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2. 주일오전예배(성령강림주일)
엡 5:5-6:9
성령충만을 받으라
1. 지혜있게 어떻게 행할지를 주의하여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2.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3. 성령 충만한 성도의 실생활에서의 모습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 창조가 재현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다시 모세와 같은 방식으로 홍해를 건너는 것을 재현하고자 하고 그 방법을 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났으니 다시 예수님의 마리아의 몸에서 나오라고 구하는 사람은 없고,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가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제 3일에 살아나셨으니 그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 방법대로 재현하자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가 물가를 걸어올 때 바람을 보고 의심했다고 하면서 믿음이 없는 자라고 했으니 나는 믿음이 있으니 베드로가 못한 물가를 걸어보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려지셨으니 다시 예수님이 하늘로 올려지셨듯이 나도 하늘로 올려지는 방법을 찾거나 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행 1:4-5)을 선물(행 11:16-17)로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다시 그것을 받는 방법을 설교하고 그것을 받기를 구하는 것을 볼 때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하나님을 예수님께서 주시는 방식은 약속과 선물이라는 용어로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성령님을 주시는 방식은 예수님의 약속과 선물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약속과 선물하면 관련된 다른 용어가 있습니다. 약속, 선물 하면 성령님 말고 또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바로 구원과 믿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만세전에 예정하신 미리 정하신 약속에 근거합니다. 그 약속을 믿도록 하신 것도 나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나의 공적이나 공로로서 업적으로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다 합니다.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 선물로 받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고 합니다. 구원과 믿음은 약속과 선물에 근거하는 은혜로 받는다면, 성령님도 약속과 선물에 근거하는 은혜로 받는다고 함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시면서 자신이 떠나실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떠나시면서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 14:26-28) 이 일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제 3일만에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려지심으로 제자들을 떠나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대로 얼마 못 되어 50일이 지난 후에 머물라고 했던 예루살렘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마무리되고 하늘에 올려졌을 때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을 교회에 임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일련의 구원의 일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일이 단회적이라면 성령님이 교회에 임하심도 단회적입니다. 어떤 분은 왜 성령님이 교회에 임하심이 단회적이냐고 반문하면서, 지금도 다른 시대, 다른 교회, 다른 사람에게 성령님이 임하는데, 어떻게 성령님의 임하심이 한번 단회적인 것이냐?라고 반박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구원의 일은 단회적 사건에 기반합니까? 반복적인 사건에 기반합니까? 더 쉽게 예수님의 구원의 일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하늘에 올려지신 단회적 사건에 기반합니까? 지금도 여전히 다른 시대, 다른 교회, 다른 사람에게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구원의 일이 다시 반복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 2000년이 지난 이 시대의 교회,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사람은 없고, 구원을 받기 위해 다시 예수님의 일련의 구원을 위한 일이 다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거나, 그 방법을 찾는 설교를 하거나 그 방법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성령님은 이 시대, 이 시대 교회, 사람에게 임한다 하여 임하는 방법을 설교하고 듣고자 하는 것입니까?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구원을 위한 일 즉 이 땅에서 오심, 고난받으심, 십자가에 죽으심, 제 3일에 살아나심, 승천하심이 단회적 사건인데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이듯, 성령님의 오심도 단회적 사건인데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구원의 일을 재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로 알고 믿습니다. 우리는 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이지, 그것을 재현해서 확인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오심이 단회적 사건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대로 성령님을 교회에 보내심을 믿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데로 오신 성령께서 떠나지 않으시고 믿는 자들에게 거주하심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독교인이라면 여러분은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거주하시는 집이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에베소서 5장의 말씀으로 성령충만한 기독교인들의 태도와 삶을 다음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라
1. 지혜있게 어떻게 행할지를 주의하여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2.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3. 성령 충만한 성도의 실생활에서의 모습들
성령충만을 받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때에 세월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세월을 방탕함과 음란과 탐욕과 헛된 말로 어둠의 자녀처럼 어둠가운데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둡고 악한 때에 사람들은 빛의 자녀가 전에 어둠에 속한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의 방탕한 행태를 술 취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술에 취한 듯 이 때가 어느 때인지 모르고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가 악한 세대이니 술에 취해 사리분별하지 못하며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세월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이 방탕하고 악한 세대에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할 때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단언하는 이유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with wine, for that is debauchery, but be filled with the Spirit.)
여기 우리말의 번역과 영어성경을 비교하면 우리말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술 마시는 것으로 채우지 말라, 오직 성령으로 채워라. 이렇게 번역을 하든지, 술로 채우지 말고 성령으로 채워라. 이런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이 본문을 더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용이하다고 여깁니다.
왜 술과 성령을 비교했을까? 왜 여러 방탕한 것들이 많은 데 그 방탕하게 하는 원인들 중 술을 예로 들었을까?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술과 성령이 대비된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10절)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핵심은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해야 하는데 전에 어둠에 있었던 자들은(8절) 자신을 기쁘게 했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빛을 비추인 빛의 자녀들(8절)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기쁘게 할 것을 살핀다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이유, 술에 취하는 이유는 기쁘기 위해서입니다. 술을 마시면 기쁘니까 술을 마시는 것이지, 그 술이 농약처럼 먹으면 죽는 것이라면 마실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마약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만 마약이 아니라 술을 예로 든 것은 술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쉽게 구해서 쉽게 마실 수 있는 음료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도 술 마시는 것처럼 보편적이고 특수한 어떤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이 계십니다.(롬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주를 기쁘시게 해야 하는데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롬 8:8) 오히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술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육신의 것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술에 취하면 흥에 취해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신령한 노래가 아닙니다.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19절과는 반대입니다. 거기다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서로 피차 복종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하고 자기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말은 많은데 오직 자신의 자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불평불만입니다. 이것은 성령충만한 빛의 자녀의 모습과는 반대입니다. (19-21절) 거기다가 어떻게 행할까 주의하거나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만한 분명력이나 이성이 마비됩니다. 이것도 15-16절과 대조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술로 채워지는 것과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은 완벽한 대조를 이룹니다.
술과 성령은 육신과 하나님을 대비시킵니다. 술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그것으로 사람이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성부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로도 말미암아 보내신 그리스도의 영이며 삼위 중 삼위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이 시대 많은 기독교인들 특별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술에 취해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음악에 취해서(여기 음악은 세상의 가요나 유행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기쁘게 하는 찬송으로 주를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운운하면서 동성애자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동성애자들을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여성의 인권과 여성의 교회의 참여를 위해서 여성에게 직분을 부여함으로 여성들을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날 수 있으니 젊은이들을 교회에 오게 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기쁘게 할 것으로 예배를 채우려 합니다. 시대가 악하기 때문에 더욱 성령으로 채워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해봐야 하는데,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시험해 보고 있습니다. 내가 기쁘다고 기쁜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는 어떤 것도 솟아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없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술에 취해서 즉 육신의 기쁨으로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주님을 기쁘게 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성령으로 채워져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도함 받아 사람들과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시험해야 합니다.
이렇듯 육신에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채워진 사람들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합니다. 성령으로 채워진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무아지경의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다 없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분별력없는 무이성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사람이 볼때는 그 사람은 비이성적인 사람일 수는 있어도 무이성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술을 마시고 취하기 전에는 다 멀쩡한 사람입니다. 멀쩡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고, 어떤 것을 해야 바른 것인지 사리 분별할 수 있는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서 취하면 다 사라집니다. 성령으로 채워진 사람이 무 이성적이고 무 비판적이고 사리분별이 안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욕심과 탐심, 음란과 음행과 더러운 것에서 벗어나, 이 모든 것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만- 이제 자신의 삶이 주님께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지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혜있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사람처럼 때가 악한지도 모르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고 술에 취해 막무가내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세히 주의하여서 어떻게 행할지를 분별합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의 판단 기준, 그 사람의 지혜의 기준이 주의 뜻이 무엇인가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려니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쉽게 설명하면, 술을 마시고 취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취하면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술입니다. 술이 몸을 통제하지 못하게 하고, 술을 먹고 운전하면 자신이 지금 똑 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게 운전해서 큰 사고를 내서 이후에 나락으로 끝이 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놈의 술이 문제야 합니다. 참 좋은 사람이 술을 먹어서 술에 지배를 받으니, 자신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술이 통제하니 나락으로 간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령으로 채우라는 것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것, 성령의 통치를 받는 것,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고 시대를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면서 행합니다. 그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습니다. 성도 상호간에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영으로 노래하며로 번역niv)를 부릅니다. 술에 취해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하여 그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합니다. 그들의 입술은 범사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합니다. 성도 상호간에는 서로 주께 찬송합니다. 사람간의 관계는 하나님께 찬송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성령충만함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범사에 즉 모든 일에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더 분명한 것은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의 저변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차 복종합니다. 그들은 서로 복종하는 관계가 됩니다.
3. 성령 충만한 성도의 실생활에서의 모습들
성령충만한 빛의 자녀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항상 시험하여 보고 지혜롭게 행하는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증명됩니다. 실생활에서의 예를 에베소서는 크게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직장에서의 직원과 상사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로 설명했습니다.
이 예를 든 세 경우의 근저에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아내도 남편에게, 부모도 자녀에게, 자녀도 부모에게, 직장의 상사도 아랫직원에게, 아랫직원도 직장의 상사에게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것을 증거해야 하는데, 그것은 피차 복종하는 것이고, 어떻게 행할지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있는 자같이 행하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분별해서 서로 복종하면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서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으로 복종해야 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함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부모들도 자녀에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으로 자신을 쳐서 자녀를 노엽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부모의 훈계에 순종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주께 하듯 상전에게 섬기고, 상전들도 하나님께 하듯 직원들에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충만은 하나님께서 내놓으신 법칙에 따라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회복되고, 부모와 자녀의 교육이나 양육관계도 회복되고, 직장에서도 상사와 직원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세우신 방식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 세상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세상의 시대적 사조나 경향이나 유행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이 원래 하나님이 여러 제도를 내신 원래 의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세우신 그 원리와 원칙을 따라 행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단순히 일시적 흥분상태의 감정이 아니라, 빛의 자녀의 삶 가운데서 성령으로 행하는 것으로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모든 사회제도에 하나님이 내신 원래 법칙, 원래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정치가 되었든지, 경제가 되었든지, 무슨 직장에 있든지, 다 하나님이 그 제도를 내신 원래 의도를 깨닫고 그 제도를 내신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항상 진지하고 주의 깊으면서도 지혜로운 사람이며, 주님께 범사에 감사하면서 주님을 찬송하면서 서로 복종하는 삶입니다. 이제 어둠에 속한 자가 아니라 빛에 속한 자로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항상 시험하면서 빛의 열매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