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호치민을 떠나며
통일 궁을 빠져나온 우리는 호텔로 향했다. 이제 달랏으로 가야한다. 호치민에서 3백킬로 떨어졌다는데 아직 고속도로가 없기 때문 비행기를 타야 한다. 신문에서 그들의 국토 건설계획을 본적이 있다. 호치민에서 동나이까지 1시간대로 갈 수 있는 기존도로를 이용하고 동나이부터 달랏까지 200Km. 4차선, 폭은 25.5m, 시속 85Km로 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시간 30분이면 이동이 가능하다. 달랏 총 공사 예정비용은 64조동(3조2천억원)이며 10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입찰을 실시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건설사들이 눈독을 들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 신문기사가 났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기사를 싣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석 박사님이 노후 여생 서비스 차원에서 부디 ‘수동 달랏 관광사’를 차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머지않아 관광지로 분명 달랏이 한 몫 차지할 것으로 나는 보고 있다. 비행시간은 5시 50분, 뜨자마자 바로 착륙이라고 누가 말했다. 총 소요시간 50분 정도. 호치민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길 안내를 자청했다. 나는 호치민에서 쇼핑센터 한 곳도 안 들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싶었다. 루비이똥이고 자라 상표가 바로 호텔 앞에 있다.
어제 급히 파인애플을 사러 잠시 들른 . 팍슨 사이공 쇼핑센터, 그 안 역시 고급상표가 넘쳐났었다. 그리고 냉방이 잘 된 곳을 들러 땀을 식히고 떠나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갈 길이 바쁘다보니 하지만 일행은 내 의중을 제대로 만끽하지는 못하는 듯 했다. 나는 기념으로 사과를 샀다. 우리나라에서는 없는 선홍빛 짙은 고운 색상이다. 체리의 큰 사이즈라고 할까, 사과로서는 예쁜 모델 깜이라 생각했다.
택시 두 대로 나누어 타고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표를 다 끊어도 다른 택시를 탄 팀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혹시 빠트린 짐 때문 되돌아간 것은 아닐까. 그래도 동코이에서 공항까지는 7킬로 정도이니 큰 문제는 아니다. 과거 이 탄손누트공항을 비행기로 제압하고 북베트남군 탱크는 4월 29일 새벽 진격하여 30일 오전 11시 정각. 대통령궁 정문을 짓부수며 진입을 완료 했으니 불과 7킬로 거리라지만 거의 무혈입성이나 다름없다. 그 탱크가 지금도 통일 궁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우리가 만난 택시기사는 젊은 친구로 영어를 곧잘 했다. 나는 신이나 인삼캔디를 주며 무엇인 줄 아느냐고 했더니 금세 화색이 돌더니 파워! 파워! 한다. 그는 인삼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마침 가는 길에 체육관이 보였다.
박 박사님이 태권도 하자 가라테 하며 응수를 했다. 나는 마침 잘됐다 싶어 그들의 축구영웅 쯔엉을 말했다. 아쉽게도 그는 그를 몰랐다. 그의 이름을 어렵게 외웠는데 보람이 없다 싶다. 그런데 사탕 한 개를 문 그가 그 사이 파워풀 해졌는지 앞서 출발한 우리 일행 차를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연실 그들에게 '약 오르지 용용 죽겠지.' 를 해댔는데 코란을 암송하는 지 아니면 조는 것인지 전혀 무반응이었다. 그들은 그러니까 우리가 앞서 달리는 것을 못 본 것이다. 먼저 출발했다는 단출한 근거 하나로 그들은 도착해서도 느긋하게 초입에 앉아 들어오는 차 쪽만 바라보았던 모양이다. 요즘 시대에도 이런 안일무사에 천하태평인 영감님들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아무튼 나는 인산 캔디 두개가 발휘한 파워풀한 기동력을 제대로 실감한 것이다. 나중 한참을 지나 상봉은 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무료하여 커피를 시켰다. 박 박사님이 산다고 했다. 즉석에서 갈아 주는 고소한 커피 , 향이 예전 마시던 커피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거기에 공짜로 얻어 마시는 맛이라니, 마누라가 베트남 커피 그저 그렇다고 주장을 해 나는 어쩔 수없이 이를 추종했는데 이 참 생각을 바꿔야 할 모양이다. 커피를 만드는 아가씨가 한국말을 곧 잘했다. 바로 한류열풍이다. 보란 듯이 한국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데 아쉽게 그녀의 한국노래를 모르겠다. 나는 아이 돌 가수를 거의 모른다. 정작 한국 사람인 내가 우리 노래를 모르다니.
내친 김에 조금 전 산 사과를 꺼내 불쑥 내밀며 순전히 한국말로 '잘라 줘!' 외마디만 외쳤다. 그녀의 반응을 보자는 것이다.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아이 돌을 좋아한다는 그녀, 그렇다면 이아이돌 노래에 흔한 갈라 서, 헤어지자 의미로 '갈라 줘!'가 알아듣기로는 더 적당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명석했다. 껍질까지 얌전히 벗겨서 쟁반에 받쳐 내놓았다. 나는 요즘 베트남여인들이 우리나라에 시집오는 것은 매우 잘한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이 또한 그대로 들어맞는 상황이다. 베트남 여인의 칭송에 대해서는 다음에 시간이 닿는다면 따로 글을 싣겠다.
그런데 갑자기 도박사 사모님이 칼을 수화물로 안 붙여 걸릴지 모르겠다고 하며 끌탕을 한다. 차이나타운에서 과일을 깎아 먹으려고 샀다는데 과연 기내 통과가 가능할까. 내 손가방에 넣고 줄을 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 그러나 이곳의 안전망도 허술하지가 않다. 바로 걸렸다. 봉지를 뜯지 않은 것이라고 하자 검사원이 씩 웃으며 손을 좌우로 흔든다. 표정에서 규정상 어쩔 수 없다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나도 어차피 안되는 줄 알았다는 듯이 오케이라고 한마디 해주었다.
수속을 다 받았는데도 1시간이나 남았다. 하노이 향발만 조금 붐빌 뿐 수속도 빠르고 번잡하지도 않다. 석 박사님은 도착해서 수속을 마치고 나오면 저녁식사 시간이 지날 수 있으니 차라리 호치민 공항에서 해결하는게 낫다고 했다. 식당을 둘러 보았는데 배도 안 고프고 마땅하지 않다. 다소곳하게 앉아 정서 없이 배를 채운다는 게 나로서는 용납이 안된다. 그야말로 의미 없는 배와 시간 채우기다. 여행은 그때그때 닥치는 난관을 즉흥적으로 해결하는 묘미 또한 한가닥을 차지한다. 예기치 않은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석박사와 통신이 급했다.
와이파이, 재주 좋은 김 이사님이 연결을 바로 해 왔다. 말을 해서 통한 것이 아니다. 인삼캔디 위력이 또 작용했다. 급한 대로 제일 연장자인 도박사님을 팔았다. 이럴 때 왜 팔았다는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다. 옛날 선비 체면에 쌀을 사러간다는 게 너무 창피하고 어색해서 거꾸로 쌀을 팔아왔다고 했다는데 그 표현도 아니고 영감님한테 할 도리는 아니지 싶다. 아무튼 문자는 "도박사님이 저녁을 달랏 가서 드신답니다." 라고 적어 날려 보냈다. 여기서 '날려'는 우리가 비행기 타고 날아갈 것인데 글자를 먼저 날려 보내는 바람에 쓴 뜻으로 이는 합당한 표현이다.
그런데 참 묘하다 싶다. 인삼캔디를 접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인삼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다. 택시기사도 공항에 커피그릴에 젊은 처자도 그렇고 이곳 그릴 점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한류 열풍을 타고 선전을 따로 한 인삼캔디는 아니지 않는가. 이에는 또한 합당한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들은 일찍이 인삼을 알고 있었다. 고려 인삼이니 이미 고려 때 중국에 널리 전파된 인삼이다. 그 이전은 왜 아닐까. 조선 선비 최부의 표해록에서 보면 1488년 표류를 하다 북경을 거쳐 돌아오는 길 지쳐서 결국 쓰러지고 만다. 그때 그가 먹은 처방전은 인삼 양위탕이라고 적혀있다. 북경에서 먹은 것이 곧 인삼이다.
다음 글은 건양 대 이철성 교수가 쓴 글 일부를 발췌해 걷어 올린 것이다. 앞서 역사를 제일 마지막에 등장한 응우옌(Nguyen, 阮王朝, 1802~1945) 왕조. 그들은 알다시피 중부지방 후에(Hueâ)에 도읍을 두고 중국의 유교이념을 적극 받아들이는 한편,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자주적인 왕조를 이룩하였다. 민망(Minh Mang, 明命, 1820~1841)은 응우옌 왕조의 제2대 황제인데 그는 오늘날 ‘베트남’이란 이름의 어원이 되는 한자명 ‘월남(越南)’이 청나라가 승인해 준 이름이라 하여 국명을 ‘다이남(Dai Nam, 大南)’이라 바꾼 인물이다. 다이남이란 북쪽에 중국이 있다면 남쪽에 베트남이 있다는 뜻으로, 중국과 베트남이 동등하다는 관념이 짙게 깔린 국호다.
민망은 개혁적인 군주였다. 창업 군주 잘롱(Gia Long, 嘉隆, 1802~1820) 황제의 넷째 아들로, 제위에 오르자 통치기구를 개편하여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황족과 종실을 감시했는데 과거제도를 완비하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유학에 소양이 깊어 그 보급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청의 건륭제가 지은 시에 대해 ‘음률을 무시하고 시어(詩語) 역시 잘 다듬어지지 않았다’고 비평을 할 만큼 유학을 존중함과 동시에 청나라에 대등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침략적인 팽창정책을 썼는데 개혁적이고 정력적인 민망 황제, 그에게는 여인들이 많았고 78명의 아들과 64명의 딸을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민망 황제 곁에는 항상 인삼이 있었는데, 특히 고려인삼에 대한 그의 욕구는 남달랐다고 한다.
<다섯 잎 세 줄기 인삼은 구름에 아름답게 감싸 안겼고[五葉三椏雲吉擁]
옥 같은 뿌리와 붉은 열매는 감미로운 이슬에 덮여있네 [玉莖朱寔露甘薄]>
이는 청의 황제가 인삼에 대해 읊은 시인데 민망은 이 시에 대해 표현이 너무 사실적이고, 시적 상상력과 상징화가 부족하며, 시적 수사에만 집중했다고 비평했다. 민망의 이 비평에 대해 한 학자는 ‘옥경(玉莖)’이 지니는 이중적 의미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옥경이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구름, 다섯 잎사귀, 세 줄기 등도 매우 성적인 표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하지만 이러한 민망의 비평은 인삼에 대한 그의 관심과 지식이 매우 깊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인삼이 베트남에 알려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응우옌 왕조의 첫 번째 군주인 잘롱 황제가 그의 최측근에게 내리는 선물 리스트에는 민망황제가 한 것처럼 인삼은 들어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 무렵이라고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즉 민망 황제에 이르러 인삼의 존재가 베트남의 왕조실록 격인 『대남식록』과 『대남식록전편』에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민망 황제의 뒤를 이은 티에우찌(Thieâu Tri, 紹治, 1841~1847)와 뜨득(Tö Ñöc, 嗣德, 1848~1883) 황제 때에도 인삼 기록은 계속 등장한다고 한다. 결국 인삼은 19세기 해외무역을 통해 베트남에 널리 알려졌고, 이후 19세기 전반 동안 응우옌 왕조의 활동성을 대변하는 상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민망 황제는 어떻게 고려인삼을 얻을 수 있었을까?
우선 떠오르는 게 거상 임상옥 루트다. 베트남에서 청의 북경으로 파견한 사신단을 통해 고려인삼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조선은 1797년(정조 21)에 홍삼 무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는데, 애초에 200근으로 한정했던 홍삼 무역량은 1840년대에 이르러서 4만 근까지 급속히 증가했었다. 따라서 민망의 명령을 받은 베트남 사행단이 북경에 조선의 숙소인 옥하관 근처의 도매상으로 부터 고려인삼을 그들의 특산품을 주고 사갔을지 모른다.
<<후한서>> 가종전에는 <자오 찌(交阯, 베트남)는 진주, 물총새 깃, 물소 뿔, 상아, 거북이 등껍질, 향목(向木), 미목(美木)의 산지이다. 그곳에 임명되는 자사(지방관)는 거의가 부패하여, 한편으로는 고위관리에게 선물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뇌물로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 축적된 부가 충분하다고 생각되면 곧 다른 곳으로의 승진을 추구했다. 때문에 하급 관리와 주민들은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들의 특산물과 이렇듯 교환을 해갔을 확률이 높다.
또 한 루트는 베트남 상인이 광동으로 들어온 고려인삼을 무역해 왔을 가능성이다. 민망 황제 때부터 베트남 상인의 무역 활동이 매우 활발해졌기 때문인데 이때 조선에서는 홍삼의 공식무역뿐만 아니라 황해 해상에서 밀무역이 수시로 일어나고 그 규모 또한 상당했다. 1864년 황해도 옹진해상에서의 홍삼 밀무역의 실례를 살펴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 이 사건의 연루자는 삼주(蔘主) 홍병구, 거간꾼 임시형, 행동책임 김정연, 물주(物主) 조관섭, 뱃사람 김순원과 이성삼 등이었다. 이들은 고종 1년(1864) 봄과 여름 사이에 황해도 옹진의 여러 섬 주변에서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밀무역을 감행했고 이 소문이 크게 나자 관아에서 해안가 각처를 정탐하던 중 인천 포구에서 장물(贓物)을 교역하던 상인들이 잡힘으로써 밀무역의 전모가 드러났었다.
아무튼 황제가 애지중지 하고 신하들한테도 하사한 선물이라는데 백성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이는 선조가 남긴 크나큰 우리의 자산이다. 드디어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다. 국내선인지라 대부분이 베트남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다. 서양인이 그득하고 , 일본사람, 한국사람 목소리도 들린다. 이륙하자 뿌연 안개가 자욱하다. 호치민의 습공기가 만든 산출물일 것인데 나는 어느 한 시절 고통과 좌절 속에 얕은 신음을 연실 쏟아내던 그 몰골 그대로 호치민의 여전한 갈증으로만 느껴진다. 호치민은 내가 보기에는 아직 상처가 덜 아물었다. 그 갈증 속에는 호치민에 남겨둔 미처 못다 한 어설픈 내 이야기도 껴 있다.
시야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리 떠난다더니 비엔호아, 쑤안록 , 푸옥롱 그리고 부온마트옷이 멀어져 간다. 뭔 좋은 이야기라고 총쏘는 이야기를 또 끄집어내겠는가. 붉은 노을빛을 향하는 기내에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노래,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어쩌면 이 노래는 저 아래 호치민이 지금 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니 비단 그들 뿐 아니라 누구든 어느 때는 못 다한 것은 못 다한 대로 그대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지 싶다. 그것이 인생이고 애써 남은 미련도 또 하나의 그리움으로 언젠가는 아름답게 물들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 막 곱게 물든 석양이 내게 그렇게 말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