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년도 연대미상 출생지 전북 순창 활약시기 철종(1850~1863)~고종(1863~1907) 장기 <적벽가>, <심청가>, 새타령 더늠 <춘향가>중 ‘이별가’ 소리의 특징 뛰어나게 맑고 고운 ‘천구성’ 소리전승 이날치, 정재근, 김채만, 공창식
박유전은 김세종, 장자백 같은 명창을 배출한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지만 전남 보성의 강산마을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는데 한쪽 눈이 곪아 빠졌기 때문에 ‘일목(一目)명창’ 이라고도 불렸다 한다. 그의 부친은 형을 위해 소리선생까지 물러서 사랑에서 노래를 배우게 하고 박유전을 나무를 해오도록 하였는데, 노래소질은 박유전에게 더 많아서 어깨너머 선생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나무하면서 소리를 연습하곤 했다. 어느날 형이 그 동안 배운 판소리를 선생 앞에서 엉망으로 소리를 하고 있을 때 옆에서 구경하던 박유전은 어려운 부분들을 청산유수로 잘 불러댔고 그때부터 형 대신 박유전이 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그 후 박 명창은 피나는 노력 끝에 전주 대사습에서 장원을 한 후(예전에는 오늘날처럼 심사 위원들이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청중들이 '잘한다', '명창이다' 등의 찬탄을 받을 사람이 명창이 되었다고 한다) 명성을 얻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된다.
중앙으로 진출한 박유전을 판소리를 유난히 좋아했던 흥선대원군의 가장 큰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선달 벼슬을 얻게 되었고 대원군에게 오수경(烏水鏡: 선글라스처럼 검은 안경)과 나귀, 금 토시(추위를 막기 위해 팔뚝에 끼는 것)까지 하사 받았다고 한다. 대원군은 <적벽가>를 특히 즐겨 들었는데, 박유전은 <적벽가>중 새타령을 특히 잘 불러서 대원군이 그 소리를 듣고 감격하여 “네가 강산 제일이로다”라고 찬탄했다고 하며, 이후로 박유전의 소리를 ‘강산제(江山制)’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박유전의 목소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고와서 사람들이 ‘안구성’이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얼굴 보기와는 달리 성품이 단정하고 성실하였기 때문에 대원군 사랑에 드나들던 유생들이 그를 좋아했으며 판소리에 대한 의견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박 명창은 이때 유생들과 나눈 의견을 참고로 동편소리와 서편소리의 맛을 가미한 ‘서편제’를 창시하였는데(박유전의 호를 따서 ‘강산제’라고도 불리며 모흥갑의 ‘동강산제’와 구별됨), 주로 계면조의 아름답고도 슬프면서 정교하고 감칠맛 나는 서편제 소리는 바로 박유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판소리사에서 그가 끼친 업적이 크다.
대원군의 그늘에서 총애를 받던 박유전은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고 그의 소리는 이날치, 정재근, 김채만, 공창식 등에게 이어졌으며, 특히 ‘새타령’은 후기 8명창으로 꼽히는 이날치를 거쳐 근대 5명창으로 꼽히는 이동백에게 전해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