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이야기
( 슬프고 흥미진진하고 다사다난한)
예술은 사랑이고,
사랑은 예술이다!
장우석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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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결혼전 10대~20대 연애사
사춘기의 질풍노도시기를 지나서 이성에 눈을 뜨고
나의 짝사랑은 시작되었다.
국민학교3학년부터~고2까지 좋아했던 학교 퀸카였던 그녀를 일편단심으로 사모했다.
해맑고 밝게 미소짓으며 웃는 모습에 반한거다.
그녀를 생각하면 설레고
참 행복하고 표현못해 안타까웠다.
그녀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감정만 간직한채 내성적이라서 결코 고백하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서 아이러브스쿨 싸이월드로 동창 찾기와 만나던 20대에 서울로 와서 살던 나는 서울여대 조교였던 그녀를 개인적으로 두번이나 데이트를 가졌다.
그녀에게 8년간 짝사랑한 이야기를 메일로 썼었고 그녀와의 데이트가 성사되었다. 뛸듯이 기뻤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소극적이고 말도 잘 못하고 사회성이 부족했다. 그녀가 나에게 사준 고기를 먹고 서울여대 밤길을 같이 걸었던 기억으로 여운을 남기고 그녀는 부산으로 떠났고 그후 그녀는 다른이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짝사랑한 그녀와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끝나고 여운을 남겼다.
20대초반으로 다시 가서 과거 나는 국민학교6학년때 반장을 했었다.
그때 같은반 친구를 나중인 20대초반에 만났다.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썸을 타다가 만남을 가지다가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었다.
허나 상태가 안좋아서 병원입원한후 그 만남은 끝이 났다.
병원 입원때도 그녀가 보고싶어서 침대에 묶여서 멘탈이 온전하지 못할때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20대초중반 나는 정신증이라는 (조현병ㆍ조울증)질병으로 세차례 입ㆍ퇴원후 22세 겨울 마지막퇴원후 노래방알바5년간 하며 차차 회복되어갔다.
약도 잘 먹고,
상담도 받고 운동하며 25세때 영어학원을 다니다가 매력적인 여성들을 만났다.
미술학원강사 친구는 연애경험부족으로 개인만남도 여러번 되었지만, 소극적인 나의 태도로 썸으로 끝나고 그녀는 그래도 선물로 그림을 주었다.
또 다른 여성으로 연애퀸카 여성을 만나서 러브레터써주기도 했고 삐삐시대 나의 삐삐앞 그녀가 직접 불러준 노래도 남겨주고 놀이공원도 가고 홍대거리도 다녔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기회를 놓치고 그녀와는 더 못 만나게 되었다.
그후 20대 중후반에
밥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티키타카가 잘 되었고 아침에 다니던 영어학원 후 늘 같이 식사하고 수다를 떤 여사친이었다. 그녀는 나중 유학가서 영어강사가 된다.
성격이 좋고 자존감이 높고 자신감도 있는 여성이었다. 이 친구가 1년간 밥친구를 하는데 어느날 나에게 남친이 생기려한다는 말하는 거다.
나에게 그남자고백을 허락해줘도 되냐고 묻는거다. 나는 썸들의 실패로 그당시 자신감이 부족했고 눈치도 없고 여성의 마음도 몰라서 그래 그러라고 말했다.
그후 그녀는 그남자와 사귀게 되었고 나랑은 만남은 안타깝게 끝이났다.
그녀는 그대신 나를 개신교 교회로 전도했고 나는 그 교회를 혼자 다니게 되었다.
그 교회목사님 아들이 바로 그녀의 남친이었고 2년뒤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나는 그 일반교회를 다니며 차차 적응해서 청년부 부회장이 되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 사이 아웃사이더시절과 존재감제로시절과 은따경험으로 상처받고 잠시 교회공동체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그후는 잘 적응하게 되었다.
적응된 시기에 교회에서 타교회와 연합모임에서 적극적이고 활발한 또래여성을 만났는데 잘나가는 삼성물산회사에 다니는 여성이었다. 연봉이 상당한 그녀였다.
그녀는 좋은 회사에 자부심이 많았으나,
나는 직장이나 돈에 연연하지않고 당당하니 그 모습에 매력을 느낀듯하다.
나는 그당시 노래방 알바일 일하며 월급도 50만원이 안 되었다.
그녀와 산행도 가고 데이트도 했다.지금 생각하면 나는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다. 경제관념도 없었다. 아쉽게도 썸으로 그녀와는 끝났다.
시간이 좀 지나 친구소개로 소개팅을 한적이 있었다. 외모도 이쁘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회사에서 직급있는 관리자 여성이었다.
같이 더블데이트로 월미도 디스코팡팡도 타고 바이킹도 탔다. 나중에 둘이 그녀차를 타고 가다가 그녀와 데이트를 하고 사귈 기회가 왔으나, 내가 선뜻 맘을 정하지 못하니, 그녀는 결국 다른남자를 만나서 6개월후 결혼했고 자기 결혼식에 나를 복수하듯 초대했다. 나는 참 마음도 없이 그곳에 가서 결혼식 사진을 찍었던 기억도 있다.
그후
교회다닐때
20대후반에 한자매를 좋아하게 되었다.
미인형에 하얀얼굴에 생기발랄한 자매였고 1년간 좋아하다가 댓쉬해서 놀이공원에 데이트했고 썸을 탔으나, 나와 만남을 갑자기 중지하고 중학교선생님 형이 그녀를 사귀면서 그형과 결혼을 했다.
아이러니하게 나는 1년후 교회 유년부 봉사하다가 다른 자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경쟁하듯이 29세 연애9개월후 30세에 결혼을 했다.
나의 결혼식에 밥친구한 그부부내외와 좋아했던 자매(중학교선생님 아내)
모두 결혼식에 참여했다.
참 아이러니한 연애사와 세상사다. 결혼식장 들어가기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가 맞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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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돌싱 된 후 연애사
11년간의 결혼생활을 종료하고 아픈전처를 처가에 보내주고 나는 혼자가 되어서 참 외롭고 쓸쓸했다.
이혼 전후로 온누리교회 횃불트리니티 상담대학원 박사님들께 상담을 총 2년간 받으며 회복해갔다.
41세 이후에 나는 취미를 가진 이후 이혼과 병원일 스트레스로 허리둘레36인치에 90kg까지 찐 살을 빼기 위해 헬스클럽에
G/S프로그램으로 줌바ㆍ태보를 했고
2년간 즐겁게 지내다가 옆자리회원이던 살사하는 분 소개로 라틴커플댄스(살사ㆍ바차타)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배우기가 어려웠으나, 1년 고생해 숙달해서 점점 연습하고 춤을 추니 참 즐겁고 재미가 있었다. 동호회4군데에서 운영회도 하고 강남댄스동회에서 운영진과 사회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나는 춤 자체가 좋아서 춤을 추었는데 춤이 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여러 이성들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한번에 한명씩만 만났다. 나는 일편단심 순애보라 바람남은 못된다.
첫 여성은
경기도쪽 동호회에서 만난 9살 아래 동생이었다.
나를 좋아하는듯 했다.
내 생일날 아이스크림 케잌을 사온 여성이었다. 근데 이렇게 여친되는 걸 앞두었는데 나랑 좀 친한 남자동생이 그날 차로 그녀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더니 그날이후 그녀를 그 남자동생에게 빼겼다.
당황했다.
김건모노래의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래서 그녀도 잃고 그 남자동생도 잃었다.
그마음을 추스리고 시간이 지나 다른 이성이 친해졌다.
춤을 즐겁게 추는 고등학교여자선생님이었다.
아주 활발하고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나랑 비슷해서 쉽게 가까워졌다.
빨간스포츠카를 타고 여유있고 즐겁게 지내던 여성이다.
나와 사귀는 단계에서 간을 보더니 나와 사귈수 없다고 어느날 말했다. 그 이유로 나중 알았는데 그녀는 다른 동호회에 한 남자와 양다리를 걸쳤고 그녀는 바로 결혼가능한 그 남자와 결국 사귐동시에 결혼으로 골인후
나와의 만남은 끝이 난다.
춤을 추다보니 춤이 잘 맞아서 자주 추다가 데이트로 연결된 경우도 몇번 있었다.
나는 좀 진지한 성격도 있기에 사귀려고 하면 그녀는 바로 떠나갔다.
그래서 춤판에서는 진지한 만남이 어려움을 늦게 알았다. 섹시한 여성은 많아도 참한 여성은 없다고 해야할듯하다.
노는곳에서 진지한 만남은 어려운거다.
나는 그래도 춤자체가 좋아서 춤을 춘사람이기에 실연의 아픔은 다시 춤이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나서 강남여친을 강남동호회에서 사귀게 되었다.
여유있는 그녀와 데이트하고 여행도 다니고,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즐거움만 추구하기에 남자관계가 단순하지 않았고 신비주의 성향도 있고 나와 넘 다른 부분도 많았다.
결국 1년만에 나는 헤어졌다. 그녀는 나를 좋아해서 나의 집까지ㆍ직장까지 찾아오기도 했지만, 나는 마음정리후 그곳을 떠났다.
그당시 나는 병원퇴사후 책 쓰고 나는 수도권생활을 접고 춤판도 떠나고
한 지인의 여동생분이었다.
춤추지않는
그녀를 만나
시골로 내려가서 증평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사귀기 위해 생판 모르는 곳 충북증평에 12번이나 내려갔다. 150km가 떨어진 증평으로 내려갔다가 13번만에 그녀가 나의 여친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싫어하는 커플춤도 끊었고 여사친들도 모두 정리했다.
나의 일편단심과 우직한 성실함에 그녀는 다른 썸남을 정리하고 나의 여친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넘 종교적이었고
금욕적인 생활에 가까웠다. 나도 그런 성향에 맞추려고 하며 2년간 지내며 동거했다.
하지만 그녀는 반려견을 너무 좋아했다. 강아지들ㆍ고양이들을 너무 좋아해서 13마리가 되었을때 결국 그 동물들로 인해 나와 시간이 없어지며 뜸하다가 멀어지며 나는 더이상 시골살이만 할수 없었다.
그 사이 다시 대전ㆍ서울 등으로 나는 취미를 다시 하고 라틴댄스를 추다가 마지막으로 춤판여친을 6개월간 사귀었다. 허나, 술을 좋아하고 남사친이 많았다.
그리고 술먹고 연락 안 되기가 몇번 있었다. 나중에 여러일이 있음을 알고 두통약 먹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지난시절 나는 마음이 허해서 좋은 여성을 놓치고
외모에 치중해서 여성 보는 눈이 참 없었던 나이기도 하다. 그 내면과 가치관과 비전도 중요함을 간과했다.
40대중반까지 다사다난한 연애ㆍ결혼ㆍ이혼ㆍ연애들로 인생경험으로 많은 돈을 쓰고 개고생 많이 하며 깨달았던것 같다.
나는 결단후 다시 서울로 왔고 그 타이밍에
대학로 티쿰선교회로 연계될것을 기대했으나, 그것도 틀어지면서 나는 맨몸으로 대학로 고시원생활 후
그 단체를 떠나
신림동으로 이사와서 살며
다시 은행 청ㆍ경일로 취업되고 심리상담사일도 자리잡아가게 되었다.
지금도 나홀로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현재의 생활에 나는 자족하고 은행일ㆍ상담일ㆍ강연일로 3잡과 한달에 2~3번 심지회와 가족협회나 산책모임에서 봉사하고 여러단체에 책기부하며 나름 소확행과 미니멀라이프로 지내고 있다.
댄스취미를 8년만에 끊은지 1달이 넘었고 취미를 홈트와 헬스로 바꿨다.
일들을 하고 봉사하고 지인 몇명이면 충분하다.
나는 공사 구분이 확실한 성격이고
일과 인간관계에서 시원시원하고 진지하기도 하고 유머있으며 쾌활하다.
상담 일할때는 적재적소의 진지하고 상담의 전문성이 있어서 내담자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회복가정과 회복자들이 많이 나왔다.
참 감사드린다.
주중 8명~10명의 가족과 당사자 전화상담을 진행중이다.
과거 나의 연애사는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들도 많았고 여러 헤프닝과 썸만 타던 시절도 있었고 그리고 연애 연습기를 거쳐 그후 넘 빠른 결혼 선택 후 11년간을 우직하고 성실한 결혼생활 하고 안타깝게 아픈 전처를 처가로 보냈다.
그 후 41세 이후 세상속 다양한 이성들을 만나고 사귀고 경험하며 세상공부를 제대로 경험하고 톡톡히 했다.
20대때 정신질환 당사자로 회복과정에 인간관계와 이성관계는 도움을 주었고,
30대이후 결혼해 아픈전처로 가족입장도 경험하고 30대중후반 이후로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동 병원사회복지사8년간과 지역사회 심리상담사로 5년간 치료진입장으로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다.
인생은 늘 배움이다.
나는 헤르만헤세
지와 사랑이라는 책을 좋아한다.
수사신부님의 길을 가는 친구와 세상의 미와 쾌락을 추구한 친구에 지고지순한 우정이야기 고전 책이다.
젊은 시절 나는 천주교에서 7년간 신부님 수종드는 복사를 하다가 20세에 가톨릭신부가 되려고 신학과에 면접도 받았으나,
신부의 길을 안갔고, 그당시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며 인생바닥까지 갔다가 그후 이렇게 많은 연애경험ㆍ결혼과 이혼ㆍ세상 즐거움에 빠져보고 그 곳에서 이제는 나와서 보다 건강하고 소박하고 자족하는 인생으로 살고 있다.
남은 중ㆍ노년은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인생으로 나아가며 진정한 행복자와 사람들을 사랑하고 돕고 섬기며 살다가고 싶다.
그리고 좋은 나의 동반자가 있으면 좋겠다.
긴 글 읽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2023.8.27
장우석 글
위 현재모습
과거 활동
과거 활동 댄스
과거 활동 강남댄스동회에서 사회자
현재 댄스말고 헬스취미로 바뀐지 1달째
예술은 사랑이고,
사랑은 예술이다!
장우석 글
2023.8.26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는 좋아하는여자가 있어도 말도 못해봤어욧 ㅜ.ㅜ
사랑은 표현이고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죠^^
다사다난 하군요
밋밋하면 재미없죠^^
이제는 앞으로 나이에 맞게 잔잔하게 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