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虎口)로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끊이지 않는 지구촌의 전쟁과 폭력이 가슴 아프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무엇을 위한 폭력인지? 그 깊은 속셈은 아무도 모른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이름의 미친 폭력은 천문학적인 돈으로 무기를 만들어 상대방을 서로 죽이며 괴롭히는 일에 일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은 많이 괴롭히며 많이 죽이는 것을 승리라고 부른다. 세상은 더 이상 전쟁을 슬퍼하지 않고 자국 경제에 끼치는 손익을 계산할 뿐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와중에서 시작된 미얀마 내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동북인도 마니푸르 폭동,
그리고 최근에 일어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 또한 반생명적인 미친 폭력이다. 감히 이것들이 방어와 평화와 정의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여도 결국 많이 죽이고 많이 괴롭히며 많이 파괴하고 많이 차지하는 자가 승리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 세계는 동식물 그 어떤 것도 결코 인간처럼 폭력을 휘둘러 파괴하며 독점하지 않는다. 모든 동식물은 성장 후에 반드시 자기 자신 또는 성장의 결과물을 아낌없이 다른 대상에게 준다. 이러한 이타적 존재 방식으로 자연의 거대한 생명체계가 무너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동식물들의 자신을 밥으로 내주는 이타적인 생존방식은 인간의 교만과 독선, 독재성과 폭력성과 뚜렷하게 대별된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웃을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로서 자기도 살고 이웃도 살리는 자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먼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므로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호구”이다.
나는 일찍이 고향 “대부뚝”에서 “호구”들과 함께 살았다.
고향 마을 뒤 동서로 지나가는 신작로를 우리는 “대부뚝”이라고 불렀다.
대부뚝은 전군가도의 일부로서 버스와 트럭이 다니는 도로였지만 우리들에게는 놀이터였다.
도로 양쪽 편에 아름드리 큰 플라타너스나무가 가로수로 줄 지어 서있고 그 아래 측면이 다 펑퍼짐하게 경사 져서 우리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최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뚝은 우리들에게 먹거리를 아낌없이 주는 간식창고이기도 하였다.
봄에는 연한 삐비와 뚝새풀을 뽑아 먹고 냉이와 쑥을 비롯한 온갖 나물을 캤다. 계절에 따라 보랏빛 꿀풀, 노란 꽃이 피는 괭이밥, 빨갛게 익는 뱀딸기, 갈색의 꿩의밥, 진보랏빛 먹딸기, 하얀 메꽃 뿌리를 먹었다. 배고프면 핏대를 잘라서 단물을 빼먹었고 소똥 아래서 잘 자라는 잔밥의 연한 뿌리를 먹었다. 잔밥은 내가 부른 이름이었고 실제 이름은 그령 이다. 그리고 가을이면 메뚜기와 섬서구메뚜기가 우리들의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대부뚝 바로 아래 방죽에 가면 마름과 물가에서 자라는 큰 매자기의 달큰한 뿌리가 있었다. 방죽에서 칠팔 분정도 걸어가면 만경강이 흐르고 노란 재첩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자연은 더럽고 불편하고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멀찍이 서서 눈으로 구경하는 대상이 아니고 언제 어디서나 밟고 만지고 뒹굴 수 있는 아버지의 등이며 동시에 따거나 뽑거나 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어머니의 가슴이었다.
대부뚝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계속 피었다. 토끼풀꽃, 양지꽃, 씀바귀, 자운영, 보리뱅이, 질경이, 냉이, 다닥냉이, 재쑥, 꽃다지, 살갈퀴. 미나리아재비, 수영, 소리쟁이, 여뀌, 닭의장풀, 지칭개, 기생초. 망초, 개망초, 명아주, 강아지풀, 수크령, 아욱새, 속새, 쑥부쟁이 등이 계속 피었다. 대부뚝에 올라가면 꽃들이 어린 내 영혼에 속살거렸고 나는 꽃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나누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대부뚝 둔덕에 앉아 토끼풀꽃으로 시계를 만들고 머리띠를 엮었다. 그러다가 봄 신명에 지펴서 아지랑이 따라 너울거리며 도레미방죽까지 단숨에 달려가곤 하였다.
어린 시절 대부뚝은 나의 호구였다.
내가 수고하여 키우지 않은 꽃과 열매와 뿌리를 주었다.
내가 키우지 않은 벌과 나비, 잠자리와 함께 놀게 해주었다. 그리고 메뚜기를 주었다.
내가 물 한번 준 적이 없는 플라타너스에 올라가서 집을 짓고 놀게 해주었다.
가을엔 플라타너스 마른 잎과 모든 풀들을 땔감으로 거저 주었다.
겨울엔 마른 풀을 모아 불을 지펴 추위를 이기며 놀게 해주었다.
대부뚝은 나의 천국이었고 꽃과 나무들은 아낌없이 주는 호구 천사들이었다. 그들 덕분에 나의 어린 시절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환상적인 동화가 되었다. 그들은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나를 바보 이반처럼 살도록 길들였다. 인도로 왔을 때 그들은 신명이 나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를 호위하며 호구로 만들었다. 자기들처럼 주라고, 내려놓으라고 나를 강박하여 초라한 떠돌이 순례자로 만들었다.
호구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외모와 옷차림과 약한 마음 때문에 어디를 가나 금방 정체가 들통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공식적인 선교 사역 뒤에 줄줄이 따라오는 비공식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호구 선교사가 되었다.
은퇴하는 목회자가 갈 곳이 없다고 찾아와서 울며 작은 집을 짓게 도와달라고 하소연을 하였다. 마음 약한 나는 비자금을 주면서 비밀을 지키라고 부탁하였는데 그가 나팔을 불어서 소문이 널리 퍼져 십여 채 오두막 짓는 일을 비밀리 돕게 되었다.
가끔 장학생들이 장학금 외에도 자기 가족이 당한 불행과 고통을 알리며 특별 지원을 요청해서 마음이 불편하고 난처한 상황에 빠졌지만 그래도 그들의 희망을 꺾을 수가 없어 특별 지원을 계속하였다.
직원이 집을 사겠다고 무이자로 돈을 빌려 달라고 해서 거절하지 못하고 당신만 빌려 주는 것이니 비밀을 지키라고 했는데 그가 자랑스럽게 떠벌려서 직원 뿐 만아니라 강사에게 까지도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어야 하는 일이 계속 발생하였다.
우리 장학생들과 고아원의 아이들이 내가 자기들에게 꼼짝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도움을 요청해서 속는 기분이 들면서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이 가끔 발생하곤 한다.
장학결연과 자매결연 후원금을 현지 형제자매님들을 통해서 지불하는데 가끔 그 분들이 욕심을 내서 자기 자녀와 친인척을 마구 소개하여 나를 힘들게 만들곤 한다.
나의 마음이 약한 것을 알고 내가 방문하는 시간에 그 자리에 빈민가의 아동들과 장애 아동들을 데려다 놓아 나로 하여금 꼼짝 못하고 그들을 지원하게 만드는 분들도 있다.
인도 형제자매들이 자기 가족의 병원 입원과 장례식, 결혼식 뿐 만아니라 친인척의 입원과 애경사까지도 알려주어 나를 자주 고달프게 만들곤 한다.
인도와 한국의 교회들이 MOU를 맺도록 힘써서 수고하고 난 뒤에 한국 측 교회가 인도 측 교회 대표를 한국으로 초청하며 항공요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항공비를 지불해주지 않았다. 나는 속이 아팠지만 한국 교회 체면을 생각하여 한국교회가 지불한 것처럼 항공비를 대신 지불하여 주었다. 그랬더니 인도 교회들이 한국에 갈 때 마다 일부 항공요금을 청해 와서 울며 겨자 먹기로 지원하곤 하였다.
나의 여린 마음을 아는 형제들이 난민지원이나 긴급지원을 요청하며 지속적인 강권으로 나를 손 들게 만들었을 때는 정말 울고 싶었다.
이밖에도 다양한 사건과 부탁이 찾아오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나는 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해결사 노릇을 하곤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호구사역이 인도에서 나온 뒤에 끝난 것이 아니라 더 증가한 것이다. 이 불가능한 역사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호구 선교사로 써주신다고 믿는 것 밖에는. 아낌없이 주는 대부뚝 같은 호구로 살라고.
억울해 하는 저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호구로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그리고 네가 호구가 되면
누군가 병든 사람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누군가 공부를 하며 꿈을 꿀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누군가 작은 집을 지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누군가 가족들과 함께 밥상에 둘러앉을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누군가 정글에서 사랑의 쌀로 생명을 부지할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누군가 사람으로 사는 기쁨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누군가 응답된 기도에 감사할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누군가 거듭날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호구로 살도록 깨달음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소란한 세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피와 살로 사랑해 주시는 주님이 계시니 선으로 악을 이기며 평화를 잃지 않는다.
생명과 평화,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시는 성령님이 계시니 세상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나로 하여금 호구로 살 수 있도록 축복해주시는 교회와 벗님들이 계시니 감사가 넘친다.
호구인 나를 불쌍히 여기며 챙겨주는 형제자매들과 벗님들이 계시니 행복하다.
나는 호구! 호구다!
호구로 사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아!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인가!
무엇을 바라겠는가!
호구로 족하도다.
2023년 10월 29일. 축시
우담초라하니 수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