최인식의 중학교 자취시리즈 제 8화
'쪽지공부의 완성'
중학교 2학년 가출 !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다. 가출은 이전에 알지 못하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게 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14살 꼬마가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늘 벅찼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호미가 벗어나려는 나의 궤도를 끌어 당기셨다.
“내 소원은 네 손에 호미를 쥐지 않게 하는 거란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못 된다. 내 IQ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배우든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없다. 특히 수학, 물리, 생물...등 수치가 등장하는 경우에는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다.
초등학교 3학년때로 기억난다. 내가 방바닥에 배깔고 누워 그날 숙제를 하고 있었다..
옆에서 담배를 피며 물끄러미 내 하는 꼬락서니를 보시던 아버지가 대뜸,
“이리 내봐...”
무뚝뚝한 저음의 음성이 작은 안방에 깔린다.
내 손아귀에 겨우 잡히는 몽당연필과 ‘수제공책(한 학년 위인 동네형이 공책을 거의 반 정도만 쓰다가 버린 것을 가져다가 안 쓴 부분만 뜯어내서 송곳으로 구멍내어 비료푸대줄로 엮은 것)을 차례로 낚아 채가셨다. 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아버지의 '곁'은 내게 늘 ‘긴장’의 자체였다. 아버지는 하던 일이 잘 안되면 어머니와 내게 화풀이하셨다.
소가 여물을 잘 먹지 않으면 내가 여물을 제대로 쑤지 않아서 그렇다고 화를 내셨다.
엊그제 풀맨 밭에 비가 내려 수북히 다시 자란 풀을 보면 내가 뿌리째 뽑지 않아서라고 타박을 하셨다.
하루는 아버지가 지게의 바에 콩대단을 올려놓고 일어나시다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넘어지신 적이 있었다.
밭뚝에서 아랫밭으로 지게와 함께 고꾸라지신 아버지는 그 일로 한동안 일을 못하셨다. 그때도 내게 성을 내셨다.
아버지가 지게에 콩대단을 올려놓고 뒤쪽 아래고리에 매인 줄을 산더미같은 콩대단 위로 던지면
지게 앞쪽에 있는 내가 그 줄을 받아 지게 앞쪽 위 고리에 단단히 묶어야 지게를 지고 일어설 때 중심을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10살도 안된 꼬맹이가 지게 뒤에서 던져준 줄도 간신히 잡아 겨우 고리에 거는데 그걸 제대로 안 걸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있는 욕 없는 욕 다 해댔다. 차마 여기에 옮기기가 민망스러운...
그런 아버지가 내 몽당연필과 수제공책을 낚아채듯 쥐셨으니 또 뭔 날벼락이 떨어질지.....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내 두 손이 내 머리위로 올라 감싸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툭하면 날아오는 아버지의 주먹을 어떻게라도 덜 맞아보려는 경험적인 본능적 방어기제였다.
그날 왜 건넌방에 안가고 아버지의 사격권내에서 숙제한답시고 배깔고 누워서 끄적거린 나 자신을 탓해야 했다.
침 발라야 써지는 내 몽당연필을 쥐신 아버지는 방바닥에 놓여진 수제공책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달필이셨다. 나도 아버지의 글씨체를 흉내내려고 해봤지만 아버지의 꺾어내리는 멋진 글씨체는 보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
그날의 사단을 일으킨 숙제는 산수문제였다. 학교에서 내 준 숙제는 숫자를 세로로 곱하기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2 곱하기 3을 세로로 푸는 문제다. 위에는 두자리 수이고 아래는 한자리 수가 적혀 있다.
줄이 그어진 아래에 답을 쓰는 식이다. 나는 삼이는 육, 삼일은 삼 그래서 삼십육 이렇게 적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내신 문제는 위에는 두자리 수 맞는데 아래의 숫자가 한자리가 아니고 두자리이다.
그날 배운 거로는 위에는 두자리 아래는 한자리를 곱하는 건데 아래에 두자리를 곱하라니....
나는 도대체가....멘붕이었다. 내가 멘붕인 것은 그걸 몰라서라기보다 이걸 풀지못하면 그다음에 미칠 아버지의 주먹회초리가 언제 날아들지 그게 걱정이어서....
“이런 건 안 배웠습니다.”라고 말이나 해볼 껄 그때는 아버지한테 일언반구 못하는, 입은 있으되 홍길동 입이었다.
배깔고 몽당연필만 꼼지락거리면서 아무리 머리를 돌려봐도 어떻게 하는 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배를 깐채 다리만 허공에 하릴없이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이리봐도 저리봐도 이 놈의 두자리수 곱셈은 난공불락이다.
아버지가 문제를 잘 못 낸 것은 아닌지 의심도 들었지만 머리를 들 수 가 없었다. 그렇게 정적의 순간이 지나가면서 나는 숨막히는 순간이 어서 오기만 바래야 했다.
“아이고 이 등신아 이런 것도 못 풀면서 뭔 공불하냐? 빨랑 기어나가 밭에 풀이나 매...”
방바닥에 놓인 공책을 발로 걷어차면서 방문을 탁 치고 밖으로 나가셨다.
아버지의 한심스럽다는 야단을 맞으면서 시무룩하게 방바닥에서 일어나 따라 나선다. 이 행동조차 굼뜨면 한 옥타브 높아지는 아버지의 날선음이 날아들고 지게 작대기가 허공에서 춤을 춘다.
잽싸게 대문옆에 걸려있는 내 손보다 큰 호미를 쥐고 윗밭으로 도망치듯 뛰어간다.
밭뚝에 주저 앉아 밭고랑을 물끄러미 본다. 오늘따라 밭고랑이 왜 저렇게 긴지.... 쪼그리고 앉아 풀아래 흙을 호미로 파서 끌어당기며 뿌리에 묻은 흙을 턴다.
이 밭은 원래부터 밭이 아니다. 아버지가 산에 나무를 베고 개간한 밭이다. 나무를 자르고 흙속에 박힌 고주배기가 여기저기 있는 이름만 밭이다.
내가 삼태기로 돌멩이들을 주어다 밭뚝에 버리면서 만들어진 밭이다. 산을 개간하여 일군 밭은 황토가 비가 오면 돌처럼 굳어져서 풀을 뽑을 수가 없다.
풀을 자르는게 일이다. 그렇게 잘라내면 또 금새 흙속의 뿌리에서 순이 올라오고 밭은 산이 된다.
뒤따라 올라오신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 그러려니 해”
어머니의 들려진 호미가 연신 풀을 향해 흙을 파고 끌어당겨 뿌리에서 흙을 터신다. 옆고랑에서 나도 호미로 흙을 파고 흙을 털어 밭뚝으로 던진다.
고랑의 절반 쯤 가서 어머니가 쉬었다가 하자신다.
“이거 하기 싫지? 나도 시집오기 전에 해본 적이 없는데....어쩔 수 없지만 너는 열심히 공부해서 호미는 잡지마라”
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나더러 12 곱하기 12도 못하는 돌대가리가 무슨 공부냐고 야단이신데 어머니는 호미를 잡지 않으려면 공부를 해야한다고 한다.
난 아버지가 툭하면 날 향해 '돌대가리 돌대가리' 라고 하시길레 "정말 난 돌대가리인가?"보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12 곱하기 1에서 12 곱하기 12를 풀기까지 엄청 시간이 흘렀다. 숫자만 보면 아버지의 돌대가리란 말이 생각났고 나도 모르게 돌대가리 주문에 세뇌를 당한 것 같다.
그 여파가 고등학교때 문과를 선택하게 된 원초적 동기였던 셈이다.
여하튼 어머니의 호미는 달빛아래 리어카 야반가출한 이후 나의 삶이 기로에 설 때마다 뿌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흙을 끌어당기는 호미처럼 날 끌어 당기셨다.
일일이 열거하면 한가지 한가지 사건 사고 같은 일들이 그것만으로도 수십장의 원고지를 채울 만큼의 애환이 서려 있다.
모든 것을 놔버리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의 호미가 끌어 당겼고 그때마다 깨알같이 적힌 신문속에 끼워 넣는 홍보전단지(뒷면은 백지) 잘라 만든 단어장을 들여다 보았다.
새벽 4시경에 일어나 역전으로 허겁지겁 뛴다. 배달일이 지체되면 지각하고...교문앞 얼차례의 신(주번)에게 오리걸음하며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이리저리 시달린 작은 체구는 수업 중에 졸고 쉬는 시간에 짝궁 노트를 빌려 공책이나 전단지 뒷면에 옮겨 적기 바쁘다.
선생님의 말씀은 자장가처럼 들리고 졸음은 아무리 떼어내려도 떨어지지 않는 찰그머리다. 늘 졸음의 포로가 되어 졸업할 때까지 수업시간에 제대로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 손에 들려있는 전단지 뒷면 쪽지가 내 유일한 공부도구이다. 한쪽에 신문지 감아안고 다른손으로는 쪽지를 들여다 보며 걸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쪽지에 쓰여진 내용 뿐이다. 그바람에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무게감이 사라지기도 했다. 신문을 다 돌리고 돌아올 때는 전적으로 쪽지내용에 빠져든다.
“야, 이 새끼야 눈을 어디다 두고 다녀....”
갑자기 날아든 험한 욕설에 쪽지에서 눈을 떼고 앞을 보니 자전거 타고 오던 사람이 내 코앞에서 급정거한 채 서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공부하는 장소는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었다. 골목이 공부방이고 변소에서 일보며 들여다보는 게 쪽지였다.
달리 느긋하게 앉아서 공부해 본적이 별로 없다. 중1 겨울방학 때 일제시대때 지어졌다는 껌댕이칠한 판대기벽에 군데 군데 구멍난 교실바닥에서 나홀로 공부하던 때말고는...
내가 60넘어 4년동안 소방시설관리사 공부할 때도 쪽지공부를 했다.
체력관리를 위해 새벽마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30여바퀴 뛴다. 나는 지금도 뛰는 게 이골이 나서 그런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한손에 암기장을 들고 뛰었다. 중2때부터 어쩔 수 없이 터득한 내 공부비법이다. 여전히 내게 통하는 짬짬이 쪽지공부다.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소리는 공부하기 싫다는 배부른 소리로 들린다. 아버지한테 ‘돌대가리 인증’을 받은 나도 짬짬이 쪽지공부가 먹혀 들었다.
무한반복 ! ‘인증받은 돌대가리’도 통하는 공부비법이다.
‘지성이 감천’이다. 글자가 감복할 때까지 보니, 12 곱하기 12를 안가르쳐 줘도 풀어내는 머리 좋은 사람보다 몇 배 더 시간이 걸리지만 원하는 결과는 그 무한반복 끝에 있었다.
중2 때 어머니의 소원은 내 자식에게 호미를 쥐지 않게 하는 것이었고
나의 소원은
“누가 세끼 밥만 먹여 주면 원 없이 공부좀 하면 좋겠다” 였다.
59년 돼지띠 올해 나이 육십넷이다. 중2때처럼 먹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나는 정년퇴직후 중2때의 꿈을 채워가고 있다.
산수가 싫어 문과를 선택하고 사무직으로 34년 근무했지만 지금은 제2의 직장에서 기술 이사로 재직중이다.
산수의 공포를 극복하게 한 전기기사 자격증은 시작이었다.
밤 1시부터 새벽6시까지 회사 창고 작업장에서 배관을 자르고 전선을 까고 드라이버를 조이고 풀면서 회로도를 벽에 만드는 실기시험 준비하느라 지문이 닳아 없어지게 한 전기기능장도 3년만에 합격했다.
날 제일 힘들게 했던 수학책이나 진배없는 유체공학도 극복하게 해준 소방기계기사 자격증도 땄다.
그렇게 해서 정년퇴직 하기 전에 야심한 시간을 이용하여 6가지의 자격증을 땄다. 모두 기술인들이 가지는 자격증이었다.
그것을 취득한 것으로 기술자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그게 없으면 취업문턱에 명함도 못 내민다.
100세 시대이다.
난 아버지가 87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11년간 둘이 살았다. 어머니가 의식불명으로 쓰러져 3년간 요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뒤로 시골에 홀로 남겨진 아버지를 그냥 둘 수 는 없었다.
혼자 사시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결국 짐싸들고 내가 사는 도회지로 올라오셨다. 하지만 평생 시골 외딴집에서 구속받지 않고 살던 자유인이 두평 남짓한 방에 갇혀 사는 게 죽을 맛이었는지 적응을 못하셨다.
그바람에 나는 지방근무를 자원하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사택에서 아버지와 합숙하는 11년을 보냈다.
젊어서는 날 그렇게 힘들게 하던 아버지였는데 텔레비전을 보며 앉아 계신 모습이 측은했다.
얼굴에 주름살은 가득해지고 등은 굽어지고 벽에 기대 계신다. 눈도 침침해서 당신의 발톱도 깎지를 못하셨다.
동해물과 하며 텔레비전을 켜시면 동해물과 하며 텔레비전을 끄시고 잠자리에 드시는 아버지 모습을 11년 동안 옆에서 지켜 보았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험악당당'한 모습은 내 머릿속에만 있다.
“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는 주문을 11년동안 외웠다. 아버지는 힘이 있을 때는 날 낭떨어지에 밀어 던졌고, 힘이 없을 때는 자신을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하시면서 인생을 가르치신 것은 아닌지 싶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건강하게 늙으면서 사회인으로서 당당히 살아가겠다.”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
이 세 가지는 결국 소방업계의 꽃이라는 소방시설관리사에 도전하게 했다.
전기기능장을 따는데 3년이 걸렸지만 소방시설관리사의 자격증을 쥐는데는 4년이 걸렸다.
지난해 4수만에 합격했다.
“해냈다 !”
중2때의 바램대로 원없이 공부했고 내 제2의 인생은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눌 수 있게 됐다.
나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내 노년의 인생은 언제나 푸르게 살 것이다. 내 어린 시절 풀밭의 푸른색깔 잡초처럼 뽑아도 뽑아도 돋아나듯이 지난날의 힘든 시절도 잡초처럼 견뎌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지는 삶의 한 순간 한 순간도 그냥 허비할 수 없다.
내가 살아오면서 부족했던 마음의 여유도 느끼면서 술한잔 마음놓고 대작하지 못했던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멋지게 당당하게 살아가겠다.
‘인생의 총량은 결국 같아진다.’
힘들다고 늘 힘든 것도 아니다.
행복은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는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노력한다고 다 원하는 결실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력 그 자체가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한 번 뿐인 소중한 인생이다.
주어진 형평성만 탓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시간이고 무한한 기회가 있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자.
자신의 삶을 귀하게 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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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이 쪽지공부의 버릇은 이 나이가 되어도 암기장 같은 쪽지가 제 손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 편하게 공부해본 적이 없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더할 나위없는 여건이지만 돌아보면 그때가 더 절박한 마음으로 공부에 집중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하튼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중2의 생존기가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약정했던 10화가 다가오네요. 제9화에서 뵙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