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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이미 우리 발이 서 있구나 . . . .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안하여라.
네 성안에 평화가, 네 궁궐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
내 형제들과 벗들을 위하여 나는 이르네.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 우리 하느님의 집을 위하여 너의 행복을 나는 기원하네.
(시편 122(121) 순례의 노래, 다윗)
2019년 2월 23일 (토)
명례성지(신석복 마르꼬 묘), 순교자 박대식 묘 (마산교구)
형제 순교자의 묘 , 이태석 신부 생가 (부산교구)
마산교구 첫 본당이자 순교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고향
‘세상의 소금이 되게 하소서.’
명례성지 (신석복 마르꼬 묘)
< 명례성지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4-3 >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인 명례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
명례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1828년-1866년)가 출생한 곳이며, 오래된 교우촌으로
1897년 영남 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입니다.
명례 본당의 초대 본당신부이자 세 번째 방인사제이며 한국에서
서품된(1896년) 첫 사제인 강성삼 신부의 사목지이며 돌아가신 곳.
성전건물은 2011년 경남 문화재자료 제 526호로 지정되었다.
< 명례 성모승천성당 >
그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마르 9,2-13)
명례성지 신부님께서는 미사중에 오늘의 축일인
성 폴리카르푸스 주교를 특별히 기억하시고 기도하셨다.
성 폴리카르푸스 주교는 요한 사도의 직제자로, 터키 스미르나(현 이즈미르)
정통 교리의 수호자로 여러 이단들과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이교도에 심취해 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체포되어 166년경 화형으로 순교.
총독이 주교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놓아 보내겠노라고 하니
당시 86세의 주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분을 믿고 따른 지가 86년이오. 그 분이 제게 잘못하신 일이 단 한가지도 없었소.
그러니 저를 구원하신 저의 주님을 어떻게 저주할 수 있겠소."
< 명례성지 성당 옆으로 새로이 지어진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 >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는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태어나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낙동강을 건너는 명례 나루터에는 일찍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정착했고,
그들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은 듯합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사하러 갔다 오던 중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밀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 자연채광이 아름다운 성전의 모습과 입구 벽면에 있는 신석복 마르코상 >
대구로 끌려가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
라고 당당히 대답하며 1866년 3월31일 교수형으로 순교.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마산교구장님이 현 명례 성당보다 더 높이 짓지말라는 당부로
땅 아래쪽으로 설계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시는 성지 담당 신부님.
빛이요 소금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온 세상이 저희를 통하여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알고
기쁨으로 서로 희생하고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복자 신석복 마르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진영성당으로 이동하여 신석복 마르코 묘로 ~
< 마산교구 진영성당과 가까운 공원묘지에 안치된 순교 복자 신석복 마르코 묘 >
< 진영성당 성전>
죽어서도 선산에 못 묻히고 남의 문중 산에 평장으로 누워
박대식 빅토리노 묘 (진례성당)
< 박대식 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산30 (책골) >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2년 현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입교한 후 가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8년 무진박해 때 대구와 김해에서 온
포졸들에게 잡혀 조카 박수연과 함께 김해 관아로 압송.
그곳에서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만나 3일간 문초를 받으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지켰고,
대구로 압송되어 감영에서 혹형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는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합니다.
결국 박대식은 1868년 10월 12일 조카와 송 마태오, 박 요셉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 가족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와 선영에 모시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인근의 유씨 문중 산에 평장으로 매장했습니다.
그후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
진례 성당은 매년 후손들과 함께 순교자를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박대식 빅토리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평장이란 ?
부산교구로 이동합니다 ~
죽어서도 나란히
형제 순교자의 묘
< 형제 순교자의 묘 -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272 (배문한 신부 생가) >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배씨(裵氏) 가문의 선산에는 배씨가 아닌
조씨(曹氏) 성을 가진 형제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조석빈(1825-1872년?)과 조석증(1834-1872년?)
형제는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상자를 매고
주로 양반들을 찾아다니면서 천주학 연구와 전교에 앞장.
생곡의 배씨 사랑방에도 자주 들러 유학과 서학의 비교 연구에도 힘썼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포졸들에게 체포.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만 배교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김해읍 왜장대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이들의 시신은 사학죄인이라 하여 문중의 반대로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방치되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의 고 배문한 신부의 3대조인 배정문 공에 의해
집 뒤 언덕 밭에 암장되었으며,
그 후 배문한 신부 본가에서 4대에 걸쳐 조씨 형제의 묘를 보호 · 관리하여 왔습니다.
< 배문한 신부의 생가 >
1997년 부산교구와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배문한 사제사랑 기념사업회에 의해
묘소 주변에 십자가의 길과 묘소 뒤에 대형 돌십자가를 조성.
1998년 8월 형제 순교자 묘 바로 아래에 있는 고 배문한 신부의 생가를 개수하여
순례자들이 쉬었다 갈 수 있게 강당과 방도 마련했습니다.
(배문한 신부는 배정문의 3대손으로 1994년 8월 5일 강원도 삼척시
인근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신자들을 구하고 선종하심)
주님,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살다 가신 이 분들을 기억해 주소서 아멘
문화탐방 이태석 신부 생가 방문 Go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 40)
"정말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곳이다.
내가 부족해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님)
2019. 2월 길손 순례를 마칩니다 ~
길손 3년간의 총경비 잔액 347,320원은 명례성지 복구 헌금으로 보내드렸다.
대구대교구 순례와 제주도 성지 순례만 남기며 지난
3년간의 98곳의 순례길를 마침하며 여기서 잠시 쉼표를 찍습니다 ~
대구대교구는 개별로, 제주도는 6월에 계획 ^^
대구 대교구 성지 순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쌍탑의 고딕 성당
대구대교구의 주교좌성당
계산성당
< 계산성당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10 >
계산성당은 경상도 최초의 본당이며 현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1885년 12월 대구본당이 신설되었고, 초대본당주임으로 김보록(로베르)신부가 임명.
1911년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대구대목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임명되면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어 달구벌 신앙의 요람으로 성장해왔다.
< 대구교구 설정 25주년, 드망즈 주교 부임 25주년 기념비와 십자가 모습 >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는 박해의 여파로 신나무골에 머물다가 대구 박해 이후 죽밭골로 옮겼고,
1891년 대구 교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으로 대구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해 다시 대구로 돌아온 로베르 신부는 대어벌에 임시 성당을 구했고,
이어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 신축을 시작하였다.
<초대 본당주임 김보록(로베르)신부 >
아실 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1853-1922년)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바오로. 한국명은 김보록(金保祿).
1853년 프랑스 소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876년 사제로 서품된 뒤,
이듬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료 두세 신부와 파리를 출발, 많은 위험을 겪은 끝에
그 해 9월 23일에 황해도 장연 앞바다에 도착했다. 1878년부터 1883년까지 황해도 배천, 함경도 안변,
경기도 오리골, 강원도 원주 부엉골 며 신학생들을 가르쳤고, 순회 전교를 통해 성사집행을 하였다.
1886년 블랑 주교가 경상도 지역의 사목 중심지로 대구 본당을 설정하고
초대 본당 신부로 로베르 신부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1891년 교안(敎案)사건이 발생. 대구의 불량배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사제관을 포위하고
위협을 가하여 사제관은 약탈당했으며 로베르 신부는 경상도 밖으로 추방당하였다.
다시 대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대구 외곽의 대아벌에 정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랜 박해로 이단시하던 인근 주민들의 태도를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계산 성당에서는 초대주임 신부이자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계산 성당을 건립하시고,
고아들을 돌보며 전교에 온 힘을 쏟으셨던 로베르 신부님을 기념하여 흉상을 건립.
1922년 1월 2일 선종,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 되었습니다.
< 계산 성당 제대 위의 유리화 >
1899년 전통 한식의 목조 성당을 완공해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축성식을 거행했으나 1901년 화재로 소실.
그 후 1903년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식 벽돌조 성당을 완공.
1911년 대구대교구가 설립되면서 주교좌성당이 되었고
1919년 5월 증축한 성당을 축성하게 되었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문 기념 성수대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84년 5월 5일 대구대교구를 방문하시어
이 성당에서 기도하시고 어린이들을 축복하시었습니다.
계산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 성당이며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I am happy, and you should be as weII”
2005년 4월 2일 선종하신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2-12일 대한민국을 방문,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성인 시성식을 거행하셨고
1989년 10월 6-10일 두 번째 방문, 제 44차 세계 성체대회에 참석하셨다.
2011년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
2014년 4월 2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요한 23세 교황과 함께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순교자들의 순교터에 세워진 도심 속 순교기념관
‘대구대교구의 제 2 주보성인 성 이윤일 요한’
대구 관덕정 순교 성지
< 대구 관덕정 - 대구광역시 중구 관덕정길 11 >
대구 관덕정(觀德亭)은 조선 시대 무과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으로
영조 25년에 세워졌는데 관덕정이 천주교와 연관을 맺은 것은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처형장에서 천주교인들이 순교하면서 부터입니다.
< 대구 제 2 주보성인 이윤일 성인상과 순교기념관의 돌 형구 >
순교자 이윤일 요한이 시성되면서 대구대교구는 사형 터로 고증된 부지를 확보하여
1985년 순교기념관 기공식. 1991년 1월 20일 지하경당 축복식과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을 갖고, 그해 5월 31일 개관하여
관덕정이 순교성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성 이윤일(李尹一) 요한(1815-1867년)
성 이윤일 요한(Joannes)은 충청도 홍주 출신 태중교우로,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박해를 피해 당시 외교인들만 살고 있는 문경읍 여우목으로 이사.
전교회장으로 지내던 중 1866년 병인박해 때 30명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상주 감영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1867년 1월 21일 대구 관덕정에서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날뫼(대구시 비산동)에 안장되었으며,
훗날 먹방이 교우촌(용인군 이동면 묵리)으로, 1976년 미리내로, 1986년 대구로 이장되어
현재는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지하 성당에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식 누각으로 당시 관덕정 모습을 재현한 순교기념관에는
이윤일 성인의 유해와 함께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 그리고 영남 지역 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윤일 요한은 사형선고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출발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이윤일 요한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987년 1월 21일 제8대 교구장 이문희 바오로 대주교는 성인을 교구 제 2주보롤 선포.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3분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복자 성당
< 복자 성당 - 대구광역시 동구 송라로 22 >
대구 도심에 위치한 복자 성당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3위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박해를 피해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입니다.
< 복자성당 세 순교 복자의 유리화 >
울산 장대에서 한날 한시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이들의 시신은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에 의해 처형 직후 형장 근처의 강둑 아래 가매장되었다가
1907년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 합장.
그 후 1932년 월배동 감천리의 교회 묘지로 옮겨졌다가
1973년 복자 성당 구내로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복자 성당은 대구대교구가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기념해 교구민의 성금으로 1970년
설립한 성당으로 3위 순교자의 유해를 이장하면서부터 도심의 순교신심의 중심지가 됨.
3위 순교자는 모두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루르드 성모님의 도움으로 교구의 기틀을 세우고 . .
성모당
< 성모당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로 4길 112 >
성모당은 대구대교구청 내에 위치한 대구대교구의 제 1 주보이신 루르드의 성모님을
모신곳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순례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열린 성지, 치유의 성지.
1911년 대구대목구에 부임한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교구에 꼭 필요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을 이뤄 주시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여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
모든 신자들이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허원을 드렸습니다.
< 대구 성모당의 십자가의 길 >
1913년과 1914년에 주교관과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건립했고,
주교좌성당 증축이 늦어지던 중, 당시 계산 주교좌성당 보좌 소세 신부가 중병을 앓아
선종 직전에 이르자 드망즈 주교는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습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동굴 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 8월 15일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 마침내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대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해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킵니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입니다.
성모당은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
< 성모당 봉헌 100주년(1918~2018) 기념미사 2018.10.13 >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님,
즐거울 땐 당신을 잊어버리고 슬프고 외로울 때
그리고 급할 때만 당신을 찾는 저희들을 용서하시어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
저희들의 구원의 기도를 전달하여 주소서. 아멘
<에밀 타켓 신부와 왕벚나무>
성모당 안익사(한옥건물) 앞에 서 있는 . . . . .
1898년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에밀 타켓 사제는 1922년 부터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수
및 교장을 역임하시다가 1952년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임종. 대구대교구 성직지 묘지에 안장.
에밀 타켓 신부는 1902년 부터 1915년 까지 제주도에 사목하는 동안
7,047점의 식물을 채집하여 한국식물분류학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남겼다.
특히 1908년 제주도 한라산 해발 600미터 지점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발견하여
독일 베르린대학 쾨네박사에게 감정 받음으로써 왕벚나무 자생지가 우리나라임을 세상에 알렸다.
1930년대 에밀 타켓 신부가 유스티노 신학교 재직시 심은 이 왕벚나무는
해마다 봄이 되면 아름다운 꽃을 풍성히 피워 에밀 타켓 신부의 사랑을 일깨워 준다.
< 성모당의 성직자 묘지 >
대구대교구에서 평생을 봉직한 성직자들의 육신이 묻혀있는 곳
주님, 세상에 있을 때 주님만을 바라보며 어린 양들을 돌보시다가
하늘의 별이 되신 착한 목자들을 기억해 주소서. 아멘
성모당에서 나오면 유스티노 신학교 담벼락을 따라 조성된
남산 100년 향수길을 걷다 ^^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품은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
신나무골
< 신나무골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산 57-9 >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신나무골은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면서도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고, 샤스탕, 다블뤼, 최양업, 리델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
사진은 신나무골 성지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 묘역입니다.
<신나무골 성지의 대구교회 첫 본당터에 복원된 사제관 모습>
이선이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그린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과 배도령스테파노 모자 초상화
(그림 / 김도율 신부님)
1860년 경신박해 때 잠시 신나무골로 피신했던 배정모와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
그리고 세 아이는 포졸들을 피해 한티로 다시 숨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포졸들에게 붙잡혀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며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이선이와 장남 배 스테파노는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977년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의 묘소를 이장하고,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를 복원.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등을 복원했으며 마당에 로베르 신부 흉상도 건립하였다.
< 신나무골 인근에 있는 가실성당 >
대구대교구에서 계산 주교좌성당에 이은 두 번째이자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1895년 설립)성당, 선교의 요람인 가실 성당을 순례하다 ~^^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거룩한 땅
한티 순교 성지
< 한티 성지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1길 69 >
팔공산 기슭, 한티재에 자리한 한티순교성지는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살고, 죽고, 또 그들의 유해가 묻히신 거룩한 땅입니다.
< 복원된 한티 마을 (옛 공소) >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산 것으로 추정.
수 차례의 박해를 넘긴 한티 마을은 1866년 시작하여 3년 가까이 이어진
병인박해의 여파로 인해 최후를 맞게 됩니다.
1868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은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 37기 순교자 묘역을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 >
박해 소식을 들은 인근 교우들이 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했고,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의 묘는 모두 37기로
1867년에 순교한 서태순 베드로(徐泰淳, 1823-1867년)와
1868년에 순교한 조 가롤로 와 부인 최 바르바라, 그의 누이동생 조아기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 33위가 묻혀 계시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
한티성지는 2016년 9월 10일 부터 총 구간 45.6㎞의 한티가는 길을 개통하였다
숲길 27.0 km, 임도 6.8 km, 마을길 11.8 km
박해를 피해 길을 떠났던 순교선조들의 신앙을 따라 가는 길.
모두 5구간으로 나누어 일부 또는 완주체험을 하도록 조성되어 있습니다.
2019년 7월 한티가는 길을 완주하신 모윤상 안드레아 단장님과 형제님들 ^^
< 한티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요 ~ 경산베네딕도 성경학교 학생들 >
주님, 박해를 피해 몸을 숨기고, 처형을 당하며, 이름없이 묻힌 거룩한 땅
한티의 순교자들을 기억해 주소서. 아멘
우리나라에는 천주교박해 시기에 약 1만명 이상의 신자가 순교하였으며
순교성인은 103위이다. 순교성인 103위는 프랑스 주교가 3위, 프랑스 신부가 7위,
한국인인 93위이며 이중 성인이 46위 성녀가 47위이다.
순교성인들의 순교한 날을 월별로 보면 9월이 33위, 3월이 15위, 12월이 14위,
5월이 13위, 1월이 12위 등으로 9월에 순교한 분이 가장 많아
9월이 순교자 성월이 되었습니다.
대구대교구 성지 순례를 마칩니다 ~
2019년 6월 14일(금)~16일(일)
( 제주 교구 성지 순례 )
14일 - 새미 은총의 동산, 정난주 마리아 묘, 차귀도, 용수(김대건 표착지)
15일 - 추자도 황경환 묘
16일 - 황사평, 관덕정, 중앙성당(교중미사), 김기량순교 현양비, 사려나무 숲길
주님의 은총과 순례객의 기도가 샘물처럼 이어지는 . .
새미 은총의 동산
< 새미은총의 동산 -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새미소길 15 >
새미(SAEM) 은총의 동산은 라틴어에서
거룩함, 영혼,, 복음, 중개자, 하느님의 모습 등을 의미.
예수님의 공생활 테마들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동상으로 제작하여
세워 놓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복음 테마 공원이다.
< 삼위일체 대성당 >
새미은총의 동산은 성 이시돌 목장안에 있습니다.
성 이시돌 목장은 지금부터 66전, 25세의 나이로 제주 한림성당에 부임했던
아일랜드의 사제 패트릭 맥그린치(임피제)가, 가난한 제주 농민들을 돕기 위해
외국의 원조를 얻어 한림읍에 넓은 목장을 확보하고 성 이시돌 목장을 설립했습니다.
65년간 오병이어의 사랑을 실천하셨던 임피제사제는 2018년 4월에 이시돌에서 선종.
새미은총의 동산은 임피제 사제와 제주교구 사제들이 함께 펼친 종교사업 중 하나로
예수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12개의 주요 사건들을 실제 인체 크기의
조각품으로 표현한 ‘예수님 생애공원’과 삼위일체 대성당이 있습니다.
대성당과 묵주기도 호수 사이에는 대형 조각상으로 재현한 십자가의 길 14처가 마련.
십자가의 길 14처를 지나면 묵주기도의 호수에 이르게 됩니다
가족은 어디 두고 홀로 외로이 견뎌낸 신앙
대정 (정난주 마리아 묘)
< 대정 (정난주 마리아 묘) -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247번길 102 >
정난주마리아는 정약현(정약용의 맏형)의 장녀로서,
15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임금의 총애를 받던 황사영알렉시오의 부인이다
백서사건으로 황사영은 순교하고 그의 아들 황경환은 추자도에,
부인 정난주는 제주목 노비로 귀양길에 오르며 아들과는 생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비록 순교는 하지는 않았으나 전 생애가
굳건한 신앙의 증거로 후손들은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리고 있다.
라파엘호를 탄 김대건 일행이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포구
용수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지)
< 용수(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지)-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1길 108 >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해에서 사제품 받고
중국 상해항을 떠나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
< 용수에서 바라 보이는 차귀도 섬의 모습 >
배를 타고 10분 거리 차귀도 섬으로 건너 갔다.
김대건신부 일행은 용수에서 바라보이는 차귀도에 표착.
첫 미사를 드리고 용수로 건너가 배를 수리한 후 다시 항해를 시작해 사흘만에
서해로 출항.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차귀도섬 올레길 일주하다 ~~
< 등대가 있는 차귀도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풍경 >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예전에는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섬이라고 한다.
제주교구에서는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용수리 포구를 성지로 선포.
여기에 김대건 신부 포착 기념성당과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며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라파엘 호를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6월 15일(토)
두 살에 유배 당한 황경환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추자도
황경한 묘
< 황경한 묘 - 제주시 추자면 신양리 산 20-1 >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약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추자도에 도착.
하추자도에는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의 묘소가 있고 추자공소는 상추자도에.
추자공소에 잠시 들렸다가 황경한 묘로 향하다 ^^
묘역의 묘비를 읽으며 애절했던 모자의 사연을 묵상하다.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1790년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인
정난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이 체포되어 순교한 후 부인은 제주도에 관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 두살 난 아기 황경한을 내려 놓았던 갯바위로 가는 길 >
젖먹이 아들마저 평생을 죄인의 자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어머니 정난주는
유배 길에 경한을 하추자도 예초리의 갯바위에 내려놓습니다.
< 경한을 내려 놓았던 갯바위에 제주 교구에서는 대형 십자가와 그때의 모습을 재현 >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져 그의 아들로 키워졌습니다.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이 지금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 황사영알렉시오는 경기도 양주시 가마골 문중 선산에,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 서귀포 대정읍에,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가족이 안타깝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아마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쁘게 만났으리라 . . .
돌아오면서 추자공소에서 토요일 오후 미사를 드리다.
6월 16일 (주님의 날)
황사평, 관덕정, 복자 김기량 현양비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의 안식처
황사평
< 황사평 - 제주도 제주시 기와5길 117-22 >
황사평 성지는 1901년 신축교안때 희생된 무명의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곳.
신축교안은 1900년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이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잡세를 거두는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습니다. 일명 이재수의 난 이라고도 합니다.
< 황사평 순교자 묘역 >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습니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관덕정 앞을 사형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는데,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
교우들의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1903년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
이때 황사평으로 이장한 무연고 묘와 시신의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해 총 26기에 28구였습니다.
은퇴하셨으나 자진하여 황사평을 돌보며 조성하고 계시는 이대원 미카엘 신부님의
황사평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다. 다음 순례지로 ^^
겹겹이 시신들로 쌓였던 신축교안의 현장
관덕정
< 관덕정 - 제주도 제주시 관덕로 19 >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에 의한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중 하나가 1901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입니다.
관덕정 앞을 사형장으로 만든 신축교안은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는데,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제주목 관아 망경루에서 내려다 본 관덕정의 모습
제주중앙성당에서 주일 교중미사를 드렸다.
마지막 순례지로 이동 ^^
제주의 사도로 복음을 전한 제주 출신 첫 순교자
복자 김기량 순교 현양비
< 복자 김기량 순교현양비 -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940-2 >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극적으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휴양 중이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 교리를 배운 그는
성령강림 대축일인 5월 31일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 김기량 순교 현양비 >
그는 제주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예비신자들의 세례를 위해 그들과 함께
육지에 자주 다녔는데 여비 마련을 위해 거제도에 갔다가 체포되어 통영 감옥에 투옥.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
라고 권면했습니다
결국 관장은 다섯 명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고,
특히 김기량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때가 1867년 1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
제주교구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황사평 순교자 묘역에 김기량 순교비를 세웠고,
2005년 4월에는 그의 고향인 조천읍 함덕리에 부지를 마련하여 순교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국내성지 111곳을 완주하였다!! 함께 기뻐하며 . . .
< 복자 김기량 순교 현양비 앞에서 >
마지막 순례지에 도착하여 기쁨과 감사를 함께 나누다 ~♡♡
지난 3년여 모윤상 안드레아 길손 단장님, 희생과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봉사하신 형제 자매님, 함께 하신 모든 회원님들 감사드립니다.
지도해 주시고, 동행해 주신 고마우신
황경순 마리스텔라수녀님, 반명순 유딧수녀님, 이태숙 마리석문수녀님
감사드립니다.
좋으신 하느님!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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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순례 기록에서 성지의 기억이 새록새록~ 글도 사진도 아름답네요.
대단원의 막이 내리고...새 희망을 안고 나아갑니다. 이제는 그 발걸음위에 우리들의 염원을 담아서, 주님께 올리는 향기로운 제사같게 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라고 하면서도... 초록바위와 서천교를 다녀오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었지요. 아직도 인간적인 연민이 먼저이니 말입니다. 저보다 몇배를 더한 마음으로, 보듬고 쓸어내리기를 얼마나 하셨을지 짐작도 못하지만, 애쓰신 보람으로 저희들은 행복합니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 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 시편 34,9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