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45.146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압슬형에 장사 없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고문
첫 접전에서 기선을 제압한 이숙번이 지신사 유사눌로 하여금 변계량이 작성한 왕지를 대간에 전달하도록 했다. 쾌속 항진이다. 이숙번과 유사눌은 쾌재를 불렀다. 이제 민무휼 민무회를 처치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다음 수순이 문제다. 여세를 몰아 쇠뿔을 단김에 뽑을 것인지 한 박자 늦출 것인지 그것이 문제였다.
원경왕후 민씨의 패악이 적시된 왕지가 대간에 전해지자 조정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했다. 의정부를 비롯한 삼성(三省)이 들고 일어났다. 충성경쟁에 불이 붙었다. 사간원에서 먼저 상소가 올라왔다.
"선한 것을 복주고 악한 것을 화(禍)주는 것은 하늘의 도입니다. 민무구·민무질은 이미 하늘의 주살을 당하였고 민무휼·민무회는 상은을 입어 아직까지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데 종지를 제거하고자 하는 민씨의 음참(陰慘)하고 교활한 것이 극에 달했습니다. 민무회·민무휼의 죄를 밝게 밝히시어 후래를 경계하소서."
원윤 이비와 산모 김씨를 학대한 혐의를 받고 있는 민씨는 왕비다. 임금이 어떠한 지침을 내리지 않는 한 왕비를 성토할 수 없다. 왕비를 입에 담는 것은 불경이다. 화살이 민무휼 형제에게 꽂혔다. 원윤 이비 학대사건에 어떠한 형태로든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것을 캐자는 것이다. 사간원에 이어 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민씨가 종지를 제거하고자 한 일은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 민씨가 잔적(殘賊)하고 참인(慘忍)한 죄악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 민무휼·민무회는 아직도 성명을 보존하고 있으니 한 하늘 아래 함께 있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민무휼·민무회를 전형(典刑)대로 처치하여 신민의 울분을 쾌하게 하소서.”
유배지에서 잡아온 죄인을 국문하라
태종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문간에게 귀양살이 하고 있는 민무휼·민무회를 잡아들여 의금부에 하옥하라 명했다. 영문도 모르고 경기도 해풍 유배지에서 잡혀온 민무휼 형제는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태종이 우사간(右司諫) 조계생, 집의(執義) 정초,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 이천우, 이조판서 박은, 예조참판 허조를 불렀다.
"해풍에 나가 있도록 명하였을 때 민무휼에게 이르기를 ‘내가 편안히 있으면 너희들도 마땅히 환(患)이 없을 것이나 내가 만일 편안치 못하면 너희들의 화는 더욱 빠를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내가 편하지 않다.”
“죄인을 율에 따라 처결하소서.”
“민무회·민무휼이 원윤 이비의 모자를 죽이고자 한 죄와 세자에게 불경한 죄를 자세히 바루도록 하라. 그 음모에 가담한 민씨의 집 노비도 아울러 국문하라.”
드디어 민무휼 형제에게 국문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추국한 내용을 보고받는 것이 아니라 죄목까지 거명하며 지침이 내려온 것이다. 원하는 답을 받아오라는 것이다.
국문과 심문은 하늘과 땅 차이다. 심문은 그래도 자의에 의한 진술이고 국문은 강요된 답을 받아내기 위한 방법이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라는 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고문이 뒤따른다. 곤장은 기본이고 주리를 틀고 낙형을 가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경우 압슬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문대열에 의정부참찬 최이, 우부대언 서선이 보강되었다. 강도 높게 국문하라는 뜻이다. 승정원은 별도로 계집종 삼덕, 사내종 화상과 한상좌를 내정으로 불러 초사를 받은 다음 의금부에 가두었다. 증거확보 차원이다. 죄인들이 부인하면 대질시키려는 준비 작업이다.
“너는 이 사건을 언제 알았느냐?”
의금부진무 서선이 민무휼에게 물었다.
“그 때에는 알지 못하였고 이듬해 애를 낳아서 교하에 가있다는 말을 들었다. 기축년에 산모의 아비 상에 문상 갔을 때 파주 교하에서 처음 보았다.”
“너는 언제 알았는가?”
의금부진무 전흥이 민무회에게 물었다.
“그 때에는 알지 못하였고 기축년에 문상을 다녀온 형으로부터 원윤이 교하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 만나보지는 못했다.”
“세자에게 불경한 죄를 다시 말하라.”
“할 말이 없다.”
국문 장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소리
민무휼은 빳빳했다. 이미 한 얘기를 반복하라니 역겨웠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의금부 도사 이문간이 곤장을 쳐라 명했다. 볼기에 떨어지는 곤장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민무휼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압슬형을 가하라."
의금부 도사의 명이 떨어졌다. 압슬로 가기 전, 다리 사이에 주릿대를 끼워 비트는 주리형이 있었지만 건너뛰었다. 갈 길이 바쁘다는 얘기다. 압슬형, 이거 인간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형문이다. 사금파리를 깔아 놓은 자리에 무릎을 꿇게 하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얹어서 자백을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고문이다.
으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민무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입에서는 동물적인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래도 할 말이 없는가?”
“중전이 편찮을 때 아우와 더불어 중궁전에 나갔는데 아우 민무회가 세자를 향하여 눈을 흘기자 세자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물러나올 때에 내가 말하기를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 하였다. 귀양 갈 때 ‘네가 세자에게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고 물으니 아우가 말하기를 ‘세자가 너희들의 가문이 좋지 않다고 하기에 내가 ’세자는 어느 곳에서 자랐는가? 라고 말했다.”
“민무회는 무슨 말을 했는가?”
“세자에게 고한 말을 잊어서 기억하지 못한다.”
민무회에게 압슬형이 가해졌다. 심문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형문이다. 압슬형을 당하는 죄인이 고통에 못 이겨 빨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도록 만드는 것이 압슬형이다. 자식이 아비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부인이 지아비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형문이다. 이러한 비인간성 때문에 영조 때 폐지되었으나 조선 초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자행됐다.
“사금파리가 무디어 졌다. 새것으로 다시 깔아라.”
민무회가 축 늘어지며 말이 없자 의금부도사가 날카로운 사금파리로 바꾸어 깔도록 명했다. 대기하고 있던 일단의 노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 나와 뭉개진 사금파리를 치우고 새것으로 깔았다. 의금부에 배속된 사노 칠복이는 노비변정 때 민무회의 집에서 군기감으로 이적된 종이었다.
계집종의 몸에서 태어난 칠복이는 민무회 형제의 국문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사금파리를 준비해두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많이 아프게 해주고 싶었다. 평생 종으로 살아야하는 자신의 출생을 원망하던 칠복은 양반들을 증오했다. 아비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더 커다란 고통을 주면 그것이 복수라 생각했다. 잘못된 인연이고 잘못된 만남이다.
"형들이 죄 없이 죽었다 했소, 그 말이 무슨 죄가 된달 말이오?"
민무회에게 다시 압슬형이 가해졌다. 심문관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 까지 가하는 것이 압슬형이다. 1차, 2차, 3차, 무릎에 올리는 돌의 무게를 배가하며 강도를 더해가지만 대부분의 피의자는 3차에 이르기 전에 무너지고 만다.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민무회의 입에서 동물적인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형들이 모반한 것이 아닌데 죽었으니 죄 없이 죽은 것이다. 세자가 우리 가문에서 자랐으니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라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가문이 좋지 않다.’ 고 말했다. 형이 말하기를 ‘세자는 어느 곳에서 자랐는가?’ 하였다.”
이것이 바로 태종이 원하는 답이다. 의금부로부터 국문 내용을 보고받은 태종은 흐뭇했다.
“이미 형들이 죄 없이 죽었다고 말하였으니 다시 무슨 일을 추문하겠느냐? 민무휼을 원주에 안치하고 민무회를 청주에 안치하라.”
임금의 명이 내려졌으나 지신사 유사눌이 움직이지 않았다. 항명이다. 지신사는 임금의 명이 떨어지면 지체 없이 받들어야 마땅한데 유사눌이 부복(俯伏)하여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간에 지침을 내리는 사람이 임금이라면 지신사에게 지침을 내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지신사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최고 권력자의 측근에 있는 사람이 균형감각을 잃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을 때 비극은 현실이 된다. 비서실장이 경호실장에 휘둘려 일어난 비극이 우리의 최근세사에서도 있었다. 역사의 반복. 피해가고 싶지만 답습하는 경우도 있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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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에게 직격탄을 날리다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어라
태종은 어이가 없었다. 명을 내리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야 할 지신사가 엎드려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당장 의금부에 하옥하라고 불호령을 내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유사눌을 내치고 나면 민무휼 사건을 물 흐르듯이 처리해 나갈 인재가 마땅치 않았다. 그것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 유사눌이었다. 태종이 노하여 지팡이로 바닥을 치며 말했다.
"지금 중궁이 이 일을 알고 울면서 먹지 않고 있으니 내가 어찌 한양 거리에서 형을 집행하겠는가? 외방에 귀양 보내어 신민(臣民)의 청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
왕비는 억장이 무너졌다. 민무구 민무질 두 동생을 잃고 또 다시 두 동생의 목숨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달렸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자신의 투기에서 비롯되었다니 괴로웠다. 왕비의 영화도 가문의 영광도 모두가 부질없는 일장춘몽(一場春夢)만 같았다. 민무휼 민무회 두 동생이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충격에 식음을 전폐하고 눕고 말았다.
죄인을 분리하여 각각 외방에 안치하라
태종은 지신사의 반대를 물리치고 민무휼을 원주로, 민무회를 청주로 분리 유배시켰다. 무릎이 부서져 일어서지도 못하는 민무휼 민무회는 함거에 실려 유배지로 떠났다. 살인적인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두 형제는 살아있어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민무휼 민무회가 귀양지로 떠났으나 조정은 들끓었다. 당장 참형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의금부에서 주청이 올라왔다.
"민무휼과 민무회는 먼저 복주(伏誅)된 두 형이 세자에게 뜻을 쏟다가 이미 죽어 장차 세자의 은혜를 바랐기 때문에 세자에게 그러한 불경스러운 말을 했던 것입니다. 원윤의 모씨(母氏)가 임산(臨産)할 때 다듬잇돌 옆에 내다 둔 것도 알고 있었으며 교하로 보낸 것까지 알고 있으면서 말리지 않았으니 종지를 범한 것입니다. 율에 따라 참형으로 다스려 주소서"
"정비가 몸져 누워있고 송씨가 병을 얻었으니 후일을 기다려 바로잡겠다."
의정부·육조·대간에서 다시 민무휼·민무회 등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형조판서 정역이 상소하였다.
"대역은 천지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고 왕법에 마땅히 죽이는 것입니다. 역신 민무휼·민무회가 종지를 제거하고자 한 정상이 나타났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대의로 결단하여 신민의 울분을 쾌하게 하소서."
이어 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송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죄인을 귀양 보냈습니다. 전하가 어떻게 송씨 때문에 핑계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박소(薄昭)가 한(漢)나라 사자를 죽이자 문제(文帝)가 베었는데 박소는 태후(太后)의 아우입니다. 문제가 어찌 태후의 마음이 상할 것을 생각지 않았겠습니까? 법이라는 것은 천하와 함께 하는 것이어서 사사로이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형(典刑)대로 처치하소서."
의정부·공신·육조·대간에 이어 3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 조온도 상언하여 민무휼과 민무회의 죄를 청했다. 그래도 임금이 꿈적하지 않자 영의정 성석린이 상언했다. 성석린은 태조 이성계 년 배의 국가 원로다. 조선 개국과정에서 정도전에게 이색, 우현보 일파로 몰려 숙청되었으나 태종 이방원의 무인혁명에 참여하여 좌명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민무휼과 민무회의 불충한 죄가 명백하게 드러났으니 잠시라도 용인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대의로 결단하여 후세에 감계(鑑戒)를 내리소서."
귀신같이 따라붙은 지신사
태종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잠을 이루지 못한 태종은 침전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지신사 유사눌이 귀신처럼 따라붙었다. 부엉이 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후원을 거닐던 태종이 정자 앞에 멈추어 섰다. 궁궐에 유일하게 연못이 있는 해온정(解慍亭)이다.
훗날 창덕궁 후원이 사색의 공간이 아닌 임금의 놀이터가 되면서 부용정, 애련정, 존덕정 등 유희용 정자가 많이 들어섰지만 태종 때는 유일한 정자였다. 창덕궁 동북방에 정자가 완성되었을 때 권근이 '하늘이 맑고 땅이 편하다'는 뜻으로 청녕(淸寧)이라는 당호를 지어 올렸지만 태종이 직접 해온(解慍)이라 명명한 정자다.
오늘따라 무엇을 해온 할 것인지 의미심장하다. 태종이 당호를 지을 때 인친의 정을 끊어내는 결정을 한 장소로 쓰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온정에 쏟아지는 별빛이 유난히 차갑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그래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유사눌 뿐이었다.
"오늘 정부·공신·육조와 3성(三省)에서 청한 것이 윤당하니 유윤(兪允)을 내리소서."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미 그 죄에 벌을 받았고 민무휼과 민무회도 또 죄에 걸렸다. 민씨의 네 아들을 서로 잇달아서 죽이는 것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옛날 두헌이 궁액(宮掖)의 세력을 믿고 남의 땅을 빼앗았으나 장제(章帝)가 그에게 죄 주지 아니하니 후세의 사가들이 우유부단한 처사라고 기록 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두 사람을 죽이지 아니한다면 신 같은 자는 전하를 우유부단하다고 사책(史冊)에 쓸 것이니 만세의 뒤에 전하께서 어찌 우유부단하다는 이름을 피하실 수 있겠습니까?"-<태종실록>
"알았다. 그러나 나는 차마 발언(發言)할 수 없다. 전날부터 오늘 밤에 이르기까지 이 일을 반복(反覆)하여 생각하여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겠다."
"이것도 또한 전하의 고식적인 인(仁)으로 백중흑점(白中黑點)입니다."
신하로부터 질책을 당하는 임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자진(自盡)하면 가(可)할 듯하다."
"사사(賜死)하도록 하십시오. 저들의 자진함을 어찌 기다리겠습니까?"
처형 방법이 결정되었다. 이튿날, 의정부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부복하였다.
"불충한 죄는 왕법(王法)에 있어서 주륙(誅戮)에 해당하는 것으로 천지(天地)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역신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미 그 주륙을 당하였으나 그 형들이 죄도 없는데 죽었다고 하여 몰래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 불충한 죄가 뚜렷하게 나타났으니 법대로 처치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민무휼과 민무회를 내 어찌 사랑하여 보호하겠는가? 다만 어미 송씨가 연로하고 중궁이 몹시 애석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은 즉시 끊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륜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공의 말이 옳다."
태종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맹진을 민무휼이 있는 원주로, 송인산을 민무회가 있는 청주로 즉시 떠나라 명했다. 다음날 한양으로 돌아온 이맹진과 송인산이 보고했다.
"민무휼과 민무회가 모두 자진(自盡)했습니다."
"민무휼과 민무회의 불충한 죄를 정부·공신·육조·대간·등 문무각사(文武各司)에서 여러 차례 신청하였으나 다만 정비(靜妃)의 지친이기 때문에 차마 법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외방으로 유배했는데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서로 잇달아 목매어 죽었으니 더 이상 논하지 말라."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어라
민무휼 민무회 형제가 세상을 떠났다. 왕비를 지친으로 둔 부귀영화도, 4형제가 입신양명하는 가문의 영광도 막을 내린 것이다. 왕기가 서려있는 사위를 맞아 좋아했던 민제를 비롯한 아들 4형제가 모조리 죽었다. 누가 그랬던가?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라고.
이 때 세종 나이 열아홉이었다. 위로 양녕 효령 두 형을 둔 셋째였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했던 충녕은 아버지로 인하여 몸져누운 어머니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등극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기다. 태종은 양녕이나 충녕 인물 중심이 아니라 차세대 왕권에 걸림돌이 될 우려가 있는 외척을 척결한 것이다.
민무휼 민무회가 자진하던 날. 하륜을 탄핵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하륜과 민무휼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씨 형제를 처치한 칼끝이 하륜을 겨냥한 것이다. 하륜에게 직격탄이 날라 온 셈이다. 외곽을 때리던 공격의 칼날이 하륜의 심장을 겨누었다. 이제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한 백병전이 벌어진 것이다.
첫댓글 압슬형 [壓膝刑]! 참 무서운 형벌이구나. 무거운 돌에 눌리어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살을 파고 드니 어찌 견디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