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유도와 임진왜란
정유년 1월13일 가토 기요마사의 상륙군이 부산성에 입성했다. 일본군이 계사년에 철군했다하지만 일본은 경남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부산-대마도간 해상로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언제나 조선에 상륙군을 보낼 수 있었다.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려면 거제도에 조선 수군이 진을 치고 있어야 하는데 거제도는 명과 일본이 합의하여 비무장지대로 만들어 두었기에 이순신 함대는 한산도에 통제영을 둘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재침 목표는 전라도 석권이다. 일본 육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8월16일 남원성을 점령하고 백성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였다. 왜적은 이어서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내륙에서도 8개월 동안이나 전라도 전역을 석권, 분탕했다.
일본군은 9월6일 평택 근처의 소사에서 조명연합군의 반격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으나 안성, 죽산 까지 침범했다. 그러던 일본 육군은 소사에서 패하고, 수군은 명량에서 크게 패해 사기가 떨어졌다. 가토는 특공대를 아산에 파견했다. 이순신 일가를 몰살해 패전의 앙갚음을 하고 이순신의 영혼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함이다.
정유년 9월16일 명량에서 크게 이긴 이순신은 포탄, 화약, 화살이 다 떨어졌다. 작전상 진을 후퇴할 수밖에 없다. 일본수군이 대패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200여척의 함대가 건재해 있었다. 일본군은 해남의 전라우수영 등 본토의 모든 포구를 점령했다. 이순신 함대는 본토의 포구에 입항할 수 없다. 그들은 서해를 북상하여 9월17일 당사도(무안군 암태도 동편), 어외도(무안군 지도면 북방), 19일 법성포(영광군), 20일 위도(영광군), 21일 고군산도(옥구군 미면 선유도)로 진을 옮겼다.
이순신은 선유도에 도착해 명량 해전의 장계를 작성했다. 긴장이 풀리자 사흘을 앓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앓는 중에도 계속 장계를 수정했다. 9월27일 3명의 수하가 장계를 지니고 배를 탔으나 풍랑이 심해 되돌아 왔다. 29일에 일기가 호전되어 비로소 장계를 조정에 보낼 수 있었다. 조정은 한성이 아니라 의주에 있다. 당시의 일기를 보자:
9월17일[을사/10월27일] 맑다. 어외도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 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우리 수군이 대첩한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 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나주진사 임선·임환·임업 등이 와서 봤다.
9월18일[병오/10월28일] 맑다. 그대로 어외도에서 머물렀다. 내 배에서는 순천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탄환에 맞아 죽고, 박영남과 봉학 및 강진현감 이극신도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9월19일[정미/10월29일] 일찍 떠나 출항했다. 바람도 순하고 물살도 순조를 타 무사히 칠산(영광군 낙월면) 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해서 들어와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에 홍농(영광군 홍농면)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정박시키고 잤다.
9월20일[무진/10월30일]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위도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이광축·이지화 부자가 와서 봤다.
9월21일[기유/10월31일] 맑다. 일찍 떠나 고구산도에 이르니, 호남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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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10월은 충무공에게 매우 고통스런 달이었다. 10월1일 선유도에서 “아산 고향이 적에게 불타 버렸다”는 공문을 받았다. 마음이 불안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 이순신은 다음날 일찍 아들 회를 배에 태워 고향으로 보내 소식을 알아오게 했다. 10월3일 다시 남행을 시작했다. 법성포, 어외도를 거쳐 9일에는 우수영으로 귀환했다. 일본군에 의해 분탕질 당한 우수영은 그야말로 참혹 그 자체였다. 보름 후, 아산에서 전령이 막내아들의 전사 소식을 가져왔다.
장가들기 전의 막내아들(면)이 적의 특공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충무공은 진영에서 통곡할 수 없어 강막지의 집으로 가서 참았던 울음을 토했다. 부인은 죽은 아들을 안고 혼절했으니 그 처참한 장면은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였다. 이순신은 분노와 슬픔으로 왜놈 포로 13명과 투항한 자를 베었다. 그래도 치욕은 씻기지 않아 적에게 붙었던 자 두 놈을 베었다. 분노는 가시지 않고 치욕은 씻기지 않았다. 적에게 붙었던 두 놈과 강간범을 베었다. 충무공은 다음해 노량해전을 앞두고 하늘에 맹세했다.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당시의 일기를 보자:
10월1일[무오/11월9일] 맑다. 병조의 역군이 공문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아산 고향이 적에게 불타 버렸다"고 했다.
10월2일[기미/11월10일] 맑다.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으나 잘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내 심정을 어찌 다 말하랴.
10월3일[경신/11월11일]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법성포로 되돌아 왔다.
10월8일[을축/11월16일] 맑다. 출항하여 어외도에 이르렀다.
10월9일[병인/11월17일] 맑다. 일찍 출항하여 우수영에 이르니 성 밖에는 인가도 없고 인적이 하나도 없다. 보이는 것은 참혹뿐이었다. 그러나 소문에 "흉악한 적들이 해남에 진치고 있다"고 한다. 초저녁에 김종려·정조·백진남 등이 와서 봤다.
10월11일[무진/11월19일] 맑다. 밤 두 시쯤에 바람이 자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닻을 올려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정탐인 이순·박담동·박수환·태귀생을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이는 반드시 적의 무리들이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다. 오정에 발음도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다. 육상에 내려 산마루로 올라가서 배 감출 곳을 찾아보니, 동쪽에는 앞에 섬이 있어 멀리 바라볼 수는 없고,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 월출산으로 뚫렸으며, 서쪽에는 비금도로 통하여 눈앞이 툭 트였다. 잠깐 있으니 중군장(김응함)과 우치적이 올라 오고, 조효남·안위·우수가 잇따라 왔다. 날이 저물어 산봉우리에서 내려와 언덕에 앉았으니 조계종이 와서 왜적의 사실 형편을 말하고, 또 "왜놈들이 우리 수군을 몹시 싫어한다"고 했다.
10월14일[신미/11월22일] 맑다. 밤 두 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가는데 말이 발을 헛디디어 냇물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쓰러지지는 않고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는데, 깨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는 고!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고!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 년 같구나.
10월16일[계유/11월24일] 맑다. 우수사와 미조항첨사를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현감 유형도 보냈다.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 놓고 통곡할 수도 없으므로 영 안에 있는 강막지 집으로 갔다. 밤 열 시쯤에 순천부사, 우후 이정충, 금갑도만호, 제포만호 등이 해남에서 돌아왔다. 왜적 열세명과 투항했던 송언봉 등을 목 베고서 왔다.
10월17일[갑술/11월25일] 맑다. 새벽에 아들 상복을 입으니 비통함을 참을 수가 없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10월19일[병자/11월27일] 맑다. 윤건 등이 왜적에게 붙었던 두 명을 잡아 왔다.
10월22일[기묘/11월30일] 아침에 눈 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군기직장 선기룡이 임금의 분부와 의정부의 방문을 가지고 왔다. 해남현감 유형이 적에게 붙었던 윤해·김언경을 묶어서 올려 보내왔다. 그래서 단단히 가두었다. 무안현감 남언상은 가리포의 전선에 가두었다.
10월23일[경진/12월1일] 맑다. 윤해·김언경을 처형했다. 진사 백진남이 와서 봤다.
10월24일[신사/12월2일] 맑다. 해남에 있던 왜의 군량 삼백 스물 두 섬을 실어왔다. 초저녁에 선전관 하응서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우후 이몽구를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그 편에 들으니, '명나라 수군이 강화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밤 세 시에 또 선전관과 금오랑이 왔다고 한다. 날이 밝자 들어오는데, 선전관은 권길이요, 금오랑(의금부도사 주부)은 홍지수였다. 무안현감(남언상)·목포만호(방수경)·다경포만호(윤승남)를 잡으러 온 것이다.
10월29일[병술/12월7일] 맑다. 밤 두 시쯤에 출항하여 목포로 향하였다가 보화도(목포시 고하도)에 정박하니, 된하늬바람을 막을만하고 배가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그래서 뭍에 내려 섬 안을 둘러보니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했다.
10월30일[정해/12월8일] 맑다. 아침에 집 지을 곳으로 내려가 앉았으니,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했다. 해남현감 유형도 와서 적에게 붙었던 사람들의 소행을 전했다. 황득중으로 하여금 섬 북쪽 봉우리로 가서 집 지을 재목을 베어 오게 했다. 저녁나절에 해남에 있던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 및 김신웅, 왜놈에게 지시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죽인 자 두 명과, 선비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을 아울러 목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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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유도를 향하여 출발
덕유는 이 선유도를 답사하기로 했다. 원래 6월19일부터 1박2일 지리산을 종주하려했으나 남쪽으로부터 장마전선이 올라오고 있어 산행을 포기했다. 덕유와 고교 동창 몇이 18일에 송암을 병문안했다. 그 자리에서 선유도 답시 이야기를 듣고 동행할 것을 마음먹었으나 확답은 안했다.
덕유 일행 6명은 영등포역에서 7시43분발 무궁화호를 타고 군산까지 갔다(경노 운임 9,900원). 3시간 후에 군산역에 도착(10시45분)해서 버스를 타려 했으나 몇 시에 어디 가는 버스가 오는지 몰라 택시를 불렀다. 일행은 2대의 택시에 분승하여 군산대 정문 앞에 내렸다(택시요금 14,400원). 11시15분경에 도착하니 99번 시내버스가 11시 40분에 도착할 것임을 정류장 안내판으로 확인했다. 기다리는 동안 점심을 간단히 하기로 했다. 제포가 건너편에 있는 로테리아를 가리켰다. 금오랑이 불고기 버거 세트와 아메리카노 커피 4잔을 구입해 왔다.
제 시간에 도착한 버스는 비응항을 지나 새만금 방조제를 한참 동안 달려서 신시도에 12시5분경에 도착했다. 종점인 가력도를 향하고 종점에서 되돌아 온 버스는 신시도에서 다시 군산대를 향할 것이다. 현재 신시도-무녀도, 무녀도-선유도, 선유도-장자도 가는 다리는 공사 중이다. 그 다리에 가려면 공사 중인 진입로를 따라 갈 수도 있지만 일행은 지름길인 산길을 택했다. 일행은 15분 정도 걸어서 월영산 고개를 넘었다. 멀리 서쪽 전방에 곧게 뻗은 방조제가 보였다. 신시도 방조제 남쪽은 바다이고 북쪽은 논이다. 일행은 현수막을 펼치고 출발 인증사진을 박았다(12:50). 방조제 끝에 신시도 개매기 체험장 안내판을 보고 북으로 우회전하여 도로공사 현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리로 진입하는 도로의 인도를 30여분 걸었다. 일행은 현수교의 거대한 주탑 아래 그늘에서 각자 준비한 간식을 나누며 25분 정도 쉬었다. 14시경 다시 출발해 앞에 보이는 무녀도를 향했다. 무녀 초교까지 가는 길에 아름다운 조약돌이 깔린 조그마한 해변이 있다. 해변을 지나면 작은 포구가 있는데 외국인 근로자가 땡볕에 앉아서 어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무녀 초교를 지나 무녀도항에 이르는 길은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는데 ‘정 산악회’가 안내한 16절지 종이에 인쇄한 화살표가 가끔 보였다. 마을 사람에게 선유도 가는 길을 물으니 전봇대를 보고 따라 가면 된다고 했다. 무녀도 항이 보이면 그 위에 주황색 다리도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려면 항구에 이르기 전에 남쪽으로 진입해야 한다. 덕유는 항구까지 갔기에 되돌아 나오기 싫었다. 그는 다리에 오르는 가파른 지역을 애써 올라 겨우 다리에 진입했다. 그 다리는 예전부터 있던 인도교다. 지금 새로 건설하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는 아직 통행할 수 없다.
인도교 진입로에 무녀도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무녀도(巫女島) 앞에 장구 모양의 장구섬과 그 옆에 술잔 모양의 섬이 있어 마치 무당이 춤추는 모습을 닮아서 무녀도라는 전설이 있다. 모감주 나무 군락지, 초분공원, 몽돌해변이 볼만하다고 안내하고 있는데 답사자들이 가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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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도-무녀도 연결 대교(공사중이나 사람은 통행가능)<!--[endif]-->
3. 선유도의 이순신 유적
다리를 건너니 포장마차가 있었다(15:10). 제포는 침상에서 막걸리를 자작하는 여인을 보았다. 선유도에 이르니 신선처럼 노는 여인을 만나나보다. 어떤 연유로 대낮에 혼자서 술을 마실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제포가 침상에 앉으니 그녀가 먼저 막걸리 잔을 건네며 시쳇말로 ‘작업’을 거는 것이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수작(酬酌)이라고 한다. 말을 주고받을 수(酬), 따를 작(酌)이다.
“혼자 마시려니 한 병이 너무 많구만유. 아자씨는 워디서 오는 감유? 한잔 받어유.”
“아이구, 고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목이 탔었는데... 서울서 왔어요. 신시도에서 선유도까지 걷는 중입니다.”
“이 더위에 그 먼 길을 걷는당께?”
“이순신 장군이 간 길을 따라 걷고 있어요.”
“장군님이 여기도 왔시유?”
길게 늘어진 일행이 모두 도착했다. 이 여사가 여기저기로 다니며 사진을 찍다보니 제일 늦게 도착했다. 일행은 막걸리와 쑥떡으로 더위를 식혔다. 여기서 선유도 항까지는 5, 6분이면 간다. 선유도 항 입구에는 5시에 출항하는 배를 기다리는 여행자들이 길가에 길게 앉아 있었다. 군산 가는 배편을 보니 5시 일반여객선(운임 9,800원) 이전에는 3시에 쾌속선이 있는데 운임은 15,500원이고 경로는 20% 할인이다.
“선유도 우체국 근처에 장군의 유적이 있을 거야.”
“저기 파출소가 보인다. 가서 알아보자.”
파출소 근무자가 안내해준 곳은 길가에 있는 5개의 절제사비였다. 선유도 군산진은 고려시대 대외교류의 관문으로 외교사절이 머무는 객관을 운영했다. 조선태조 6년에 수군 만호가 지휘하는 진(鎭)을 설치하고 선조 2년에는 수군절제사를 파견했다. 선조 30년 명량대첩이후 이순신 장군이 12일간 머물렀으며 1932년에는 화재로 소실됐다. 군산진은 9900㎡(3000평) 부지에 동헌과 부속건물이 있었다.
“이 비가 아니고 군산진의 동헌이 있던 자리를 찼습니다.”
순경은 이곳에 발령 받은 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 마을 뒤편의 작은 언덕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풀밭에 문화재 청장과 군산시장의 경고판이 세워져 있었다.
<경고.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337-1 일원, 위 지역은 고군산진 영역으로 문화재청장의 승인 없이 현상변경, 매장문화재 발굴 등의 행위가 불가한 지역입니다. 이를 위반하면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됩니다.>
경고판에는 조선시대의 군산진이 있었던 영역을 현대의 지적도에 표시하고 있었다.
금오랑이 풀밭을 헤치고 들어가 보았으나 별다른 흔적을 볼 수 없었다. 그는 내려오다가 기와조각을 하나 주웠다.
“이것 봐, 여기 꽃모양의 무니가 있네.”
“기와지붕의 막새 조각 아닐까? 그 자리에 그냥 두어. 가지고 가면 1억 원의 벌금에 처한다잖아.”
제포가 겁을 주었다.
순경이 일행을 길가로 안내했는데 또 다른 안내판이 있었다. 명량에서 12척으로 적선 133척을 격파한 충무공이 5일 후에 이곳에 와서 12일간 머물었다는 설명이 있다. 그런데 사실은 전라 우수사 김억추의 판옥선 1척이 추가되어 13척으로 싸웠다. 한, 영, 일, 중 4개 국어로 된 안내문 위에 군산진 옛 지도가 있다. 1872년 당시 군산진 지도의 선유도에 동헌(東軒)과 내촌(內村), 진리(鎭里), 동면(東面), 서면(西面), 명사십리, 망주봉이 있고, 주변의 섬(장자도, 대장도, 무녀도, 신시도)이 그려져 있다. 지도는 보통 위쪽이 북이지만 이 지도는 위가 남(南)이다.
“우리는 장군의 유적을 보았으므로 답사의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답사가 아니라 관광입니다. 선유도를 즐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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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진 동헌이 위치했던 지역은 이러한 풀밭이다.
4. 선유도 명사십리 해변
일행은 명사십리 해변에 앉아 잠시 맥주를 마셨다(16:00). 금오랑이 숙소를 수배하여 짐을 풀었다. 미하는 백사장만 보면 뛰고 싶어진다. 그는 밀물로 출렁이는 바닷물을 맨발로 밟으며 왕복 1km쯤을 천천히 뛰었다. 제포는 바다에 들어갔다. 미하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따라 들어갔다. 물은 대체로 차갑지 않았으나 가끔 차가운 물이 섞였다. 바닥은 모래이고 물이 맑아 수영하기 좋았다.
스카이라인 타워 높은 데에는 백사장을 따라 멀리 솔 섬까지 내려가는 와이어가 설치되어 있다. 이 여사는 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분이 어떨는지 경험하고 싶어졌다. 김 여사가 동의하여 두 여인은 탑에 올라갔다. 관광객이 다 떠난 늦은 시간이다. 모든 거래에는 협상이 있게 마련이다.
“이제 날도 저무는데 디스카운트 합시다. 저 아래 남정네들도 우리가 타는 것을 보면 용기를 내지 않겠어요?”
“원래 2만원인데 숙녀 분들이 우아하고 용감하시니 만 오천에 태워드리겠습니다.”
이 여사는 안전교육을 들으면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벨트를 허리에 감고 가슴과 어깨 위로 다른 벨트를 추가하더니 와이어에 매달린 고리에 연결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눈 딱 감고 있는데 어느 듯 출발이 되었다. 수평선 쪽 섬들이 아른한데 앞에 보이는 망주봉 봉오리가 점점 다가왔다. 착지를 하니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오면서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벌써 다 왔단 말인가? 솔 섬에서 출발점 까지는 승용차로 보내준다. 이래저래 인건비가 많이 드는 장사다.
일행은 저녁 식사할 곳을 찾았다.
“선유도까지 왔는데 어디 근사한 횟집에 들어가 보자.”
“내가 인터넷에서 알아봤는데 선유도에는 먹거리가 별로라는데...”
일반적으로 섬은 선편이 자주 있지 않아 공산품이나 식품이 귀하다. 생 막걸리는 보기 어렵고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멸균 막걸리가 고작이다.
“군산항에 가면 유명한 횟집이 있어.”
제포가 회는 내일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일행은 간단히 백반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아주머니, 여기서 낙조 보기 좋은 데가 어딘가요?”
“해변 동쪽 스카이라인 타워에서 사진을 많이 찍던데요.”
하지 때 일몰은 7시30분경이다. 수평선 근처에 작은 섬이 보이는데 그 위에 불그레한 태양이 내리려는 모습이다. 덕유와 이 여사는 해변으로 내려갔다. 높은 데크 보다는 낮은 해변이 낙조 사진 찍기에 더 좋은가보다. 덕유는 선유낙조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제 지리산행도 비로 포기했기에 선유낙조는 기대도 안했다. 그런데 이게 웬 횡재인가? 수평선 위에 잔뜩 끼어있던 구름이 점차로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여름 해는 길다. 선유도의 일요일 저녁은 월요일에 출근해야하는 사람이 다 나가고 조용했다. 6명이 명사십리를 독점하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어둠을 기다렸다. 마침 음력 보름이라 동편에는 둥근 달이 구름 사이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구름이 많아 기대를 접어야 했다. 일행은 가까운 수퍼에서 맥주, 소주, 오징어땅콩 등을 샀다.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필자의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술이 과했나보다. 밤 10시 가까이 되자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해 해변을 떠났다.
식당의 아침 식사는 보통 8시에 시작이다. 숙소에서 운영하는 ‘우리식당’은 7시 30분부터 아침을 준다고 했다. 이 여사는 다음날 일출도 사진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새벽에 나가 봤으나 구름이 많아 좋은 그림을 얻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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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자도 등산
9시에 장자도를 향했다. 도중에 타워를 지나는데 어제 본 관리인이 있었다. 그의 호의로 일행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관리인은 앞에 보이는 섬의 이름과 전설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그는 선유도의 아름다움과 관광하기 좋은 곳임을 일행의 마음에 새겨두고 싶은 듯했다.
“우리는 저 봉오리에 오르고 싶은데 등산이 가능하나요?”
“네, 15분이면 오릅니다. 저 아래가면 ‘그 섬에 가고 싶다’는 펜션이 있을 겁니다. 아름다운 수석과 장식이 많은 집인데 거기서 올라갑니다. 밧줄이 있습니다.”(09:05)
일행은 탑에서 내려와 장자봉을 바라보고 걸었다. 나지막한 대장교를 건너니 대장봉 아래 아름다운 펜션이 여러 채 보였다. 미하가 앞장서서 알려준 그 펜션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무턱대고 그를 따랐다. 마을을 다 지나서 다행히 그들은 산으로 오르는 길을 찾았다. 나무와 풀이 우거진 좁은 길이다. 시계방향으로 섬을 돌아서 오르는 길이다. 미하는 도중에 절벽을 만났다. 발을 잘못 디디면 왼쪽의 30미터 아래 푸른 바다로 떨어진다. 도저히 편한 걸음으로는 진행할 수가 없다. 그는 뒤따르는 김 여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저 아래에 다른 길이 있었어요.”
“여기는 좀 위험하니, 그 길로 갑시다.”
뒤 따르는 사람 중에 덕유와 인송은 제대로 길을 잡아 앞서 나갔다. 미하는 제포에게 전화를 했다.
“이 여사가 안 보이는데 함께 있나? 갈림길 만나면 오른쪽을 택해. 왼편은 바위길이라 위험하니.”
정상에 오르는 도중 8부 능선부터 숲길은 끝나고 넓은 바위가 나타났다. 덕유와 이 여사는 절벽 쪽으로 다가가 예쁜 꽃과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타워에서 50분 이상 걸어서 여기 까지 왔다. 15분이라는 말은 펜션 마을까지의 거리를 말한 듯하다.
정상에서 선유도를 바라보니 명사십리 해변이 길게 북으로 펼쳐있고 장군봉과 주변의 섬들이 그림 같았다. 건설 중인 선유도-장자도 연결 다리가 보였다. 우리는 예전부터 있던 낮은 다리를 걸어서 건넜지만 자동차가 이 섬에 들어 올 날이 머지않았다. 10시 좀 지나 다른 하산 길을 찾았다. 온 길을 다시 내려가기는 싫다. 새로 찾은 길은 가파르다. 곳곳에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타워에서 관리인이 말한 그 밧줄인가 보다. 10시 30 경 밧줄에 매달려 겨우 다 내려가니 붉은 색의 유턴 표시 화살표(↶)가 있는 경고문이 있었다.
<가파른 암석지로 위험하오니 전문등산가 외에는 등산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코스를 가르쳐 준 것이로구나.”
“그래, 이 안내판을 보았다면 등산 포기할 뻔 했다.”
좀 더 내려가니 장자할머니바위전설 안내판이 있었다. 북쪽을 올려보니 기둥처럼 솟은 바위가 보였다. 치마폭이 넓게 펴진 여인의 모습이었다. 작은 목조 건물이 허물어져 있는데 사당인지도 모른다. 안내판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있다.
<남편 혼자의 힘으로는 과거에 급제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말을 믿고, 여인은 백일기도, 천일기도를 하며 남편의 금의환향을 기원했다. 남편은 사대부집 외동 딸 가정교사를 하며 과거에 계속 응시했다. 그사이 남편은 외동딸과 눈이 맞아 데릴사위가 되었다. 남편의 급제 소식을 15년 만에 듣고 여인은 술상을 차려 마중을 했는데 소실과 함께 나타난 남편을 보고 술상을 든 채로 굳어서 저 바위가 되었다.>
이야기를 읽으니 아무래도 여인이 할머니는 아닌 것 같다. 왜 할머니라고 했을까? 여인이 남편 꼴 보기 싫어 홀로 살다 늙어 죽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그 할머니의 넋을 위로하려고 사당을 지었을까? 이 마을 청년들에게 고시공부 열심히 하되 급제하고 출세해도 조강지처를 잊지 않게 하려고 이 전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것일까? 이 장자도는 매우 작은 섬인데 고시에 합격한 판검사, 장관, 학장 등 출세한 사람이 50여명이나 배출되었다고 한다.
“이 집이 바로 ‘그 섬에 가고 싶다’ 펜션이네.”
산자락을 다 내려와 바닷가에 이르니 찾던 펜션이 보였다. 작은 배에 물레방아가 있고 분재, 수석이 가득했다. 분홍 루즈를 바른 주인아주머니가 일행의 질문에 응했다.
“이 집 참 이쁩니다. 여기서 잤으면 좋았을 텐데...”
“어디서 주무셨어요?”
“저 건너 선유도에 식당도 하는 호텔인데요. 제목이 호텔이지 여관이던데요.”
“화장실이 좀 거시기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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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항을 향하여
원래의 계획은 올 때의 반대로 가는 것이다. 신시도까지 걸어가고 버스타고 택시타고 군산역에 가는 것이다. 그러나 온 길을 다시 가고 싶지 않다. 다른 곳을 더 둘러보고 배를 타면 좋겠다. 시간을 보니 옥돌해변에 가도 3시 출항하는 배 시간에 댈 수 있을 것 같았다(13:00). 선유도 타워까지 돌아온 일행은 선유도 중학교에서 남쪽으로 뻗은 낮은 고개를 넘었다. 선유대교에서 장자대교에 이르는 자동차도로의 건설 구간을 건넜다. 일행은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로 들어섰다. 항구가 보였는데 아무래도 아름다운 해변은 없을 것 같아 되돌아 나왔다. 지도를 확인했다면 분명히 옥돌해변 가는 길을 찾았을 테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었나보다. 너무 내려갔다가 배 시간을 노치면 안 되겠기에...
일행은 어제 앉아서 막걸리 마시며 쉬었던 포장마차에 이르렀다(13:50). 3시 출항하는 배를 타기 위해 선유도항으로 내려갔다. 어제 항구 도로변에 사람들이 길게 앉아서 배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가 그런 모습을 연출하게 되었다. 도로는 바다 바로 옆이다.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시간이 많다. 걸어서 지친 다리를 바닷물에 담그면 좋겠다. 몇 명이 계단과 바위에 앉아 발을 씻는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비가 야속하기는커녕 반가웠다. 우리의 답사를 방해하지 않고 참고 있다가 이제 배타고 떠나는 시간이 되니 천천히 내리기 시작하니 고마운 느낌이다.
쾌속선은 2시 반에 입항했다. 일행은 맨 앞좌석을 차지했다. 이 여사는 멀미에 대비해서 중간쯤에 앉았다. 배는 좌우, 전후, 상하 등 3차원으로 요동한다. 배가 진행방향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로 기우는 것을 롤링(rolling), 위아래로 요동치는 것을 피칭(pitching), 뱃머리가 좌우로 흔들리며 침로가 지그재로 진행되는 것을 요잉(yawing)이라하는데 핏칭이 심하면 구토를 참기 어렵다. 제포가 물고기형 과자에 든 아이스크림을 돌렸다. 제포가 어떤 사람에게 군산의 유명한 횟집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그는 장항-군산 간 나룻배를 40년간 운항했던 선장이다. 지금은 다리를 놓았기에 나룻배가 없다. 그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군산의 횟집에 대해 잘 안다면서 그 횟집들이 지금은 거의 다 비응 항으로 옮겼다고 했다.
군산항에 입항하니 비가 그쳤다. 일행은 택시로 옛 군산항에 있는 횟집까지 갔다. 대전횟집의 2층에서 밖을 보면 바로 항구다. 백의종군로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쉬면서 고급 음식으로 뒤풀이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순신 장군의 고통을 체감하자는 취지에 맞게 소박한 식사를 해왔다. 그러나 이 날은 예외다. 답사는 어제 끝났고 관광 모드로 바뀌었으므로 약간의 호사를 누가 탓하랴.
“저는 이번 답사에 참가해서 참 보람 있고 즐거웠습니다. 그동안 백의종군로 순례에 참가하려 했지만 못하다가 이번에 거의 마지막 답사에 참가한 것이 다행이고 고맙습니다. 오늘 식사를 맛있게 들어 주세요.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덕유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덕유와 인송은 제가 백의종군로를 혼자 걷다가 맨 마지막 구간인 구례-순천을 걸을 때 참가해서 제게 큰 힘을 주었습니다. 오늘도 두 분이 참가했고 이런 식사까지 대접 받으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금오랑의 감사하는 말에 일동이 박수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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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무궁화호 무임 승차
비가 다시 조금씩 내렸다. 택시를 불렀다. 군산 역까지 6.7km의 운임은 7,200원이고 콜(call)비가 1,000원이다. 무궁화호 승차권을 사려는데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므로 발권이 안 된다고 했다.
“그냥 타면 어떻게 되나요?”
“50% 할증료 내셔야 됩니다.”
할증료 내는 것이 1시간20분 기다려 비싼 새마을 호 타는 것 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2분 후에 열차 도착이니 빨리 홈으로 뛰자.”
요즘은 차 탈 때 차표 검사하는 사람이 없다. 일행은 기차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무서운 속도로 계단을 뛰어 승강장에 이르렀다.
“휴, 모두들 겨우 탔구나!”
미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8시43분발 열차인데 일행이 군산 역에 택시를 내린 시간이 18시 41분이었다. 열차는 약간씩 연착한다. 미리 출발하는 경우는 없다.
1시간쯤 후에 열차 승무원이 오는 것이 보였다. 승무원은 원래 매표한 자리와 빈 좌석을 대조하는 법이다. 그런데 그냥 지나칠 것 같았다.
“저기여, 여기 승차권 사려고 하는데요.”
“어디서 승차했나요?”
“군산에서 6명 탔습니다. 그중 5명은 경로이고요.”
자진 신고했다. 승무원은 의심 없이 표를 끊어 주었다. 미하가 운임을 확인하니 50% 할증이 아니고 정상 운임이다.
“흐흐, 오늘 운 좋은 날이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엔딩이 좋습니다..ㅎㅎ
ㅎㅎ 답사기 아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새만금방조제는 농어촌공사이로 서너번갔었는데..선유도까지는 못들어갔었는데..더운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운 날씨에 고생하셨지만, 뜻깊은 시간을 보내셨군요.
뭐든 할 수 있을 때 실행에 옮겨야 후회가 없을 듯합니다.
부러울 뿐입니다.
더운 날씨 수고 하셨습니다,
답사지 사진이 선유도리 산 56-67 인근이 맞습니까?
선유도리 산 56-67 인근이 고군산 수군진터 였다고 합니다.
명량님 말씀으로는 가로 20cm, 세로 50cm 작은 표지석으로
'이순신 장군 머무신 곳' 이라는 글이 써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보셨는지요? 군산시 문화해설사도 못찾았다고 하더군요...
위도는 영광군에 속했다가 현재 부안군에 속합니다.
조기 산지였던 위도의 조기가 영광굴비로 불린 배경입니다.
지금도 조기가 많이 나온다면 부안굴비로 불리웠을 수 있는데...
3대 조기파시 연평도, 위도, 흑산도의 영화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조기는 일부 추자도나 제주도 조기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중국산 조기 입니다.
그 풀밭에 있는 경고판 사진을 올렸습니다. 아마도 그 경고판 있는 곳이 동헌 자리가 아닐까요? 표지석 못봤습니다. 일행이 단체로 찍은 사진의 안내판에는 장군님이 머무신 곳이란 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