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관한 시모음 33)
11월의 저녁 /송진환
벗들과 오늘은,
피 끓는 이야기들 다 접어두고
하루치의 약봉지 무게나 어지럽게 견주다가
소주 몇 잔에 취해
일찌감치 헤어져 돌아가는 11월의 저녁은 한없이
쓸쓸하다
돌아갈 길이 아직 남았다
벗들도 지금 제 길 따라 흔들리며 가고 있으리, 문득
지난여름 악쓰며 울어대던 매미들 다
어디로 갔나 싶다
우리는 모두 서둘러 집으로 가고 있지만 정작
집은 어디쯤인지 보이지 않는다
낙엽이 툭 발등에 떨어진다
십일월 /동시영
단풍은 계절의 지문
변하고 변하여
변하지 않는 계절
눈물로도 다 울 수 없는 슬픔이 있다고
십일월엔 잎이 새가 된다고
나뭇잎은 본래 나무가 아니었다고
꿈에서 깨어나듯
나무가 잎을 떨구고 있다
십일월 /배선옥
개나리 덤불을 뒤집어쓴 성근 담장아래엔 얇은 잎사귀들마저 몰려와 삭아가느라 늘 하품처럼
지린내가 떠다녔다
어디에도 평화는 없었지만 어디에도 손톱을 세울 다툼 따위도 없는 그 담장아래 땅속 깊숙이 알을 숨긴 암 매미의 눈물이 단번에 바스러져 흩어졌고 해소기침으로 밤을 샌 국화는 그래도 견딜만하다며 노란 웃음을 빚어 마루 끝에 올려놓곤 했다
아침이면 간밤동안 두꺼워진 이슬을 털어내느라 기지개는 더 힘차야 하는 지금 한 발자국 밖에서 세상은 구겨진 신문지마냥 품위를 잃어갔지만 샛노랗게 익을 열매도 한 알 없는 수은행나무 그 울울창창한 적요를 품고 김장배추는 스스로 노랗게 영글어갔다
11월에 기대다 /배연수
가야 하는데
조금 더 가야 하는데
수양버들 나무는
물에 비친 제 모습 들여다보다가
문득 가라앉고
오가는 기척 없어
마스크를 벗고 어딘가 눕고 싶다
생에 늦은 건 없다고
그날이 올 때까지는
여전히 시작이라고 말해준 사람
이 공원은 너무 커서
어디 있는지
자주 다녀가지는 않는지
알 수 없어 아무렇지 않고 싶은 마음
물가에 비친 나무는
유리잔처럼 깨진다
보이는 저 길은 가팔라서
놓고 가야 할 것 투성인데
바람이 오기 전에 떨어지는 잎들
손을 뻗으면 오늘을 쓱 훑고 가는데
더 가지 않아도 되겠다고
이대로 있어도 좋겠다고
주춤하다 부딪친
나무에 기대어
11월 초하루 아침에 /윤보당
무엇인가 모르게 달라보인다
살벌한 북풍 휘몰아치는 상강 아침
한 발 한 발 힘겹게 움직여도
11월 초하루날
왜 그렇게 더디가는지 몰라야
새소리는 얼마나 많은 도량의 축복인지
무지렁이 된 연등 아래
세상의 아침이 춤을 춘다
어떤 때는 부활절 아침처럼
안부 전할 곳 찾아
이곳 저곳 헤매다녔다
황사바람 청정한 이곳까지 달려와
우리의 가슴에 흠집을 낸다
가을비는 지상 가상없이 내려도
바람도 게워내고
물먹은 하루도 게워낸다
어느 누구 마음 쓰지 않아도 말이다
십일월의 뜨락에서 /유영서
스산하게
바람 분다
가랑잎 구르는
길목에
언뜻 스쳐 가는 그림자
걸어온 삶의
애증인가
속내 풀어 놓고
발길 멈춘다
사계의 길목에서
자연도 쉬어가잔다
피한 적 없는
삶 데리고
놀 빛 짙은 산마루에
구름처럼 쉬고 싶다
11월 /신창홍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면 11월입니다
바래진 햇살에 냉기가 드리우고
도시에 내려앉은 하오의 그림자는
해풍이 빠져나간 바다의 저녁처럼
낯선 침묵들이 거리를 서성입니다
가슴이 먼저 시려오면 11월입니다
화석처럼 메마른 플라타너스 잎새가
아스팔트에 쓸려 비명을 지르며 멀어지고
텅 빈 거리에 남겨진 공허가
낙엽으로 부서지는 가슴을 향합니다
마음이 초조해지면 11월입니다
오가는 새들의 날갯짓에
창공의 푸른 멍 자국은 비색으로 번지고
일상으로 흘렸던 작은 쓸쓸함이
눈사람처럼 커지며 마음을 흔듭니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으면 11월입니다
저무는 것들의 드러낼 수 없는 상흔
가야 하는 마음도
보내야 하는 마음도
모두가 견디기 힘든 아픔입니다
11월을 보내며 /靑娥 이세복
깊은 억새 숲의 스산한 소리에도
능선에 앉은 낙조는 요염하다
싱그러움도 찰나에 지듯
꽃향기 코끝을 간지럽히더니
끝없는 계절이 바뀌어도 피고 진다
어스름한 산 아래 홍시가 주렁주렁
주인 인심마저 장독대와 어우러진
후덕한 풍경이다
을씨년스런 찬바람에 몸서리쳐도
자연이 준 선물에 만족하며
별을 세며 꿈을 키우리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조화롭게 흘러가는 아름다운 세상
그 무대에 내가 서 있다.
11월, 숲길에서 /염혜순
단풍 빛이 눈부시게 아름다워도
버려야할 옷이라고
바람 한 번에도 후드득 잎을 떨구며
나무가 말없이 웃었다
숲길에 켜켜이 내려앉은 이파리들은
저마다 다른 빛
자기만의 빛으로 물든다는 건
나름의 삶을 지켜왔다는 것
하나도 같은 잎은 없는 것처럼
한해의 날들도 같은 날은 없었다
그날이 그날 같던 지난날들이
제각각의 빛으로 떨어져 내렸다
폭풍 속 하루도
푸름이 가고 나니 단풍이다
입술조차 말라버린 잎들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길 위에
아직 고운 단풍잎 하나 떨어져 얹힌다
가을 숲이 바람의 손길에 앞섶을 푸는 동안
목련, 감출 것 없는 가지 끝에는
어느새 하얀 솜털에 싸인 꽃눈이 달렸다
11월이 숲을 지날 즈음엔
한해를 살아온 시간들이 낙엽처럼 날리는데
아직 올해가 다 가지 않았다고 속삭이는 소리와
이젠 너무 늦었나 하는 두려움 사이에서
월말에 받아든 얇은 월급봉투처럼
가벼이 팔랑이는 달력이 보인다
오래된 달력 뒤에 새 달력을 걸면
달력에도 꽃눈이 생길까
십일월 /박세현
십일월은 시월이 벗다가 남긴 허물이다
왜 아니겠어,
지다 말다 우두커니 서 있는
은행나무, 그 옆에
바람이 아랫배를 대고 간 초등학교 운동장
공터가 훤해서 혼자 웃었다
지나가던 개가 하늘을 쳐다보다
한 발을 접질리며 제게도 없는
웬 불성(佛性)을 몇 점 흘리기에
얼른 주워 마음에 비벼넣는다
바람 따라 올라갔던 은행잎 몇이
수근거리며 허공을 내려오는 길에
십일월의 모서리를 타고 흐른들
저런들 어떠하리는 아니겠고,
지나간 시월과 십일월이 살 맞대고
웃음과 눈물이 우연히 짝짓는 틈새
늦가을 한때가 수수하게 정리된다
11월의 기린에게 /손택수
옥탑방의 철제 계단은 여전히 삐걱거리고 있는지, 여쭙니다
당신은 그 계단이 모딜리아니의 여인
목덜미를 닮았다고 하였지요
그 수척하고 해쓱한 목 끝의 옥탑방은
남하하는 철새들이 바다를 건너기 전
날개를 쉬어갈 수 있도록 일찌감치 불을 끈다고 하였습니다
싸우기 싫어서 산으로 간 고산족의 후예였을까요
어느 가을은 가지를 다 쳐버린 플라타너스에게
초원의 기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흑만 남은 가지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일어난 수피가 얼룩을 닮았기 때문만도 아니었어요.
저는 기린이 울 줄 모른다고 하였지만
우리에겐 저마다 다른 울음의 형식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사이 저는 위장이 늘어나서 갈수록 목도 점점 굵어져 갑니다
반성도 중독성이 되어 덕지덕지 살이 오르고 있습니다
포도의 낙엽들은 이미 마댓자루 속으로 들어갈 채비를 마치고,
거리마다 등뼈 으스러지는 소리로 탄식하던
몰락의 노래도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사이 지상은 낙엽의 소유권과 실용성을 발견했습니다
낙엽도 쓸모없이 배회할 틈을 잃고 말았습니다
기린이 사는 초원엔 벼락이 드물다고 했던 게 당신이었 던가요
녹슨 철제 계단 밟는 소리가 낙엽 부서지는 소리 같던 거기
치켜올린 목이 사다리로 굳어진 옥탑방, 여쭙니다
철새와 함께 잠을 청하던 가을의 안부를
물방울 하나가 길디긴 물관부를 유성처럼 흘러가던 밤을
11월의 노래 /전태련
한 발을 낙엽 속에 묻은 채
다른 한 발은 겨울로 가는 차가운 강물에 담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쓸쓸한 11월
그래, 11월엔
영혼이 아름다운 그대를 만나고 싶다
맑고 아름다운 영혼이 자신의 짝을 알아보는
영혼이 통하는 그대를 만나보고 싶다
겉모습이 어떻든 영혼의 빛깔이 닮은 사람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도
그 영혼 깊숙이 교감할 수 있는 그대를 만나고 싶다
따뜻하고 깊은 영혼이 또 하나의 따스하고 깊은 영혼을 만나
학의 두 다리처럼 적당한 거리를 가진 채
겨울의 강을 건너가는 11월의 오후,
물안개 피어나는
하얀 눈이 덮인 따뜻한 겨울 숲속으로 들고 싶다
나무의 몸이 가벼워지고
햇살이 투명하게 빛나는 11월엔
따스한 영혼이 닮은 그대를 만나고 싶다
우물, 11월 /박수현
첨벙, 뒤꼍 우물에 두레박을 부린다
이끼 낀 돌팍에 부딪히는 두레박 소리가
이적 저지른 죄들이 늑골을 타고 수직 낙하한다
흑백의 기억이 물방울을 튕기며
동심원을 그리는 그곳
두레박 속엔 노루꼬리 햇살 한 줌과
삭아 잎맥뿐인 상수리 잎새 몇 장뿐
여름은 적도의 스콜처럼 성급했고
지퍼를 목까지 올린 가을은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았다
당도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캐럴은
낯선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겨울은 왜 더 멀리 돌아가서 맞고 싶은 것일까
나는 그저 성글어진 나무 우듬지에 가닿는 새소리를 듣거나
겨울이 데리고 올 이야기의 페이지나 무심하게 넘기며
물끄러미, 달의 뒷면을 비끼는 두레박을 바라보았다
현관 밖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가는 신문지 더미처럼
이제 우물은 가물어서
아무도 두레박을 던지러 오지 않을 것이다
먼 곳으로 가는 새떼들이 하늘 어디쯤을 건너는지
죄지은 듯 십일월의 이마를 짚어본다
내가 신열을 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