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작품의 얼굴이요, 글에 대한 첫인상이다. o 글의 제목은 글 전체의 내용과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요체이다. o 독자에게 흥미를 주고, 재미있는, 그리고 인상 깊은, 참신한 제목을 써라. o 난삽한 제목, 흔하거나 평범한 제목, 어디에서 본 듯한 제목은 과감하게 버려라. o 선동적인 제목, 너무 주제가 드러나는 제목은 피하라. o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상적, 구체적인 제목을 o 독창적이며 기발한 제목을 o 가급적 쉬운 제목을 |
1. 표제 달기의 예 - 옛날부터 신중을 기하였다.
○ 소설의 표제, Alexandre Dumas Pere(1803-1870)의 경우 : 『몽테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1845)의 일화를 보자.
이 소설이 나오기 3년 전인 1842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망명중이던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때, 뒤마는 제롬의 아들과 함께 배를 타고 엘바섬에 갔다가 오는 길에 괴상한 바위섬을 목격한다. 뒤마는 뱃사람에게 섬 이름을 묻게 된다. ‘몽테크리스토 섬’이라고 듣게 되고, 지금은 섬에 사람이 살지 않지만 13세기에는 승원(僧院)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당시 승원에는 수사들이 많았는데, 그만 터키군의 침공으로 모두 달아났고, 그들이 도망가면서 섬 어딘가 보물을 감추어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
뒤마는 그 섬 이름의 어감이 좋을 뿐더러, 재미있는 전설까지 전해져 와 제롬에게 함께 여행한 기념으로 ‘몽테크리스토 섬’이란 제목으로 소설을 꼭 쓰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그후 ‘섬’ 대신 ‘백작’ 을 붙이게 된 것.
이리하여 소설이 출간되자, 파리에는 새로운 유행어가 생겨났다. 즉 이 소설의 제명인 ‘몽테크리스토’란 말이 어감이 좋다하여 파리 시민들은 무엇이든 마음에 들고 좋은 것이면, 다 이 ‘몽테크리스토’란 대명사를 썼다고 한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아도 ‘아, 몽테크리스토!’라고 하고, 큰 황소를 보아도 ‘아, 몽테크리스토!’ 하고 감격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 Shakespeare의 『Hamlet』의 일화 : 햄이 든 옴렛
어느 날, 음식점에서 ‘햄’이 든 ‘옴렛’을 먹게 되었단다. 그러다가 햄과 옴렛을 붙여서 말을 만들어보니 ‘햄릿’이 되었다는 것.
2. 표제(標題)는 글의 얼굴이다.
○ 표제는 내가 쓴 한 편의 글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표제 붙이기는 시의 형식, 유형, 내용과 연루되어 암시하고 보충하며, 비유적 텐션이나 이미지, 상징, 반전 효과, 화자의 설정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인다.
○ 대개 문학작품에서의 제목은 글감의 소재나 제재가 제목으로 붙여지는 경우가 가장 많고, 비유, 이미지, 주제, 상징, 환유(제유), 역설, 반어 등의 순으로 나타난다.
3. 개성 없는 글, 내용이 없는 글이 상투적인 제목을 낳게 한다.
○ <가을유감(有感)>, <눈 오는 날의 단상(斷想)>, <고독의 독백(獨白)>이나 혹은 <실제(失題)>, <무제(無題)>, 같은 제목을 쓰는 경우,
○ 이런 제목의 글은 대다수가 내용이 빈약하고, 추상적, 피상적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제목은 뭔가 붙여야 하겠고, 궁여지책으로 이런 제목을 붙이게 된다. 글 내용 자체가 ‘감(感)’이고, ‘상(想)’이고, ‘독백’인데, 왜 설명하고 사족을 붙이려는가?
4. 아름답고 예쁘고, 장식적이고 형식적인 표제, 혹은 주제를 넣게 되면 작품의 맛을 반감시킨다.
○ <그리운 바다>, <내 사랑 승봉도>, <고독의 메아리>, <둥지의 선율>, <자연의 향기>, <나무의 노래> <세월호 참사> 등과 같은 제목을 쓰는 경우,
○ 아름답고 곱고, 예쁜 제목을 붙이는 것은 마치 짙은 화장, 요란한 옷으로 치장하는 것과 같다. 또 막연하게 장식적 수식어를 쓰거나 형식적으로 주제를 넣어 쓰게 되면 환기력이 반감된다. 시나 수필의 경우 제목에서 주제가 드러나면 호기심이 사라진다. 가령 ‘어머니의 사랑’, ‘담쟁이의 그리움’보다는 ‘어머니’, ‘담쟁이’라고 붙이는 것이 좋다.
○ 예쁘고 장식적인, 그리고 뻔히 주제가 드러나는 표제는 노랫말의 제목에서 볼 수 있다. 그 점이 문학작품의 제목과 다르다. 또한 동시, 동화제목의 경우 동심천사주의에 함몰되어 예쁘고, 아름답고, 착하고, 귀여운 표제를 붙이려는 경우도 3,40년대의 발상이다.
5. 표제(標題)는 새로움, 파격, 낯설음으로 꿀벌을 유혹하듯 호기심을 끌도록 해야 한다.
○ 가급적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이 없는 제목을 붙여라. 어디에서 들었던 제목이라면, 벌써 참신한 맛을 잃고 진부해진다. 신선감, 생동감 있는 제목을 붙여라.
○ 그러니까 제목은 시나 수필의 성패와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독자들은 제목을 보고 소설을 선택하고, 작품을 해석하며, 또 제목을 통해 시(작품)의 맛을 만끽한다. 그러니 제목도 남다르게 새롭고 신선한 맛이 있어야 한다. 제목은 곧 시의 내용과 독자의 상상력을 밀고 당기는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수명통장
이생진
공원 벤치에 앉아 남몰래 통장을 꺼내본다
몇 달 치 생활비가 남았나 하고
그런데 내가 얼마나 더 살지 그것을 볼 수 없어 갑갑하다
내 수명과 내 지출이 맞아떨어지는 그런 통장 하나더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죽은 뒤에도 몇 푼이 남아있으면
통장을 습득한 사람도 실망하지 않을 텐데 하고
웃는다 (2012.1.1)
○ <어느 노생물학자의 주례사>(이가림), <등이 말을 하면>(윤연옥), <바람의 그림자>(정현종), <긍정적인 밥> (함민복), <달의 눈물>(함민복), <어느 대나무의 고백>(복효근), <고향을 염(殮)하는 시간>, <꿈꾸는 역>(황외순),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유영선), <쌀눈, 따뜻한 모서리>(유영선), <풍경 재봉사>(김민철), <그늘들의 초상>(최호빈), <고목나무의 리모델링>(신순자), <여기는 구름세탁소에요>(심인경) 등의 제목은 비교적 참신한 표제들이다
○ 이들 제목들은 시적 언어의 개방성을 노린 것인데, 작품 전체를 새롭고 참신하게 만든다. <슬픔이 그리움에게>(정호승), <꿈꾸는 역>(황외순)과 같은 제목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상화하고 있다는 점. 혹은 의인화하여 생명성을 부여하는 낯선 제목이라는 점에서 시적 새로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6. 제목 자체를 오브제(objet) 시어로 새로 조합하여 언어의 개방성을 최대한 살려 효과를 보는 경우도 많다.
얼굴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 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 위의 <얼굴반찬>은 ‘얼굴’과 ‘반찬’이라는 시어가 결합된 것으로, 제목 자체가 오브제(objet) 시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생경한 오브제 언어의 조합은 원거리 시어의 조합에서 텐션을 유발시키고, 제목에서 신선함을 얻게 된다. <별국>(공광규), <자연산 가수>(김선태), <민들레역>(송찬호), <수명통장>(이생진), <하늘골목>(손택수),<구름의 사춘기>(최문자) 등이 그 예들이다.
7. 설명시, 사물시의 경우 비유체계나 해석적 진술로 이루어지는 경우, 이런 부류의 시들은 시적 대상(사물)이 되는 소재가 제목으로 드러난다.
고드름
박정원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였다
<이하 생략> (《시문학》2006년 4월호)
○ 설명시는 맥로글린(MacLaughlin)은 기술 방식에 따른 유형의 하나인데, 위의 <고드름>처럼 설명시의 형식은 주어+서술어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주어(소재)는 제목, 서술은 본분으로, 주어(소재)에 대한 의미부여, 상상적 비유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많다. 곧 본분은 소재에 대한 시인 자신의 관념으로 어떤 시적 동작이나 형태, 존재, 성질, 작용 등의 뜻을 나타낸다. 그리니까 설명시의 내용은 현실, 일상적 논리, 과학적인 사실에 기초한 설명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 내지 시적 인식을 토대로 한 내용이다.
○ 이러한 설명시 형태의 유치환의 <깃발>이나 김현승의 <눈물>은 제목이 하나의 소재이자 원관념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시적 의미부여로서 본문은 모두 서술어에 해당하는 보조관념식의 시 구조를 이룬다. 정호승의 <갈대> 같은 경우는 제목이 ‘가을 갈대’로 이루어지는 소재이지만, 본문은 ‘개꼬리를 흔드는’ 시각적 이미지에서 ‘개가 음식을 먹는 소리’의 청각적 이미지로, 개의 행위와 비유체계로 구조되어 있다.
○ 묘사시나 체험시의 경우도 대개 선택된 소재가 제목이 되는데, 제목에서 소재가 한 번 쓰였을 경우, 가급적 본분에서는 등장하지 않게 하는 것이 명징한 시를 얻을 수 있다.
○ 해석적 진술의 대상이 되는 사물시의 경우 사물에 몰입하게 됨으로써, 소재가 제목으로 드러난다.
8. T.S.Eliot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시인들은 ‘객관적 상관물’이 표제(제목)으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보조관념이 시의 제목이 되기도 한다.
○ 시를 쓸 때, ‘객관적상관물’을 활용하라. 객관적 상관물은 시의 구체성을 확보해주고 비유적 이미지 체계를 이루면서 시의 내용과 제목을 매우 유기적으로 구조화시킬 수 있다. ○ 객관적 상관물(客觀的相關物, obejctive correlative)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일상생활의 시적 감성을 그대로 직설적으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정과 직접 관계가 없는 어떤 비유, 이미지, 상징, 사건을 들어 구현시키는 것이다.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소주’는 서민의 삶을 달래주던 약술. 소주병은 속을 계속 비워나간다(자식에게). 급기야 소진한 빈 병이 되어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니”는 존재가 되고, 그런 소주병은 3연에서 아버지가 된다. 즉 바람이 세게 불던 밤, 시인은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에서 아버지의 흐느낌을 듣는 것이다. 권위의 상징이었던 아버지, 하지만 실직한 아버지의 가련한 처지, 소외감을 시인은 소주병이란 객관적상관물을 통해 정서를 드러낸다.
○ 김광균의 <雪夜>도 객관적상관물로 제목이 채택된 것이다. 시에서 밤눈을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자취', '머언 곳의 여인의 옷벗는 소리',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 등으로 묘파하고 있다. 이는 사물로서의 '눈〔雪〕'에 인간의 생활 경험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곧 시는 '눈'을 통하여 화자의 그리움과 슬픔의 정조를 서서히 드러내어 정서를 환기시켜 나간다.
9. 반전이나 역설, 반어법 등을 구사하여 시적 내용이 환기하는 힘에서 최대한 효과를 볼 수도 있다.
○ 제목도 하나의 형상화 장치로 이루어진다. 가령 본문과 제목 사이 비유적 장치나 혹은상상적 거리를 두어 긴장의 묘미를 살린다든가, 표현 효과를 살리기 위해 그 어떤 장치로서 제목을 생각할 수 있다.
단단한 고요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맷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 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 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 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 <부드러운 칼>(정호승), <단단한 고요>(김선우) 등은 역설 ․ 반어에 의한 시 제목에 해당한다.
10. 시의 본문(내용)이 추상, 관념으로 흐를 때에는 구체적인 제목을, 반대로 시의 본문이 구상적, 구체적으로 흐를 때에는 추상(관념)적인 제목을 붙이는 것이 좋다.
露宿
안도현
양말 한 켤레를 빨아
빨랫줄에 널었다 양명한 날이다
빨랫줄은 두말없이 양발을 반으로 접었다
쭉쭉 빨아 먹어도 좋을 것을
허기진 바람이 아, 하고 입을 벌려
양말 끝으로 똑똑 듣는 젖을 받아먹었다
양말 속 젖은 허공 한 켤레가
발름발름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바지랑대 끝에 앉아있던 구름이
양말 속에 발목을 집어넣어보겠다고 했다
구름이 무슨 발목이 있느냐고 꾸짖었더니
원래 양말은 구름이 신던 것이라고 했다
아아, 그동안 구름의 양말이나 빌려 신고 다니던 나는
차마 허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짝사랑
이윤학
둥근 소나무 도마 위에 꽂혀 있는 칼
두툼한 도마에게도 입이 있었다.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 <부분>
○ 위의 시에서처럼 <노숙>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양말’이라는 사물, 여기에서 시적 텐션의 미학이 생겨나고, 의인적 상상에서 재미있는 시가 만들어진다.
○ 시의 내용이 비교적 추상적일 때는 구체적인 제목으로, 시의 내용이 구체적일 때는 비교적 추상적인 제목으로, 붙여주면 좋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박제천), 제목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시의 격조와 긴장을 높이는데 효과적이라면서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 방법, 성적 호기심이나 관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선정적인 제목을 다는 경우(이지엽)도 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표제(제목)의 중요성 다시금 새겨 봅니다.^^
꼭꼭 씹어서 소화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공부하는 인천문협'이 되어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식이 짧아서 그런지 '해석적 진술의 대상이 되는 사물시의 경우 사물에 몰입하게 됨으로써, 소재가 제목으로 드러난다.'는 부분에서 질문하게 됩니다. 그동안 '해석적 진술'을 시적 진술의 세 가지 유형(독백적 진술, 권유적 진술, 해석적 진술) 중 그 시점이 관조적이거나 풍자적 해석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오규원, 현대시작법). 그러나 '사물시'라 함은 시적 묘사에서 '사물에 대한 화자의 판단이 중지된', '관념이 배제되고 사물만으로 이루어진 시'(김준오, 시론)로 알았습니다. 이에 대한 보충설명으로 바르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오규원(서울예전 교수)과 김준오(부산대 교수)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시론에 관한한 이 두 분의 이론서가 단연 압권이지요. 둘 다 '시문학론'강좌에서 교재로 쓴 적이 있습니다.
사물시와 관념시는 대척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사물시가 사물 중심 지향이라고 한다면, 관념시는 자아 중심 지향이라고 보면 될 것 같구요. 그래서 사물시가 해석적 진술의 관조와 연루된다면, 관념시는 독백적진술의 내면의식(감정)과 연루된다고 볼 수 있을듯, 그런데 여기에서 사물시가 관조적으로 화자의 판단이 중지된 것으로 보는 것은 후설(Husserl)의 현상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에요.
후설의 '현상학적 잔여'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대상을 idea적으로 보는 방식과 transzendental(선험적, 초탈적)으로 보는 방식이 있어요. 전자의 경우에서는 세계 존재(대상)는 자연적으로 보는 방식에 있어서 감성적 직관과 과학적 인식, 보편 정립의 작용.- 그러니까 의식의 작용을 거치는 '현상학적 판단'에 의해 대상(사물)과 교섭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후자의 것은 감성적 직관이며, 보편 정립의 작용을 작용시키지 않는 곧 '에포케'(epoche,현상학적 판단중지) 시켰을 때, 세계의 존재는 존재 성격을 탈취당하여 현상학적 잔여로 남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주관(의식)과의 상관관계를 벗어나 있는,
'잔여(residuum)'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현상학에서는 이를 '순수즉물성', '초월적 대상'이라고 하고, 이는 Hegel의 '즉자'(an sich), Sartre의 '즉자'(en-soi) , Heidegger의 '사물존재'(Vorhandensein)' 의 개념과 일맥상통하지요. 쉽게 말하면 '관조의 세계'와 연결됩니다. 바로 사물시는 "있는 바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관념시는 대자적 의식을 거치는, 주관이 개입되는, 관념화된 세계, 곧 "무엇에 대하여 있는 존재" 를 드러내지요. 물론 여기에서도 세심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대척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물시나 관념시 모두 세계(대상)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인이 선택한 소재가 제목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관념시의 경우는 사물인식에서 시인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관념이 우위가 되어 내용은 물론 제목까지도 관념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경우, 그러니까 관념시는 대개 독백적 진술로 이루어진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종래 우리시가 관념시 일변도였다면, 현대시에서 사물시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나아가 시가 관념의 표백이나 감정의 설사가 아닌, 존재하는 것에 대한 깊은 사유나 상상에 초점을 둔다면 사물시로의 흐름은 바람직한 것이지요.
한가한 시간, 놀러왔다가 착실하게 공부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유익한 내용 잘 습득하였습니다
공부 잘하고 갑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단지 '진술'이라는 용어 때문에 질문한 거예요. 시적 진술과 묘사는 대척관계에 있으므로 묘사 중심의 '사물시'에 대한 이야기에서 '진술'이라는 용어가 낯설게 느껴져요. 언어의 발화 행위 측면에서의 진술도 '은연중에 행위수행적(오스틴, 현대 문학 문화 비평용어사전)'이고, '시적 진술'이라고 볼 때 아무래도 '언어적 그림'이 아닌 '직설적 설명'이라 생각해서요. 20년대 진술시의 판도를 바꿔놓은 정지용 시인이 사물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로 현대시를 개척했다고 보는 입장인데, 제가 단순한 이론에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닌지, 책꽂이에 쌓아둔 책들의 먼지를 털고 좀더 공부하겠습니다.
아, 네. '진술'과 '묘사'를 나란히 놓고 볼 때 논의상은 대척적으로 변별되겠지만, 넓은 의미로 볼 때는 '묘사'도 진술로 들어간다고 봐야지요. '묘사적 진술'이라는 용어를 봐도 그렇구요.
정지용 연구로 학위 논문을 받으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다 알다시피, 30년대 정지용의 <유리창> <바다>등 같은 시는 낭만적, 관념적 진술이 풍미하던 때(그러니까 노래하고, 읽고 외우던 시풍)에 일대 '보여주는 시'(묘사 중심의 시, 이미지시)를 주창하여 새로운 파격을 주었지요. 시사적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현대시풍과 깊은 관련이 있지요.
참고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 문협 회원의 작품들(아니, 시인 2만명 시대에 대다수 문인들에 해당되는 것이지만)이 대략 다음 네 가지 측면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첫째로, 일부 회원 가운데 시적 감각이 과거에 안주한 낭만, 감정, 관념(추상), 직설에 젖어 있다는 것이지요. 시는 감성을 주조로 하지만, 그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지성(주지성)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고, 그래서 한 방법으로 '객관적상관물'같은 것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 이는 시적 의식의 확대- 비유,낯설기의 새로움, 상상력과 결부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두번째는 또 우리 문협회원 작품들의 상상력에 관한 것입니다.
땅속(지옥)에서 하늘(천당)까지, 탄자니아에서 쓰시마섬까지의 상상 공간의 확대, 육안이나 뇌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심안과 영안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세계까지 파고드는 감성적 촉수가 필요해요. 최근 양진채의 엽편,<구멍>에서의 몰입력, 그속에 한 사나이의 삶이 그려지는 것, 그리고 회원작품란에 소개한 강인봉의 에세이<원두막 풍경>에서 '원두막에 돛대를 달면 천국 하늘로 간다'라는 기막힌 착상의 상상도 모두 시적 발상이라고 생각돼요. 문학의 작품성은 상상력에서 오거든요.
세번째, 내용의 빈약과 표현력 문제입니다.
독자들은 유능한 독자들이고, 나름 인문학적 소양이 깊은 사람들이지요. 문학작품이 필시 작가 나름의 세상살이, 세계 존재에 대한 언어적 해명이고, 형이상적 해석이라 한다면, 작품마다 내용이 새롭고,풍부하고, 상상할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신한 내용을 가지고 정교하고, 치밀하고, 풍부하게 언어를 부려써서 독자들에게 환기력을 주고, 강렬하게 감흥시킬 수 있는 형상화 장치가 필요해요. 자기만이 알 수 있는 두리뭉실하게 표현하거나, 뻔한 내용으로 써 버리면, 독자들은 황당해합니다. 왜 노래 잘 부르는 가수의 호소력, 특징 같은 것 있잖아요.(회장)
네번째로, 시와 수필에서 세련된 어휘의 선택과 명징한 문장력 문제입니다.
어휘력은 평소 독서에서 길러집니다. '일물일어설'을 들지 않더라도 적합하고 효과적인 어휘를 선택해야죠. 그리고 비유를 많이 쓰세요. 최근 젊은 시인들이 산문시 경향을 보이는데, 산문시라도 그 내용은 정서적 상상력이 주조를 이룬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시의 맛을 살려야 합니다. 행과 연을 주기만 하면 시가 되는 줄 알면 큰 일 납니다. 시나 산문 모두 제목과 함께 첫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짧게 끊어쓰세요. 또한 '말하기'가 아니라, '보여주기' 방식인 구상적으로 쓰세요. 절대 설명하려하지 말고, 주제도 암시적으로(회장)
회장님, 온라인 상으로도 강의를 듣고,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토론하며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어 속이 시원합니다 ^_^
와~, 대단하십니다. 과거 문덕수 <문장이론>, 김상태 <문체 이론 분석>, D.W 포케마 <문학이론>... 최상규, 구인환 같은 분의 창작학 이론서가 생각나네요. 본문이나 댓글 모두 값진 글입니다. 한가할 때 다시 한 번 정독하겠습니다.
정정합니다.
김상태 <문체의 이론과 분석>...
문예창작교실의 수혜자 중 1번은 제가 될 거 같습니다.^*^ 본문 구성을 바꿔놓으셔서
읽기에도 편했습니다.^*^ 제 블러그로 공유합니다. 불편하시면 바로 내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틈 날때 마다 읽고 또 읽고 생각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공부 잘 하고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겠습니다.
좋은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참 좋은 출발, 공부 많이 하고 다시 보고싶어 스크랩 합니다 양해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스크랩 괜찮으신지요. 저장해 놓고 정독하려고요. 정성이 담긴 교재 고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저도 스크랩해 갈게요~~ 공부열심히 하겠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싫어하는 시인들이 여럿 보입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글은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