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이야기 / 바르사, 아니면 죽음을 / 야마 나무 / L.E.L., 마지막 날들 / 우리 거미들의 삶
/ 비밀스러운 사랑 / 행복 / 요 / 아무도 아닌 / 조금은 교훈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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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이건 바로 존재한다는 행복감이야,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고 - 이건 특이해, 새롭다고!
그러면 이제 우리는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만사형통인 건가? - 그냥 짧은 한순간의 망각, 중간 휴식, 심한 변덕이라고 해두자 - 결국 이기적인 행복이란 말인가? - 원한다면, 이기적인 사람이 안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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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유진은 대답할 말, 반박할 말을 지어냈다.
그에게 차마 하지 못한 모든 말을.
모든 게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건 사소한 일이야, 존재의 표면에 진 주름 하나 같은 거라고, 이야기할 가치도 없어, 나머지 모든 것을 함께한다면, 지나가는 순간순간 인생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안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냐.
누군가와 함께하면서 모든 것을 나눈다면, 혼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면 권태도 없고 타성에 젖는 일도 없을 거야.
그건 인생의 한 순간이야, 무한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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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녀는 날개를 살짝 들어 올리듯 두 팔을 몸에서 조금 벌려본다.
새벽빛이 벌써 그녀 앞에 와서 그녀의 두 눈 깊숙이 들어와 저항할 수 없는 부름으로 그녀를 함빡 적신다.
나는 간다. 나는 갈 거야. 그녀는 생각한다.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이 집요한 시선, 스며들어 자신을 꿰뚫는 눈 없는 시선을 느낀다.
구름 없는 하늘에 얼굴 하나가, 떠오르는 달처럼 창백하고 매끄러운, 특징 없는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 두 삶 사이에 매달려 꿈에 이를 때까지 무한과 만나 자유로워지고, 훨훨날고, 기억도 고통도 떨쳐내려는 어떤 목소리, 부름이다.
그녀는 옥상 가장자리에 있다.
그녀의 발가락들은 시멘트에 힘껏 달라붙어 있고, 이 건물이 지어졌을 때부터 스쳐지나간 비와 바람에 쓸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차갑고 콕콕 찌르는 알갱이들이 관절 마디마디에 느껴진다.
유진의 마음속, 머릿속에는 이미 주차장을 향해 훌쩍 뛰어내려 부서져 널브러진 몸, 목 구멍에서 뿜어져나온 피, 파열된 눈의 하얘진 각막을 뒤덮은 진홍색 피, 멈춰 선 자동차 바퀴들 사이로 낭자한 피.
이 모든 것이 어떤 소리를, 아니 소리가 아니라 하늘, 바다, 공항, 그리고 억새밭까지 에워싸는 얇은 울타리를 형성한다.
그녀의 두 발이 거부한다.
벌어진 발가락들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단단히 붙어 있다.
시멘트 가장자리를 놓지 않을 것이다.
발가락들은 유진의 몸 한가운데까지 전율을 퍼뜨리고, 다리를 쇠기둥으로 변모시키고, 등골의 인대를 긴장시키고 머리를 뒤로 젖히게 한다!
발가락들은 세이렌의 노래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살아 있으며, 죽고 싶지 않다!
유진은 뒷걸음질로 지붕 위를 걷는다.
본능적으로 손으로 배를 감싼다.
마셔버린 빈병들의 잔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들 한 가운데로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미끄러진다. 그중 그녀가 남긴 것은 많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보다 먼저 여기 와서 술에 진탕 취했다가 삶을 잇기 위해 아무 일 없이 멀쩡하게 돌아간 것이다.
유진은 쉬지 않고 진동하며 더운 김을 뿜어내는 굴뚝 아래쪽에 주저앉아 있다.
태양이 지평선의 연무 사이로 광채를 발하고, 첫 비행기들이 지구 저편을 향해 도시 위로 이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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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길다.
예전 같으면 무의미하고 대단치 않게 여겨졌을 순간순간, 몸짓 하나하나, 오늘이 영원히 계속된다.
유진은 결코 끝나지 않을 듯 매 순간을 사는 것에 깜짝 놀란다.
자신이 사무엘도 크리스티앙도 아닌 다른 누군가, 그녀 안의 자기 분신인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
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게. 그것이 뼈도 거의 없고 겨우 몇 그램밖에 안 되는 태아 때문일리는 없다.
하지만 그녀의 배는 양수로 가득차서 불룩해지고, 부풀어오르면서 피부가 팽팽히 당겨져 매끈해진 가슴에서는 정맥이 비치고 젖꼭지는 단단해지고 작은 돌기들로 덮여 있다.
밤에 그녀는 숨이 차고 땀이 나서 이불을 차버린다.
해변에서처럼 벌어진 발가락들, 그녀는 일렁이고 꼬물거리는 태동을 느끼기 위해 배에 손을 대고 있다.
그녀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이 그 주위를 돌고 있다.
커튼 없는 창문 너머로 그녀는 어두운 밤을 바라본다.
별이 천천히 나아간다. 그것은 무한한 아름다움을 지닌 신이다.
그 별이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밀려오는 행복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자신에게 끝까지 가볼 힘, 자신의 역사를 살아낼 힘이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이제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안다.
다른 어떤 것도 이젠 중요하지 않다.
휴대전화가 침대 옆 탁자에서 울려도 좋고 작은 화면에 빛이 들어와도 좋다.
그녀의 번호를 다시 알아낸 사무엘이 전화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알아 냈을 수도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 조사를 했을 테고, 지금쯤 꽤나 궁금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진은 응답기에 인사말을 남기는 대신 <바일렐로>를 부르는 키리테 카나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게 해둔다.... 그녀를 위해 말하는 이 목소리가 좋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지난 일, 그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똑같은 것, 무한히 긴 똑같은 순간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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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선생님, 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청소기, 다리미, 냉장고, 냉동고, 제게 필요한 건 다 집에 있어요.
빨래요, 빨래방에 갈 거예요.
기계는 항상 고장나잖아요. "어떻게 되어가지?" 좋습니다. 좋아요.
당신은 어떠세요? 우거지상.
달님은 어디 있나요? 난 그가 보고 싶어요.
아름다운 얼굴, 밤의 미소가.
아니요. 가차없는 빛을 무대에 쏟아내는 요오드 조명 말고요.
아니면 해님이라도요, 제발. 숲속 빈터의 감미로운 여름 공기 속에 수확이 끝나 그루터기만 남은 밭에서요.
증인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아이 아버지 말이에요.
"출산을 지켜봐줄 누구 있어요?" 설명 없이, 아니요.
이번엔 병원 직원들 차례다. 반복해서 묻고 적고 강조한다.
불쌍해라. 혼자서 아무도 곁에 없나봐. 찾아와줄 사람도 없고.
얼굴들이 착한 요 정처럼 몸을 굽혀 주의깊게 내려다보고 있다.
유진은 왼쪽에 있는 조산원의 손을 꽉 쥔다.
어리디 어린 여자로 장밋빛 뺨의 어린 애 같은 얼굴인데 두건에서 금발의 곱슬머리가 빠져나와
있다.
유진은 고마운 마음이 밀려와서 그녀의 이름과 나이를 알았으면 싶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조산원 실습을 받았는지도. 남자친구 는 있는지, 곧 결혼할 건지?
들이쉬고, 내쉬고 ..... 두 호흡 사이에서 그녀는 질문할 겨를이 없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낮이 다 지나 태양은 구름 뒤로 숨고 달빛은 사위었고 이 눈부신 조명뿐이다.
난 아기가 파란 물속에서, 숲속 빈터에서, 수확이 끝나 그루터기만 남은 밭에서 태어났으면 해요. 벽 너머에서 달님이 하늘에 떠오르자 그의 노랫소리와 속살거리는 물소리와 흔들리는 풀의 감미로운 속삭임이 또렷이 들려온다.
유진의 딸이 태어난다.
그리고 유진은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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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름이다.
구름이 모래언덕 위로 흘러가고 바람이 모래 사장에 핀 엉겅퀴를 흔들고, 살갗의 털도 파르르 떨린다.
유진은 바람을 피해 모래언덕 아래 웅크리고 누워 있다.
그녀는 피부를 스치는 바람결과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를 느낀다.
오목한 배 위에는 월랄리가 잠들어 있다.
아이는 태어날 때를 기억 한다는 듯 머리를 아래로 두고 거꾸로 자고 있다.
유진의 가슴 사이에 아이의 작은 두 발이 아무렇게나 맡겨져 있다.
그러자 유진은 지치지도 않고 발가락을 세어본다.
월랄리를 웃기려고 유진은 어머니가 들려준, 전래 동요 <이 꼬마 돼지>를 흥얼거린다.
꼬마 돼지가 시장에 갔다네, 꼬마 돼지가 집에 있다네, 그리고 새끼발가락을 잡고 위-위-위-위-위. 길을 쭈욱 따라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모두 해서 열.
자갯빛 발톱이 달린 작은 분홍색 발 가락들, 월랄리, 그건 공항으로 가는 길에 안개와 뒤섞이던 긴 줄기들과 복슬복슬한 방울 술을 기억하며 유진이 고른 이름이다.
사뮈엘은 싫다고 하지도 않았고 이유도 묻지 않았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왔고, 더이상 세상 끝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삶은 유진과 월랄리의 머리 위로 흘러가는 구름처럼, 모래시계 소리를 내는 바다처럼 변화무쌍하다.
월랄리가 태어났을 때 유진은 아기를 데리고 매일매일 바닷가에 가리라 결심했다.
바닷소리와 바다 내음이 그에 안에 배어들어 그애가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그녀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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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려면 내가 바뀌어야 해. 더이상 이곳에 속해서는 안 되는 거지.
저편에서 뭔가 다른 것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거나, 또는 지금까지의 내 삶, 모든 것을 성찰하고 비판하는 내 삶, 이런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나는 우연 속에 놓여 있었고 떠나서 삶을 바꿀 좋은 기회를 기다려왔다는 생각,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거야.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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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밀항 알선업자에게 돈을 주고 카누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갈 거야.
바르사를 향해서, 죽음을 향해서! 절대 안 돌아와, 절대로, 엄마가 죽어도 절대 보러 오지 않을 거라고!"
아마 이런 말 들이 소리 없이 그의 목구멍에서 빠져나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릴라가 계단에 털썩 주저앉더니, 리멜 표 마스카라를 화장지로 닦으며 이쇠 할머니처럼 큰 소리는 아니지만 소녀처럼 처량한 소리로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붙임머리가 개 귀때기처럼 옆으로 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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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소리가 하늘을 채우고 어두운 땅을 다시 뒤덮고 있다.
왓슨은 파도 하나하나가 배에 도달하는 소리에 귀기울이고, 말려 올라가 바람 속에서 거품을 일으키는 물마루 소리를 분명하게 구별해낸다.
그는 섬의 호텔방에서 파투와 함께 듣던 바닷소리가 떠오른다.
그들의 몸이 하나가 되어 어디론가 실려갈 때, 파도의 리듬을 따라 고조된 숨소리 그에 맞춰 뛰는 심장 소리와 함께 천천히 반복되던 그 소리를.
그는 자신이 여기서, 이 검은섬의 넓은 바다에서 해변을 눈앞에 두고 물에 빠져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
생루이에 있는 어부들의 묘지 비석에는 바다에서 실종된 누구누구, 그리고 날짜가 새겨져 있다. 그는 그들, 카누 바닥에 웅크린 채 새끼 염소들처럼 서로서로 끌어안고 있는 아이들도 생각한다. 그에게 욕을 한 남자는 두려움에 납빛이 된 얼굴로 배 뒤쪽에 널브러진 채 손으로는 모터 덮개를 붙들고 입으로는 '비스밀라'를 웅얼거리며 신을 찾는다.
오직 늙은 키잡이만이 잠에서 깨어나 후들거리는 다리로 배 뒤쪽에 서서 거친 바다에, 덮쳐오는 파도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그의 너덜너덜한 스카프가 해적 깃발처럼 펄럭인다!
끝내,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다른 때보다 더 큰 파도도 아니었건만,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나무둥치처럼 카누가 단번에 휙 뒤 집히고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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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감정이 북받쳐서 목이 메었고 파투는 그가 이 도시에서 단 한 명의 친구였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언젠가는 되돌아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하자 잠보는 화를 내다시피 말했다.
"절대로 그래선 안 돼요, 여긴 지옥이니까. 우린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야, 나의 누이, 안녕"
이것이 파투가 이 큰 도시 바르사에서 누군가와 나눈 단 한 번의 마지막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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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투는 로스 코코테로스에 있는 여유 있는 영국인들을 위한 고급 주택지 세드레스에서 일거리를 찾았고, 그 부속 건물에 딸린 방도 하나 구했다.
침대가 너무 좁아서 그녀는 매트리스 두 개를 그냥 맨바닥에 깔았다.
바로 거기서 왓슨은 단지 반대편에 있는 공동 욕실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가지도 않고,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채 자유의 첫 며칠을 보냈다.
밤이 되면 예전에 고래 섬의 분홍 방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닷바람이 야자수 사이로 불어왔다.
파투는 왓슨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장래에 대해서는.
그녀는 오직 왓슨 이 잠에서 깨어날 그 순간만을 생각한다.
그의 몸과 영혼의 각 부분이 생명을 되찾으리라. 잠보가 말했듯이 그는 다시금 완전 해지리라.
머리, 눈, 키, 입술. 어깨, 등, 팔, 손 그리고 성기, 그는 자신의 피부에 와닿는 파투의 강인하고 따뜻한 손만이 필요할뿐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이제 그들은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늙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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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야마 나무야" 마리가 말한다.
존경스러운 노인에게 하듯 눈을 내리깐 채 무릎을 끓는 것이 아니라, 팔을 벌리고 손을 펼친 채 나무를 똑바로 보며 자기 방식대로 나무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고는 나무 안으로 들어간다.
처음으로 나무 속에 들어간 것은 읽기와 셈을 배우는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였다.
마리는 파란색과 초록색의 스코틀랜드 타탄체크 치마와 흰 블라우스 교복을 입고 윤이 나는 새 구두를 신었다.
옷을 망치지 않으려 벗어버리고 신발은 입구에 벗어둔 채 벌어진 구멍을 통해 나무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밖에서는 태양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작열하고 있었다.
열기 속에서 새도 벌레도 바람도,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하지만 나무 안의 공기는 서늘해서 마리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야마, 나야, 손녀딸." 마리는 속삭였다.
“들여보내줘, 오래전부터 들어 가고 싶었어, 나를 받아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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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아주 크고 품이 넉넉하다.
강인한 몸체는 그루터기에서 돋은 새싹과 기둥과 문설주와 밧줄과 다리 들로 나뉘어 있다.
그 뿌리는 땅속에서부터 온 세상으로 뻗어 있다.
마리가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
옛날에 어렸을 때는 얼마나 쉬웠는지를 떠올린다.
지금은 엉덩이가 문을 통과하기 어렵고 머리는 문틀에 부딪히고 머리카락은 이끼와 가시에 걸린다.
하지만 금세 냄새와 그림자와 부드럽고 축축한 펠트천 같은 바닥을 알아보고 나무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오, 야마. 마리는 벌 진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되된다.
"오, 할머니, 저를 보호해주시고, 저를 당신 뱃속에 다시 품어주시고 젖도 주세요.
제 친구 에스메도 보호해주세요. 저애는 제 자매니까요.
저애도 당신 안에 받아들여주시고, 저희를 적으로부터 구해주세요.”
이번에는 에스메가 들어온다.
에스메는 아프고 고열과 절망으로 떨고 있다.
마리는 에스메를 방 안쪽, 목수개미들이 남겨놓은 마른 양탄자에 눕힌다.
햇살이 굴뚝을 타고 내려와 잎사귀와 새들의 노래와 섞여 연한 초록색을 만들어낸다.
마리는 나무 안쪽 벽 껍질이 접힌 부 에 고인 맑고 신선한 빗물을 손바닥으로 펴다가 에스메에게 먹인다.
"꿀처럼 달아” 하고 말하면서 에스메는 허겁지겁 마신다.
어린애 같은 목소리를 듣고 마리는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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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 보낸 사자는 매일 밤 같은 시각에 다시 왔다.
그 짐승이 나무 주위를 걸으며 춤을 추면 소녀들은 곰처럼 둔중하고 어둡고 강한 실루엣, 넓적한 얼굴과 작은 귀를 알아보고는 너그러우면서도 변덕스러운 조상 할머니에게 보호받고 있음을 느낀다.
마리는 매일 저녁 바나나나무 잎사귀에 바나나, 생강, 말린 생선 같은 먹을 것을 남겨놓는다.
물도 나무껍질로 만든 사발에 담아 준비해주는데 그 달콤한 빗물을 하이에나는 조금씩 할짝거리며 들이마신다.
짐슴은 생강은 남겨두고 다른 것만 조금 먹은 뒤 고맙다고, 잘 먹었다고 말하는 듯 작은 소리로 으르렁거린다.
마리와 에스메는 밤마다 잠도 자지 않고 바닥에 누워 얼굴을 문 가까이 대고 그 짐승이 오기를 기다린다.
풀 속을 걷는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오면 그들은 가까이 접근하는 짐승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마리는 그 짐승이 겁먹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다.
마리는 야마 할머니 이야기, 할머니가 자신을 숨겨놓고 젖을 주고 살인자들과 학살자들로부터 보호해주던 시절, 예전에 나무 속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이에나는 귀를 기울인다.
마리에겐 그 짐승의 눈이 보이지 않지만, 짐승은 넓적한 얼굴을 나무 쪽으로 돌리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다.
그러고는 작게 으르렁거림으로 대답하고 흙속으로 숨을 뿜고 땅 위를 구르고 몸을 흔들어 흙을 털어내면, 달빛 속에서 먼지의 후광에 에워싸인다.
그 짐승은 막강하다.
짐승은 큰 강 양 쪽 기슭에 우거진 숲의 지배자이며, 삶의 신비를 아는 대지의 할머니로서 인간들의 의지와는 달리 이 땅을 지켜낼 것이다.
그 짐승은 고독하고 나이가 없으며, 강물이 시작되는 곳, 사막 가장자리를 따라 뻗어 있는 산맥, 모래와 바오밥나무의 고장 태생으로, 야마의 후예를 보호하고 시련을 겪는 아이들과 함께하려고 밤처럼 어두운 색깔에 과묵하고 경이로운 모습으로 삶의 저편에서 왔다.
그 짐승은 전쟁이 끝나고 아무도 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되어야만 그 아이들을 떠나 북쪽에 있는 저희들의 안식처, 동족들이 살고 있는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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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중순, 찰스 테일러는 무기를 내려놓고 권좌를 포기했다.
마리와 에스메는 마을 사람들의 환희에 찬 아우성을 듣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소녀들은 대낮에 나무에서 나와 칼랑고를 향해 길을 떠났다.
농가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맨발에 넝마를 걸치고 진흙과 풀이 머리에 영겨붙은 채 길을 따라 지나가는 두 인간의 형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 명은 몹시 창백한 피부에 맹인처럼 눈이 투명했고, 다른 한 명은 회색 반점이 얼룩진 흙빛 피부에 얼굴은 광기 어린 표정을 띠었다.
두 소녀가 침묵 속에 나아가자 모여 있던 아이들 무리가 그 앞에서 양쪽으로 갈라졌고, 늙은 여인
들은 귀신이라도 본 줄 알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민병대들이 겁탈한 후 긴 도살용 칼로 살육하여 숲 한가운데 빈터에 묻어버린 여인들의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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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녀는 확신했다. 끈질기게 조른 끝에 그녀는 메리 아마로부터 진실을 알아냈다.
그녀가 오기 전에 어떤 여자가 요새에 살았다는, 어떤 웬치가 총독의 거처에서 살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러타샤가 도착하기 전날 떠났는데 정확히 조지 매클레인이 한밤중에 배를 타고 떠난 바로 그때였다.
아이들도 있었고? 메리 아마는 그녀에게 딸이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멀리 스리포인츠 곶의 악심 쪽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애 이름이 뭐지? 메리 아마는 그애는 충독이 요새에서 세례를 받게 해서 로르라는 이교도 이름으로 불렸다고 했다.
이 이름을 듣고 러티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귀에 거슬리는 비웃음과 조롱의 웃음이었다.
운명은 남편의 흔혈 딸에게 그녀가 자기 딸에게 붙여준 것과 똑같은 이름을 붙여주며 그녀를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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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가 겨우 열여섯 살이었을 때 오른손에는 여자애들의 훌라후프를 들고 왼손에는 바이런의 시집을 펼쳐 들고 옥스퍼드 스트리트에서 산책하는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그가 기혼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열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녀는 시 덕분에 자신은 자유롭다고 느꼈다.
거만하고 자유로운 그녀는 자신이 실수를 하거나 속임을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 운명보다 강하고 여성해방을 누리며 아프리카의 노예해방을 위해 싸울 것이었다.
감옥처럼 좁은 방에 갇힌 그녀 앞으로, 지나가버린 영광스러운 영상들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히려 無로 돌아가는 환영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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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러티샤를 부르고, 무겁고 어두운 음악 속에서 죽음이 유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그곳, 요새의 곶까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람은 그녀가 나가지 못하도록 강력한 손으로 덧문을 누르고 있었다.
이 손이 그녀를 감옥에 가둔 것이다. 누구도 절대 그녀를 해방시킬 수 없으리라.
"친구들, 오 친구들이여, 어디 있나요?"
러티샤의 탄식은 그녀가 인데버호에서 내릴 때 썼던 서간시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내가 그대들을 생각하듯 그대들도 나를 생각하는지, 오. 친구들이여?"
그녀는 기도문을 암송하듯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려고 했지만 공포에 질린 그녀에게 어떤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로라라는 이름만이 떠오르고, 죽음이 그애를 노르망디의 차가운 겨울로 데려가기 전의 연약하고 빛나는 아이 모습 그대로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탁자 위에서는 기름 등잔이 떨고 있고, 빗방울이 덧문들을 두드리며 휘몰아치고, 공중에 날린 모래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러타샤는 글을 써보려고 했지만 두서없는 편린들만 펜 끝에서 흘러나와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쓰였다.
그녀는 필기대 위로 몸을 숙이고서 악심 여행에서 도로 가져온 불투명한 작은 병에 마지막으로 거위깃 펜을 담갔다.
감미로운 아몬드 냄새가 방안 가득 퍼졌다.
무서우면서도 어린 시절의 과자처럼 달큰한 냄새였다.
그러고는 떨거나 주저하지 않고 펜 끝을 입술로 가져갔다.
아침에 하녀가(아직 어린애인 신참으로 러티샤는 그애 이름이 뭔지 물어볼 시간조차 없었다) 덧문들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와 서는 어둠 속에서 눈을 크게 뜨고 커튼을 문 양쪽으로 열어젖히 다 말고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여주인의 시신이 바닥의 붉은 타일 위에 널브러진 채 반쯤 의자 위에 결쳐 있고 탁자 모서리에 밀려난 팔을 허공에 내뻗고서 하늘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듯했다
사망을 확인한 것은 셰퍼드였다.
탁자 위에서 즉각 자기의 청산 약병을 알아본 그는 한순간 그걸 아편정기 병으로 잽싸게 바꿔치기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하녀에게 들킬까봐 겁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병사 한 명을 보내 매클레인 총독에게 기별을 하자 정오가 되기 조금 전에 그가 도착했다.
셰퍼드가 의료기록부에 벌써 작성해놓은 검시서에는 이런 소견이 담겨 있었 다.
"희생자가 청산을 요새의 의사가 신경 발작 치료를 위해 처 방한 아편정기로 오인해 흡입하여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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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날 저녁, 폭풍우가 다시 시작되려 하는데도 조지 매클레인은 풍랑이 거친 바다에서 난파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병사 몇 명과 함께 아노마부로 가기 위해 배에 올랐다.
그의 가슴은 죽음이 남겨놓은 빈자리를 어서 채우고 싶은 욕망에서 오는 달콤한 흥분으로 벅차올랐다.
저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두미사의 품안에서, 어린 로르의 입맞춤과 재잘거림 속에서, 왜 그토록 오래 집을 비웠느냐며 뾰로통하게 제 아비를 질책하고야 말 딸아이 곁에서 떠오를 태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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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형제들의 손에 이방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간 브라푸족 멘카심의 아두 왕 혈통인 아자사의 딸 아두미사다.
우리가 적들보다 열등한가, 주인이 바뀌어 백정의 칼 앞에 끌려온 짐승들과 우리가 매일반인가? 비밀스러운 계곡의 장로들은 난관의 매듭들로 점철된 내 인생의 끈을 내 생의 첫날에 그랬던 것처럼 매끈하고 순결하게 돌려놓았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그 끈을 조지 매클레인의 딸 로르 아위아빌에게 준다.
그애가 태어나던 날 신니 강물에 그애를 목욕시킬 때처럼 자유롭고 순결하게 남아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방인 여자는 독약에 중독되어 얼굴이 상하고 몸은 검게 변해 떠났다.
나는 밤마다 아위아빌을 꼭 끌어안고 민나 노파의 집 앞 모랫바닥에 누워 그녀의 꿈을 꾸었다.
그 이방인 여자가 멀리 북쪽으로 달아나는 꿈.
그녀의 영혼이 바다 위에서 제 조상들의 땅에 다다를 때까지 떠도는 꿈을 꾸었다.
병사들이 나와 아위아빌을 충독이 기다리고 있는 요새로 데려가려고 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나에게서 원하는게 무어냐? 나는 버렸다가 다시 불러들여도 좋은, 주인 명령 에 복종하는 짐승이란 말이냐? 예전에 외종조모 아두미사가 애 인의 총을 당신 가슴에 겨누어 명예를 구했듯이 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병사들은 민나 노파의 집 앞 땅바닥에 앉아서 그녀가 준 푸푸를 먹고 코코넛 즙을 마셨다.
병사들은 바로 저희들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무리지만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들은 붉은 옷을 입고 검은 가죽 신발을 신고 모자를 썼다.
그들은 총과 칼을 지니고서 그걸로 우리 종족을 죽였다.
그들은 제 조상을 배반하고 이 땅에서 이방인, 고아가 되었다.
그들은 저희의 형제자매를 바다 저편에서 온 배에 팔아넘겨 지옥으로 끌려가게 만들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은 적이 없고 기독교인들의 책도 읽을 줄 모르며 예수 왕도 알지 못한다.
아위아빌은 나의 파뉴 자락에 매달려 내 뒤에, 내 그림자 안에 머물러 있다.
저녁에 병사들은 케이프코스트의 요새로 되돌아잤고 나는 그들이 숲을 지나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길이 끝나는 곳에 남았고 아위아빌은 나무 밑동을 휘감은 칡넝쿨처럼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누구도 그애를 나에게서 떼어내지 못하리라.
누구도 그애를 잡아다가 노예로 만들지 못하리라.
끈은 아무 매듭 없이 매끈하다. 장로들이 나를 자유롭게 만든 것이다.
이방인 여자는 제 조상들의 나라로 되돌아갔지만 나는 결코 조지 매클레인, 베치, 붉은색, 바다 위 자기 요새에 있는 충독을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도 곧 자기 나라로, 예전에 나에게 얘기해준 추위와 안개의 고장, 태양이 뜨지 않는 고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나는 표범과 하이에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숲속의 길을 걸어 내 외종조모 아두미사가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련다.
그리오들이 노래한 대로 그분이 내 꿈속에 나타났다.
노란 비단 파뉴를 입고 손목에는 황금 팔찌를 끼고, 매끄럽고 윤기 나는 붉은 피부, 먹으로 그린 긴 눈을 하고서.
나는 아위아빌을 데리고 그분에게로 간다.
그분에게 자유로운 여인들의 삶을 배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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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우리의 계곡 도처에 내려앉으면 공기는 마치 극세섬유들, 먼지 빛깔의 씨실과 날실로 엮은 교직물로 가득찬 것 같다.
이들은 나뭇가지들과 돌들 사이에서, 언덕들 사이에서 살랑 살랑 나부끼면서 세상 끝까지 다리를 놓는다.
이렇듯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다.
공기는 우리 것이고 우리는 그걸 입으로 잡아다가 다리 사이에 붙들어둔다.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린다.
연약하고 작은 짐승들은 우리가 만든 고치의 보호 아래 잠들고, 밤은 시시각각 우리가 내놓는 실로 고치를 짜고 있다.
우리는 쉬지 않고 거미줄을 친다. 밤에도 거미줄을 친다.
하늘은 우리가 엮은 그물로 덮여 있다.
그것은 숲을 이루고, 한 오라기의 흐릿한 거미줄이 생명을 빨아들인다.
우리는 침묵을 짠다.
그러면 저마다 땅굴 구멍 속에 잡혀 있는 작은 동물들은 머리가 꼬리에 당도록 동그랗게 몸을 말고 저희들의 시큼한 숨결에 싸여 잠을 잔다.
그들은 밤에 기껏해야 무슨 떨림, 무슨 빛 같은 꿈이나 꿀 뿐이다.
그들은 다리를 비동거리고 수염을 바르르 떨며 감긴 눈거풀 아래서 눈알을 굴리고 있다.
우리는 보호자인 까닭에 불침번을 선다.
우리는 낮이고 밤이고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회색 거미줄은 땅과 이어져 바람에 나부낀다.
우리는 기다린다.
시간은 흘러가면서 파리 몇 마리와 길 잃은 나비 몇 마리를 우리에게 흔쾌히 넘겨준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비단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연약하고 발가벗은 작은 동물들이 저희들의 구멍에서 평화롭게 잠든 것은 다 우리 덕분이다.
우리는 밤이 그리 무섭지 않다.
밤은 더이상 비어 있지 않다. 밤은 이제 그리 춥지도 멀지도 않다.
수풀 사이에, 가지들이 갈라지는 자리에, 황소자리가 있는 창공에 이르기까지 지켜보는 이 모든 눈들이 있는 것이다.
곧 날이 밝고, 태양이 물에서 나와 계곡 주위를 도는 운행을 다시 시작한다.
우리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여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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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자 별 하나가 하늘에 나타났다.
마야는 짧은 순간 눈을 뜨고 그 별을 보았다.
그녀의 입은 차마 미소를 짓지는 못했지만 안간힘을 다해 그 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모국어인 보즈푸리어 몇 마디가 입술에서 새어나온다.
'이스트 아스파라 코타 사리, 토레 라스타 타카트 랄리'
바로 내가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영혼은 그 누구도 결코 이야기해준 적 없는 저 무한을 향하여 조용히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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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덧없는 것들이 그렇듯이 결국은 그것도 비에 젖고 음식물로 얼룩지고 나방에게 먹혀버리고 말리라.
앙드레아는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사람들이 자기 책을 간직하라고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단 몇 글자, 문장 한 줄, 이름 하나만 남는다 해도, '이스트 아스파라 코타 사리, 토레 라스타 타카트 랄리', 마야가 죽기 전에 중얼거린 이 보즈푸리어 몇 마디만 남는다 해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수도원 정원에서는 매일 저녁 그렇듯이 찌르레기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앙드레아는 파얄이 오기를, 부리로 유리창 쪼는 소리를, 검은 아이라인의 눈을 기다런다.
그녀는 여전히 회색 옷을 입고 의자 위에 꼿꼿이 앉아 두 손을 앞자락에 둔 채 기다린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결코 모를 일이지만 만반의 준비를 해두고 싶어서 검은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이다.
모기들이 노란 하늘에서 춤을 추고 있다.
앙드레아는 세계는 하나다, 라고 생각하며, 마치 조금 건방진 이런 뻔한 이치가 진정 대단한 것을 의미하기라도 한다는 듯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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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멀지 않은 우중충한 회색 도시. 도시를 남북으로 절반씩 가르는 큰 강.
다리들, 부식 방지 페인트가 칠해진 옛날 철제 다리며, 강철 케이블로 가림판을 매달아놓은 거대
한 아치 모양의 현대적인 시멘트 다리.
도시 위를 나는 새들의 외침, 바닷새, 맹금, 구슬픈 외침, 녹슨 경첩이 삐걱대는 소리.
다리 위, 강둑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단조로운 소음, 가끔 들려오는 짐승 소리 같은 외침, 키잡이를 부르는 배, 정차하지 않고 역을 통과 해 북쪽으로 달리는 고속 열차
그것은 얼마 뒤, 우리가 알고 있던 것 중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거의 없을 때, 시간의 굴곡 속에서 일어날 일이다.
이윽고 전쟁은 세상의 껍데기를 바꿔놓고 도시들은 깨진 거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사이 행복이라는 단어는 사라졌다.
설령 세상 어디엔가 아직 존재한다 해도 그건 금지된 말이고, 이젠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달아나는 삶처럼 의미가 빠져나갔다.
아마도 그 말은 모든 사람들, 부동산업자, 보험설계사, 자동차 판매원 그리고 정치인들이 써버린 나머지 모두 닳아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도 뭔가가 바뀌었다.
똑같은 창문들이 달린 시멘트 벽, 네잎클로버 모양의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다리, 광장, 땅을 뚫고 들어간 철도 등 도시가 이토록 텅비고 이토록 우중충한 적이 없었다.
예전에 화려했던 이 도시도 이제는 해변의 황량함을 피할 수 없다.
바다는 더이상 모험이 아니다.
광막한 무지갯빛 수면이 하구에서 표류하고, 바람은 시멘트 구름을 싣고 온다.
남쪽을 향해본들 더이상 자유는 없다.
포용할 수도 억누를 수도 없는 고뇌가 파란 하늘에서 용솟음친다.
태양, 아름다운 야자수, 황혼녘의 감미로운 산호초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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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옛 시절의 노인들, 동족상잔의 전쟁, 숙청, 문화혁명과 세뇌, 화형과 자아비판에서 살아남은 노인들이 있다.
그들은 밝은 날의 햇빛, 밀밭에서 이상 줍던 시절, 볏단을 길가에 넣어 말리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사라지고 잊힌 시절에 대해 누구에게 길게 헛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그들 시대에는 격리된 자들, 매장된 자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없어야만 불완전한 자들이 더 완전해지고 그들의 잘못과 범죄가 지워질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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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왔는가?
무엇이 그를 자기 고향에서 몰아냈는가? 그보다 먼저, 비람에 겐 고향이 있기나 한 걸까? 예전에,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는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자유롭게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었다.
그들은 길을 떠나 모험의 길을 따라갔다.
그들은 숲속 빈터에서 멈추어 아름다운 별 아래 누웠다.
여자들은 노래를 불렀다. 내가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해주신 이야기다.
전쟁 전에는 어디서나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휘파람을 불었으며, 거리에서는 방울 소리, 심벌즈 소리 같은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강변은 낚시꾼과 하역 인부와 짐꾼과 행상의 인파로 가득했다.
야자수 잎으로 지붕을 엮어 만든, 영원한 여행자들을 태운 커다란 뗏목들과 장대로 조중하는 긴 나룻배들이 어스름 속에 천천히 흐르는 강물을 타고 내려왔다.
비람은 그 시절로부터 온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이, 살아남은 유일한 아이, 아니면 아이와 비슷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성인이라는 것은 기적이다.
그는 미소를 짓는다고 누군가가 나에게 말해주었고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
오늘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얍삽한, 기분 나쁜 그런 미소가 아니라, 부드럽고 신뢰가 가는 진정한 미소, 천사의 미소를 짓는 것이다
(우리는 이 초상, 오래된 사원 벽에 새겨진 얼굴, 박물관 먼지 속에 묻혀버린 이 아 스라한 이미지들을 아직 알고 있기에).
그는 'ABITBOL' 또는 'ABITIBT'라고 쓰인 티셔츠와 우리 것과 똑같은 탈색된 청바지를 입고, 뒤꿈치가 닳은 운동화를 신고, 있는 대로 헝클어진 길디긴 머리를 하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지하철 전동차 안에 서서 아무도 보지 않으면서도 모두를 지켜본다.
내가 상상 하는 그는 이와 같다.
그는 아무도 행복의 존재를 더이상 믿지 않을 때 행복을 찾고자 우리 도시에 왔다.
내가 안니에게 그 얘기를 하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아주었고 잠깐이나마 우리 사이에는 더이상 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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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니에게 바람과의 만남을 넌지시 이야기했다.
이미 그녀를 더이상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녀 역시 샤방트의 은밀한 권력에 조중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불완전한 자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 다툼에서 아마존들과 접촉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안니는 나를 비웃었다. 안니는 천성적으로 비꼬기를 좋아하는 여자다.
그녀는 사남매의 막내로, 빈정거리기와 어깃장 놓기로 자신을 방어하는 법을 배웠다.
"자기가 이야기해주는 장면은 이상하게도 꼭 번개가 치는 것 같아!" 그녀는 말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 실망감을 지우려고 나를 팔로 끌어안았는데, 짧은 순간 그녀의 체취와 머리카락 냄새가 내 강박을 떨쳐버렸다.
그러나 번개라는 말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그 말엔 진실이 담겨 있었다.
갑작스럽고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것, 한줄기 빛, 자유와 사랑의 눈부신 기호가 논리적인 근거도 없이 우리 삶의 혼돈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바로 그날부터 안니와 나는 소원해졌고, 예전의 내 삶은 또다른 지평을 열기 위해 나에게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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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없는 지금, 우리와 이 도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가 찾던 이 단어, 모두에게 해당하면서도 아무에게도 딱 들어 맞지는 않는 글귀를 읽기 위해 깨뜨리는 포천 쿠키처럼, 그가 조개 껍데기처럼 열어놓은 이 단어, 행복이라는 이 말은 영원히 절멸 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거리로 되돌아와 채광 환기창을 점령하고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올 것인가?
그렇게 되면 또다시 무관심한 사람들, 불완전한 사람들, 끝없는 바다, 쓸모없는 소문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는 어디 있어요?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내 앞에서 사람들은 침묵한다. 어깨를 으쓱한다.
그들은 내가 치유 불능으로 미쳤다고 생각한다.
관리인 하나(회색 셔츠를 입은 자들 중 한 명으로 내 생각엔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다른 쪽으로 보낸 예전 수감자)가 부엌 창문 - 쇠창살이 떨어져나가 여기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 - 으로 몸을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입꼬리로 비밀리에 말한다.
"패거리가 모두 함께 떠났어요.
애가 낫지 않았는데도 그 사람들과 함께 가도록 내버려두데요.
아마 여기서는 해줄 게 더이상 없었나봐요.
그들이 그를 알아서 하겠죠, 저 위에서, 그들의 빌어먹을 산속에서 말이에요."
나는 그를 알아서 한다는 그 말에 몸서리쳤다.
아마도 그 도형수가 손날로 그 손짓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보지 않으려고, 이해하지 않으려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위험하다.
이해한다는 것은 여기 머무른다는 것이고, 그것은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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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만은 원장도 거들먹거리며 말하지 않는다.
그는 지루하다. 그에겐 청중이 필요하다. 나는 이제 그의 관심 밖이다.
그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서류에 대충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는다.
그가 도장 찍고 서명하는 것은 바로 나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나는 그를 향한 엄청난 증오에 몸서리를 친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이 설계 사무실에서 한바탕 화를 쏟아내고 싶다.
그 인간에게 나의 모든 "빵빵"과 "철컹철컹"과 "찍!"을 날리고, '얼굴 없는 그림자' '눈 없는 시선'이라고 소리지르고,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의 이름을 외치고 싶다.
그 아이는 행복을 발견했고 그는 절대로 그 아이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아이는 그를, 그와 그의 여대생들을, 그리고 아마존과 주인들의 졸개들을 겁쟁이처럼 불태울 눈부신 빛을 탄생시키리라!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서명을 하는데, 그것이 그가 할 줄 아는 전부다.
그는 안니와 이야기를 하고, 짐짓 격식을 차리는 체하면서 쓸 데없는 질문을 한다
정말 그게 알고 싶어요. 아니면 습관적으로 묻는 건가요?
나는 눈을 내리깐다.
그건 소심함이나 겸손으로 여겨질 수 있다.
나는 개의치 않는다.
문은 복도 저 끝에 있다.
나는 작은 자갈이 깔린 오솔길을 걷는다.
정문이 열린다.
안니가 내 손을 붙잡고 세게 그러쥔다.
우리는 바깥세상에 있다.
우리는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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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역정, 오랜 흔들림.
명명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기와 존재 하지 않기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그런데 내가 하나의 이름을 얻었다면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개연성이 아니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증명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설이다.
다시 도래한 부정적은 미완성인 것을 잊게 만들고야 말 것인가?
미래에 대해서들 이야기한다
(슈퍼마켓 카트에 말 타는 자세로앉아 아무것도 아닌 것에 웃는 여자아이는 말도 기억도 없지만 이미 매우 강하고, 독립성이 없어도 제 아비와 어미보다 우세하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으니 존재의 부유 상태, 창세기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은 빛, 공허에 자리를 내주지 않고 그림자에 중요성을 내주지 않는, 현실을 비추는 적나라하고 눈부신 긴장의 빛이다.
이 도시, 도로, 해변, 호수, 강, 신령한 산, 현재의 유혹은 거대하고 현기증을 일으킨다.
어떤 기억도 어떤 후회도 없다.
모든 것이 시간의 공간, 경이로운 공간 속에서 열린다.
나는 거기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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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대기를 떠돈다.
미친 나방, 빛에 취한 나방이 날듯 이쪽저쪽을 오간다. 여기저기.
샘과 연못과 매달릴 벽과 마실 이슬과 막아야 할 피의 실개천을 찾아서.
내가 세상에 대해 아는 게 무엇인가?
세상은 밤을 빛나게 하는 이 붉은빛, 반딧불이처럼 미약하고 불붙은 담배꽁초처럼 흔들리는 잉걸불을 때때로 가질뿐,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두터운 침묵은 부르는 소리에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다.
무성의 느린 진동이 아니라 날카로운 진동, 오 어찌나 날카로운지 심장까지 아프게 한다(하나의 표현 방식), 그것은 위이이이이이가 아니라 취이이이이이하는 소리다.
나머지 모든 것은 멀리 느리고도 멀리 있고 중요하지 않다.
이미지들, 그저 약간의 광채, 현실을 믿게 하려는 인조 보석, 동맥 의 가벼운 박동.
존재는 조용조용하다기보다는 예쁘게 배회한다.
팔꿈치와 허리 아래쪽에 보조개처럼 팬 자국이 있고 작은 손과 작은 발, 그리고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미소를 지닌 평온하고 볼이 통통한 천사 같다고나 할까.
아니다. 존재는 폭력적이다.
지성적이고 명확하며 환상을 품지 않고 관용을 베풀지도 않는다.
매달릴 주름, 배 그리고 그의 눈, 그의 출발점이 될 배꼽을 찾아라.
언어를 알지 못한다, 존재는.
단어들은 존재에게 약점이 될 것이다.
단어들은 하나의 노래, 자장가일 수도 있다.
존재의 비상을 느리게 만들고 진보를 방해하며 존재와 세계 사이에 개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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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천천히 지워지는가, 어떤 것도 형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가, 실체가 없으면 나는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이 버려지는 것인가?
다른 질문 - 그것도 분명 마찬가지겠지만 - 각각의 새로운 세대는 앞선 세대의 행위들을 지우지 못하는 것인가?
흉터. 흔적. 오래된 벽에 남겨진 자국, 유탄이 폭발한 그곳, 차도에 난 상처.
오래된 용설란 잎사귀에 칼로 그어놓은 머리글자.
바람과 비가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비석에 새긴 기호들, 먼지로 변해버리는 서류들, 꺼져버린 전기, 남아 있는 약간의 열기, 그리고 구름을 밀어내는 바람.
쉼터 안뜰에서 발가벗은 아기 하나가 맨바닥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
아이는 겨우 앉을 수 있는 정도여서 머리가 가느다란 목 위에서 흔들거린다.
성가신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아이의 손에 잠깐 앉았다가 날아간다.
아이는 조금 찌푸리더니 웃기 시작한다. 얼굴과 눈이 환해지는 묘한 속웃음이다.
날고 있는 정신은 아직 멀리 있지 않으며 정신의 긴 여행의 끝은 질료와 관념의 회오리처럼, 추억의 회오리처럼 아직도 소리를 울린다.
옆에서는 열린 문의 그늘에서 한 젊은 여인이 아기를 바라본다.
여전히 똑같은 올림머리, 똑같은 얼굴, 똑같이 가느다란 다리지만 아이 같은 태도는 더이상 없다. 여인의 애인을 죽게 만든 폭발은 그녀의 한쪽 귀를 멀게 만들었고, 의사들은 나중엔 나머지 한쪽 귀도 그 아무도 아닌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누가 알겠는가?
그녀는 쉼터 안뜰 한 가운데서 홀로 아이를 바라본다.
그녀에게는 아기의 몸과 육중 한 무게의 커다란 머리만 보이는데 땅바닥에 그림자가 진다.
바로 이 순간이다.
이름도 전설도 필요 없다.
알리야, 엘리, 엘리야, 리즈베트,
존재는 새처럼 자유롭고 존재가 머무는 그곳이 그의 거처다.
존재는 항상 똑같고 절대로 어떤 것과도 비슷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단 하나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일어나는 일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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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활력 넘치는 에세이 문학의 역경에서 세 종류의 작가가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첫번째 저자들 부류는 무시했다.
나머지 두 부류는 어떤 것을 주장해야만 하는 동기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의 전적인 차이는, 하나의 경우엔 저자가 경험이 없는 사냥꾼처럼 빈 손으로 돌아올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에 뛰어든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또다른 부류의 경우에는 작가가 몰이꾼 덕분에 사냥한 고기를 그러모으는 사냥꾼처럼 자신이 말해야 할 것을 깊이 생각하고 계산을 마친 뒤에야 작품에 착수한다.
나는 철학자와는 반대로 모험적인 사냥꾼에게 공감이 간다.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우연에 떠밀려 엄청나게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사냥꾼도 아니고 육식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지만 예전에 파나마의 숲으로 사냥꾼을 따라갔던 일이 기억난다.
인디언들은 먹기 위해서만 동물을 죽인다.
그들은 몰이꾼도 없고 개량된 무기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민첩함이 그러한 것들을 대신하고 본능이 그들을 인도한다.
그들의 감각은 기회를 노려 사슴이나 멧돼지의 냄새를 포착한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며 사냥을 세속적이고 권태로운 오락거리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동물적인 면을 복원하는 즐겁고도 필요한 유희로 만든다.
그것이 내가 글 읽기와 글쓰기에서 발견했으면 하는 것이다. 모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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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안에서는 몸들이 서로 닿는다.
드물지만 서로를 찾기도 한다
(그러려고 지하철을 타는 몇몇 변태들은 제외하더라도, 몸들은 금세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빈자리가 나도 서로 피할 것이다.
절대로 마주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고 있다.
수레를 끄는 늙은 인부와 사춘기도 안 된 소년, 기품 있는 중년 부인과 기둥서방, 멋쟁이 비행사와 창백한 창녀, 이발사 보조와 대사(이들이 서로 닮아 보일 때도 있다), 교사와 학생, 미친 사람과 예언자, 눈이 어두운 늙은이와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 삼십대, 판사와 죄수, 여행사와 소매치기, 보통 이 모든사람들은 비슷하고 구별되지 않아서, 하나같이 우중충하고 익명이며 서로 바꾸어도 될 듯하면서도 유일하다.
이 여행은 얼마나 지속되는가? 사오 분, 때로는 그 이상.
하지만 사건과 감각에서 그 시간은 아주 길고 풍부하며, 상념과 파닥이는 단어들과 이미지들과 생명으로 충만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언제까지 살아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에 어떤 이유를 부여할 것인가?
언젠가는 이유를 찾아내고 이유를 대야만 할 것이기에, 우리의 결백을 믿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최종 목적지가 어디든(그런 선택이 가능하다 면) 우리는 설명하고 따져봐야 할 것이다.
나는 존재했고, 행했으며, 소유했다.
그리고 언젠가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두 세계 사이, 두 상태 사이에서 상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아마도 절대에 가까운 속력으로 발진한 이 지하철과 비슷한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상태로, 즉 과거로, 그 혹은 그녀가 사랑했던 대로 되돌아 가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얼굴들은 경직되어 움직이지 않으며 때로는 흙빛이다.
검은 눈동자에 매달린 생명의 별과 같은 시선이 움직일 수 있도록 두 개의 금을 낸, 질긴 종이나 낡은 가죽으로 만든 가면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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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닫힌 눈꺼풀 안에서 나는 다른 기억 속을 헤엄치고 있다.
기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책 읽기와 비디오 영상과 어디서 주워들은 것, 늘 하는 생각에서 가져온 내 것인가?
보편적인 사고라고들 하는 인간의 기억인가?
다른 여인, 요동치며 허리를 꿈틀대는 이 낡은 철제 캡슐의 힘을 빌려 내가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동하면서, 출렁거리는 살과 드나드는 숨결을 타고 불법 침입하게 된 여인의 기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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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로 되돌아가자.
매 순간이 아득하게 여겨질 만큼 긴 어느 하루, 일 년과 같은 하루, 한 세기와 같은 일 년.
터널 속에서는 공기가 압축되어 귀가 막혔다가 작은 딸가거림과 함께 열린다.
모든 것이 바쁘거나 느긋한데 사실은 둘 다 같은 게 아닌가?
얇은 플라스틱 가리개, 개별적인 칸막이가 사라지고 결국 삶들이 서로 뒤섞인다.
얼굴들, 언제나 얼굴들은 거대한 나선형 계단실에 걸린 가면들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아무도 알려고 애쓰지 않는 보편적인 진실 한 가지를 감추고 있다.
나에게는 그 생김새, 높은 이마, 중간 높이의 코, 입술, 가끔 은청색의 번뜩이는 시선이 새어나오는 감긴 눈꺼풀, 뺨, 턱, 주름진 목, 어깨 그리고 피곤과 권태에 절어 축 처진 전신이 눈에 들어온다.
우연과 뜻밖의 만남과 몹시 짧아서 부질없는 욕망의 결과인 현존하는 전 인류, 비밀, 잃어버린 말들, 지식에 대한 환상, 어린 시절의 환상을 품고 죽음의 파도에 실려가는 인류가 보이는 것이다. 내일이면 그들은 늙을 것이고, 사라져버리고 없을 것이다.
조물주가 되려는 유혹에서 치유된 자들이다.
강자건 약자건, 가진 자건 가지지 못한 자건, 허영쟁이건 승리자건, 거지건 부랑자건, 귀한 사람이건 세련된 사람이건, 모두가 이 지옥 열차에 실려 격렬한 흐름의 손아귀에 맡겨진 채 끌려가고 있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구원받지 못하리라.
전속력으로 물러나 빠져나가는 얼굴들, 나도 마찬가지다.
단 한 마디의 말, 단 하나의 행동이 그들을 제지할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하지만 그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이 노선에서 A 지점과 B 지점 사이의 거리를 고려해 分의 문제 역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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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빨리 적어내려간다 해도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전모, 즉 표현, 생각, 소음과 한숨, 철길 위를 구르는 쇠바퀴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침묵 같은 것까지 메모하지는 못한다.
어떤 정류장에서 열린 문으로 또다른 외침이 들려왔다.
이름도 아니고 부르는 것도 아닌 그냥 외침이었다.
하우아, 외침이라 기보다는 어떤 정신 나간 남자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소음에 가까운 소리로, 그에게는 이 외침만이 유일한 언어인데, 고문당하 능욕당한 희생자의 외침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피해 그 앞에서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러고는 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그 외침은 끊어지고 남자는 해체된 꼭두각시처럼 플랫폼에 실려갔다.
그리고 넓적한 얼굴에 볼록한 이마, 작은 입, 겨우 눈에 띄는 납작코, 그리고 비스듬히 올라간 큰 눈, 고양이 눈, 페루 가면의 황금 잎사귀처럼 생긴 눈을 한,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모를 아가씨. 하얀 얼룩처럼 자기 자리(쉬잔을 부르짖던 청년 옆자리)에서 미동도 않는 그녀는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으로 에워싸인 조각상과 비슷하다.
소음과 사람들 그리고 미친 청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선은 허공을 붙잡고 있고, 나는 그녀에게로 들어가 마치 강력한 존재가 나를 감싸고 보호하듯 강렬한 열기와 빛의 폭발을 받아들인다.
나는 다른 곳에서 오는 시선, 여름밤 하늘과 비교되는 광채, 다른 세계에서 온 부드러운 별빛을 받아들인다. 한순간, 단지 한순간일 뿐이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내가 이 열차에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고 우연이란 없거나 반대로 모든 것이 우연이고 나는 이순간을 기다려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이 가야 할 궤도로 빛의 속도로 발사된 이 객차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 이 모든 사람들, 나와 더불어 우연한 승객일 수도 있고 일년 정기권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여행자일 수도 있고 떠돌이일 수도 있 고 구걸과 소매치기 상습범일 수도 있는 모든 사람들, 손에 들린 탐정소설
을 읽지 않을 소녀부터 플랫폼에서 홀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백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은 무
엇인가를 의미하고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신을 알게 된 순진한 소녀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한 줌의 밀기울이나 한 뼘의 가죽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들 삶의 한 조각을 주기 위해서?
인류보다 더 위대한 기억을 움직이기 위해서, 존재가 이 소녀의 작열하는 중추에 붙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날고 나를 통과하기라도 하듯,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상상하는 이 전체의 한 조각, 이 소우주의 먼지 한 점에 불과한 나를 말이다...
기계의 속도가 떨어지고 브레이크의 마찰음이 열차 안으로 들려오고 황 냄새 같은 것이 공기중에 떠돌면, 현실은 우주선의 동체 안에서 다시금 몸을 불린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하차를 시작했다.
여행에 끝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모든 것이 다시 닫힌다.
아가씨는 계속해서 커다란 눈으로 바라보는데 살짝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하다.
끝은 분명 안도를 예고 한다.
지하철역 이름들, 과거의 지층, 기념물, 헌병과 도둑, 장군과 병사, 법관과 군인, 여걸과 여학자, 혁명의 딸들, 폐허가 된 들판, 출정가, 행복의 섬 등등 뒤죽박죽인 도시들 속에 나란히 놓인 무분별한 단어들,
워털루
미셸앙주몰리토르
을지로 삼가
캔도스
로즈 힐보바생
라 루이즈
모카
유레카
각자에게 자기 인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