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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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하는 비범한 여정 17]
오직 너희의 하나님만 가까이 하라
수 23:1-16 (봉독: 3-11, 14)
여호수아는 이제 늙어 고별 말씀을 전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 23장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리더십들에게 남긴 메시지입니다.
나이가 많아 늙은 여호수아가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가 꺼낸 서두는 바로 “자신”과 자신의 업적이 아닌 “하나님”이었습니다.
[수 23:3]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편이 되시어 이 모든 이방 나라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그 모든 일을 잘 보셨습니다. 과연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의 편이 되시어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의 편이 되시어 싸우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없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가리고 오직 하나님을 주어로 높이고 그분이 행하신 일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영성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산 비결입니다. 23장은 여호수아가 지도자들에게 하는 말씀인데, 이미 시작부터 리더십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리더십은 오직 “하나님만”이 리더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내가 한 것이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그저 참 리더이신 하나님만을 따라가는 추종자였을 뿐이라는 겁니다.
제자는 누구입니까? 나를 따르라고 하신 참 스승이요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지금 여호수아의 고백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편이 되어 싸워주셨고, 5절에 보면 앞으로 미래에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즉, 여호수아의 메시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어요, 전부다.”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분이시다.”
또한 이 하나님은 약속하시면 반드시 이루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그 어떠한 약속의 말씀도 어김이 없이 이루어짐을 경험하였습니다.
14절 보세요.
[수 23:14] ... 당신들은 주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선한 말씀 가운데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당신들 모두의 마음과 모두의 양심 속에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한 말씀도 어김이 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놀라운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선한 말씀 중에 한 말씀도 어김이 없이 다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계속 하셨던 약속의 말씀이 뭐였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리고,
[수 1:3, 개정]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이미 내가 너희에게 주었다.”
여호수아는 지난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땅을 다 주셨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히브리어에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에서 “말하다”라는 말 중에 하나가 다바르(dabar)인데, 이 단어는 독특하게도 말을 가리키는 동시에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바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라고 번역하지만, 하나님이 행동하신다라고 번역해도 전혀 무방합니다. 말씀과 행동은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히브리어에서 말은 질서를 가져오고 관계를 형성합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동시에 창조가 일어나고, 계시가 주어집니다. 말과 행동과 말과 실재가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은 곧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우리의 경험도 동일한가?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우리의 경험도 이와 동일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경험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친히 앞장서서 대적과 싸우십니까?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문제입니까?
우리 편에서 무엇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조차도 하나님이 약속을 잊으신 것 아닌가 싶어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인가요? 아이성 전투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수 7:7-8] 7 여호수아가 아뢰었다. "주 하나님, 우리 백성을 요단 강 서쪽으로 잘 건너게 하시고는, 왜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기어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 8 주님, 이스라엘이 원수 앞에서 패하여 되돌아왔으니,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틀렸구나, 하나님이 실패하셨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아이성에서 아모리 사람에게 패배할 수가 있는가? 사실 우리의 경험은 여기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세상과 죄에 이기기보다는 지는 삶이 익숙한 이들에게 말씀이 어김이 없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허황된 말씀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패배한 이유가 있었어요. 여호수아는 왜 그때 우리가 패배하였는지 그 핵심 이유를 오늘 본문 16절에서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수 23:16]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지키라고 명하신 언약을 어기고, 가서 다른 신을 섬기고 경배하면, 주님의 진노가 여러분에게 내려, 당신들은 그가 주신 좋은 땅에서 곧 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성 전투 때 아간이 이 언약을 어긴 것이지요. 시날의 외투와 금은덩이에 마음을 빼앗겨 간음을 합니다.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신 언약이 뭐죠?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곧 “결혼 서약”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우리는 신부니까, 서로에게 신실하고 서로만을 사랑하라는 언약입니다.
결혼한 부부니까 한 눈 팔지 말고 다른 여인들이나 남성들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는 겁니다.
이 언약을 지키면 항상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강력한 임재로 모든 승리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언약을 어기면, 진노가 내려서 좋은 땅에서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언약을 어겼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은 사실상 그들과 함께 있지 않으신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신 거예요. 너희 마음에 돈과 탐심에 대한 우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수 7:12]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원수를 대적할 수 없었고, 원수 앞에서 패하여 물러섰다... 너희들 가운데에서 전멸시켜 나 주에게 바쳐야 할 물건을 없애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겠다.
그들이 아이성에서 패배한 것은 그들의 군사가 적어서도 아니고 상대가 강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딱 하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셨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두고 다른 신, 다른 우상을 따라 간음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호수아도 아이성을 칠 때 하나님께 묻지 않고 소수의 인원을 보냈었지요.
자신과 자신의 군대를 믿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신랑 되신 하나님께서 떠나신 겁니다.
그래서 아이성에서 패배한 겁니다.
여호수아는 오늘 23장에서 사실 그때의 사건을 다시 회상시킵니다.
우리가 절대로 강해서 이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훌륭한 군사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경험이 많아서, 우리에게 신무기가 있어서 땅을 차지한 것도 이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여호수아의 결론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긴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중단된 것과 그들이 패한 것은 아주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호수아 전체를 끌고 가는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만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약속의 땅을 정복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가 말하는 여정은 단지 땅을 차지하는 여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비범한 여정입니다. 이 하나님과 함께함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 어떠한 역경도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가까이 하라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그분의 임재가 가장 중요하므로 하나님만을 가까이 하라고 하지요. 8절에,
[수 23:8] 오직 당신들은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주 당신들의 하나님만 가까이하십시오.
여기서 가까이 하라는 히브리어 다바크 דָּבַק 는 단지 “가까이 하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꽉 붙잡으라” ”단단히 매달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수 23:8, 우리말성경] 오직 너희가 오늘까지 행한 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
마치 나의 목숨이 여기에 달려 있는 것처럼, 떨어지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굳게 붙들고 매달리라는 겁니다. 영어 성경은 cling 이라고 해서 본드로 붙이듯이 “딱 달라붙는다”는 의미로 썼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말의 원어에는 달라붙는 정도를 넘어서서 완전히 둘이 용접이 되어 연합이 되어버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다바크라는 단어가 어디에 먼저 쓰였냐면 창세기 2장 24절에 부부의 결합을 말할 때 쓰였습니다.
[창 2: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아내와 결합하여, 이 결합하여가 “다바크”,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와 같은 동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하고, 하나님께만 꼭 붙어 있고, 하나님께만 매달리고,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과 연합한 자는 하나님이 그의 전부가 되어 주시고 하나님이 친히 싸워주시고, 하나님이 그의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신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가 히스기야 왕입니다. 그는 다윗 이후로 유다 왕 중에 그런 왕이 없었는데,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왕하 18:5-6] 5 그는 주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신뢰하였는데, 유다 왕 가운데는 전에도 후에도 그만한 왕이 없었다 6 그는 주님에게만 매달려,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들을 준수하였다.
히스기야는 바로 여호수아의 이 말씀, 하나님만 가까이 하라, 하나님께만 매달리라는 말씀을 바로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늘 임재하셨어요. 그 결과가 뭐죠?
[왕하 18:7] 어디를 가든지, 주님께서 그와 같이 계시므로, 그는 늘 성공하였다. 그는 앗시리아 왕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섬기지 않았다.
히스기야의 용기가 대단합니다. 자기가 뭐라고 대제국 앗수르왕에게 반기를 듭니까?
히스기야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입니다.
쥐가 여우를 못 이기지요. 그러나 쥐가 사자에게 붙어 있으면 여우는 쥐가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사자가 두려워서 도망갑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못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못 이기는 겁니다. 그러므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면, 나는 놈 위에는 붙어 다니는 놈이 있는 겁니다.
이 붙어 다니는 놈을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히스기야는 이 비밀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붙어 다니는 놈이십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분들이십니까?
하나님께 매달리는 분이십니까? 우리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한 지난 한 주를 보냈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시작해서 저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겁니다. 인어공주라는 만화에 보면 주인공 에리얼이 목소리를 빼앗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꼭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렇게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이 제 평생에 처음이고, 아내도 처음 본다는 겁니다. 지난주에 저를 본 분들도 처음이셨을 겁니다. 주중에 전화를 하면 다들 놀라세요. 목소리가 왜 그러시냐? 목감기에 걸린 이유도 있지만, 왜 목소리가 나지 않을까? 돌아보니까 저는 한 번도 목소리가 잘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 목소리는 당연히 그냥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타고난 것이었습니다. 자다가도 일어나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거의 일주일간 심한 기침과 더불어 목이 잠겨서 소리를 낼 수 없는 겁니다.
“아 나의 선천적인 재능도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구나.”
제가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았더라고요. 주님 좋은 목소리를 통해 말씀을 증거할 수 있도록 성대를 지켜주세요라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지 않았구나. 정말 그렇더라고요.
지난 목요일에 두란노 바이블 칼리지의 초청으로 사모 블레싱을 가게 되었는데요, 중요한 집회잖아요. 250여명의 사모님들이 전국 각지에서 오셨어요. 사모님들이 살아야 교회가 살잖아요. 그런데 전 날 밤까지 목소리가 회복이 안 되고 기침이 끊이지 않는 겁니다. 중보기도팀에게 기도 요청을 하고 동역자분들에게 기도요청을 했어요. 목요일 아침이 되어 말씀을 인도하러 강단에 섰는데 삼손과 같은 심정이 되었어요. “주여 이번 한 번만 나를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번만 목소리를 주시면 제가 단번에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담대히 전하겠습니다.” 기도하고 올라갔는데, 그래도 목소리가 100%는 아니지만 80% 정도로 나오는 겁니다. 1시간 반 조금 못 미치게 말씀을 전하고 기도 인도까지 잘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내려오자마자 다시 목소리가 쉬더니 기침을 하는 겁니다. 아내가 그걸 보고 기가 막혀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해서 그날 아침만은 잠깐 말씀 전하도록 목을 풀어주시고, 다시 강단에서 내려오니까 다시 목소리를 막으시는 겁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것이 무엇이죠? 하나님께만 매달려야 한다. 나의 임재가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 나 없으면 말도 못한다. 제가 주님께 철저히 매달리지 못했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 여러분의 재능? 내 거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두어가시면 끝입니다. 더 늦기 전에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려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이들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약 4:8]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욱 가까이 오십니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누구냐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 다른 것이 우상이기도 하겠지만, 그 우상이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신”을 더 의지하고, 내 자신의 “재능”을 더 의지한다면, 두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또한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만, 실상 하나님을 원해서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내가 더 강해지고 싶어서, 내가 더 높아지고 싶어서, 내가 더 유명해지고 싶어서,
즉, 하나님이 주시는 그 어떤 것, 좋은 것, 선물을 바라기에 가까이 가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두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것이 우리의 마음은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오늘 예배에 왜 오셨습니까? 순결한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정말 주님만 사랑하기에 오셨나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겉으로만 보면 다 똑같아 보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원하기에 가까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얻기 위해 가까이 가는 사람이 있어요.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높이기를 원하세요.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던 백성들을 출애굽하여 광야로 이끌어 내신 이유는 땅을 주시려고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들을 고통에서 구출해 주시고 가나안 땅도 주시려고 한 것이긴 하지요.
그러나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려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게 하려고.
[출 7:16] ...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나를 임금님께 보내어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에게 예배하게 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갈망하십니다.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는 것 아십니까?
그분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그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다른 곳에 있었어요.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가까이 하는 것 같다가도 조금만 자신들에게 손해가 나타나면 불평을 쏟아냅니다.
[출 14:11-12]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도대체 우리가 여기에 몇 번이나 등장합니까? 바로 여기에서 그들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이들의 신앙 동기는 하나님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통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들과 우리가 무슨 차이입니까? 정말 진지하게 우리 마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8절에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다른 무엇을 얻고자 그분께 가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저 하나님 그분만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그분과 그분의 임재를 누리고 만족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이미 모세와 함께 있을 때 경험한 사람이지요.
출애굽기 24장 13절에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 둘만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갑니다.
다른 리더십들은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립니다.
또한 출애굽기 33장에서도 그가 누린 친밀한 교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 33:11]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진으로 돌아가도, 눈의 아들이며 모세의 젊은 부관인 여호수아는 장막을 떠나지 않았다.
장막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른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곳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그 경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저 하나님만을 가까이 하고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여호수아는 세상과 가까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다른 이방 민족들을 가까이 했을 경우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수 23:12] 만일 당신들이 이것을 어기고, 당신들 가운데 살아 남아 있는 이 이방 민족들을 가까이하거나,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사귀면,
여호수아는 8절과 12절을 의도적으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것인가? 아니면 이방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이방신, 우상들을 가까이 할 것인가?
후자의 결론은 멸망입니다. 왜 멸망인가? 하나님이 임재를 거두고 떠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방 민족들을 가까이 한다”는 뜻은 지금으로 말하면 무엇이 있을까요?
반성경적인 문화 아니겠습니까? 마치 하나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주장과 가치관을 쫓아 살아가는 삶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가까이 하는 것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가까이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내가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저절로 다른 것에 가까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로 다윗을 꼽을 수 있어요. 다윗은 늘 하나님의 임재와 얼굴을 구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의 일생은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그와 함께 했던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에게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에 가장 큰 흠으로 지적되는 부분이 바로 밧세바와의 간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가 어떻게 밧세바와의 간음이라는 죄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왜 그가 간음과 거짓말과 살인교사라는 죄에 빠지게 되었는가? 어떻게 그가 나단 선지자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죄를 깨닫지 못할 정도가 되었는가? 그 단서가 사무엘하 11장 10-11절에 나옵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우리아에게 명하여 집에 가서 아내와 자라고 했더니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아가 이런 말을 하지요.
[삼하 11:11]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성경은 넌지시 이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언약궤가 무엇이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가 어디에 있죠? 야영 중에. 뭐냐면 다윗과 언약궤가 수십km 이상 멀어져 있다는 겁니다. 다윗이 얼마나 언약궤가 성에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고 춤을 추었습니까?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뻐했습니까? 그러나 지금 다윗의 현실을 보세요. 얼마나 다윗이 언약궤, 즉 하나님의 임재와 멀어져 있습니까?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떨어져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다윗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부와 권력이 많아서, 그가 왕이라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왕이면서도 하나님께 신실했던 사람입니다. 문제는 돈, 권력이 많아서도 아니고 유혹이 강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그가 하나님과 멀어졌고 하나님의 임재에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거짓말, 아내를 훔치는 도둑질, 간음이라는 죄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너무 악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강해서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숨이 여기에 달려있는 마냥 주를 붙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작이요 끝이요 전부임을 온전히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실패의 유일한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다윗처럼 회개해야 합니다.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그분의 임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여호수아는 하나님만을 가까이 하는 것이 모든 승리의 비결임을 배운 자입니다.
[수 23:8-9, 개정] 8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9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십시오.
그분께만 매달리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은 자로 알려진 죠지 뮬러가 “하나님을 가까이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매 순간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분에게 보고하고 그분의 지시를 받는 것입니다.
내 경우에도 어떤 문제를 붙잡고 수년 동안 기도했지만 바로 응답받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 했습니다.
하나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단순하게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져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마다 우리 영혼은 새롭게 됩니다. 오늘 그분과 친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다. 무너졌던 새벽제단도 쌓고, 시시 때때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주를 바라보고, 작은 일도 주님께 보고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매달리십시다. 그리하여 여호수아처럼 삶을 회고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어김이 없이 다 이루어졌다고 고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찬양: 주님 곁으로 (전체 한번, 후렴 두 번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