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자취시리즈 제10화 (마지막)
“화양연화(花樣年花)”
바야흐로 춘삼월 꽃피는 봄이다. 한낮에 내리 쬐는 햇살이 따사롭다. 겨우내 추위에 억눌려 웅크리고 있던 온갖 씨앗들이 약동을 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각양각색 저마다 최고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봄내음을 펼치는 ‘꽃들의 향연’이 절정으로 치닫으리라.
이런 꽃들의 모습을 일컬어 ‘화양연화’라고 한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이와 같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혹자는 모든 사람에게 화양연화가 있다고 한다.
꽃피는 시기가 다르듯이 저마다 화양연화의 시간이 다를 뿐,언젠가 분명히 꽃피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다보면 결국 커다랗고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고.
중학교 2학년 열네 살 가출소년 최인식의 삶에는 화양연화의 그림자조차 어른거린 적이 없었다.
먼 이후 어느 날에 찾아올지 모를 화양연화를 꿈꾸는 것조차 사치였을 만큼 어느 하루의 삶도 녹록치 않았다.
내 배꼽시계는, 보채는 아기처럼 끼니를 때우라 명령하였다. 난 그저 배고픔을 면하게 하는 모든 것이 최고의 성찬(盛饌)이었다.
배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끼니를 거르는 것이 일상이다. 겨울철 냉구들장보다 더 무서운 것은 끼니를 거르는 것이었다.
새벽녘에 신문을 받으러 역전에 나가면 한 늙은 노숙자를 만나곤 했다. 행색과 몰골은 말로 옮기기가 어렵다.
늘 대합실의 쓰레기통을 뒤졌다. 뭔가 먹을 것을 찾으면 그게 무엇이든 허리춤에 챙겼다.
그 노숙자를 볼 때마다 내 현실도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며칠, 몇 달 동안만 작정하고 끼니를 거르는 것은 누구든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기간이 ‘기약 없는 십 여년’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장발장이 빵을 훔쳐먹고 평생 쫓기는 삶을 살아야 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동병상련의 눈물을 삼킨 적이 있다.
역전 근처에 자취집을 옮겼을 때다. 겨울방학 때 몇 끼니인지 아무것도 못 먹고 지내고 있었다.
"이러다 죽을 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에 무작정 집을 나섰다.
자취집 앞 구멍가게에 들어가 진열된 유리뚜껑 안의 삼립크림빵을 먹고 도망가다가 붙잡혔다.
역전앞 도로상에서 가게집 아들한테 교복이 찢겨나가고 빨래감 패대기 치듯이 얻어맞았다.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계속된 '끼니와의 전쟁'은 고등학교 3년 내내 계속되었다.
고2 담임 한원희 선생님께 전학을 가게 해달라고 조른 적이 있다.
예산 소재 신설된 모 고등학교에서 장학생을 선발하는데 전액장학금에 숙식까지 제공한다는 내용에 솔깃했다.
내겐 끼니와의 전쟁을 쫑낼 절호의 찬스지 싶었다. 가까스로 행운이 내게 던져준 희망의 빛줄기처럼 여겨 졌다.
한선생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라고 일축하셨고, 난 가방을 챙겨 뒤도 안 돌아 보고 학교문을 나섰다.
그 다음날 1학년 때 담임인 박성규 선생님이 내가 잠시 머물러야 했던 학교 앞 독서실에 나타나셨다.
“이눔의 자슥, 한선생님한테서 말 들었다. 쓸데 없는 소리말아라. 그런 신생학교에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선생님은 내 귀에 하나도 안 들리는 설교를 하셨다.
한마디로 "전학은 택도 없다"는 경고셨다.
전담임과 현담임 선생님의 합동작전에 전학은 불발되고 나는 또다시 '끼니와의 전쟁'에 포로가 된 채 어찌 어찌하여 겨우 '빛없는'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고시반 입실 전제, 등록금 면제와 생활비 일부제공’이라는 조건에 역시 솔깃하여 진학한 대학에 가서도 '끼니와의 전쟁은 다소 소강상태이긴 했지만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1학년 때부터 행정고시 준비에 내몰렸지만 나로서는 등록금 면제와 생활비 제공이라는 미끼를 물어버린지라 조건이행을 위한 의무적인 공부였다.
하지만 이래 저래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그해 말에 대통령이 권총에 맞았느니 어쩌니 하면서 학교에 군인들이 나타나고 장갑차가 들어서면서 보따리를 싸들고 학교를 떠나야 했다.
해가 바뀌면서 세상은 다른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누가 최류탄에 맞아 죽었느니... 서울역으로 가자느니... 서울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에 빠지고 있었다.
학교 고시반에서 쫒겨나 갈 곳이 없어진 나는 결국 군 입대를 선택해야 했다.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군 입대영장’을 받는 날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국전력 입사합격통지서’ 받는 날이었다.
전자는 중2때부터 지속된 '끼니와의 전쟁'에서 잠정적인 ‘휴전’이었다.
후자는 그 '끼니와의 전쟁'에 ‘종전’을 선포한 날이었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다보면 화양연화의 순간이 온다고 하였다.
내 청소년기 대부분을 ‘끼니와의 전쟁’으로 소모한 탓인지 나는 세상사에 매사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야 찾아온다는 화양연화가 매사 부정적이었던 내게 찾아올 리가 없었지 싶었다.
중2 열네 살 최인식에게 소원이 하나 있었다.
“누가 밥만 먹여주면 원 없이 공부 좀 하고 싶다.”
내 나이 60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지난 4년간 “끼니 걱정없이 오로지 공부만 했다.”
60이 넘어서 그 소원이 풀어진 것이다. 원 없이 공부하고 원 없이 떨어졌다.
나이 들어 하는 공부에 여러 가지 말못할 사연이 많지만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했지 싶다.
중2때부터 그 놈의 끼니와 싸우느라 지쳐서 하고 싶어도 제대로 못했던 공부다.
지난 해 4수만에 소방업계의 고시처럼 여겨지는 시험에 합격했다.
34년 전력회사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한 내겐 ‘소방’은 낯설기만 한 문외한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 하나 쪽지에 적어 수도 없이 보고 또 보았다.
중2 때 한 손에 신문을 감아쥐고 다른 손에 들려 있어야 했던, 빼곡이 적힌 전단지 뒷면을 볼 때 처럼....
60이 넘어 3040세대와 현장에서 호흡을 함께 하고 있다.
아직은 실무적으로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대등한 수준으로 따라 잡을 날을 기대하며 소방시설관리사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4년간의 공부습관이 관성이 되어서 인지 아니면 평생습관이 되도록 불어대던 아버지의 쾌종시계 덕분인지 지금도 새벽에는 육십넷 최인식의 안경넘어로 책장이 펼쳐지고 있다.
쪽지대신에 녹음을 하여 이어폰을 끼고 다닌다.
일도 재미있고
공부도 재미있다.
요즘처럼 사는 게 재미가 있던 때가 있었나 싶다.
내 인생에 화양연화가 찾아왔다면 지금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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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제10화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중2 가출소년의 무모한 도전과 홀로서기에 성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번에 못다한 이야기들을 제가 부족했던, 항상 긍정적인 시각으로 써보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여러분의 삶도 더욱 '재미'있기를 바랍니다.
최인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