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다음 글은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중 「구외이문(口外異聞)」에 실린 내용으로서, 청나라 학자였던 능어(凌魚)가 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서문」을 박지원이 베껴서 쓴것임.
우리나라 서적(書籍)으로서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 극히 드물었고, 다만 《동의보감(東醫寶鑑)》 25권이 성행(盛行)하였을 뿐이었는데 판본이 정묘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의술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토산 약품이 옳지 못하였으므로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태의(太醫) 허준(許浚)과 유의(儒醫) 정고옥(鄭古玉.정작의 호) 작(碏)과 의관(醫官) 양예수(楊禮壽)ㆍ김응택(金應澤)ㆍ이명원(李命源)ㆍ정예남(鄭禮男) 등에게 명령을 내려 국(局)을 차리고 이를 편찬할 제, 내부(內府)의 의방(醫方) 5백 권을 내어 고증의 자료로 삼아서 선조 병신(1596년)에 시작하여 광해3년 경술(1610년)에 이룩하였으니, 때는 곧 만력(萬曆) 38년이다. 그 간본(刊本) 서문(序文)의 문장이 제법 소창(疎暢)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 동의보감은 곧 옛 명(明) 때 조선 양평군(陽平君) 허준이 엮은 것이다. 상고하건대 조선 사람들은 애초부터 문자(文字)를 알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허(許)는 또 그 중의 세족(世族)이어서 만력 때 봉(篈.허봉)ㆍ성(筬.허성)ㆍ균(筠.허균)등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문장으로 날렸으며, 그의 누이 동생 경번(景樊.허초희.난설헌)의 재명(才名)이 더욱 그의 오빠들보다 뛰어났으니, 구변(九邊)의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걸출한 자였던 것이다. 그 ‘동의(東醫)’라는 말은 무엇일까. 그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의원에서도 동(東)이라 일컫는 것이었다. 옛날 이동원(李東垣. 금나라 의학자 이고(李杲). 동원은 호)이 《십서(十書)》를 지었고, 북의(北醫)로서 강(江)ㆍ절(淛)에 행세하였으며, 주단계(朱丹溪.원나라 의학자 주진형(朱震亨). 단계는 호)가 《심법(心法)》을 지었고, 남의(南醫)로서 관중(關中)에 나타났더니, 이제 양평군이 비록 궁벽한 외국에 태어났으나, 능히 아름다운 책을 지어서 중국에 유행되었으니, 대체로 말이란 족히 전할 것을 기약하는 것이지, 어떤 지역으로써 한계를 지을 것은 아니리라. 또 ‘보감(寶鑑)’이란 무엇을 이름일까. 햇빛이 새어나오고 잠든 안개가 풀리듯이 살을 나누며, 갈피를 쪼개어, 독자로 하여금 책장을 들추게 하면 요연히 거울처럼 광명함을 말함이었다. 옛날 나익지(羅益之.원나라 의학자 나천익(羅天益). 익지는 자)가 《위생보감(衛生寶鑑)》을 짓고, 공신(龔信)이 《고금의감(古今醫鑑)》을 지었을 때 모두 ‘감(鑑)’이라 이름하였으나, 지나치게 과장하였다고 의심하지 않았었다. 적이 논하건대 사람에게는 오직 오장(五藏)이 있을 뿐이요, 병은 칠정(七情) 즉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에 그치는 것이다. 그 사이 천품이 편벽되고, 온전하고, 점염(漸染)함이 얕고 깊음과, 증세의 통하고 막힘에 차이가 있어서 양후(兩候.1후는 5일간) 간의 맥박이 움직이면 부(浮)ㆍ중(中)ㆍ침(沈) 등의 세 부(部)가 있으므로, 가만히 살펴보면 마치 저 밭이랑처럼 한계가 있으니, 넘을 수도 없거니와 횃불처럼 밝아서 덮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대황(大黃. 한약의 일종)이 체한 것을 내려가게 하는 줄만 알고서 속을 식히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며, 부자(附子)가 허함을 돕는 줄만 알고, 독을 끼친다는 것을 모른다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병이 나기 전에 다스리고 이미 이룩된 뒤에 약을 쓰지 않는 법이니, 병이 난 뒤에 다스림은 가장 하책(下策)임에도 다시금 용렬한 의원에게 맡긴다면 어찌 낫기를 바라리요. 심지어 사리(私利)를 품은 자는 애초에 병 없는 사람을 다스려 공적을 남기려 하고, 처음 이에 종사한 자는 병자를 이용하여 공부하려 함이 일쑤인즉, 《역경(易經)》중의 ‘약을 쓰지 말라는 점사(占辭)나, 남쪽 사람은 항심(恒心)이 없다.’는 경계가 마치 이런 무리를 위하여 어떤 덮개를 떼버리는 듯싶었다. 옛날 편작(扁鵲.전국 때의 의학자)이 이르기를, ‘사람들은 병자가 많음을 걱정함에 비하여 의원은 병 보는 방도가 적음을 골치앓는다.’ 하였으나, 헌(軒))ㆍ기(岐) 이후로 대대로 명의(名醫)가 있어서 이제 이르러서는 그 저술의 번다함이 거의 한우충동(汗牛充棟)할 만큼 적음을 걱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방문을 써서 맞고 안 맞는 것이 있으니, 어찌하여 옛 사람이 각기 본 바로 학설(學說)을 끼친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선택하는 데 정밀하지 못한 자는 설명이 상세하지 못하고, 하나에 집착된 자는 옳은 길을 해치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니라 남의 병을 고치고자 하면서 그의 마음을 고쳐주지 않았다든지, 또는 남의 마음을 고치고자 하면서 그의 뜻을 통하지 못한 까닭이리라 생각된다. 이제 이 책을 살펴 보면 첫째 내경(內景.내과계통)을 논하였음은 그 근원을 따름이요, 다음에 외형(外形)을 논한 것은 그 끝을 나눔이었고, 다음에 잡병(雜病)을 논한 것은 그 증세를 분간함이었고, 다음에 탕약과 뜸질로써 마친 것은 그 방법을 정함이었다. 그 중에서 인용한 책으로 말한다면, 《천원옥책(天元玉冊.저자 미상)》으로부터 《의방집략(醫方集略.저자 미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80여 종이나 되는데, 모두가 우리 중국의 책들이었고, 동국(東國)의 책은 불과 3종뿐이었다. 옛 사람이 이룩한 방법을 따르면서 능히 신통하게 밝혀낸 것이 있어서 우주(宇宙) 사이의 결함을 보충하고 4대(大.땅ㆍ물ㆍ불ㆍ바람)에 양기(陽氣)를 베풀었었다. 이 책은 이미 황제께 올려서 국수(國手)임이 인정되었으나, 다만 여태까지 비각(秘閣)에 간직되어 세상 사람이 엿보기 어려웠었다. 얼마 전에 차사(鹺使. 염운사의 별칭) 산좌(山左) 왕공(王公)이 월(粤)을 맡았을 제, 시속의 의원이 그릇됨이 많음을 딱하게 여겨 사람을 수도에 보내어 이를 베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한 채 곧 그곳을 떠나 버리고, 순덕(順德)에 살고 있는 명경(明經.국가 고시에 경서로써 합격한 자) 좌군(左君) 한문(翰文)은 나의 총각 때부터의 친구였는데, 개연(慨然)히 이를 간행하여 널리 전하기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3백 민(緡)이 넘는 돈을 소비하였으나 조금도 아끼는 빛이 없었다. 대체로 그 마음은 병든 생명을 건지고 물건을 이롭게 할 마음이었고, 그 일인즉 음양(陰陽)을 조화하는 일인 동시에 천하의 보배는 의당 천하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이니, 좌군의 어진 마음이 크도다. 판각이 끝난 뒤에 나에게 서(序)를 부탁하므로 드디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그 머리에 쓴다. 건륭(乾隆) 31년 병술(1766년) 난추(蘭秋.7월의 별칭) 상완(上浣.상순)에 원임 호남소양예릉흥녕계양현사 충경오임신계유병자사과 호광향시동고관(原任湖南邵陽醴陵興寧桂陽縣事充庚午壬申癸酉丙子四科湖廣鄕試同考官)번우(番禺) 능어(凌魚.청나라 학자)는 쓰노라.”
하였다. 내 집에는 좋은 의서가 없어서 매양 병이 나면 사방 이웃에 돌아다니며 빌려 보았더니, 이제 이 책을 보고서 몹시 갖고자 하였으나, 은 닷 냥을 낼 길이 없어서 섭섭함을 이기지 못한 채 돌아올 제, 다만 능어가 쓴 서문(序文)만을 베껴서 뒷날의 참고에 자(資)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