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選擇)
임병식 rbs1144@daum.net
서울 성북동을 생각하면 나도 몰래 자연스럽게 ‘선택(選擇)’이라는 어휘가 떠오른다. 해방 직후 그곳에 거주하던 두 인물 때문인지 모른다. 그 사람은 바로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1904-1978(?)선생과 화가이면서 수필가인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선생이다. 아마도 십 수 년 전에 그곳으로 구경을 간 적이 있는데 그 생각이 나서인지 모른다.
그때 보니 성북동은 예술의 요람 같아 보였다. 상허 선생이 사셨던 수연산방(壽硯山房)을 중심으로 근원선생의 노시산방, 그리고 간송미술관과 길상사가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이 두 분은 이웃에서 산 것 이외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태어난 년도가 똑같이 1904년생이라는 것과 광복이후 해방공간에서 월북한 점, 둘 다 당시 예술가로서 주목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특이하게 아호가 지극히 자기를 낮추고 있는 점도 공통점이다. 이태준선생의 호인 상허는 항상 비어 있다는 뜻대로 겸손을 강조하고 김용준의 근원은 당초에는 원숭이 원(猿)자를 써서 근원인데, 이는 자신을 가리켜 ‘원숭이와 같이 미물에 가깝다’고 해서 지은것이라고 한다. 얼마나 겸손과 겸양을 이름인지 알만하다.
이는 조선말 독립 운동가이며 서예가인 오세창 선생이 자신의 호를 '하찮은 갈대로 차있다'고 '葦滄(위창)으로 한 것이나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정여창선생이 자기를 일러 한갓 좀 벌레에 불과하다며 ‘一蠹(일두)’라고 한 것에 버금간다.
두 분은 한국문학이 자리 잡은 1940년대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상허는 ‘돌다리’등을 통하여 깔끔하고 운치 있는 문장을 선보였는데 여간 표현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물은 아름답게 흘러간다. 흙 속에서 스며 나와 흙 위에 흐르는 물, 그러나 흙물이 아니요 정한 유리그릇에 담긴 듯 진공 같은 물, 그런 물이 풀잎을 스치며 조각돌에 잔물결을 일으키며 푸른 하늘 아래에 즐겁게 노래하며 흘러가고 있다. -물중에서."
얼마나 실감 나는가. 상허는 성북동에 수연산방을 마련하여 마당에다 파초를 가꾸고 살았다. 그의 집은 고향 철원에서 전통가옥을 옮겨온 것이다. 선생의 집에는 항상 문인들이 붐볐다. 주로 구인회(九人會) 회원이 모여 들었는데 거명을 하면 김기림, 정지용, 이효석, 이상, 박태원등 역량이 있는 작가들이었다.
한편, 근원은 화가이면서도 문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 우수한 수필작품도 많이 남겼는데 그의 글은 평단에서 ‘한국수필의 백미’라는 말을 듣는다. 글 속에 동서고금의 사상과 철학이 녹아들어 진정한 수필 미학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당시에 문학잡지 '문장'에다 표지화도 많이 그렸다.
선생은 동경미술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서울대미대 초대학장이 되었다. 당초에는 서양화를 그렸으나 나중에는 필법을 바꾸어 문인화를 그렸다. 근원은 자기가 거주한 집을 노시산방(老柿山房)이라 불렀다. 마당에 늙은 감나무 서있는 것을 보고 지인이 지어준 것이다.
"(...)아뭏든 나는 내 변변치 않은 이 모옥(茅屋)을 노시산방이라 불러 오는 만큼 뜰 앞에 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다."
그러고 보면 집 이름도 두 사람이 유사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닮은꼴은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에 월북을 한 점이 아닌가 한다. 해방직후 어느 날 상허는 살던 집을 정리하고서 가족을 이끌고 북으로 넘어갔다. 평소 좌익사상에 물들어 있었는지는 모르나 명성 높은 작가가 북쪽을 선택한 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무엇을 더 바라고 원했던 것일까.
궁금증이 이는데, 하나 그것은 어렴풋하나마 단서가 될 만한 증언이 있다. 서정범수필가께서 6.25전쟁이전에 황해도 해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를 만났다는 것이다.
친분이 있는 사람 집에서 그를 만나 북쪽에 온 이유를 물으니, 러시아를 갈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해서 오게 되었다고 하더란다.
그때 만난 시기가 6.25전쟁이 터진 3일 후로 인민해방군 종군작가로 취재차 해주에 내려와 평양으로 올라가던 길에 만났다. 그때 보니 그는 얼굴은 단아했으나 무척 수척해 보였고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여 주민 사기가 드높아 있던 때인데도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로 미루어 그는 사상에 깊이 물든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한편, 그의 처지를 전하기를 공장의 선전인쇄물 교정을 보다가 말년에는 땅에 파묻힌 쇳조각을 줍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다른 말도 전해지는데 북한을 다녀온 소설가 황석영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64년 가까스로 복직되어서 창작실에 배치되었다고 한다.그의 작품은 남한에서 1988년 7월 19일 복권되었다.
알려지기로는 근원의 처지도 별반 다름이 없다. 북한에서 미술교수로 활동하다가 숙청이 되어 말년에는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나는 1988년 올림픽 이후 북한인사와 그들의 작품이 해금되었을 때,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근원작품을 본 적이 있다. 북한작가의 서화작품을 팔고 있었는데, 수묵화에 한글로 ‘근원 김용준’이라고 적혀있었다. 눈으로 슬쩍 보고 지나쳤지만 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한국에 그대로 눌러 살았으면 크게 대우를 받았을 텐데, 그의 후반생이 비극으로 끝난 것이 안타깝다. 그러기는 상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그의 명성이 자자한데, 한국에 남아서 후진을 양성하고 창작활동에 매진했다면 얼마나 대단한 작가가 되었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살아가면서 기로에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된다. 그들이 젊은 시절에 예술 지향의 열정과 순수를 지키고자 했던 것을 돌아볼 때 얼마나 잘못한 것인가. 자유가 없는 세상에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여 예술을 꽃피울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닌가. 그것을 생각하면 인생 막바지에 판단을 잘못하여 그릇된 선택을 한 것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2023)
첫댓글 상허 이태준과 근원 김용준의 월북에 대한 선생님의 안타까운 마음에 편승해 봅니다 그분들의 월북 동기가 순전히 사상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허는 월북 후 러시아를 방문했으니 한 가닥 꿈은 이룬 셈인지도 모르겠어요 문득 로버트 푸르스트의 "가지 않은 길' 이 떠오릅니다 인생은 선택의 갈림길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어느 한 길을 택하여 걸어가야 하니 아마도 그걸 운명이라고 부르는가 싶습니다 선택은 또 다른 포기가 아닐는지요
1940년대 미술과 문학가로 크게 주목받은 두 사람이 같은시기에 월북한 것은 우리문단의 큰 손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허는 우리소설을 완성했다는 말을 듣고 있었고, 근원역시 화가이면서 충중한 수필가였는데 큰 대들보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북에서 말년에는 비참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데 왜 그런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곳을 돌아보면 한시기 문예부흥을 일으킨 장소라는 점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수필과 비평 2023년 6월호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