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던 날에 기남은 순희의 새 아파트로 찾아온다. 채 정리 못한 채로 방바닥에 널브러진 종이 박스들을 테이블 삼아 아무렇게나 펴놓고 자장면을 먹고 있을 때였다. 포장이사여서 손 댈 것도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비 내릴 날씨에 신경이 곤두서 웬만한 이삿짐을 손수 나른 것처럼 피곤한 하루였다. 이삿짐을 집에 다 들여놓고 구구절절 손대겠다는 직원들을 물리치고 보니 그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남아? 이 늦은 시간에 네가 무슨 일이야? 길 찾기는 어렵지 않았을 건데 왜 이렇게 비는 맞았어? 이사한 게 걱정 된 모양이로구나?
순희가 아직 풀지 않은 상자 몇 개를 보듬더니 금세 수건을 꺼내와 기남의 옷을 닦아주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으레 그러면 됐다고 수건을 빼앗았을 기남이가 막대기처럼 꼿꼿한 게 어색해 고개를 올려본다는 것이 그와 눈이 마주쳤다. 기남은 울먹울먹했다. 엄마. 미안. 의열도 자장면 그릇을 내려놓고 아들 기남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 더 이상은 못 숨겨요.
─뭘?
─저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남자예요.
대번 환해지던 순희의 표정이 채 어두워질 틈도 없이 뱉어진 말미의 붙은 성별 하나. 비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작지만 분명하게 번개가 내려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정적. 정적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기남이 돌아서서 집을 나섰고 두 사람은 그런 그를 붙잡지 못했다.
나이 스물여덟. 스무 살이면 으레 아르바이트를 해서 하다못해 몇 만원이라도 용돈 들고 다니기 마련인데 기남이는 그 나이 먹도록 집에서 용돈을 꼬박꼬박 받아다 썼다. 지금이야 중학교 때까지 의무교육이어서 전처럼 돈 많이 들여가며 공부 시킨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버렸지만 기남이하고 기영이 때는 국민 학교 시절이어서 육성회비부터 학교에 들어가는 돈이 자잘하게도 많았다. 모자라지는 않아도 넉넉하지는 못한 집에서 두 남매를 대학 교육까지 시키겠다는 결정은 생각처럼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기남 밑에 네 살 터울 기영이는 여자 애인데도 제법 머리가 비상해서 어려서부터 판사 하겠다는 둥, 간호사가 인생의 꿈이라는 둥 듣기만 해도 고마운 소리를 철철 잘도 해주었지만 기남은 아니었다. 어려서는 오로지 택시 운전수였다. 그러다 학교 들어갈 때쯤엔 어디서 봤는지 입만 열었다 하면 가수 타령이었다. 장난감 마이크가 없으면 보채는 것도 정도가 지나쳐 그쯤 아이들한테 근엄하고 말 없기로 아이들 훈육을 도맡았던 의열도 그런 그 앞에서는 장사가 못됐다.
기남은 그 후로부터 12년 학교생활 내리 장래 희망 적는 란에 가수만 하겠다고 적는다. 머리가 굵어지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제법 이름 있는 회사에 오디션도 수차례 본다. 이름 있는 노래 대회에 나가 입상도 했지만 그런 입상 경력은 오디션에서 인정해주지를 않아 허사였어도 무슨 대회만 있다면 밤새도록 목소리 올려가며 연습해서는 손목시계라도 부상을 타왔다.
순희는 기남이가 한 때 바싹 저러고 말겠거니 벌써부터 몽둥이 휘두르며 가수는 안 시킨다 했던 의열을 말렸다. 그게 화근이었다. 어느 새 기남 나이 입시생. 단단히 결심을 먹었는지 기남은 수험장을 박차고 나가 어디 회사 연습생이 되었다 전갈 한통을 날리곤 연락을 끊는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순희나 의열 모두가 전면 반대를 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의열은 전보다 더 강하게 그를 붙잡고 그의 꿈을 규탄했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뜯어 말리면 더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안 그래도 노래가 좋아 노래 부르는 인생을 살겠다 결심한 스무 살 기남은 그들의 반대에 더 강렬한 스파크를 내게 된다.
그러나 연습생이라는 것이 무직과 다름없어서 월급을 바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능수가 없다면 가차 없이 내쳐 버리는 통에 돈 벌 시간에 춤 한 자락, 노래 한 절 더 부르고 봐야 하는 게 서글픈 연습생 시절이 아니던가. 그렇게 8년을 내리 연습만 하며 살았으니 부모 속은 부모 속대로 본인 속도 본인 속대로 까맣게 타들어가는 시간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의열과 기남의 사이는 그 8년동안 거침없이 추락했다. 새벽 늦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면 의열은 기남을 두들겨 패서는 다리라도 부러뜨려 인생 제대로 만들겠다고 도끼눈을 해서 그 새벽부터 기남과 전면전을 펼쳤다. 기남도 만만치 않았다. 내 인생 내가 사는데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숫제 돈 떼어먹힌 빚쟁이처럼 소리쳤다. 하나 있는 아들 사람 구실 못한다는 말은 예삿말이고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말려 봐도 그때뿐인 기남을 의열은 이제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기남의 누이 기영은 약대에 입학하여 그 후 장학금을 받으며 순조롭게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고 싶어 했으나 집안 사정 때문에 고사하고는 큰 병원에 약사로 취직하게 된다. 그러다 같은 병원 내과 의사와 치정이 생겨 그 후 연애만 쭉 하다가 결혼에 성공한다. 인사라는 것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지만 누이가 떵떵 잘 나가는 약대에 나와 또 잘 나가는 의사와 결혼까지 해버렸으니 기남의 열등감을 말할 수 없이 비감했다. 의열은 분개했다. 8년 세월을 놀고먹는 기남의 젊음에 대해 분개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애들도 햄버거 가게에 가서 손에 기름 묻혀가며 돈 버는 시대에 딴따라 하겠다고 미련스러이 세월아 네월아 하는 그를 의열은 이제 용서할 수 없다고 비탄했다.
그렇지만 사람일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 했던가. 그 후 기남의 1집 앨범이 만들어지고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수상하는데는 채 일 년도 걸리지 않는다. 그제쯤 의열이 평생을 다니던 보험회사에서 명퇴하고 집에만 있을 때니까 싫다고 그래도 여봐란 식으로 가요순위 프로그램만 틀어놓는 순희의 계략에 기남이가 1위를 수상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지켜보게 된다. 순희는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기남의 옆으로 크레딧이 올라가는 영상을 가리고 서서는 그만 기남이를 용서해요, 한다. 의열은 안 보는 척 눈짓으로만 화면을 쳐다보다 쑥 화면 앞으로 비어져 나온 순희의 기척에 놀라, 들고 있던 신문을 필요 이상으로 팔락팔락거리며 헛기침을 한다.
1집이 대박 난 후 연이은 대박 행진은 계속된다. 드라마, 영화 주제곡도 작품의 히트와 상관없이 연일 대박이 났다. 광고 회사에서도 기남에게 억대의 러브콜을 서슴지 않아 했다. 그만하면 연습생 8년은 숫제 미담이었다.
명퇴하고 하릴없이 지내는 것이 싫어 퇴직금으로 화곡동 아파트 근처 상가에 치킨집을 낸 의열. 톱스타 기남 아버지로써 조금 구김 갈 만한 일이었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리하게 연 가게는 다행스럽게 근처에 들어선 신축 건물과 회사 건물들로 부산한 호황을 맞게 된다. 연속 롱홈런을 치고 있는 기남 소속사에서 아들 이미지를 생각하라는 말과 가게 처분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도 가게가 호황을 맞을 때였다. 기남이 가전제품에서부터 화장품 광고까지 이미지 주가가 최상일 때 친부가 다름 아닌 치킨을 튀겨다 배달하고 있다고 한다면, 톱스타 기사거리에 사족을 못 쓰는 연예부 기자들한테는 황송한 젯밥일 수밖에. 그러나 열은 소속사 사람에게 보란듯이 비죽된다. 저 인생은 저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일진데, 내가 아들 무서워 돈도 못 법니까? 닭을 튀겨내던 순희가 조금 두려워져서 회사 사람들이 물러간 뒤, 정말 그래야하지 않을까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면 열은 한마디로 묵살시켜버렸다. 됐어.
가게는 잘 됐다. 야식 시간이면 그 시간에만 따로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이 오토바이로 부지런히 치킨을 날랐다.
바쁜 스케줄에 연락도 뜸하던 기남이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뒤 화곡동 가게를 찾았다. 순희는 대번에 알아봤지만 열은 손님인 줄 알고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파딱 숙인 열의 뒤로 순희가 어머 기남아! 했다.
─기영이는 기영이대로 잘 살고 있고 저도 저대로 잘 살고 있는데 치킨집이라니요. 남한테 빚진 것도 없이 잘 살고 있잖아요. 누가 보면 배 아플 정도로요. 이제 저도 엔간해서 아버지 앞으로 외제차 한 대쯤은 무리 없어요. 아무리 미운 오리 같은 자식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삐딱하게 나오실 필요는 뭐예요? 하실 거면 고상하게 카페 같은 거면 또 몰라요. 정 하고 싶으시다면 목 좋은데다 카페나 하세요. 엄마도 이제 말년이신데 치킨 튀기는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해요? 제발 정리하세요.
가게는 결국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순희의 끈질긴 회유도 있었지만 의열도 그렇게까지 나오는데야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가게는 내놓고 얼마 안 돼서 금방 새 주인이 나타났다. 금방에서 매출하면 최고였고, 이기남 아비가 하는 집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구경삼아 들른 뜨내기들도 그간에 많았던 것이다.
청년 아르바이트생을 마지막 마중까지 해서 보낸 다음 의열이 철제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희가 걸레질을 하다 말고 미련스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뭣 하러 울어. 그렇게 그만두라고 재촉했던 사람이. 그가 투박하게 이죽거리니까 순희가 대답하기를, 섭섭하기는 하네요, 한다. 홀 한 구석에 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는 여인, 순희를 보며 열은 허탈한 감정에 빠진다. 기뻐서 울고 슬퍼서 울고, 눈물 많은 여자라 좋다고 덥석 결혼해주시오 했던 의열이었다. 이제는 예순을 넘어 진갑을 의식하고 사는 이 나이에 손수건을 찍어대는 마음 약한 순희가 의열은 문득 새삼스러웠다. 새삼스럽지 않은 것을 새삼스럽게 하는 것은 사랑일까. 열은 고개를 저으며 그런 생각은 제하고 마지막으로 가게를 훑어본다. 비록 아들 때문에 접게 된 가게래도 평생을 보험만 팔 줄 알았지, 몸을 놀려 돈을 벌기는 이 가게가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왜 닭집이느냐고 기남이가 그랬을 때, 보험에 치였던 살던 지난 날, 문득 일이 힘들어 사는 게 지쳐, 제 두 눈 찔러가며 살았던 그때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것이 술이었다면 안주로는 닭이어서 훗날 닭 집을 하며 자신과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쫄깃쫄깃한 닭 한 마리 튀겨주는 말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짐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닭만 튀겨주는 삶이 삶의 치열함에 비켜나 있을 나이와 어울릴 것 같아 그렇게 여겼던 마음이었다.
새 주인이 직접 가게로 내방했다. 순희가 셔터를 내리고 뒤돌아서서 담배만 뻐끔거릴 뿐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열을 대신해서 새 주인에게 열쇠를 넘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열이 일 미터 정도 앞서 걸었고, 순희가 그만큼 뒤쳐져서 그를 따랐다.
집에 돌아오니까 기남이 아파트 입구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쪽에서 열하고 순희가 오는 것을 알고는 이만큼 헐레벌떡 달려와서 하얗고 커다란 서류봉투를 열의 품에 안겨주고는 그만 제 차에 올라타 쌩 가버렸다. 귀신처럼 왔다가 헤벌죽 봉투 하나 주고 간다고, 열이 비죽거렸다. 순희가 엘리베이터에서 봉투 안에 든 것이 무어냐고 하니까 열이 심드렁하니 건넸다. 순희가 봉투 안의 종이무더기를 꺼내어 보니 자동차 등록증, 아파트 계약서, 보험증이 들어있었다. 순희가 놀라서 열을 올려다보면 열은 거울로 그런 순희를 보다가 뜨먼 봉투와 서류들을 본다. 왜?
강남의 아파트. 독일의 차. 유명한 보험회사의 보험 상품. 모두 다 하루아침에 꿈처럼 다가온 것들이었다. 이사 날짜를 정해 자신의 매니저 만수에게 연락 하라는 봉투 속 흘겨 쓴 기남의 위풍당당한 메모처럼 일은 일사천리 진행되었다. 오래도록 살아온 화곡동 아파트를 떠나 외제차에 몸을 싣고 강남으로 건너가는 도로 위. 창문을 내려놓고 순희는 운전석의 의열에게 소리쳤다. 열이 오빠! 꿈 같애!
포장이사여서 큰 짐은 집안 무사히 안착 됐고 자잘한 짐들은 순희가 직접 하겠다고 직원들의 손을 물리쳤다. 내 살림 내가 정리하고 정 붙여야지, 안 그래도 새집이라 무정한데 내 짐마저 이러쿵저러쿵하면 살 맛 안 날 것 같아서요. 생돈 들여 사람까지 불렀는데 그런다고 그가 지청구를 주니까 슬몃 웃으며 순희가 그런다. 오빠도 참.
─저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제서야 순희가 기남의 손을 붙잡으며 어머, 그랬다.
─남자예요.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그제야 배알이 뒤틀린 열이 화가 뻗쳐서 그대로 돌아가 버린 기남에게 연락을 했다. 술에 잔뜩 취해서 술주정하는 거라고 순희가 아무리 휴대폰을 뺏어보려고 해도 열은 막무가내였다. 술주정을 해도 정도라는 것이 있는데, 득달같이 와서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런 소리일거면 필시 그게 사람이냐고, 열은 극악무도한 자식을 제 탓으로 돌려가며 자식 잘 못 키웠다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해댔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속이 상하여 열은 그대로 기영에게 전화를 넣었다. 입덧이 심해 말이 아니더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전화 목소리가 꼭 며칠 앓은 사람처럼 의욕이 없는 목소리라 혈에 찬 열도 그만, 괜찮니, 목소리를 낮추며 그랬다. 기영이가 아버지 전화라는 것에 퍼뜩 놀라서 어머, 아버지가 웬일이세요? 호····· 혹시 엄마한테 무슨 일이라도?했다. 연락이라고는 한 번 없던 양반이 그것도 늦게 연락을 해왔으니 사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으응, 으응, 이러고 있는 열을 전화기를 순희가 뺏어서 별일 아니다, 네 아버지가 노망이 나시려고 그러시나보다 하고는 제법 빨리 끊었다.
─왜요. 동네방네 아시는 분이라면 다 연락해서 아들이 이렇더라고 소문이라도 내시지. 기남이 걔가 오죽 힘이 들었으면 그런 술주정을 하겠어요. 그리고 말 들어보니까 연예인들 보는 눈이 많아 외로움이 많은 직업이라고 해요. 저도 슬슬 그런 외로움이 드는가보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노여움 접으세요.
기남과 배우 A의 염문설이 터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서였다. 기남의 사진과 이름이 대문짝하게 나온 1면의 신문들이 테이블에 한 가득이었다. 아들 일이라면 죽자사자 반대로 나가는 의열도 그날만큼은 순희 앞에서 대놓고 신문을 보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순희가 기남의 휴대폰으로 연락을 넣어봤지만 전화기는 죽은 상태였다. 순희는 그날 기남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물기를 닦아준다고 재빨리 수건을 꺼내어 옷이며 얼굴이며 닦아주던 때 기남은 그런 말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결혼할 사람도 된다는 계산은 도대체 무슨 계산법일까. 순희 본인도 모를 일이지만 기남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녀는 대번 그런 이야기인 줄 알고 좋아라했던 것이다.
─남자예요.
뒤통수 얻어맞은 것처럼 기남은 그런 소리를 했다. 열은 그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순희는 바로 코앞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남자예요, 했을 때의 기묘한 자신감 같은 것이 이상하게 가슴을 훑어 내리는 것 같더라고 순희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 날 저녁. 강남 아파트로 기남이가 낯선 남자와 집을 방문한다. 아침의 신문 기사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두 내외가 버선발로 기남을 반겼다. 순희는 그러던 중 기남 뒤로 보이는 우직한 인상의 남자를 보고 대번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누구시니?
기남이 회사 마케팅 팀장 김병수라고 소개할 때까지 순희는 자리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엉거주춤 치질 걸린 환자마냥 그러고 있었다. 의열은 이미 앉아서 기남에게 염문설에 관련해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잔에 커피를 쏟아놓는 동안 순희는 부엌 너머 거실의 동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엄마!
기남이가 부엌에 들어왔다. 순희가 잘 됐다는 듯이 다짜고짜 어떻게 된 거야, 라고 물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저 사람 정말 회사 팀장이야, 하고 물었다. 묻고 보니 기분이 요상했다. 자신의 입으로 이름까지 밝은 사람한테 그럼 누구냐고 묻는 것은 무얼 더 알겠다는 것인가. 생각에 젖어있는 순희의 손을 잡은 기남이가 나오세요, 하고는 부엌에서 나갔다.
병수는 열과 마주하고 앉은 채 얼마 전 치킨 집을 정리해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있었다. 순희가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그들 사이의 기계적인 대화가 끊겼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순희가 소파에 앉기가 무섭게 기남이가 입을 열었다. 순희가 기남을 보니 며칠 전 그때와 똑같은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병수는 또 어떠한가. 단단히 결심한 듯 어금니를 꽉 깨물어 각진 턱.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깍지 낀 손은 이제부터 터지는 일에 대해 이미 충분히 관여되어 있고 자신은 철저히 방관하겠다는 듯한 인상까지. 아닌가. 순희는 그런 불안한 마음으로 병수를 훑은 다음 기남을 쳐다보았다.
─며칠 전····
그렇게 운을 뗀 기남의 고백은 연습생 시절에부터 사귀기 시작하여 지금 머물고 있는 청담동 오피스텔에 같이 동거 생활을 하며 지내는 사람이 병수라고 소개하는 걸로 시작해, 자신들의 만남을 한때 지나가는 그런 값싼 게이들의 로맨스라고만 생각했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진지하게 둘의 미래를 약속하고 싶다고 얘기하는 것으로 긴 고백을 끝마쳤다. 그 얘기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수차례 들어가 있었다. 기남이가 사랑이라고 얘기할 때마다 마치 연습생 시절 빨갛게 물들인 머리를 해가지고 가수하겠다고 할 때의 가슴 철렁거림이 똑같이 느껴졌다. 기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보다 10살이나 많은 병수가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의열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열이 병수의 멱을 잡아 내동이 쳤고, 기남을 무작위로 쳤다. 미쳤군! 미쳤어! 의열은 그대로 욕실에서 찬물을 퍼서 그들에게 쏟았다. 순희는 제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흠뻑 물벼락을 맞고 있는 기남과 병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아파트에 입주할 때 기남이가 선물로 사다 놓은 가죽 소파가 상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순희는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기력이 쇠했다. 열이 아침엔 죽을 쑤어왔고 저녁엔 기영이가 산만한 배를 만지며 저녁상을 차려왔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이고 나면 거짓말처럼 잠이 휘발되었다. 한 달이 지났다. 기영이가 놀랄까봐 순희도 의열도 기남의 얘기는 일절 함구했다. 기영의 편에서는 노인 양반이 갑자기 자리 보존하고 밥도 못 드시는 게 금방이라도 사단 치룰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산모 스트레스로 간혹 예정일을 넘길 수 있다고 연락을 받았지만 예정일을 3일이나 지나서도 아이는 나오지 않자 기영이는 힘들어했다. 죽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했다. 아침 일찍 병원에 들어갔던 기영이가 순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링거를 맞는 손으로 순희는 기영의 전화를 받았다. 그 길로 순희가 산부인과를 갔고 새벽이 다 돼서야 어렵게 아이가 나왔다. 자연분만을 시도하다 제왕절개를 했다. 삼키로의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아이를 낳은 산모나 곁에서 아이 낳을 때까지 시중을 들어준 순희나 똑같이 쓰러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일주일을 보냈다. 기영의 아들 때문에 꼭 한 달을 정신없이 보내고 보니 순희도 그제야 기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기영의 아들이 사르르 웃으면 순희도 사르르 웃게 되고 아이가 기영의 젖을 힘차게 빠는 모습을 보면 그깟 일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힘주어지기도 했다.
─기남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대통령?
─아니. 나는 운전사. 택시 운전수 할 거야.
대통령이란 답이 듣고 싶어서 순희는 까딱만 하면 꿈 질문을 하며 덧붙여서는 대통령을 들먹거리곤 했다. 뭐가 되고 싶다고 했지? 대통령이라고 그랬나? 지능적으로 대통령이라고 얼러봐도 기남은 단호히 아니, 라고 했다. 어린 애가 참 똑 부러지게도 아니, 아니, 한다고 동네 사람들은 큰 사람이 될 거라고 해주었지만 순희는 볼에 힘을 잔뜩 줘가며 아니, 하는 기남이 내심 서운했다. 나중에는 선생님이 되고 싶지? 해도 아니, 또 나중에는 변호사가 되고 싶지? 해도 아니, 의사가 되고 싶지? 아니. 아니! 아니! 아니야! 나는 택시 운전수 할 거야!
─엄마. 우리 아들 웃는 거 봐요.
기영의 아들 이름은 대성이었다. 살이 토실토실 오른 게 좋다고 팔도 까딱까딱 거렸다.
─나중에 영화배우 시켜도 되겠어. 오빠는 가수니까 얘는 배우 시킬테야.
까딱까딱하는 대성의 팔을 흔들어주며 순희는 그런 기영에게 제 자식이라고 제 뜻처럼 되지만은 않는다, 지나가듯 말했다. 기영이가 내심 서운한 지 말을 또 그렇게 하세요, 했지만 머릿속에 그득한 기남 생각 때문에 기영의 말은 대꾸도 못하고 혼잣말처럼 그게 그래······ 그렇더라구······ 중얼거렸다.
─엄마. 그거 뭐예요?
대성이를 품에 앉은 채 순희를 지나 순희 뒤로 있는 보자기 통을 보며 기영이는 말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뭔데요?
─아니라니깐 별스럽게. 엄마 간다.
순희는 도망치듯 기영이가 입원해 있는 산부인과에서 나왔다. 기껏해야 버스로 다섯 정거장. 청담동까지 기껏해야 지선버스로 다섯 정거장이면 간선버스로 세 정거장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척의 오피스텔을 앞두고 순희는 자신이 없어져서 정류장 벤치에 무너졌다. 두 달이 넘도록 연락 없는 무정한 아들 기남. 낯선 남자 병수. 오피스텔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두 달의 시간보다 연습생 시절부터라고 자신들의 감정이 서툰 감정이 아니다 공식했던 그간의 세월이 더 순희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그 말. 그 말이 하도 배신스러웠다. 배신이면 배신이지 배신스러운 것은 또 뭔가. 순희는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땀을 찍어냈다.
이미 오피스텔로 가는 버스는 수차례 지나갔는데도 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순희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기남의 전화번호를 눌러본다. 몇 개의 번호를 뒤로 멋쟁이 가수, 기남의 이름이 뜬다. 귀에 휴대폰을 댄다. 오래도록 신호음만 갈 뿐 그 신호음 끝자락에 매달려 있을지 모를 기남의 목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땅거미가 질 때 초록색 버스는 순희를 청담동에 내려주었다. 휘황할 것이라고만 여겼던 동네. 강남 사람들은 금金으로 도색한 길로 다니는 줄 알았던 순희였다. 그런 순희가 이제는 독일의 차를 몰고 강남의 아파트에서 산다. 그녀의 오래된 친구는 그를 대놓고 부러워했다. 나도 아들 하나 잘 키워 그만큼만 됐으면 소원이 없겠다. 여북해야 아들한테 너 지금이라도 가수 해 볼 생각 없겠느냐고 낮 술 한 잔에 그런 주접을 떨겠니. 자식 키워봤댔자 다 소용없다는 말 여지없는 얘기로 만든 사람이 너다 얘. 어떻게 두 남매를 똑 소리 나게 키우냐? 나는 아들 하나 있는 것도 힘에 붙여 죽겠구마는. 참! 막내가 이번에 아들 낳았다구? 딸도 아니고 첫애를 순풍 아들까지 낳고, 니 딸도 참 너 닮아 대단하다. 왕왕거리는 친구의 소리를 지우려는 듯 그녀는 느슨해져 이마 위에서 턱선 아래서 춤을 추는 풀린 파마 머리칼을 하나로 질끈 모아 묶는다. 순희는 손가방과 들고온 보자기 통을 단단히 쥔다. 청담동이라고 해봐야 화곡동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기며 그녀는 오래도록 기남이가 살고 있다던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기남이 매니저 번호가 몇 번이었더라······. 경비에게 붙잡혀 오피스텔 마당에서 전화기를 어수룩하게 들추고 있는 순희가 보인다. 기어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닫고서는, 내 아들이 이기남이라구요! 빽 소리 지른다. 드라마 남녀 치정 관계에서 오는 애틋함만 봐도 우는 여자, 환갑을 지나 진갑을 의식하고 살아도 뻑하면 눈물부터 흘린다고 의열에게 지청구를 얻어먹는 그런 여자 순희는 낯선 남자에게 소리를 빽 지른다. 내 아들! 이기남이가 여기 산다구요!
낯선 사람은 내쫓고 보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순희와 동년배의 경비 남자는 그녀를 모질게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 아줌마가 대낮부터 술 한 잔을 걸치셨나. 다 저녁에 와서 이 무슨 행패질이에요! 당신 아들이 이기남일 것 같았으면 내 아들은 원빈이겠소! 순희가 발악하며 경비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하는 말이, 내 아들이 이기남 맞으니 댁의 아드님이 원빈이겠네요. 거참 좋겠어요! 그러는 것이 아닌가. 동년배 두 남녀가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러고서는 네! 참 조오오습니다! 그러니 나가세요! 한다. 이 양반이! 내 아들이 이기남이라면 이기남인거지 어딜 봐서 사람을 이렇게 헌신짝 취급해요! 내 아들이 알면 가만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이기남씨 불러 보시든가. 네! 불러내겠어요! 순희가 독기 품은 눈으로 손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비장하게 그의 전화번호 하나하나를 호명하며 누르기 시작했다. 경비 남자는 그런 순희를 가소로운 듯 팔짱끼고 짝다리 짚으며 바라본다. 기어이 열 한 개의 번호가 다 채워지고 통화버튼을 누른 다음, 순희가 귀에 휴대폰을 가져갈 때까지 경비 남자는 대놓고 경멸하는 자세를 풀지 않는다.
─여보세요.
힘없는 기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순희는 그러거나 말거나 여, 여보세요?! 기남아! 엄마야!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엄만데 여기 오피스텔 밑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붙잡혀 있어. 엄마 좀 데리고 올라가.
한참 뒤에 굳게 닫혀 있던 오피스텔 들어가는 자동유리문이 열리고 캡 모자를 눌러쓰기는 했지만 텔레비전에서 많이 보았던 얼굴이 경비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어이구, 이기남씨.
기남이 뛰어와 순희 옆에 선다.
─무슨 일이시죠?
─아, 아니·······. 그게········.
─들어가요 엄마.
순희는 분에 찬 표정으로 굽신거리는 경비 남자를 째려보며 기남을 쫓아간다. 기남은 순희의 손에 들린 보자기 통을 뺏어 든다.
─어쩐······ 일이세요?
엘리베이터 앞에 서고 보니 그제야 순희도 덜컥 마음이 어려워진다.
─아들 집에 오는데 어쩐 일이 필요하니.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쇠 상자 안에 두 사람이 갇힌다. 적막. 19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기남과 순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구세주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용사 같은 아들. 하지만 사람들이 일체 없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아들 기남은 서먹하고 배신스러운 아들로 추락한다.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1907호. 기남의 엄지손가락을 인식하자 영리한 문은 금방 철컥 소리와 함께 빗장을 푼다. 오피스텔이라고는 하지만 신발장도 두 개나 연달아 붙어있고 신발 벗어놓는 곳도 널찍하니 변기통만 박아놓으면 욕실이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 순희가 신발도 벗지 못하고 대리석 바닥에 서 있으니까 기남이가 손에 들고 있던 보자기 통을 내려놓고 들어오세요, 한다.
─그 사람은?
망설이던 눈치더니 이윽고
─자요. 어제 좀 늦었어요.
순희가 한참이나 지체하다 하는 수 없이 실내화에 발을 꿴다. 평수가 제법 있는 오피스텔은 강남의 아파트 못지않다. 손님들 응대하라고 샹들리에까지 내려온 거실 같은 응접실은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워 보인다. 응접실을 지나 곧바로 난 복도 길을 쭉 내려오면 방이 있고 그 옆으로 부엌이 있다. 기껏해야 두 사람 밥 해먹고 그럴 텐데도 식탁은 여섯 명이나 붙어먹을 수 있는 크기의 식탁이다.
─밥은?
너른 집에 기가 죽어 작은 목소리로 순희가 기남에게 물었다. 기남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따라 식탁의 순희에게 내놓으며 먹었다 한다.
─갓김치야.
─응?
─문턱에 있는 거. 너 좋아라 하는 거잖어.
─아, 응.
─이렇게 잘해놓고 사는 건 줄 알았으면 김치도 가져오지 말 걸 그랬어.
─엄마아.
─너 어떻게 엄마한테 이럴 수 있어? 엄마는 가슴이 후들거려서 그런다쳐. 너는 어떻게 안면몰수하고 그렇게 두 달이 넘도록 연락 한 통 없이 그럴 수 있냐구. 엄마는 너 생각에 밤 잠 못 이루면서 그렇게 살았건만 너는 엄마 생각도 안 나?
순희는 기어이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찍어낸다.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말, 나 이제 알겠어.
─무슨 말을....
─너가 나라면 그러지 않겠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마냥 대뜸 찾아와서는 띡 남자하고 살아요 그러는데, 그러면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죄송해요.
─그게 다야?
─할 말 없어요.
─어이쿠. 휴.
뒤늦게 누구야 하며 병수가 부스스한 얼굴로 부엌에 넘어왔다. 순희의 모습을 보고 병수가 퍼뜩 놀라서 상체를 꾸뻑 숙이며 인사한다.
─오셨습니까.
인사를 하고도 순희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한참이나 멀대처럼 서있다 이윽고 기남의 옆에 가 앉는다.
내가 왜 찾아왔을까. 다만 얼굴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순희는 마음에게 그렇게 답한다. 하지만 왜 몰랐던 것일까. 청담동 오피스텔은 병수하고 같이 사는 집이라는 것을. 무슨 낙을 보겠다고 갓김치까지 담가 꾹꾹 눌러 보자기에 싸들고 왔던 것일까. 두 눈 앞에 말쑥하니 앉아 있는 장대 같은 두 남자를 보면서 동성애자라는, 기어이는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은 말로 그들을 묶어내는 게 면전에 침을 뱉는 것만큼 흉측하여 순희는 고개를 숙이고 만다.
조용한 부엌. 윙.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그들 사이의 침묵을 알맞은 농도로 조절한다.
삐쭉삐쭉 웃자란 머리칼. 양복을 벗겨놓으니 후덕한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의 병수. 그 옆으로 아직도 말갛게 젊은 기남. 저 젊음은 어떡하나. 순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다 자신 없어 다시 고개를 숙인다. 저절로 눈물이 억울하게 흘러내렸다.
─나는 도통에 이해하려고 해도 안 돼. 기남이 너가 엄마한테 장난치는 것 같아 기분이 내내 나빠. 사랑하는 사이라구? 둘이?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마 눈에는 사랑이 안 보이는데.
─사랑이 눈에 보여 엄마는?
─보이지. 보여. 너는 안 보여? 엄마는 보여.
─그래도 사랑인 걸.
─아버지는 어떻게 할래 너? 그 양반 심지 굳기로는 따라올 사람 없는데. 너 이 일을 어떻게 해쳐나갈래?
─엄마만 나 믿어주면. 8년 동안 무일푼으로 살았어도 엄마는 나 믿어줬잖아.
─엄마가 언제? 나 누구보다 너 등 떠밀면서 살았어. 돈 한 푼 못 벌어온다고 세상에 등신 천치 다 모아다가 합쳐놔도 너만큼은 아닐거라고 나 그렇게 8년 동안 너 떠밀면서 살았던 엄마야. 엄마 믿지 마.
─엄마가 나 좀 믿어주면 나 아버지한테 좀 어떻게 해 볼 거 같은데.
─엄마가 니 호구야? 엄마는 왜 항상 너의 이런 모습만 봐야 하니. 엄마가 만만해? 만만해서 이러는 거야? 엄마는 사람도 아니야? 너 나한테 왜 이러니 정말.
순희는 어깨를 떨어가며 운다. 기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복도를 지나와 신발을 꿰차고 보자기 통을 들고 현관문을 나서는 순희. 뒤늦게 기남이가 현관문까지 뒤쫓아 나오지만 거기까지만이다. 더 이상 쫓아간단들 상처투성이인 순희를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는데, 여기 있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데 그렇다면 순희에게 무리하게 다가가 잡는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상처일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말을 믿고 있는 기남이는 거기까지만 나온다. 마치 복도 어느 자락에 사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그 뒤로 병수가 조심스럽게 나와 기남의 뒤에 선다.
헐레벌떡 오피스텔을 나오다 보니 순희는 자신의 손에 김치통이 그대로 들려 있음을 알아차린다. 뭐해?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의열이 잠옷 차림으로 부엌에 나와 본다. 산발을 한 순희가 빨간 플라스틱 대야에 갓김치를 담구고 있다. 아직도 날이 새려면 한참이나 남은 시간에 갓김치라니, 의열이 놀란 가슴에 순희의 어깨를 톡톡 치며 뭐하냐고 연거푸 물었다. 보면 몰라요, 김치 담그고 있잖아요. 순희가 어깨를 퉁퉁 튕겨가며 불안한 음색의 의열을 야멸차게 물리친다.
─미쳐버린 줄 알았잖아 이 여편네야!
─깜짝이야!
─자라는 잠은 안자고 새벽에 뭐하는 거야? 그거 담가도 안 먹어. 그만두고 얼른 들어와!
─당신 안 줘!
─그럼?
─······혼자 다 먹을 거야.
─순희야.
─상관 마. 들어가서 자던 잠이나 자요.
순희는 걱정스런 눈길로 자신을 뻔히 내려다보고 있는 의열을 무시하며 김치를 버무렸다. 막 무친 갓김치를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하여 금방 꺼내주면 기남이는 밥부터 찾았다. 다른 애들처럼 햄이며 고기 반찬 안 해줘도 좋다고 했던 게 신기해서 친구들한테 김치 잘 먹는 자식이라고 자랑했던 순희. 뭐 그런 걸로 자랑이냐고 친구들은 싱거워했지만 어린 아이가 젓가락질도 시원찮은데 김치를 먹겠다고 포크로 연신 김치통을 통통 치는 것을 보면 그녀에게 그것은 행복이었다. 설령 이 아이가 나중에 살인을 저지른다 하여도 모두 다 무마하고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용솟음치는 자애가 순희를 더욱 엄마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아이들이 속상하게 하면 순희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내놓았다. 기영이는 김치를 싫어했다. 참치나 붉은 속이 들어간 햄을 좋아했다. 기영이가 속상하게 한 날이면 정성껏 햄을 계란에 붙여냈다. 그러면 의열이 속없이 그랬다. 공부 잘하는 자식만 편애한다고. 기남이는 기껏 갓김치가 뭐냐고 타박했다. 아이들한테 버럭버럭 소리만 지르기만 했던 의열도 그럴 때 보면 자식들 위하는 천상 아비였다. 그런 의열의 속엣마음을 사소히 확인하며 또 아이들의 엄마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느끼며 순희는 먼 미래를 생각했던 것이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순희는 갓김치를 버무렸을 때 그냥 기남의 얼굴만 보자 했다. 김치만 주고 내빼듯 오자 했다. 그거면 된다고. 김치를 수백 통 만들어도 좋으니까 아들 먹이는 재미에 만들어주고 싶을 때까지 김치를 만들어보겠다고 순희는 다짐하며 그 새벽에 김치를 담갔다.
데스크의 경비남자는 어색한 듯 순희에게 어정어정 웃었지만 순희는 그런 경비남자를 외면한 채 다시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올라타고 19층을 누른다. 1907호. 순희가 1907호 현관문 앞에 우뚝 선다. 이 문 안에 두 사람의 얼마의 시간이 엉겁처럼 지탱되어 있다. 순희 자신이 감히 엉기고 들어갈 수 없는 아무도 모를 시간이 그 둘 사이를 단단히 묶어두고 있다. 사랑이 안 보였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남자 둘이 앉아 있는 그 꼴에서 사랑을 느낀 순희는 그것이 더없이 수치스러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자식이 그럴 수가. 순희는 김치통을 앙 쥔다. 1907호. 두 눈에 새겨지는 1907호가 춤을 추고 지렁이처럼 하나가 되어갈 때쯤 순희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김치통을 쥐색 현관문 바투 내려놓는다. 다시 현관문을 본다. 1907호. 순희는 그렇게 발음해본다.
[끝]
첫댓글 와, 정말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밤새 편의점에서 쌓인 피로가 잠시나마 풀린 느낌! 제 수준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소설이에요. 역시 부럽기만 하네요. 습관적으로 접속했다가 또 강한 자극 하나 받아 갑니다. 더불어 끈끈한 감동도요.
고맙습니다.
좋은데요~ 그런데 저희 카페에 소설에는 대체적으로 주인공들이 부유한 사람들이 많네요 ㅋㅋ
고맙습니다.
1. 한 단락 안에서 시제일치가 전혀 안되어 있네요. 과거형과 현재형이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첫 문장부터 비문입니다. ~온다에 뒤이어 바로 ~였다가 쓰입니다. 이와같은 문장 구성이 전체문장에 퍼져 있네요, 시제일치가 안되어 있으면 독자들의 작품독해가 난해해집니다. 다시 한번 스스로 작품을 정독하시면서 맞춰보시길 바랍니다. (~ㄴ다. 같은 현재시제는 문장상으로 볼 때 제일 멋있어 보이지만 제일 어려운 문장이라고 합니다. )
네. 편재님의 말씀처럼 시제 일치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ㄴ다, 문장이 제일 어려운 문장이라는 말씀은 처음 들었는데, 어쩐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2. 제가 보기에는 소재인 동성애와 주제인 모성애(?)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듯해 보여서 결말이 미지근해 보입니다. 차라리 하나만을 가지고 파고 들었으면 더 좋았을거라 생각이 됩니다.
3. 제목으로 쓰인 갓김치.... 작품의 제목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을 내포해야 하는건데... 이 제목은 고개가 갸웃거려집니. 갓김치 안에 동성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엄마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유로 이걸로 정한건가요?
아래 싸리대문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해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그렇게 정했는데, 제가 표현력이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조합을 잘 못 시킨 것 같네요.
4. 긁적이다님이 적은 댓글에 덧붙이자면... 주인공이 부유하게 나오면 직품은 전체적으로 천박(?) 해보입니다. 그게 문학입니다.
동성애코드는 한국사회에서 민감한 이야기 중의 하나인데, 이 소설에서 동성애는 없고 동성애라는 단어만 있습니다. 기남이 부모 앞에 동성애를 한다는 말 한마디 외에는 기남이 동성애에 대해 어떤 생각이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드러나는 게 없습니다. 이는 이 작품에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는 굳이 동성애 코드가 아니더라도 다른 소재를 집어 넣어 읽을 수 있으니까요. 동성애를 빼고 부모가 결사반대하는 여자를 집어 넣고 읽어도 동성애와 똑같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소설 속 내러티브 -세상이 반대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기남. 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림. 부모는 남자는 안 된다며 호적까지 파겠다고 결사반대. 냉전. 시간이 흐르면서 아들에게 문을 조금 열어 보이는 부모(순희). 다른 내러티브 -부모가 완강히 반대하는 여자와 사랑하는 기남. 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림. 부모는 그 여자는 안된다며 결사반대. 냉전. 시간이 흐르면서 아들에게 문을 여는 부모.
이렇듯 이 소설에서 동성애라는 소재는 표피로만 작용합니다. 솔직히 이 소설에서 동성애 코드가 왜 필요한지도 의문입니다. 동성애 코드를 쓰려면 좀 더 동성애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할 듯 싶습니다. 동성애 코드보다는 차라리 이혼한 여자나 연상의 여자를 등장시키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맞습니다. 싸리대문님의 말씀처럼, 동성애에 관련한 기남이나 병수에 대한 부분은 다소 건성적이었습니다. 그 부분보다 엄마로써, 여자로써, 순희라는 인물로써, 동성애를 둔 아들을 이해하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었는데.. 역시 부족함을 지적해주셨네요.
만일 내 아들이 동성애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다수 한국 부모들은 결사반대를 할 것입니다. 끝까지 반대하는 부모도 있을 것이고, 순희처럼 아들에게 이해의 문을 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갓김치는 그 이해의 상징이 아닐까요. 아들이 좋아하는 갓김치를 현관 앞에 내려 놓으면서 순희도 동성애에 대한 마음의 문을 서서히 내려놓는 것. 혹은 내려 놓은 싶은 것.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편재님과는 다르게 저는 결말은 여운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늘과 땅을 오가는 것처럼, 댓글 하나에 마음이 휘청하기도 튀어오르기도 하네요. 감사합니다.
문장은 편재님말대로 과거시제와 현재시제사이에서 줏대없이 왔다갔다 합니다. 통일성이 필요할 듯 합니다. ^^*
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편재님이나 싸리대문님이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시제 일치의 부분에 대해선 조금 어색하다 여겼을 뿐이었는데.. 감사합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윗 분들이 다 해주신 것 같네요. 시제같은 경우에는 가끔 한 문장을 현재형으로 쓰는 것이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하지만 이 작품처럼 많이 나오면 오히려 독자들이 읽기에 좀 거북할 수가 있습니다. 편재님이 말씀하신 부유함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부유한 사람들에게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고민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부유함으로 인한 고민들 역시 존재하는데, 그런 부분을 좀 더 중점적으로 기술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의열이 하는 치킨집이 굳이 잘 되지 않았더라도, 아니 안 되는 편이 좀 더 스토리상으로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랄까요.
전반적인 심리묘사나 결말에서의 여운은 좋았는데, 왜 1907이 딱히 의미가 있는 숫자가 아닌데 왜 마지막에 그렇게 반복이 되고 발음까지 해보는지 조금 의아하더군요. 다른 소재로 여운이 남았으면 훨씬 좋은 결말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