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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제119회-3
송강의 인마가 천천히 전진하여 소주성 밖에 당도하였을 때, 혼강룡 이준이 풍질에 걸린 척하면서 침상에 쓰러졌다. 보고를 받은 송강이 의원을 데리고 오자, 이준이 말했다.
“형님께서는 회군하는 기한을 어기지 마십시오. 장초토가 먼저 간 지 오래 되었으니, 늦으면 조정의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형님께서 저를 가련히 여기신다면, 동위와 동맹을 남겨 저를 돌보게 해주십시오. 병이 나으면 뒤를 따라 갈 테니, 형님께서는 군마를 거느리고 먼저 경성으로 가십시오.”
송강은 그 말을 듣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의심하지도 않았다. 장초토가 재촉하기도 해서, 송강은 이준·동위·동맹을 남겨두고 인마를 거느리고 경성으로 출발하였다.
한편, 이준과 동위·동맹은 전날의 약속을 어기지 않고 비보 등 네 사람을 찾아갔다. 일곱 사람은 유류장에 모여 상의한 끝에, 가산을 모두 털어 배를 건조하여 태창항을 떠나 바다로 나아가 외국으로 갔다. 훗날 이준은 섬라국(暹羅國)의 임금이 되었고, 동위·동맹과 비보 등은 관원이 되어 바닷가를 지배하면서 즐겁게 살았다고 한다.
한편, 송강은 군마를 거느리고 상주와 윤주 등 지난날의 전쟁터를 지나면서 또 다시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군마가 강을 건너온 이래 열에 두셋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주와 회안을 지나 경성이 멀지 않자, 송강은 장수들에게 각기 천자를 알현할 준비를 하라고 명을 내렸다.
삼군 인마는 9월 20일에 동경에 당도하였다. 장초토의 중군 인마는 먼저 도성으로 들어가고, 송강의 군마는 도성 밖에 주둔하였다. 예전에 머물렀던 진교역에 영채를 세우고 성지를 기다렸다.
그때 이준을 보살피라고 남겨두고 왔던 군졸이 소주에서 돌아와, 이준은 원래 병이 난 것이 아니라 경성으로 가서 관원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동위·동맹과 함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송강은 또 다시 탄식하였다.
송강은 배선으로 하여금 경성으로 돌아온 27명의 장수들과 나라를 위해 전사한 장수들의 이름을 기록한 표문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장수들에게 천자를 알현하기 위해 관복을 준비하라고 명을 내렸다.
사흘 후, 조회가 열려 근신이 천자에게 아뢰자, 천자는 송강 등을 알현케 하라고 명하였다. 그날 동방이 차츰 밝아오자, 송강과 노준의 등 27명의 장수는 성지를 받들어 말에 올라 도성으로 들어갔다. 동경 백성들이 봤을 때, 이번이 세 번째 입조였다.
첫 번째는 초안을 받았을 때로서, 그때는 천자가 하사한 붉은 전포 혹은 푸른 전포를 입고 금패 혹은 은패를 차고 입조했었다. 두 번째는 요나라를 격파하고 돌아왔을 때로서, 그때는 모두 갑옷을 입고 입조했었다. 이번에는 태평한 때라 천자의 특명으로 관복을 입고 입조하였다. 동경 백성들은 백 명이 넘던 장수들이 몇 명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송강 등 27명은 정양문 아래 당도하여 말에서 내려 입조하였다. 시어사가 대전 아래 계단까지 인도하였다. 송강과 노준의가 앞에 서서 앞으로 나아가 여덟 번 절하고 뒤로 물러나 여덟 번 절하고 다시 중간쯤 나아가 여덟 번 절했다. 모두 스물 네 번의 절을 올리고 만세를 세 번 불렀다.
군신 간의 예가 끝나자, 휘종천자는 송강 등이 몇 명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측은하게 생각하여 모두 어전으로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송강과 노준의는 장수들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가 주렴 아래 무릎을 꿇었다. 천자는 장수들을 일어서게 하고 주렴을 걷게 하였다. 천자가 말했다.
“짐은 경들이 강남을 평정하느라 노고가 많았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경들의 형제를 태반이나 잃었다는 것을 듣고, 짐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송강이 흐르는 눈물을 그치지 못하고 재배하고서 아뢰었다.
“신은 어리석고 재주가 없어, 간뇌도지(肝腦塗地)하더라도 국가의 큰 은혜를 갚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날 신들 108명이 모여 의기를 함께 하고 오대산에 올라 생사를 같이하기로 발원했었는데, 오늘 이렇게 열 중에 여덟을 잃을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사한 형제들을 감히 모두 아뢸 수 없어 그 이름을 적어 삼가 올리오니,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천자가 말했다.
“경의 부하로서 왕사(王事)에 죽은 자들에게 모두 관작을 봉하라고 짐이 명하였으니, 그 공이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송강은 재배하고 표문을 올렸다.
평남도총관 정선봉사 신 송강 등은 삼가 표문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 송강 등은 어리석고 재주가 용렬하며 미천한 하급 관리로서, 지난날 큰 죄를 지었는데 다행히 폐하의 은덕으로 사면을 받았습니다. 하늘이 아무리 높고 땅이 아무리 두터워도 폐하의 은덕에 비할 수 없으며, 분골쇄신(粉骨碎身)하더라도 다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희 형제들은 양산박으로 떠남으로써 사악함을 버리고, 오대산에 올라 한 마음으로 충의를 다하여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고자 발원하였습니다. 유주성에서는 요나라 군사를 물리쳤고, 청계현에서는 방랍을 사로잡았습니다. 비록 작은 공이지만 이렇게 아뢰는 것은, 장수들의 이름이 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 송강은 그들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슬픔에 잠깁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은총으로 굽어 살피시어 이미 죽은 자들도 은택을 입을 수 있게 해주시고 살아있는 자들도 보살펴 주시옵소서. 신 송강은 전원으로 돌아가 농민이 되기를 원하오니, 폐하께서 너그럽게 살펴 주시옵소서.
신 송강 등은 황공하오나 죽은 형제들의 이름을 적어 삼가 올립니다. 전쟁터에서 전사한 정편장은 모두 59명입니다. 정장 14명은, 진명, 동평, 장청, 서녕, 삭초, 유당, 사진, 뇌횡, 완소이, 완소오, 장순, 석수, 해진, 해보입니다.
편장 45명은, 송만, 초정, 도종왕, 한도, 팽기, 정천수, 조정, 왕정륙, 선찬, 공량, 시은, 학사문, 등비, 주통, 공왕, 포욱, 단경주, 후건, 맹강, 왕영, 호삼랑, 항충, 이곤, 연순, 마린, 단정규, 위정국, 여방, 곽성, 구붕, 진달, 양춘, 욱보사, 이충, 설영, 이운, 석용, 두천, 정득손, 추연, 이립, 탕륭, 채복, 장청, 손이랑입니다.
도중에 병으로 죽은 정편장은 10명입니다. 정장 5명은 임충, 양지, 장횡, 목홍, 양웅이고, 편장 5명은 공명, 주귀, 주부, 백승, 시천입니다. 항주 육화사에서 원적한 정장 1명은 노지심이고, 팔을 잃어 관작을 원하지 않고 육화사에서 출가한 정장 1명은 무송입니다.
지난번에 경성으로 회군했을 때 소주로 돌아가 출가한 정장 1명은 공손승입니다. 관작을 원하지 않아 도중에 떠난 정편장은 4명인데, 정장 2명은 연청, 이준이고, 편장 2명은 동위, 동맹입니다.
강남으로 떠날 때 경성에 남은 사람과 후에 경성으로 불려간 의원까지 5명인데, 편장 안도전, 황보단, 김대견, 소양, 악화입니다.
현재 입조한 정편장은 27명으로, 정장 12명은 송강, 노준의, 오용, 관승, 호연작, 화영, 시진, 이응, 주동, 대종, 이규, 완소칠이고, 편장 15명은 주무, 황신, 손립, 배선, 양림, 능진, 장경, 번서, 송청, 목춘, 두흥, 추윤, 채경, 손신, 고대수입니다.
선화 5년 9월 일.
선봉사 신 송강, 부선봉 신 노준의 등이 삼가 표문을 올립니다.
천자는 표문을 보고 탄식하여 마지않으며 말했다.
“하늘의 별자리에 응한 경들 108인이 이제 27인만 남았구나. 관작을 사양하고 떠난 4인까지 치면, 참으로 열에 여덟이 떠났구나!”
천자는 성지를 내려 왕사(王事)에 죽은 정편장들에게 관작을 수여하였다. 정장은 충무랑(忠武郎)에, 편장은 의절랑(義節郎)에 봉하였다. 그들 중 자손이 있는 자는 경성으로 불러 관작을 승계하도록 하고, 자손이 없는 자는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장순은 영험을 나타내어 공을 세웠으므로 금화장군(金華將軍)에 봉하였다. 중인 노지심은 역적 괴수 방랍을 사로잡은 공이 있고 큰 사찰에서 좌정한 채 선종하였으므로 의열조기선사(義烈照暨禪師)를 추증하였다. 무송은 적과 싸우면서 공을 세우고 팔을 잃었으며 육화사에서 출가하였으므로 청충조사(清忠祖師)에 봉하고 10만 관의 돈을 하사하여 천수를 마칠 수 있게 하였다. 고인이 된 여장군 호삼랑에게는 화양군부인(花陽郡夫人)을, 손이랑에게는 정덕군군(旌德郡君)을 추증하였다.
현재 입조한 자들은 선봉사 송강을 제외한 정장 10명은 무절장군(武節將軍)에 봉하여 각 주의 통제관이 되게 하고, 편장 15명은 무혁랑(武奕郎)에 봉하여 각 방면의 도통령(都統領)이 되게 하였다. 여장군 고대수는 동원현군(東源縣君)에 봉하였다.
선봉사 송강은 무덕대부(武德大夫) 및 초주 안무사 겸 병마도총관에 봉하고, 부선봉 노준의는 무공대부(武功大夫) 및 여주 안무사 겸 병마부총관에 봉하였다. 군사 오용은 무승군 선승사, 관승은 대명부 정병마총관, 호연작은 어영병마지휘사, 화영은 응천부 병마도통제, 시진은 횡해군 창주 도통제, 이응은 중산부 운주 도통제, 주동은 보정부 도통제, 대종은 연주부 도통제, 이규는 진강 윤주 도통제, 완소칠은 개천군 도통제에 임명하였다.
천자는 또 정편장들에게 관작을 봉함과 동시에 상을 내렸다. 편장 15명에게는 각각 금은 3백 냥과 비단 다섯 필, 정장 10명에게는 각각 금은 5백 냥과 비단 여덟 필을 내렸다. 선봉사 송강과 노준의에게는 각각 금은 1천 냥과 비단 열 필, 어화포(御花袍) 한 벌, 명마 한 필을 상으로 내렸다.
송강 등은 사은한 다음, 목주의 오룡대왕이 두 번이나 영험을 나타내어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고 장병들을 구원한 일을 아뢰었다. 천자는 칙령을 내려 ‘충정영덕보우부혜용왕(忠靖靈德普祐孚惠龍王)’의 칭호를 더하였다. 그리고 어필로 목주(睦州)를 엄주(嚴州)로 흡주(歙州)를 휘주(徽州)로 개명하였는데, 방랍이 모반한 곳이기 때문에 반대의 뜻을 가진 문자로 바꾼 것이었다.
청계현(清溪縣)은 순안현(淳安縣)으로 개명하고, 방원동은 물길을 내어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칙령을 내려 목주의 관아에서 돈을 내어 오룡대왕묘를 세우게 하고 친필 편액을 내렸다. 방랍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강남 지역의 인민들에게 3년 동안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날 송강 등이 사은하자, 천자는 태평연을 열어 공신들을 경하하였다. 문무백관과 구경(九卿)·사상(四相)이 모두 연회에 참석하였다. 연회가 끝나자, 송강이 또 상주하였다.
“신이 양산박에서 초안을 받은 이래 부하 군졸도 태반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에게 폐하께서 성은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천자는 상주를 허락하고 칙령을 내렸다.
“군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1백 관의 돈과 비단 열 필을 내리고 용맹군(龍猛軍)과 호위군(虎威軍) 두 영채에 속하게 하여 달마다 봉록을 지급하라. 군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2백 관의 돈과 비단 열 필을 내리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양민이 되게 하라.”
송강이 또 상주하였다.
“신은 운성현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죄를 지은 이래로 감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신이 고향으로 돌아가 친족들을 만나보고 초주로 부임할 수 있도록 성상께서 휴가를 주시기 바랍니다.”
천자는 상주를 듣고 기뻐하면서 다시 10만 관의 돈을 하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자로 삼게 하였다. 송강은 사은하고 조정을 나왔다.
다음 날에는 중서성에서 태평연을 열어 장수들을 대접하고, 사흘째에는 추밀원에서 또 연회를 열어 태평을 경하하였다. 장초토, 유도독, 동추밀, 종참모, 경참모, 왕품, 조담은 조정에서 더 높은 관작을 얻었다. 태을원(太乙院)에서는 성지를 주청하여, 방랍을 동경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에 처하고 사흘 간 대중에게 효시하였다.
한편, 송강은 부하 군사들 가운데 군대에 남기를 원하는 자는 용맹군과 호위군에 이름을 보고하고, 민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은자를 주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 양민이 되게 하였다. 부하 장수들도 각기 상을 받고서 임명받은 곳으로 부임하였다.
송강은 장병들을 모두 보내고 나서 아우 송청과 함께 군졸 1~2백 명을 거느리고 하사받은 물건을 가지고 동경을 떠나 산동을 향해 출발하였다. 송강과 송청이 금의환향하자, 고향의 친척들이 모두 영접하여 장원으로 갔다.
하지만 뜻밖에 송태공은 이미 돌아가시고 영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송강과 송청은 통곡하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식구들과 일꾼들이 모두 나와 송강에게 절을 올렸다. 장원의 전답과 가산들은 송태공이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송강은 스님들을 장원으로 청하여 돌아가신 부모님과 종친들의 명복을 빌었다. 고을의 관원들도 모두 찾아와 인사했다. 송강은 날을 택하여 송태공의 영구를 높은 언덕에 모셔 장례를 지냈다. 그날 고을의 관원들과 인근 노인들, 친구와 친척들이 모두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송강은 현녀낭랑(玄女娘娘)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돈 5만 관을 내어 장인들로 하여금 구천현녀낭랑의 사당과 산문을 다시 세우게 하고 성상도 새로 장식하였다.
어느덧 여러 날이 지나 천자의 책망을 염려하여 날을 택해 상복을 벗고 연회를 열어 고향 어른들을 초청하여 대접하고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다음 날은 친척들이 역시 연회를 열어 경하하였다. 송청은 관작을 받기는 했으나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종친들의 제사를 받들기를 원하여, 송강은 송청에게 장원을 넘겨주고 남은 돈과 비단 등은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향에서 몇 달을 보낸 송강은 어른들과 친구들을 작별하고 동경으로 다시 돌아갔다. 형제들 중에는 가족을 동경으로 불러들여 함께 사는 사람도 있고, 부임지로 떠나간 사람도 있었다. 남편이나 형제가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은 조정에서 하사한 상을 받아 가족을 위로하러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송강도 성원의 관원들을 작별하고 임지로 부임하기 위해 행장을 수습하였다. 그때 신행태보 대종이 송강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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