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張保皐)
장보고의 자 (字)는 정집(正集)이요, 어릴 때 이름은 궁복(弓福)인데 또 다른 이름은 궁파(弓巴)라고도 하였다. 관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감의군사(感義軍使), 진해장군(鎭海將軍)이고, 장군의 아버지 장백익(張佰翼)은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부(蘇興府) 용흥(龍興)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중랑장우복야(中郞將右僕射)를 지냈으나 750년경(경덕왕) 신라로 귀화 하였고 장보고 장군은 신라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시인 두목 (杜牧)은 장군과 정년을 이렇게 쓰고 있다. [장보고와 정년이란 사람이 있으니 모두 신라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싸움을 잘하고 특히 창을 잘 썼다. 정년은 바다 물속에 잠겨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았고, 용맹하고 굳건한 것은 보고(保皐)를 따르지 못했으나 정년은 보고를 형이라 불렀는데 보고는 나이로써, 정년은 재능으로써 항상 의견이 어긋나서 서로 굽히지 않았다 ……] (신당서 권 220) 이 내용이 삼국사기 권제 44열전 제4에 가필되어 전해오고 있다.
장군은 당나라 무령군 소장에서 물러난 후 무역상을 하면서 신라의 래도인(來渡人), 백제의 유목민까지 통합을 이루고 산동성, 문등현, 청령향, 적산촌, 유산포, 등주, 로산 등 10여 곳에 신라인들만의 집단촌(신라방)을 세우고, 적산촌 서북쪽 5Km에 법화원(法華院)이란 큰 절을 세우기도 하였다. (절의 규모가 한때 승려가 27~40명이나 상주 했고, 절에 딸린 논이 500석이나 됨) 사업을 확장하면서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리며 비참한 형편으로, 신라 연안에서 해적에 의해 선량한 백성들이 잡혀 온다는 것을 알고 비통함을 금치 못하며 서해의 해적들을 소탕할 길을 늘 생각하다가 828년 4월 신라 흥덕왕을 배알하고 군사 만 명을 얻어 청해진 대사가 되어 청해 (완도)에 군진(軍鎭)을 세웠다.(삼국사기 흥덕왕 편)
김성훈 (金成勳)교수는 “ 장보고 해양 경영사 연구의 의의 ” 란 논문에서 청해진과 장군을 일러 군산복합 종합상사(軍産複合 綜合商社)의 수장 (首長)이라 했다. 장군은 청해진을 세워 서해의 해적을 섬멸하여 신라인들이 평안히 어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고 신라와 일본, 신라와 당나라로 무역을 함으로 해상무역의 길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신라 역대 왕 연대표
왕위 왕 명 성씨 재위 시기 왕릉 위치 특기 사항
42 흥 덕 왕 김 11 826 ~ 836 안강읍 육통리 淸海鎭 설치 (張保皐), 차나무
43 희 강 왕 김 3 836 ~ 838 내남면 망성리
44 민 애 왕 김 2 838 ~ 839 내남면 망성리
45 신 무 왕 김 1 839 ~ 839 대도동 장보고 지원으로 왕위, 病死
46 문 성 왕 김 19 839 ~ 857 서악동 남해일대 制海權 장악(장보고)
- 837년 5월 김명(金明)에게 화를 당할까 두려웠던 우징(후에 신무왕)이 황산진구로 달아나서 청해진대사 궁복에게 의지하였다.(삼국사기 희강왕 편)
- 838년 1월 상대등 김명이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물리치고 왕이 되다 (삼국사기 민애왕 편)
- 838년 우징의 요청으로 대사 정연에게 군사 오천을 나누어 주고 또 12월에는 김양(金陽)을 평동장군으로 삼고 염장(閻長), 장변(張弁), 락금(駱金), 장건영(張健榮), 이순행(李順行)과 더불어 싸우게 하고 839년 윤 정월에 민애왕을 살해하고 우징이 왕이 되었다.(삼국사기 권 10 민애왕 편)
- 839년 신무왕이 즉위하고 대사에게 감의군사로 삼고 식실 이천호(食實二千戶)를 封하였다.(삼국사기 권제 10 신무왕 편)
- 839년 신무왕이 갑자기 죽자 태자 경응(慶膺)이 대를 이어 문성왕(文成王)이 되다.
청해진대사 궁복에게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겸하여 의복을 하사 하였다. (삼국사기 권제 11 문성왕 편)
- 845년 문성왕이 청해진 대사의 딸을 차비(次妃)로 취(娶)하려 했으나 정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 846년 한때 청해진 대사의 수하였던 무주인 염장(閻長)이 출세의 길을 얻고자 황도에 남아있더니, 청해진 대사의 보복이 있을까 두렵게 생각하고 있던 정신들에게 나아가 대사 암살을 약속하고 청해진에 이르러 대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기를 위한 주연석에서 대사를 암살하고 달아난다.(삼국사기 권제 11 문성왕 편)
이상의 기록을 통해 나약한 정신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청해진과 대사를 경계했으며 나라의 번영과 장래를 위해선 얼마나 근시안적 이었는지 하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 청해진 대사의 해양 경영사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의 사기에서는 모조리 삭제되고 없으니 애석하나, 오히려 외국 사람들이 보고 기록한 기록으로 신당서(新唐書), 일본후기(日本後記) 續 日本後記 그리고 일본의 승려 자각대사(慈覺太師) 원인(圓仁)이 10년 동안 지내며 쓴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에 귀중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장군이 암살당하고 6년째인 851년에 청해진을 파하고 남은 백성들을 벽골군(碧骨郡 현재김제)으로 옮기었다라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상당기간 청해진의 세력들이 청해진을 지키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다시 말해서 대사의 가족과 막료들이 청해진을 포기하고 당으로 돌아가는데 걸린 시간이 길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 안동 장씨 중앙대종회 홈 페이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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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간의 욕심이 항상 화를 자초하는것 같네요.
청해진 대사로 만족하지 못하고 중앙정부쪽으로 세를 넓혀나갈려고 시도했던게 아까운 인재를 잃는 계기가....
장군은 청해진을 세워 서해의 해적을 섬멸하여
신라인들이 평안히 어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였네요.^^*
이순신 장군전에 이땅에서 바다를완전히 장악한 유일한 장군이였죠
장군은 당나라 무령군 소장에서 물러난 후 무역상을 하면서
신라, 백제인을 위해 많은 일을 했네요
아마도 당나라 말기의 혼란스런 정치에 환멸을 느껴 신라로 귀화한 것 같습니다.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828년 4월 신라 흥덕왕을 배알하고
군사 만 명을 얻어 청해진 대사가 되어 청해 (완도)에
군진(軍鎭)을 세웠네요.
아마도 서해안쪽에서 어린시절을 보내 서해바다를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던 해적들로 인한 어려운 사정을
익히 잘알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45대 신무왕의 아드님 4형제중 3째 아드님이 저의 시조이신 김자흥자광자이십니다. 젊었을 때 피비린내 나는 왕권다툼이 싫어 왕자의 자리를 내려 놓고 지금의 전남 광주 서일동에서 세거하셨다. 고려때 2대~9대 까지 평장사이상 8분이 많이 나오셨다 하여 사시는 서일동이 평장동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전하여 지고있다. 본인은 광산김씨 41대 선자돌림자 입니다.
아 ! 그렇군요. 광산김씨의 시조가 김자 흥자 광자이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