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 인생으로 첫 출발은 통증과 고통에 대한 탐구과 통찰이었다.
pain and suffering
질병으로 인류에게 주어지는 객관적 통증
대부분의 환자는 객관적 통증이 아니라 두려움, 공포를 동반한 주관적 고통(suffering)때문에 괴로워했다.
거기서 마음탐구가 시작되었고
마음탐구의 작은 통로를 따라 영적인 관심과 탐구로 이어졌다.
10. 통증과 고통
이 장에서는
통증과 고통의 경감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흔히들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둘이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것이다.
또 몸의 경험에서 나타나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측면들 간의 관계도 살펴볼 것이다. 모든 병과 장애, 인간 삶의 문제들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것이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50년 넘게 내과의사로 일하면서 병의 신체적 측면을 이해하고,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정신적 요인들을, 의식과 영혼의 문제를 연구하고 경험하는 동안에는 영적인 차원에 대해 알게되었다.
그런데
영혼은 진정 무엇을 의미할까?
영혼은 단지 환상에 불과한 걸까?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실제적인 무엇일까?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나 쓸모있는 것일까?
영혼의 실체를 경험하려면
영혼에 대해서 무엇을 알야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의 문제들을 경감하는데
영혼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이장에서는
급성통증과 만성적인 통증을 다루고
더욱 중요하게는 이 통증과 함께 하는 법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리가 이야기할 문제는 두가지다. 먼저 증상들을 다루는 구체적인 방법과 최면과 침술같은 방법들이 통증의 완화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의식의 단계들과 이 단계들이 통증의 경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를 위해 의식지도를 다시 참조할 것이다. 이 지도에 수치로 표현한 에너지 단계들과 이것들의 상대적인 힘, 방향,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감정들과 의식속에서 진행되는 과정, 이런 과정이 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미치는 영향, 신을 믿지 않을 때 문제를 푸는 방법이 모두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또 타인들은 물론이고 나도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통증의 임상적 예들을 소개하고 앞으로 설명할 기법들을 이용해서 이 통증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설명한다. 이 임상적 예들은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의식의 분명한 원칙들을 입증해준다. 특정한 예를 통해 배운 것을 다른 곳에도 적용할 수 있으므로 여러분은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통증처럼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기는 것을
변화시키는 방법과
이 통증으로 오히려 덕을 보는 방법,
특정한 경험에서 얻은 지식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법을 알게될 것이다.
그러려면 의식자체의 본질과 이런 본질이 우리의 삶에 전반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알아야 한다.
인간경험의 본질은 무엇일까?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하는 자리는 어디일까?
이 의문의 답을 풀려면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 영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실제로 이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의심이 많고 실용주의자적인 내면을 갖고 있어서 과학자가 되었다.
그래서
실제로 효과가 있는 것에는
크게 감동을 받지만
가정이나 이론에 불과한 것에는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똑같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몸에는 자신을 경험하는 능력이 없음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모두들 몸이 곧 자신이라고, 자신의 몸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이런 말이 충격적으로 들릴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몸을 어떻게 경험할까? 예를들어 팔은 자신이 팔임을 다리는 자신이 다리임을 경험하지 못한다. 몸 전체가 그렇듯이 부위들도 오감을 통해 경험된다. 우리는 몸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의 이 감각들은 어디서 경험될까?
감각을 경험하는 곳은 마음이다.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경험하지 못하고 몸에 대해 알려주는 오감도 느끼지 못한다. 몸에 대한 경험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다음으로 놀라운 점은 마음도 자신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각은 자신이 생각임을, 느낌도 자신이 느낌임을 기억도 자신이 기억임을 경험하지 못한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면, 마음보다 더욱 큰 어떤 것속에 있어야 한다.
더욱 큰 어떤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수 있는 것은
의식덕분이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내용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의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경험은
의식속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벌어지는 일에 대한 자각이
의식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한예로 두뇌의 한부위를 잘라내면 정신의 이 부분도 더이상 신체의 영역에서 작용하지 못한다. 잘라낸 부위가 감각을 담당하는 부분이며 몸의 한쪽을 더이상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두뇌를 통해
마음에서 경험된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을 제거하면
마음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마취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의식자체도
훨씬 더 큰 영역에서 경험된다.
작은 영역은
언제나 이렇게
더욱 큰 영역에서 경험된다.
한층 더 큰 영역이
작은 영역의 경험을 포함하고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의식은
가장 큰 영역,
즉 자각도 포함하는
무한한 영역안에서 경험된다.
의식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각의
본질이다.
그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이 의식의 본질이며,
오감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이
마음의 본질이고,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이
오감의 본질이다.
보통 이 모든 경험은
의식안에서 일어난다.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할때
이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디서 이 의식을 경험할 수 있을까?
의식이 자리하는 분명한 장소가 있을까?
의식이 자리하는 특정한 공간이나 위치가 있을까?
의식은
특정한 공간이나 물리적인 영역,
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이것도 분명하게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이다.
흔히들 난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경험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 머릿속에서 생각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어디서 경험할까? 우리는 어디에서도 생각을 경험하지 않는다. 생각을 경험하는 특정한 공간이나 위치가 없다는 말이다.
의식의 본질은
특정한 형태가 없다는 것이다.
의식은 형태없이 존재한다.
의식의 내용에는
형태가 있지만
의식자체의 장은
특정한 자리가 없는 공간과 같다.
나중에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통증을 다루는 법을 이야기할때 이점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다. 통증과 그 구체적인 감각, 이것에 대한 경험을 다루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통증을 경험할 때
하나의 존재로서
어느 단계에 위치해 있는가,
자신의 의식속에서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가에 따라
통증이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통증과
고통은 별개의 것이다.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은
통증과 고통이 같다는 믿음체계다.
이런 믿음체계가 일련의 프로그램들을 심어놓기 때문이다.
통증과
고통은 별개의 것이다.
통증을 안고 있으면서도
통증에 완전히 무심할 수 있다.
몸에 통증이 있어도
최면에서 나타나는 것 같은 무통성 혹은
변성된 의식상태로 인해 통증으로 인한 고통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끼거나
전혀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통증이
여전히 존재해도
통증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통증은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통증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통증의 희생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통이나
모종의 괴로움을 경험하지 않고도
통증과 함께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함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통증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통증과 고통이 같은 것이라는 믿음체계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사람들은 치과에 가면 반드시 통증을 경험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도 몇년전까지는 치과에 가기가 괴로웠다. 통증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분계점인 동통역치가 낮아서 언제나 치과진료를 연기했다. 스케일링을 받을때도 마취를 해야만 했다. 통증에 그만큼 취약했던 것이다.
통증역치나
기꺼이 통증을 겪어 내겠다는 자세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몇년동안 영혼과 의식의 다양한 기법들을 배운 후 통증에 이것들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통증의 경험이 줄어들고 치과에 가서도 놀랍게도 극도의 괴로움 대신에 적정수준의 통증만 느끼게 되었다. 서서히 통증이 약해지더니 살짝 불편할 정도로만 느껴졌다. 지금은 치과에 가면 불편을 아예 느끼지도 않는다. 의자에 엉덩이를 잠깐 붙였는데 금세 치료가 끝나서 오히려 이렇게 소리친다. 벌써 다한거에요? 이렇게 빨리 치료가 끝나다니 믿을수가 없군요.
이 장의 끝에서는
스스로를 위해
변성된 의식상태를 이용하는 방법이나
영향을 받기 쉬운 공간에서 벗어나
변성된 의식상태를 더욱 신속하게 익히는 법,
통증을 완화하는 법 등
자기암시의 일종인 자기 최면기법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 기법은 우리가 배운 것들을 더욱 강화시켜 줄 것이다.
또 자기최면 기법이
어떻게 신속한 자기수양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도
설명할 것이다.
다음에 치과에 가기전까지 이런 기법을 익힐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이것을 빠르게 익힐 방법도 몇가지 소개하겠다.
가장 먼저 이야기할 것은 극심한 통증을 다루는 방법이다. 잘 돌아다니다가 발목이 갑자기 접질려 괴로운 통증에 시달릴 수있다. 혹은 다리가 부러지거나 담낭이 갑자기 아프거나 콩팥산통이 일어나거나, 심장동맥질환이 생길 수도 있다. 아니면 정강이 살갖이 벗겨지거나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히는 것 같은 일상적인 사고로 기절할 것처럼 통증에 시달리는 순간들도 있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급성통증과 만성적 통증을 포함한 다양한 병들을 다루는데 이용할 수 있는 기법을 설명하겠다. 뜨거운 물이 쏟아져 손을 데거나 난로에 화상을 입는 사고를 갑자기 당하면 물론 당혹스러울 것이다. 이때 유용한 기법은 저항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려놓음이 주는 이득들과
우리의 마음이
흔히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비교해보자.
마음은 보통
고통을 예상하고
경험에 저항한다.
통증은
곧 고통을 의미해.
그러니까
난 통증에 저항할거야라는
프로그램이 이미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항하면
사라지리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점은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나가야
통증과 고통을 신속하게 덜 수 있다는 것이다.
항복하고
통증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 일상에서는
이런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까?
보통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이 흔히 사용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기법을 적용해서 신속하게 치유된 몇가지 임상적 예들을 이야기해주겠다.
저항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사건과 완전히 함께하면서
감각에 전적으로 순응한다는 의미다.
또 사건이나
감각에 일어날 수도 있는 생각들을
무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하는 대신
감각을 즉시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이 감각에 대한 저항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예를들어 사고로 화상을 입었을때 감각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으면 처음에는 통증에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내려놓음의 문을 여는 순간
통증이 물밀듯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통증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저항을 내려놓는다.
'더, 더, 더 아파도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경험이든
그 만큼의 통증이 있음을 알면,
이 점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제 문을 열고
통증이 빨리 흘러나가게 한다.
통증과 함께 하는 것과
통증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는다.
생각은
전혀 도움이 안되므로
무시한다.
그 대신
완전히 순응해서
통증을 경험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치 문이 열리면서
통증이 밀려들었다가
완전한 경험으로
통증이 곧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것같은
느낌이 들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목을 삐끗한 기억이 난다. 심하게 삐었기 때문에 보통때 같으면 정형외과 의사를 찾아가 발목에 붕대를 감거나 6주 정도 깁스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공원 벤치에 앉아 두눈을 감고
이 경험에 나를 맡겼다.
물론 극심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통증에 저항했다면
결국 깁스를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통증에 저항했다면
통증이 극심해지다가
결국 만성적인 증상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원벤치에 앉아서
통증이 나를 휘덮게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처럼
통증에 나를 맡기자
통증이 파도처럼 나를 휘덮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 스스로
이 통증을 경험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이 경험의
주인이 되었다.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니었다.
나는
이 통증을 경험하기로
선택했어.
아플테면 더 아프라고 해.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고통의 양이 줄어들었다.
통증도 급속도로 완화되어 3-4분도 안되어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통증이 최소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계속 통증을 내려놓았다. 이후 왼발을 다쳤을때도 같은 기법을 적용했다. 장작을 패다가 커다란 떡갈나무 통나무가 왼발위에 떨어져 발등뼈가 으스러졌다. 그러나 얼마후 나는 크리스마스 무도회장에서 춤을 췄다. 발에 깁스도 하지 않고 말이다.
경험에 대한 저항을
의식적으로 내려놓는 것 말고는
다친 발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후 사고로 엄지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역시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과 감각에 대한 저항을 끊임없이 내려놓으면 경험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는대로 실천하자 흔히 말하는 기적적인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졌다. 부주의로 원형톱에 엄지손가락이 잘린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경험에 대한 저항을 멈추는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이 경험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게 두었다.
그러자
몇초도 안되어
출혈이 멈췄다.
자르던 나무판 위로
떨어진 핏방울은
고작 여덟 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또
경험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은 덕분인지
절단을 당하면
손가락 동맥이 이상한 모양으로 팔딱거릴텐데
그런 일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다른 예로
부엌에서 심하게
화상을 입은 친구가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화상에 저항하지 않기로
의식적으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정말로 1-2분만에 통증이 사라지고
나중에 물집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보통은 아마 커다란 수포가 생겨서 치료에 몇달은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화상으로 인한 변화는 변색뿐이었다. 한번은 내 수업을 듣던 소목장이 양손에 화상을 입었다. 그도 똑같은 기법으로 저항을 즉각 내려놓았다. 이 기법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의 손은 수포들로 뒤덮여 몇주 동안 손에 붕대를 감고 지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 따르면 불과 3-4분 만에 통증이 사라지고 수포도 전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즉각적인 치료의 예들은
우리가 저항을 내려놓는 순간
몸이 어떻게 스스로 치유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 마법같은 것은 없다. 누구나 이것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다. 수천년간 전해져 온 일반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선수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신체적 몸의 불편을 다루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 방법은
저항을 내려놓고
생각도 지우고
이 경험과 하나가 됨으로써
경험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의식의 작업에서는
이 과정을
사라짐이라고 부른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을
완전히 내려놓음으로써
그것을 우리의 경험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알다시피
저항을 할수록
그 경험은 더욱 연장된다.
무언가에
저항하고 집착하는 한
그 존재는 계속 유지된다.
저항은
경험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과 같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경험의 희생자가 된다.
저항하던
그 대상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러나
저항을 내려놓고
경험과 하나가 되면
경험은 사라진다.
여기서 내려놓음은 관련있는 모든 이미지와 이것들의 축적된 에너지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의식지도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다른 단계들에 대한 상대적인 힘을 보여주기 위해 의식의 각 단계들을 수학적으로 수치화했다. 이때 화살표는 에너지의 방향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보여주며 우리의 경험방식을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부정적인 방향을 향하는 것들은
통증과 고통으로 경험되며,
삶에 해롭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다양한 에너지 장들은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의식속에서 일어나는 과정도 보여준다.
또 우리의 개인적인 나보다 더욱 위대한 어떤 존재 즉 신이라 부르는 존재와의 관계를 경험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작업을 바라보고 경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한결 고차원적인 단계들에서는
더욱 크고 강력한
의식의 장들과 관계를 맺는다.
의식지도를
다시 살펴보는 유일한 이유는
격심한 통증을 다루는 기법을 적용할 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통증에 대한 저항은
150의 부정적인 에너지 장을
이룬다.
통증을 통제하려고 애쓰거나
통증에 저항하고 맞서려 하면,
작은 나안에서
150 정도의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 생겨난다.
이것은
괴로움이나 분노같은 감정으로서
통증에 짜증과
화를 내는 단계와 같다.
그러다
저항을 내려놓는 단계로 올라간 후 즉시
이 기법을 활용할 용기를 내서
거리낌없이 시도하는 단계로 올라가면
중립의 장으로 이동한다.
중립의 단계로 올라간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초연한 에너지 장에
머물게 된다는 의미다.
'난 괜찮아.
기꺼이 이 경험을 끝까지
겪어낼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발성은 우리를 310의 에너지 장으로 상승시킨다.
이 에너지 장에서는
삶과 삶의 경험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이것들에 기꺼이 응하고 동조한다.
이로 인해
삶은 긍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저항하는 대신
삶과 함께 흐르며
신에게 삶을 내맡긴다.
이것이 바로 도교에서 가르치는 지혜다. 도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바람이 불때 버드나무 가지는 바람을 따라 휘어지지만 바람에 저항하는 떡갈나무는 결국 부러진다고 한다.
정강이 살갖이 까졌을때
우리도 저항하는 대신
버드나무처럼 상처와 함께하면서 저항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 경험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부정적이고 고통스런 에너지 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려움은
100의 에너지 단계에 있다.
저급한 에너지 장으로
기쁨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점수가 높을수록 행복의 느낌이 커진다.
그러므로
경험을 다루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받아들임을
기꺼이 인정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나 고차원적인
380의 에너지 장으로
상승할 수 있다.
방울뱀과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든
우리를 어려움에 빠트리는 다른 사건이든,
삶과 더불어 흐르기를 선택하고 순응하면
우리 내면의 위대한 힘,
즉 고차원적인 에너지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런 기법을 실천해본 사람들은 이 힘을 고차원적인 힘이라 부르며 "저의 고차원적인 힘에게 간청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어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제겐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려요.
어떻게 하면
실제로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체험을 하는 방법은
실천에 있다.
실제로
내려놓기를 실천하면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개인적인 나보다 더욱 큰 어떤 것이
사건을 다루어 주고 있음을 체험하고,
고통스러운 일도 몇초 지나지 않아
참을 만하게 여겨진다.
괴로움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힘이
낮은 차원의 부정적인 에너지 장을
건너뛰거나 피해서,
사랑같은
고차원적인 에너지 장(500)으로 올라가
그 안에 머물게 된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단계(540)에 들어가면
치유의 힘을 경험한다.
치유가들은
주로 540 이상의 단계에 있다.
이 크나큰 사랑의 장에서는
삶과 더불어 흐르고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저항을 내려놓고 싶은 갈망과 사랑의 감정을 경험한다.
이 기법을 사용하면 극심한 통증이 자연히 치유된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도 여러번 되풀이해서 이 기법을 사용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있었다. 언젠가 일요일 밤에 열리는 수업에서 이 기법을 가르쳤던 일이 기억난다. 신기하게도 그 주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 이 정보가 구조대같은 역할을 했다. 실제로 이 정보 덕분에 끔찍한 경험을 잘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후 거구의 건장한 친구가 나를 찾아와 꽉 안아준 적이 있다. 덕분에 갈비뼈가 세대나 부러졌다. 딱하고 부러지는 게 느껴졌지만 그가 죄책감을 가질 것 같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갈비뼈는 잘 치료되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 다른 친구가 찾아와 나를 포옹하는 순간 반대편 갈비뼈 세개가 부러졌다. 말할 필요없이 이번에도 난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내 갈비뼈의 카르마를 감안해도 좀 지나친 결과였지만 말이다.
급성통증과
만성통증을 다룰때는
이 기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만성통증도 급성통증과 똑같이 다루지만
그 방식이 약간 다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모든 경험은 의식속에서 이루어진다.
예를들어 엄지손가락이 잘려나가는 것같은 일이 벌어졌을때 어디서 그 통증을 경험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엄지손가락에 통증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그 통증은
정말로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엄지손가락에서
먼 곳으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한다.
아마
"머리꼭대기로 관심의 초점을 옮기게 되네요"라고
말하고는
머리 꼭대기에서
엄지손가락과 관련된 자리를 찾고
통증을 경험하는 자리는 정말로 어디일까?
이렇게 계속 질문을 던지다 보면
통증이 모든 곳에서 경험된다는 것을
몸의 곳곳에서 몸의 에너지 장 전체에서 경험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통증은
정말로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구역질이 나거나
속이 뒤집어지거나
무릎이 풀릴 정도의 통증을
거의 모든 사람이 겪어 보았을 것이다.
이런 통증을
우리는 모든 곳에서 경험한다.
앞의 훈련에서처럼
머리꼭대기의 영역에 집중하면
그 지점에서 통증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통증이
모든 곳에 존재함을 알아차리면
급성통증을 다룰 때와 같은 기법을 이용하게 된다.
통증이
어느 특정한 자리에서
계속되지 않으므로
모든 곳에서 경험되고 있는 통증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는 것이다.
느낌과 감각
혹은 경험을
생각과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계속
삶의 온갖 문제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특히
실제의 경험속에서
순전한 감각이나
신체적인 병들이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이런 경험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딱지를 붙이고
개념을 부여한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궤양이나 접질림이 아니다. 이것들은 딱지나 개념 혹은 진단일 뿐이다. 감각이라는 말처럼 통증도 하나의 개념일 뿐이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현상은 말이나 개념, 딱지를 넘어서 있는데 말이다.
그럼
우리가 정말로 경험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에서
궤양이라고 부르는 경험은
'바로 여기"에서
배속에서 일어나는 감각이다.
그런데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걸 궤양이라 부를 수 없다면 얼얼하다고는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것 역시 개념이다. 이것이 개념에 불과하다는 말의 의미를 즉 이것이 생각의 형태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알 것이다. 이렇게 개념에 갇히면 우리는 실제로 그 얼얼함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안으로 들어가 말 너머에
존재하는 경험을
실제로 체험해야 한다.
경험을 실제로 느껴야 한다.
경험을 할때
동물들은
말로 딱지를 붙이지 않는다.
경험은 그저 일어나는 일일뿐이다.
우리는
왜 자신의 동물적 본성을 불러내
경험하는 일과 단순하게 함께하지 못하는가?
왜 경험에
어떤 말도 갖다 붙이지 않고
경험과 그저 함께 하지 못하는가?
온갖 생각들로 인해
복잡한 프로그램과 믿음체계들을 받아들이고
결국은 이 생각들의 위력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난 궤양이 있어"라고 말하면 궤양과 어울리는 일련의 프로그램들이 작동을 시작한다. 그러면 마음의 본성과 힘으로 인해 이 프로그램들을 전부 경험하기 시작한다. 의식의 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점은 마음에도 힘이 있으며 영향력이 아주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 하나하나에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마음의 힘과
생각의 본질을 이해하고 나면
의식의 한가지 법칙,
즉 마음에 품은 것들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깨닫는다.
마음에 품은 것들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이 한 문장속에
모든 병과 통증, 고통을 치유하는 핵심이 들어있다.
마음은 놀라운 정도로 강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음이 그토록 강력하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것이든
통증이나 고통을 다룰때는
먼저 이것에 대한
모든 믿음체계를 중단하고
내려놓고 지워버려야 한다.
연구결과
실제로 경험을 창조해내는 것은
우리의 믿음체계 자체라고 한다.
믿음체계의 발현이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마음이 정당화시켜주는 것과 같다.
통증과 고통이 같다는 믿음을 부정해보면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
급성이든 만성이든
통증을 다룰때는
모든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
생각도 사실은
믿음체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근본적인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근본적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딱지를 붙이지 않고
실제로 경험되는 일을 느끼면서
저항을 내려놓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통증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더 이상 개의치 않는 지점에 이른다.
처음에는 이런 점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통증을 제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료에 좋은 태도는
통증을 받아들이고
감각의 존재를 허용하며
이 감각에서 멀리 물러나는 것이다.
통증 둘레에
경계를 설정해 놓은 다음,
이 부분적인 통증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다.
발목이 부러진 통증으로 모르핀 주사를 맞을때도 마찬가지다.
모르핀 주사를 맞으면
통증이 여전히 존재해도
이 통증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통증은
더 이상 우리도,
우리의 것도 아니다.
이 예에서
우리가 의식의 작용으로 설명한 일을
모르핀이 대신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모르핀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저 의식이
작용을 시작할 수 있게 도울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핀의 자극이 없어도
의식이 이렇게 작용하도록
만드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옛날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몇 해동안 나는 모든 진통제와 진정제, 마취제에 심한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런데 몇해 동안 나는 온갖 중병과 사고를 겪었고, 급기야 마취없이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필요에 의해 어쩔수없이 통증을 다루는 보통의 방법들에 의존하지 않고 의식자체의 역량과 힘을 연구하고 발견해야만 했다. 덕분에 의식이 자신의 힘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 온갖 진통제들의 역할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진정제를 쓰지 않고도
똑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힘이
우리의 의식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통증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고
통증이 변화되기를 바라지도 말고,
통증과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감각들이 존재하도록
그냥 내버려두고
감각들이 존재하든 하지 않든
신경쓰지 않게 될때까지
감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감각의 존재여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게 들리겠지만
이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살다보면
많은 일에 동요하게 된다.
그럴때 무언가 조처를 취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오면
갑자기 그 일들을 흘려보내고
무관심해진다.
예를들어 뒷마당에 문제가 있어서 미칠지경이 되었다가도 어느날 문득 "제기랄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거야!"라고 소리치게 된다.
무조건 조처를 취하고
통제하고 바꾸고
의지력을 발휘해야 할 것같은 마음이
그냥 그대로 두는 상태로
불현듯 변화한 것이다.
사람이나 장소,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애쓰다보면
결국은 불가능한 것에 맞서 싸우다가
고통만 만들어 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대로 존재하도록 두는 순간
그것을 더이상 경험하지 않게 된다.
통증이 있어도
통증을 느끼지 않는 상태로
올라간 것이다.
물론
아픈 상처에서 생겨난 감각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 감각에 더이상 신경쓰지 않는다.
신체의 절단으로 인해 생긴 감각은
여전히 그대로이지만
이것에도 신경쓰지 않는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통증이 존재하면
존재하는 것이고
통증이 없으면
없는 것이다.
그뿐이다.
이 모든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주 간단한 수행,
즉 통증에 완전히 무관심해지는 수행이다.
내가 평생 경험했던
무수한 통증도
결국에는 대부분 알아서
사라져버렸다.
갑작스런 상해의 경우
몇분이 걸리기도 하고
만성 통증은 몇달이 걸리기도 했다.
이 기법을 활용해본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경험을 보고했다. 어떤 병은 드디어 사라지기까지 1년넘게 끊임없이 내려놓고, 풀어내고 내맡겨야 했다.
그래서
나는 감각들도
결국에는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억지로 애쓰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병을 변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상적 관찰주제이기 때문에
저항을 내려놓다보면
통증이 있건 없건
신경쓰지 않는 시점이 와서,
어느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통증이 사라졌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는 걸
나는 안다.
통증을 제거하기 위해서
저항을 내려놓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행복한 부작용이다.
통증의 존재여부에
신경쓰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런 시점에 이르면
통증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마음에
이런 힘과 역량이 있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마음에 정말로 힘이 있는지
스스로 시험하고 확인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이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통증으로 고통받는 상태를
경험할 필요가 없다.
통증과 고통은 별개다.
이 점을 자신에게 되풀이해 말해주고
그 기법들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통증과 분리된
나가 있음을 체험할 것이다.
더 이상 통증과
연결되지 않으며
통증을 넘어서 있는
더욱 큰 존재가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삶의 경험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경험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우리의 자세에 있다.
그렇지 않은가?
확실한 방식으로
경험과 함께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방식이다.
영혼이 진화한 사람들은
대단히 비극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이런 상황과 함께 한다.
통증에 대해서
우리가 할수 있는
또 다른 일은
의식의 성장과
움직임 면에서 계속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통증에 영향을 잘 받는 것은
내면에 많은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들을
쟁여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때
영적인 작업과 진화는
종합적인 가치를 지닌다.
전에는 사실
종교계가 아니면
용서의 전체과정에 대해서
별로 들어 볼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사회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예를들어
사회생활을 시작할때
누군가 분노를 드러내면
다른 사람은
그를 그냥 지켜보면 된다.
그가 취해야 할
다음 행동이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그 영향으로 괴로워지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모든 통증과
고통이 생겨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
때문이다.
통증이나 고통에
아주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시적으로
잠깐만 흔들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차이의 원인은 무엇일까?
통증과 고통이
의식의 표면만 뚫을 뿐
그들 존재의 핵심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일에
극도로 흥분해도
그들 내면의 큰 나는
변함없이 고요하게 존재한다.
우리의 존재와
경험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큰나는
전혀 어지럽혀지지 않으며
경험이 작은 나를
관통하게 해준다.
감정적인 갈등이든
다른 무엇이든
혼란이 몇시간 동안 지속돼도
내면의 큰 나는
이 혼란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 점이 바로
우리의 큰 나와
경험의 차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경험과 동일시하는
습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경험이 이루어지는 장일뿐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이런 진화와 성장이 일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의식지도로 돌아가서 자신이 만성적 통증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이해하면, 통증을 뛰어넘어 통증으로 고통받는 상태에 더 이상 머물지 않을 수 있다.
지도의 아랫부분에는 죄책감(130)의 장이 있다.
오랫동안 과도한 죄책감을 품고 있다 보면,
병이나 사고, 상해, 통증,
고통같은 것들에
쉽사리 영향을 받는다.
또 죄책감에 기초한 세계관으로
죄와 고통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러면
의식속에서는
자기혐오 때문에 자기파괴의 과정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죄책감과 고통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믿음체계를 버려야 한다.
에너지 장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성인이나 위대한 존재들의 장에 근접한 이들은 신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반면 죄책감과 통증, 고통과는 멀어진다.
궁극의 실재를 경험하면서
진취적인 사랑의 문을
통과한다.
기쁨과 황홀경을 통해
위로 올라가
평화의 상태에 다다를수록
사랑이 증가하고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의 신을 숭배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기독교인들도
십자가형에 처해진 신,
십자가형에 처해진 그리스도만을
숭배하는 일을 멈추고
부활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가 전하려던 메시지는
죽음과 죄,
고통의 메시지가 아니다.
근본주의적 물질주의자들은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하나의 몸으로만 보고
아픔과 죄, 죄책감,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그가 전하려던 메시지는
과연 이것이었을까?
그리스도가 죽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신체적인 몸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가르치기 위해였을까?
혹시 그가 전하려던 메시지가 정반대는 아니었을까?
그가 전하려던 메시지는
우리가
무한한 존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생각을 바꾸고
사랑과 고차원적인 의식상태로 나아가,
그가 전하려던 메시지가
부활의 그리스도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고행과 죄책감, 죄의식, 고통이
엄청난 영적 이득을 안겨다 준다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
솔직히 50년 넘게
환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만성적인 통증과 죄책감, 죄의식, 고통으로
나를 찾아왔던 수천명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제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에
가장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만성적인 통증이나 고통이
사람들을 깨우쳐 주거나
사랑이 많은 존재로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괴팍하고 끔찍하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만들어
자기연민의 단계로 이동하게 된다.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거의 자기연민과 비탄에 빠져
자신을 가련한 존재로 여기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거나
더 악화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저항하고
통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을 갖는다.
의식지도 아랫부분은 부정적인 에너지 장을 반영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분노로 가득차 있다.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분노는
어마어마하다.
분노에 갇혀 있으며,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에
자부심마저 느끼는 이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만났던 의사들이며
시도했던 치료법들에 대해 떠벌려대고
이것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며
차갑게 비웃는다.
그러나
용기단계로 올라가면
통증과 함께 하는 방식이 있음을
직시할 힘을 얻는다.
통증과 함께하는 방법은
저항을 내려놓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를 갖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는
무언가를 기꺼이 시도해볼
의지가 있는가?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통증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고
통증과 거리를 둘 용기가 있는가?
낮은 에너지 장들은 전부 고통의 부정적인 상태다. 200위의 에너지 장들은 화살표가 모두 위를 향하고 있다. 위로 올라가 기쁨의 단계로 올라갈수록 고통이 점점 줄어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통증이라는 만성적인 병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통증과 함께하면서도
통증에 대한 저항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을까?
통증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통증과 함께 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통없이
함께하는 능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200미만의
에너지 장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살펴보면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릴때
어떤 감정들이 동반되는지 알 수 있다.
먼저 자기혐오와
희생자라는 감정에 시달리며,
의식속에서는
가망없음이라는
파괴적인 작용이 일어난다.
통증에 대해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마음의 본질적인 힘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경험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속에 품은 것들이다.
예를들어
"내 병은 가망이 없어"라고 말하면
실제로 이 병은 가망이 없어지고
치료에도 저항을 보인다.
무감정의 상태에서 슬픔의 단계로 올라가면
상실감이나 낙담과 함께 후회의 감정상태에
놓인다.
하지만
이것들은 단지
인간적인 감정에 불과하다.
이런 감정들이 생긴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냥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이해를 하면 이런 감정들은 해결되기 마련이다.
엄지손가락이 잘려나갔을때 나도 이런 감정들을 전부 경험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응징세력같은 것에 공격이나 처벌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통증이 극심해서 가망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엄지손가락을 다시 붙일 수 없다는 생각에 절망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처럼 슬픔과 비탄에 빠졌다. 이런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통증과 고통이 계속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일었다.
한편 이 상처와 장애, 통증, 고통, 수술 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저항하는 자신이 느껴지기도 했다. 삶에, 운명에,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
자부심단계로 이동하면서
이런 상황에 대해
무언가를 하게 되었고
용기단계로 올라가서는
내가 알던 기법들이
이런 상황에서 효과가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후
자발성의 단계에서는
이 기법들을 이용해
저항을 내려놓고
마침내 수용의 단계로 올라가
통증이 있어도 혹은 없어도 좋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중립은 흥미로운 에너지 장이다. 이 장에서는 어느쪽이든 상관없다고 여기게 된다.
통증에 대한 저항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에
통증의 존재여부에도
신경쓰지 않는다.
용서의 자발적인 의지가 일어나고
궁극적으로는
연민의 장으로 들어가고 싶은 바람도
생겨난다.
분노나 자기연민, 두려움, 자부심,
타인이나 자신에 대한 비난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조건과 원형질적인 경험을
수용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사랑의 에너지 장은 물론이고
기쁨의 에너지 장으로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내 경험을 다시 이야기해보자. 누군가의 경험을 들으면 인간의 의식에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확인할수 있다.
나는 통증이 느껴질 때
나보다 위대한 힘에게
부탁했다.
통증에 순응하면서
이 힘에게 나의 통증을
계속 내맡겼다.
응급실에 가서도
의사들에게
마취제나 진통제는
어떤 것도 쓰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의사는 통증을 어떻게 다룰지 몰라 약간 당황스러워 했다. "제 나름대로 방법이 있어요'라고 말해주자 그는 통증을 다룰 방법이 내게 있다고 느꼈는지 마음을 놓는 것 같았다.
나는
내면으로 들어가
통증과 거리를 두고
저항을 내려놓았다.
내가 이해하는 신,
즉 나의 큰나에게 부탁했다.
힘이 제한되어 있는
개인적인 나보다
더욱 큰 모종의 에너지 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료가 이루어지는 내내
이 신에게
나를 끊임없이 내맡겼다.
버팀목들을
전부 빼버린 상태에서
참기 어려운 통증과
고통에 짓눌리는 이런 시간은
이미 믿고 있던 것을
실험해보기 좋은 때였다.
성장을 위한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이렇게 통증에 순응하면서
저항을 내려놓자,
내 몸에서 벗어나
내면의 깊은 평화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갑자기 들었다.
믿기지 않는 고요의 상태,
내면의 절묘한 평정과
기쁨의 상태였다.
나의 개인적인 자아가 아닌
어떤 것이
경험과 통증을 다스려주고 있는게
느껴졌다.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릴 때
우리가 익혀 실천해야 할 일은
신이든 천사든
자신이 믿는 존재에게
통증을 다스려 달라고
내맡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개인적인 자아보다
더욱 큰 어떤 존재가
통증을 다스려주는 것을 체험한다.
나도 이런 체험을 했다. 어떤 힘이 들어와 나를 대신해 통증을 다스려주었다.
우리는 이것을
"위대한 에너지"라고
부른다.
이 에너지의 존재도
입증이 가능하다.
어쨌든 앞에서 말한대로 나는 "신이시여 저는 이 통증을 다스릴 수 없나이다. 저를 위해 이 통증을 다스려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나의 짐을 내맡겼다. 우주속의 위대한 에너지가 나를 대신해 통증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기이하게 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이해 가능한 차원에서 이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540의 단계에서는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하며
뇌에서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미취제에서 나오는
신경화학물질도
엔도르핀이다.
이 경험덕분에
나는 나의 개인적인 자아가
전혀 관여를 하지 않아도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자동으로 통증을 다스려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증이 심해질수록
내 안의 에너지 장은
엔도르핀의 분비를 통해
신체적인 차원에서
스스로 드러냈다.
그리고
이 장의 힘이
알아서 통증을 다루어 주었다.
통증과 고통이
완전히 모두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 무한한 평화와
고요가 깃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노력을
이런 방향으로 증대시킬 수 있을까?
물론
영적인 작업을 하면 되지만,
용서같은 모든 작업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
그사이에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침술이나 최면같은
보조 작업들이
통증완화에 영향을 미칠까?
침술은
통증의 완화에
대단히 효과적일 수 있다.
모든 형태의 병과 통증, 고통은 몸과 마음, 영혼과 연관이 있다. 영적인 차원에서 이것들을 다루는 방법은 앞에서 설명을 마쳤고, 그 전에는 마음을 통해 의식의 차원에서 다루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신체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법도 동시에 알아야 한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놓고 보면 침술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약 25년간 십이지장궤양을 앓았는데 난치성이라 치료가 쉽지 않았다. 치료법이란 치료법은 다 써보았지만 곧 위부분 절제술과 회복을 위한 위장관수술을 받아야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때 나는 침을 맞았다. 그런데 침을 세번째 맞았을때 통증과 고통이 사라져버렸다. 검사결과 만성적인 십이지장궤양도 치유가 되어 있었다. 나중에 재발되지도 않았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이후 난치성의 만성적 질환에는 침을 맞아보는 것도 좋다고 제안하게 되었다.
진통제에는 두가지 부작용이 있다.
첫째는
진통제가 마법같은 단기적 해결책이기 때문에
의식의 성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의식에서 나오는 진정한 힘을
알약에 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약에 자신의 힘을 맡겨버리면 개
인적인 성장은 멈춰버린다.
두번째 부작용은
진정제나 진통제에 점진적으로 의존하면
내성이 생겨서 문제가 처음의 상태보다
더욱 심각하게 악화될수 있다는 점이다.
최면도 유용한 기법이다.
대체의학 분야에서는 침술은 물론이고
최면에도 요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최면 가운데서도
가장 유용한 형태가 자기최면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
최면에 들기보다
스스로 최면에 드는 법을 익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식의 진보와
관련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최면상태를 이용해
앞에서 설명한 것들을 익히면 된다.
최면상태는 사실 암시에 잘 감응하는 상태일뿐이다.
깊이 이완된 상태로 들어가 위에서
제시한 방법들이
진실임을 실험하고 체험해보면
더욱 빠르게 익힐 수 있다.
나와 타인들의 경험을 놓고 볼때,
자기최면의 가치는
다른 방식으로는 다다르기 힘든
집중상태로 의식을 끌어다 준다는데 있다.
암시에 잘 걸리면
보통의 정신싱태로는
다다르기 힘든
집중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병이든
만성적인 신체적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간단한 기법을 활용할 수 있다.
온갖 형태의 믿음과 의미들을
연상시킬 수 있으므로
최면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피암시성이 높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이완과
집중력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서
서서히 이완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죽 이어져 있는 열개의 계단을 내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첫번째 계단이라고 말하고
이제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다음으로
두번째 계단이라 말하고
깊은 이완상태로 들어간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이 경험에 발을 들여놓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얼마동안 머리의 모든 근육들을 이완시킨다.
이렇게 하다보면
얼굴에서는 아픔이
턱근육에서는 낮동안에 경험했던 긴장이
느껴질 것이다.
뺨도 실제 얼얼할 것같다.
뺨을 찔러보면
이 느낌이 실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 이렇게 얼얼한 것일까?
참았던 느낌이 만들어낸
만성적인 긴장때문이다.
몇분간
머리를 이완시키고 나서
세번째 계단이라고 말한 후
목을 이완시킨다.
목과 어깨 윗부분의 힘을
전부 빼는 것이다.
이제
네번째 계단이라고 말한 후
등과 흉부근육을 이완시킨다.
그러고는
다섯번째 계단이라고 말한 후
가장 큰 근육에서부터
가장 작은 근육에 이르기까지
어깨, 팔 윗부분과 아랫부분, 손, 손가락 순으로
서서히 이완을 계속한다.
여섯번째 계단이라고 말한 후에는
흉부와 몸통을 이완시키고
일곱번째 계단에서는
배 아랫부분으로 옮겨가
그 곳에 쌓아두었던 모든 긴장을 풀어버린다.
여덟번째 계단에서는
허리와 엉덩이 부분을 깊이 이완시키고,
아홉번째 계단에서는
다리를 따라 내려가면서 깊이 이완시키고
열번째 계단에서는
발을 이완시킨다.
이제 나는 열번째 계단에 있다라고 말하고,
깊은 이완상태에서
모든 저항을 내려놓는다.
놀랍게도 아무리 완벽하게 이완한 것 같아도
훨씬 깊은 또 다른 차원의 긴장이
존재함을 발견할 것이다.
점진적으로
더욱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 이완을 해도
깨어있는 동안에는
평생토록 완전하게 이완한다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제 깊은 이완상태에서
깨닫고 싶은 것을
자신에게 말하고,
이것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린다.
통증과 고통은 별개라는
생각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통증에 저항하지 않으면
통증으로 인한
고통같은 것도 없다.
깊은 이완상태에서 이제 만성적인 통증을 다루는 법에 대해 앞에서 설명한 내용으로 돌아간다.
통증은 어디에나 있음을
이 통증에 대한 저항을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음을
알아차린다.
문을 열고
통증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는다.
그래도
큰나는
통증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자신을 향한 사랑과 인간으로서
자신이 지닌 본질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연민의 단계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500에서 540에 이르는
에너지 단계에서는
사랑이 생겨난다.
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에게 웃음을 보낼 줄 안다면
사랑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또
유머의 고차원적인
에너지 장도 있다.
유머에
치유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웃음과 유머를 선택해서
사랑이 가득하고
긍정적인 500이상의 에너지 장에
자신을 두면
웃음과 유머의 본질 덕분에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불행히도
웃어넘길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고
경험과 본래의 큰 나를
별개의 다른 존재로 받아들인다.
경험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도 않고
경험에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더이상
경험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며
경험과 싸우거나
저항하지도 않는다.
중립과 자발성의 단계를 지나
수용의 단계에 이르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통에
저항하거나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낮은 에너지 장에 떨어지고
의식속에서는
구속의 과정이 일어난다.
통증과 고통에 저항하는 한,
화를 내고 이를 악물며 몸부림치는 한,
억지로 의지력을 발휘하려고 애쓰는 한
이것에 더욱 깊이 휘말려 들어간다.
마치
늪처럼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칠수록
더욱 깊이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 고차원적인 에너지 단계로 올라가면
이런 구속에서 벗어나
힘을 얻는다.
문제를 직시하고
무언가 할 수 있는 용기덕분에
힘을 얻는다.
자발성은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는 장으로 올라가
기꺼이 용서하고 사랑하며
연민의 마음을 품게 해준다.
몸과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의 동일시를
진정으로 넘어서면
자신이 몸이 아닌
어떤 것임을 자각한다.
저항을 완전히 내려놓아서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게 되는 상태에서는
다른 장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통증의 경우에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
통증이 있다는 인식이나 기억, 생각이
하루 중 몇초간만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다.
내말이 진실임을 보여주는 예로 앞에서 엄지손가락 이야기를 했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을 때도 하루중 단 몇초 동안만 그 통증이 느껴졌다. 약 한시간 뒤 문득 엄지손가락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오 엄지손가락이 존재한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네"
이런 일은 하루 중 몇번씩 일어날 수도 있다. 24시간 동안, 사람들이 괴로울 것이라고 말한 고통을 내가 경험한 시간은 오전에는 5초에서 10초, 오후에는 몇초에 불과했다.
몇달간 지속된
이 경험에서 느낀 고통의 총량은
아마 30초도 안될 것이다.
이 내려놓기 기법은
누구나 실천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 기법의 실천을 통해
큰나의 전모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멋진 음악을 듣는 것도
통증을 포함한
여러가지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음악자체가
두뇌속에서 엔도르핀의 분비를
돕기 때문이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치유효과를 불러온다는 것은
히포크라테스 시대부터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인류의 스승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께 깊은 감사와 존경, 사랑을 바칩니다
통증이 있어도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다?
감사합니다_()_
몸은 암에 걸려 죽음 직전에 있어도
마음은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암치유의 핵심과제입니다 ㅎㅎㅎ
통증에 대해서 우리가 할수 있는 또 다른 일은 의식의 성장과 움직임 면에서 계속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통증에 영향을 잘 받는 것은 내면에 많은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들을 쟁여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멋진 음악을 듣는 것도 통증을 포함한 여러가지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음악자체가 두뇌속에서 엔도르핀의 분비를 돕기 때문이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치유효과를 불러온다는 것은 히포크라테스 시대부터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감사합니다. 통증때문에 힘든데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놓아버림 방법 쪽지로 보낼께요 ㅎㅎㅎ
이장에서는 급성통증과 만성적인 통증을 다루고 더욱 중요하게는 이 통증과 함께 하는 법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리가 이야기할 문제는 두가지다. 먼저 증상들을 다루는 구체적인 방법과 최면과 침술같은 방법들이 통증의 완화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의식의 단계들과 이 단계들이 통증의 경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를 위해 의식지도를 다시 참조할 것이다. 이 지도에 수치로 표현한 에너지 단계들과 이것들의 상대적인 힘, 방향,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감정들과 의식속에서 진행되는 과정, 이런 과정이 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미치는 영향, 신을 믿지 않을때 문제를 푸는 방법이 모두 나타나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