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매자 시 모음 6편
《1》
따뜻한 추억
문매자
아버지 손잡고 장기 두러 간다
한 손은 명주 두루마기 긴 옷고름 잡고
콧노래 부르며 마른 꽃신이 깡충거린다
손을 번쩍 들어 건너뛰기 걸음 멀리 뛰면
아버지 칭찬이 초가지붕 위로 호탕하게 퍼지고
나는 아빠 올려다보며 하얀 이빨 토끼가 된다
장이야 멍이야 우렁찬 아빠소리
고추 먹고 맴맴 한 곡조 내뽑으면 장기가 끝나고
막내딸 품안에 꼭 꼭 안아 집으로 돌아간다
굴뚝에 피어오르는 저녁 짓는 연기 피어오르면
코끝에 스며드는 구수한 밥 눕는 향기와
된장 풀은 배추 국 끓는 소리 마중 나와 손잡는다
어머니 밥상은 아빠와 나의 천국의 저녁상
맛있는 소리 귓전에 장단 맞추며 숭늉 눌은밥 한 그릇
배부른 줄도 모르게 시원한 목 줄기 쾌지나 칭칭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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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성
문매자
안개처럼 왔다가
해 뜨면 사라지는 고요마저도
자신의 감정대로 행하지 못해
헌신짝 인양 타인에게 맡긴다.
툭 튀어나온 돌부리 향해
의미 없는 독설 거침없이 내 뱉는
반성의 지름길이
어디로 회귀해 갔는지
가까운 친구의 충고가
이웃집 아기 우는 소리보다 시끄럽고
부모의 가르침이 잔소리로 들리는
허무맹랑한 사회에 발 들여놓고 뒷짐 지고 걸어간다
잘못 낀 단추가 울며 외쳐도
바로 잡아주지 못하는 비뚤어진 얼굴
대칭된 내 모습은 진정 찾을 수 있을까
바꿔 신은 신발이 발 아픈 이유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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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 오는 날의 귀 울림
문매자
귓전에 가랑비 오는 소리인가
아니
당신의 묵직한 범종 소리 울려 퍼지고
믿음직한 사랑의 언약 행복에 젖는다
순리대로 흐르는 빗물은
얕은 대로 흐르고
그대 사랑도 당신에게서 나에게로
흘러 스며드는 빗속의 포근한 정
원앙새 노니는 강가에 흘러가
물장구치고 입맞춤 수줍은데
가랑비 반주 맞춰 사랑노래 들으니
행복의 울림이 무지개 타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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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손녀의 손톱 밑 가시
문매자
아픔을 못 이겨 구슬 같은 눈물이
할미의 심장을 후벼 찌른다
마음에 박히는 가시가 더 아픈 것은
위로 할 수 없는 할미의 존재
겉으로 우는 울음이
오히려 예쁜 것을 예전에는 몰랐었다
제 잘못 아닌데 손톱 밑을 찔려 흐느끼는 어린 것
그래도 부모 이해하려 노력하는 예쁜 마음
어미의 손톱 아리를 제 것으로 바꾸고
눈물만 가슴 항아리에 오롯이 담으며
인내의 고뇌와 타협하는 손녀 딸
할미 어미 너에게는 죄로 남는 이별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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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줄 매던 날
문매자
건넌방에서 안간힘을 쏟은 지 열 두 시간
이마에는 식은땀이 속옷을 적시고
혀 깨물고 아픔을 참는 새 언니
어머니는 언니 곁에 더 힘을 쓴다
자 한번만 더 힘내라 잘한다
칭찬 아닌 용기를 북돋우는
여자로서의 공감하는 응원일까
부엌 가마솥에는 물이 하나가득하고
아궁이에는 장작 불꽃 튀는 소리
나도 응원한다는 듯이 파란 불꽃을 피운다
따끈한 물을 한대야 담아 방문 안에 들여놓고
어머니의 어명만 기다리는 오빠
대문 안 뜨락에는 화롯불이 발갛게 피워있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아버지는 새끼줄을 꼬신다
고추를 달 것인지 숯만 달 것인지
아버지 속마음은
고추 달기를 바라실지도 모르지만
무덤덤한 듯 말없이
손바닥에 침을 뱉어 짚을 비빈다
첫 손자 기다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마음은
이제는 고추와 숯 가릴 때가 아니다
마루 끝에 벗어놓고 들어간 신발을 다시 신을지
입술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새 언니와 어머니 오빠와 아버지
철없는 나는 이리저리 눈치만 살핀다
땅거미가지고 별이 반짝일 때
방안에서 다급한 어머니의 외침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내가 힘이 든다
으앙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아이고 수고했다 아가
누구를 말하는 아가일까
이어 들리는 소리 고추 달고 나왔구나
아버지는 지금부터 할아버지다
꼬아놓은 새끼줄에
붉은 고추를 듬성듬성 꽂으시고
탯줄 끊은 태를 화덕에 올려 태우기 시작한다
틀림없이 천지신령님께 빌고 비셨겠지
건강하게 자라다오
튼튼한 놈 안아보자고
대문에 부정한 사람 접근 막는 인줄이 걸리고
온 동네 아들 낳았다고
말없는 자랑으로 정표를 달았다
밤은 으슥해 지고
산모 먹일 미역국 향기 처마 밑을 드리우는데
하늘에 조각달과 별이 유난히 반짝거리며
첫손자의 탄생을 축하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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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존심
문매자
볼일을 실수했던 날
감추려 해도 냄새가 앞장선다
자신의 차가운 눈초리가 자학의 매질을 한다
조용한 감추기의 전쟁
애꿎은 휴지만 풀러 덮는다
아내의 목욕하자는 권고가 고맙기는 하지만
매번 궁정거리는 입안의 면목 없는
잔소리 아닌 탄식
듣는 사람도 어쩔 수 없는
피할 길 없는 자연의 생리
씻고 빨고 반복하는 고마움을 넘어
끓어오르는 화를 내뿜는 역행의 행동
치매를 조정하는 마지막 자존심일까
자신의 방어벽이 무너진 허탈한 현실에서
고추 먹고 맴맴 돌고 도는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