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49.150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이숙번의 추락
부러진 날개로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까
태종은 우의정 박은과 병조판서로 승진한 이원, 그리고 대소 신료들을 편전으로 불렀다.
"이숙번은 근래에 어찌 하여 출입하지 않는가?"
임금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신하들은 머리만 조아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과인에게 불경하고 무례한 신하가 있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태종 재위기간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것이 기상재해였다. 극심한 한재(旱災)에 시달렸고 비가 왔다하면 폭우가 쏟아져 청계천이 범람했다. 기우제를 지내고 개천을 여는 토목사업을 펼쳤지만 자연재해 앞에는 임금도 백성도 무력했다. 임금이 가뭄을 빗대어 말했지만 이숙번을 성토하라는 암시가 내려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좌대언(左代言) 서선이 입을 열었다.
"지난 5월 신이 마침 강무(講武) 장소를 정하는 일 때문에 명을 받고 이숙번의 집에 이르니 이숙번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정사(政事)는 어떠한가?' 하기에 '박은이 우의정이 되었다'하니 이숙번이 기뻐하지 않는 기색으로 '박은은 일찍이 내 밑에 있었는데 명이 통하는 자이다'고 하였습니다."
태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임금의 신하를 자신의 명이 통하는 자라 하니 어이가 없었다. 당사자 박은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일찍이 '붕당(朋黨)을 만들지 말라' 하였는데 붕당을 만들었고, 하륜이 성상께 국정을 아뢰는데 이숙번이 계하(階下)에 잠복하여 엿듣는 것은 반복(反覆)입니다. 또한 세자를 배알하고 '이제부터 세자를 상견하기를 원합니다' 하였으니 금장(今將)의 마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무례하고 불충함이 이와 같으니 유사(攸司)에 내려 그 정상을 국문하여 불충한 자들의 감계(鑑戒)로 삼으소서."-<태종실록>
좌대언 서선의 말처럼 박은이 이숙번과 내통하고 붕당을 지었는지 아직은 모른다. 때문에 입에 오르내린 박은이 더 강하게 치고 나오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를 들라 이르라."
태종의 목소리는 분노에 떨리고 있었다. 긴급 호출을 받은 정효문이 부복했다.
"이숙번이 불경한 죄를 스스로 헤아리도록 연안에 나가 있도록 하라."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도 단칼이다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를 부리던 이숙번도 단칼이다. 자원 안치의 형식을 취했지만 유배나 다름없는 팽(烹)이다. 이숙번은 변명 한 마디 못하고 속절없이 한양을 떠났다.
부귀영화도 한조각 구름이다. 거동할 때면 줄줄이 따르던 수하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숙번 파당임을 은근히 내비치던 자들도 색깔을 거두어 들였다. 정치의 속성이고 권세의 냉혹함이다. 높이 오른 새가 멀리 볼 수 있지만 날개가 꺾여 추락할 때는 얼마나 야멸치게 추락하는 가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여기까지는 예정된 수순이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숙번이 풍해도 안악으로 유배 길에 올랐지만 조정은 들끓었다. 이숙번을 국문에 처하라는 것이다. 이숙번의 위압에 짓눌려 아무소리 못하고 숨죽이던 원성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대사헌 김여지의 상소에 이어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박수기가 상소를 올렸다
"훈구는 나라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것이니 무릇 출입이 있게 되면 이를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이숙번은 성명(聖明)을 받아 지위가 1품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외방으로 추방하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가 범한 죄를 알지 못합니다. 전하는 유사(攸司)에 명하여 그 이유를 국문하게 하여 사람마다 알게 하소서."
뒤이어 형조판서 안등의 상소와 조정의 원로대신 성석린의 주청이 올라왔다. 한결같이 이숙번을 국문하라는 것이었다.
"짐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다시는 청하지 말라 이르라."
태종이 지신사 조말생을 불러 하명했다.
"이숙번의 불충하고 무례한 것이 언행에 나타난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마땅히 그 죄를 바로잡아서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뚜렷이 알게 하여야 하는데 원훈대신(元勳大臣)을 하루 아침에 추방하면서 그 죄를 밝히지 아니한다면 나라 사람이 이를 의심할 것이니 실로 부적절합니다."
드디어 대척점에 서있는 하륜이 움직였다. 공격의 끈을 늦추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맞바람은 예상 가능한 바람이지만 뒤통수를 치는 역풍은 불확실성의 바람이다. 어느 순간 어디에서 불어올지 모른다. 바람을 잡았을 때 확실하게 제압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내선(內禪)은 내가 꺼낸 말이지 이숙번의 음모는 아니다. 이숙번은 천성이 광망(狂妄)하고 매사에 착오를 자주 일으켜 불찰이지 실로 두 마음 먹은 것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신(信)을 잃는 것은 불가하다."
이숙번은 천성이 광포하고 꼼꼼히 챙기지 못하는 성미일 뿐, 근본은 역심을 품은 것이 아니므로 거론하지 말라는 뜻이다. 또한 무덤까지 같이 가겠다는 공신들과의 약속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임금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자 모두 사직서를 제출하며 윤허를 청했다. 임금과 신하의 힘겨루기가 계속 되었다. 형조와 대간(臺諫)의 간원들이 퇴궐하지 않고 3일 동안 밤을 새며 이숙번의 죄를 청했다.
"이숙번은 두 번이나 사지(死地)를 같이 겪었으니 그 공이 크고 중하다. 그러나 일에는 경중이 있으니 내가 어찌 구처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천천히 순리대로 하겠다."
이숙번과 함께 광화문 앞에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향한 무인혁명을 성공시키던 일과 형 이방간을 치던 일을 상기하는 말이다.
날개가 있어야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
임금이 한발 물러섰다. 순리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리가 무엇이냐가 문제다. 임금의 회유에 물러설 대신들이 아니었다. 좌의정 유정현의 상소에 이어 병조판서 이원의 상소가 올라왔다. 그래도 임금이 꿈적하지 않자 형조와 대간에서 교장(交章)하여 청했다.
"모든 대소신료가 이숙번의 죄를 청하였으나 겨우 관문 밖으로 나가도록 하니 아직 그 연유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답답합니다. 전하께서 말씀하기를 '이숙번은 내가 자식같이 여긴다. 근래에 과실이 있어 그를 밖으로 내보내어 그가 개과(改過)하기를 기다리니 죄를 청하지 말라'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를 아들같이 하는데 이숙번은 어찌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로서 전하를 섬기지 아니합니까?
대소신료가 비록 그 범한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 반드시 그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그 죄를 다스리지 않고 개과하게 하고자 하니 이것이 신들이 실망하는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유사에 영(令)을 내려 그 직첩을 거두고 그가 범한 죄를 물어서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심으로써 방헌(邦憲)을 바로잡으소서."
"이숙번의 녹권과 직첩을 거두어라."
태종의 명이 떨어졌다. 임금이 물러선 것이다. 어쩌면 예정된 수순대로 진행되어 왔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숙번의 녹권과 직첩이 거두어졌다. 부귀영화의 보증수표가 사라진 것이다. 이제는 목숨이 위태롭다. 날개가 있어야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데 이숙번의 날개가 꺾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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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와 서자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리게 한 정치철학
자신의 농장에 거주하고 있는 이숙번의 녹권과 직첩이 회수 되었지만 조정은 조용하지 않았다. 이숙번을 국문에 처하라는 원로대신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삼성(三省)과 형조의 주청이 끊이지 않았다. 이숙번을 중죄로 다스려 엄벌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애써 외면했다. 침묵을 지키는 임금의 의중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왕심(王心)을 읽어내는 귀재 하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금의 속내를 알지 못하여 부심하고 있었다.
'성상께서 이숙번을 지키려는 의도가 무엇일까? 혁명동지들과의 약속? 하지만 삽혈맹세는 이미 깨지지 않았는가. 개과천선? 이숙번의 성격이 광포하다고 규정하지 않았는가. 천성이 광포한 자가 교정되기란 나이가 너무 굳어있다. 이용가치? 그것도 이미 유효기간이 지나 용도 폐기하여 팽(烹)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인가?'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정답이라 예단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최소한 오답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무릎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 것이 하륜이다.
어떠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절대 임금을 앞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정치철학이었다. 반발 뒤따라 가돼 뒤쳐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그의 처세술이 그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숨 고르기에 들어간 하륜은 평온했다. 관직을 벗어났으니 백수다. 출사할 일도 없었고 책임져야 할 일도 없었다. 가끔 임금이 부르면 입궐하여 자문에 응할 뿐 그야말로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그에게 대궐에서 전갈이 왔다. 자문할 일이 있으니 입궁하라는 것이었다. 채비를 갖춰 편전에 나아가니 여러 신하들이 있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계모인가? 서모인가?
"내가 풀어야 할 문제가 있어 하공을 들라 했소."
"무슨 말씀이온지 하명을 주십시오."
"계모(繼母)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태종이 꼭 풀어야 할 숙제였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게는 정비 신의왕후와 계비 신덕왕후가 있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이방원의 동복형제를 낳은 생모이고 신덕왕후는 이복동생 방번과 방석을 낳은 강씨다.
태종 이방원은 생모 한씨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한 강씨를 미워했다. 정동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있던 강씨의 정릉을 파헤쳐 성 밖으로 내보내고 신장석으로 광통교를 만들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묻어 두었던 증오심의 표출이다.
태종 이방원은 신의왕후 한씨만을 어머니로 대접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걸 기정사실화 하여 강씨를 무시했다. 그 연장선에서 신덕왕후 소생 방석과 방번을 서자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일으킨 것이 무인(戊寅) 혁명이다.
이러한 태종의 처사에 일각에서는 예법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그래도 아버지의 제2 여자 신덕왕후 강씨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들로서 또는 국왕으로서 이 두 분을 어떻게 모셔야 할 것인지 고민이었다. 시행하는 절차에 있어 혼선이 있었고 봉행하는 과정에서 결례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이를 계승하는 자를 계모라고 합니다."
좌의정 유정현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정릉(貞陵)이 내게 계모가 되는가?"
정릉이란 신덕왕후를 이르는 말이다. 적개심이 묻어 있다. 태종은 신덕왕후라는 말조차 입에 담기를 싫어했다.
"그때에 신의왕후(神懿王后)가 승하하지 않았으니 어찌 계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왕후 한씨가 살아있을 때 태조 이성계가 강씨를 취했으니 계모라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정릉(貞陵)이 내게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었다. 내가 어머니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이 애중(愛重) 하시던 의리를 생각하여 기신(忌晨)의 재제(齋祭)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태종실록>
절대로 어머니 대접을 해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 소생 방석과 방번을 서자라 해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해석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결례다.' '법도에 어긋난다.' 이러한 소리를 다시는 하지 말라는 쐐기이기도 했다.
태종이 하륜을 부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유불선(儒彿仙)에 통달한 당대의 석학 하륜이 입회한 자리에서 논리를 정립하고 재론의 여지를 없애겠다는 전략이었다. 하륜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긍정한다는 얘기다.
관복을 벗은 백수, 산릉고증사가 되다
"하공에게 또 하나의 청이 있소."
"무슨 말씀이온지 하명을 내려주십시오."
"공이 잡아준 수릉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편안하니 진산의 공이 크오. 동북면에 있는 능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오. 하공이 다녀오도록 하시오."
조선 왕대의 주역 전주 이씨는 전주의 토호세력이었다. 훗날 목조로 추존된 이안사는 전주 고을 산성별감과 갈등을 빚다 가솔과 식솔 170여호를 이끌고 외가의 고장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했다.
공교롭게도 임지를 따라 부임해 온 안렴사가 전주의 산성별감이었다. 그 관리를 피해 동북면 덕원에 정착한 이안사는 훗날 익조로 추존된 이행리를 경흥에서 낳았다.
이행리는 이춘을 낳고 이춘은 이자춘을 낳았으며 이자춘이 무장으로 성공했다. 동북면을 평정한 이자춘은 부인 이씨와의 사이에서 이원계를 낳고 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이성계다.
여기에서 이씨와 최씨의 위상이 모호하다. 이자춘의 첫 부인은 김씨인데 실록은 '이자춘의 배위(配位)가 정효공(靖孝公) 최한기의 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도 승자의 냄새가 난다.
태종 이방원의 조부와 증조부 그리고 고조부의 묘가 모두 동북면 함흥에 있었다.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묘였으나 조선을 개국하고 왕에 등극한 후 경흥에 있던 이안사의 묘를 함흥으로 천장하면서 능으로 격상하고 관리를 상주하게 하였다. 도참의 대가 하륜으로 하여금 함흥을 방문하여 조상의 묘를 돌아보고 문제점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명을 받들어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하륜이 제산릉고증사(諸山陵考證使)가 되었다. 고증사의 위상에 걸맞은 안마(鞍馬)·모구(毛裘)·모관(毛冠)·입(笠)·화(靴)와 유의(襦衣)1습(襲)을 마련해주고 종사관을 붙여 주었다. 최상의 대우다.
"진산이 함길도에 가는데 내가 잔치를 베풀어 전송해주고자 한다. 진산부원군이 술을 마시지 못하니 풍악을 준비도록 하라."
하륜이 동북면으로 떠나던 날, 태종은 몸소 동교 선암(鐥巖)에 나와 하륜을 전송했다. 풍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임금이 내려준 모관에 하사한 말(馬)을 타고 멀어져 가는 하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태종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태종과 하륜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첫댓글 하륜은 이숙번 보다는 한 수 위, 그러나 토사구팽 당하기는 시간차는 있지만 똑 같지요.
태종의 장자방 하륜, 다시는 못올 한양을 떠나 함길도로 가는구나. 나이 70에 먼길 나서니 어찌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