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2코린 5,19)
연중 제 13 주간 목요일인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삶의 여러 고통들로 두려워 떠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위로와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삶의 여러 고난들로 인해 고통받는 이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의 모습이 그러하고 복음의 중풍병자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우선 오늘 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의 모습은 베텔의 사제이자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의 곁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던 아마츠야가 아모스를 향해 쏟아 붓는 말들을 살펴봄으로써 아모스가 어떤 처지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츠야는 독기에 찬 듯 아모스에게 다음과 같이 퍼붓습니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아모 7,12-13)
아모스 자신의 말대로 아모스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닌, 어디 근본도 모를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마츠야는 아모스를 예언자라고도 부르지 않고 선견자라 부르며 임금이 머무는 베텔 주위에서는 예언은커녕 얼씬도 하지 말라며 그를 몰아세웁니다. 그러면서 아모스가 하는 모든 일을 부정하고 그의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아마츠야의 이 같은 행동이 아모스를 얼마나 심리적으로 위축시켰는지, 또 그로 인해 아모스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를 아모스의 다음의 말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아모 7,14)
아마츠야의 말대로 아무 것도 아닌 아모스 자신이라는 이 고백이 참으로 절절하게 들려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자신이 처한 그 난처한 상황에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불리움 받았음을 그리고 그 부르심으로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자신의 소명을 용기있게 다음의 말로 피력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제 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아모 7,15-16ㄱ)
하느님께로 불리움을 받던 순간의 그 강렬한 체험, 그로부터 비롯되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강한 확신은 아마츠야로 대변되는 기존 세력의 텃세와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자신이 해야할 바를 분명히 인식하는 그리고 그를 통해 모든 것을 이겨내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아모스가 이렇듯 불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의 강한 체험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 오늘 독서의 아모스는 바로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 역시 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와 별반 다르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던 그는 병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과 더불어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곧 하느님께 대한 죄의 결과 중풍이라는 육신의 병을 얻게 되었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으로 인해 마음의 고통까지 안고 살아가야하는 비련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라는 이중의 고통으로 아파하는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가 그의 병을 낫게 해 주십니다. 아니 병뿐만 아니라 그의 죄까지도 모두 사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기존에 그들이 중풍병자를 대하는 그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아니꼽게 바라보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에 괘념치 않으시고 고통 속에 있는 그를 구원으로 다시금 이끌어 그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ㄷ)
이처럼 오늘 독서와 복음은 공통되게 삶의 고통으로 인해 아파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그들의 삶에 용기와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화답송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나타내줍니다. 코린토 2서를 인용한 복음환호송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2코린 5,19)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남들과 화해하지 못하며 내가 하는 일들과 화해하지 못해 두려움을 느끼고 고통 속에 있으며 삶의 좌절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시고 그 화해가 모든 이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남겨 주셨다는 사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이 화해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화해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이 우리를 화해의 삶으로 초대해 줍니다. 나 자신과 또 나와 불목하는 이웃들과 그리고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일들과 화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해줍니다. 오늘 말씀이 전하듯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화해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 모두가 진정한 화해의 삶, 고통과 좌절이 아닌 진정한 기쁨과 희망을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2코린 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