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전투의 의미를 새기며] 정병경.
ㅡ정충묘를 찾아ㅡ
맹추위에 방점을 찍는 겨울이 이어지고 있다. 영하 15도 한파 예보에 마음까지 움츠려진다. 곧 봄이 온다는 변곡점으로 여긴다.
광주廣州 쌍령리 정충묘精忠廟에서 제향이 있는 날이다.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한 데에 의미를 둔다(2008.4.21).
네 분의 넋을 기리고자 위패가 봉안된 사당에 들어선다. 매년 음력 정월 초3일에 광주시와 광주문화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린다. 광주 전통 전례 보전회에서 주도하여 도유사와 지역 유림과 후손 등이 참여하는 행사다.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50여 명이 제례에 참여했다.
시장을 비롯해 직원들과 관계 기관에서 행사 준비에 최선을 다한다. 광주학 연구소장과 연구위원들도 자리했다. 한 칸 남짓한 사당은 동쪽 방향이다. 30여 미터 높이의 경사진 곳이어서 시야가 좋다.
공간이 협소해 일부를 제외하고 제단 아래에 배열해야 한다. 초월읍 곤지암길 왕복 4차선 국도변에 위치해 소음과 칼바람이 뒤섞여 귀를 에인다. 갓길 주차공간이 여유롭지 않다.
4세기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해본다. 무기가 열악한 시대의 전술은 지휘자 지혜에 달렸다. 상대의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백전백패다.
조선 인조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청군淸軍에 포위된 상태다. 임금을 지키고자 쌍령리에서 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의인(허완.민영.선세강.이의배)을 상기한다.
ㅡ용감한 노병ㅡ
목숨을 바친 이들은 후대들에게 교감이 되는 인물이다. 당시 지휘관인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許完 장군(68세)은 고령임에도 전투에 참여해 고군분투하다 최후를 맞는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장군이 지휘하는 군은 승산을 기대했다. 화약을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실수로 폭발해 혼란이 가중되었다. 능수능란한 지휘관의 전술도 청나라 군사를 제압하지 못해 패하고 많은 군사와 함께 목숨을 거둔다.
이의배李義培 장군(61세)은 본관이 한산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통정대부로 승진한다. 절도사와 부사를 두루 거친 인물이다. 인조 13년 공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한다. 당시 병자호란으로 전투에 가담하지만 전술도 펴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
충남 예산군 봉산면에 이의배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충남 문화재 186호). 1644년에 건립한 비문은 영의정 최석정이 찬하고, 송설 조맹부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다고 한다.
경상좌도 안동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 (60)은 허완의 중군中軍이다. 본관은 보성이다. 쌍령전에서 많은 적을 죽이고도 패전으로 전사한다. 그의 공적을 기려 전남 장흥 포충사와 보성 오충사에 제향된 인물이다. 선세강에게 충정공忠精公 시호를 내린다.
이들의 공통점은 전술에 익숙한 60대 노병이다. 전투에 패한 결정적 원인은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아서다. 조선군은 2천여 명의 숙련 포수와 고위 지휘관이 몰살당하고 만다. 전투에는 패했지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를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의인에게 시호가 내려진다.
허완과 이의배, 민영 세 사람은 충장공忠壯公 시호諡號를 받는다. 허완은 충청도 청양에 묻혀있고, 민영은 음성, 이의배는 충남 예산에 누워있다. 선세강 무덤은 전남 장흥이다.
먼곳에서 후손들이 제향에 참여했는데 민영의 후손은 보이지 않는다.
ㅡ실패의 교훈ㅡ
칠전팔기는 전투에서 생긴 성어다. 승리하기가 어렵다는 표현이다. 임진왜란 때 칠천漆川 전투에서 대패한 기록이 있다. 한국 전쟁 당시 현리 전투에서도 패했다. 쌍령전투와 함께 한국 역사 3대 패배 전투로 기록된다. 인명과 재물의 큰 피해를 본 전투는 아쉬움을 남긴다.
여진족이 세운 후금(1616)은 인조 5년에 조선과 전쟁(1627)을 벌인다. 이때가 정묘호란이다. 그 후 형제의 국가로 조약을 맺게 된다. 명과의 동맹한 조선이 후금에 비협조적인데 앙심을 품는다.
1635년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며 태도가 달라진다. 병력과 물자를 요구하며 조선에 압박을 가한다. 화친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은 상태다.
청의 공격으로 왕 가족이 강화도에 피신한다. 인조는 신하들과 남한산성으로 피한다. 방어에 지친 조선군은 불리해진다. 명나라에 구원 요청은 시간적 여유가 없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친 조선 조정은 항복하기에 이른다.
13만 병력을 이끌고 온 청나라 태종은 의기양양하다. 조선의 왕인 인조대왕은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례를 치른다.소현세자와 둘째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고 조공까지 바치기를 약조한다. 치욕의 역사에 기록된 병자호란이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받드는 조선의 선비들은 북벌론을 주장한다. 청에 대한 강경론자들을 등용한 효종은 기대가 크다. 송시열과 이완, 김집 등을 등용하게 된다. 송시열이 효종의 사부師傅이기에 의견도 같다.
왕위를 이어받은 효종(봉림대군)이 군사력을 증강한다. 효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북벌론은 좌절된다. 숙종 때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지만 거대해진 청에 대항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송시열의 주장을 한구절 옮긴다. "오늘날 온 천하에서 명나라가 망한 것이 우리만큼 억울하고 분한 자가 또 있겠습니까."
송시열의 친필이 화양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다.
'임금이 묻힌 창오산엔 구름은 끊어지고,
주자 계신 무이산이 비어있구나(蒼梧雲斷 武夷山空).' 명나라가 망하고 청淸이 중원을 정복한 걸 한탄하며 글로 새긴다.
조선 태조가 주원장을 임금으로 섬기게 된다. 군신君臣의 의리라는 주장이 송시열 의리론이다. 북벌은 청을 물리쳐 명에 대한 은혜를 갚는 수단으로 여긴다. 아이러니한 건 군사적인 북벌에는 반대의 견해이고 혀로만 북벌을 주장한 송시열이다. 쌍령전투는 후대를 이으면서 여진족과의 악연이 교훈으로 남는다.
2023.01.24.
첫댓글 맹추위에 정충묘(精忠廟) 제향에 잘 다녀오셨습니다.
'창오산엔 구름이 끊어지고, 무이산은 비어있다'는 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한국사 3대패전의 아품이
새삼 되새겨지는 쌍령전투
그때의 1월 많이도 추웠겠지요
조용히 그날의 아품을 새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