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2. 8. 21(주일) - 성령강림절후 열한째 주일- (2016년 34주)
제목; “용서와 화해의 만남과 생명 살림”
성경; 창 45:1-15 (구약 71면) (시 16:11, 310<410>, 220<278>, 621)
<예배의 부름> (시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훈련의 달 8월 셋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화, 위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금년 여름은 유난히 국지적으로 폭우가 많이 쏟아지는 해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파주와 서울 주변은 비가 많이 와서 사람도 죽고, 피해가 많지만, 아직도 남부 지방은 비가 오지 않아 저수지가 말라버리고, 가뭄으로 논밭이 쩍쩍 갈라지므로 농작물들이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섬들이 많은 전라남도, 경상남도 도서 지방에는 1주일에 한 번만 물이 공급되는 제한 급수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 서로 격려해 주고 용기를 주는 열 마디 소중한 글자가 있습니다.
1. 천하보다 소중한 한 글자 ▶ “나”
2.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는 두 글자 ▶ “우리”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글자 ▶ “사랑해”
4. 평화를 가져오는 네 글자 ▶ “내 탓이오”
5. 돈 안 드는 최고 동력 다섯 글자 ▶ “정말 잘 했어”
6.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드는 여섯 글자 ▶ “우리 함께 해요”
7. 뜻을 이룬 사람들의 일곱 글자 ▶ “처음 그 마음으로”
8. 인간을 돋보이게 하는 여덟 글자 ▶ “그런데도(그럼에도) 불구하고”
9. 다시 한번 일어서게 하는 아홉 글자 ▶ “지금도 늦지 않았단다”
10.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열 글자 ▶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괜찮고 좋은 말이다 하는 생각이 들지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몹시 힘든 세상에서 우리 서로 따뜻한 말 한 마디로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며 이 힘든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본문 말씀은 요셉이 두 번째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시험하고,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가나안 땅에 있는 아버지의 가족들을 초대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정체를 밝히며 자신이 겪은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설명하는 전반부와(1-8), 그 섭리를 현실화하는 미래, 곧 이집트로의 이주 계획과 형제 간의 화해로(9-15)구성되어 있습니다.
문학적인 면에서 구조적으로 보면 오늘 본문은 창세기 37장 요셉의 꿈으로부터 시작되는 요셉 이야기 전체에 있어 중심에 위치합니다. 창세기 37장에서 보인 요셉의 꿈 가운데 하나는 이집트를 다스리는 것이었고, 이것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39-41장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의 꿈은 아버지와 형들에 대한 지배였는데, 그것은 흉년을 통해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오는 42-44장을 통해 진행됩니다. 요셉을 중심으로 하는 이전의 이야기들은 이 본문을 향하고 있고, 이후의 이야기들은 요셉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화하는 것으로 전개됩니다. 즉 요셉의 이야기를 산에 오르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오늘 본문은 산의 정상에 해당하고, 이후의 이야기들은 하산하는 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요셉이 꿈을 꿉니다.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에 절하는 꿈과,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입니다. 그런데 이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분개했고, 급기야는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 계략 속에서 구덩이에 던져졌다가 맏형 르우벤의 제의로 극적으로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나 은 20에 팔려서 애굽으로 가서, 애굽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종이 됩니다, 요셉의 시련은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인해서 옥살이까지 하게 됩니다(39장). 하릴없이 옥살이를 하던 도중 애굽 왕 바로의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을 하게 되지만, 그는 여전히 옥살이를 합니다. 그로부터 만 2년이 지난 후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꾸게 됩니다.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를 잡아먹고,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리는 꿈을 꾸게 됩니다(41장). 이 꿈 이야기를 들은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이 감옥에서 만났던 요셉을 왕에게 천거하게 되고, 요셉은 앞으로 되어질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예언하는 꿈이라고 꿈 해몽을 한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41장).
17살에 꿈을 꾸고형들의 시기에 의해서 팔려서 13년 동안 종살이, 옥살이를 한 후에 30세되던 해에 그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였던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 후 7년의 풍년이 지난 후에 7년의 흉년이 시작됩니다. 흉년이 시작되고 2년이 지난 후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야곱의 가족들에게도 식량이 떨어져 요셉의 형 열 사람이 먼저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형들은 요셉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양식을 구합니다. 요셉은 같이 오지 않은 아우 베냐민의 안부를 물은 후에 양식 살 돈을 그대로 넣어서 돌려보냅니다(42장).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더욱 심하므로 다시금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게 됩니다. 이제는 처음에 베냐민을 데려오겠다고 한 약속대로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갑니다(43장). 이에 요셉은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는 시험을 하고, 형들이 전과 같지 않고 서로 우애 있음을 보면서(44장)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45장).
베냐민 대신에 자신이 인질이 되겠다고 하는 유다의 간청을 들으면서 자신이 형들이 죽이려고 했고, 은 20에 팔았던 요셉임을 밝히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임을 밝히는 본문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메시지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하고 증오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남북 관계도 여전히 냉담하기 그지없습니다. 계속 되고 있는 우크라니아 전쟁, 우리 주변의 중국과 대만, 일본과 우리나라, 먼 유럽과 미국에서의 갈등들,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와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 결국 서로 믿고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가운데 일어난 결과입니다.
미움과 증오가 쌓여 반목질시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예정이라고 밝히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골육 의식, 곧 형제 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3-5a).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3-5a)
성경에 보면 “골육”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삿 9:2, 삼하 5:1, 19:12-13, 사 58:7, 롬 9:3, 11:14). 그 중 대표적인 말이 사울이 죽고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어있던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 왕으로 모셔올 때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한,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삼하 5:1) 하는 말과,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믿지 않고 죽음과 지옥의 길로 갈 때 사도 바울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한 말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골육”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쳄’(עצם)은 ‘뼈, 동일한, 족속’이란 뜻이며, 신약에서 “골육”으로 번역된 헬라어 ‘사르크스’(σάρξ)는 ‘살, 육체, 혈통, 인류’란 뜻이며, “친척”, ‘슁게네스’(συνγγενής)는 ‘함께, 더불어’란 뜻의 전치사 ‘쉰’(σύν)과 ‘혈족, 가족, 동족’이란 뜻의 ‘게노스’(γένος)의 합성어로 ‘동족, 친척, 혈족’이란 뜻입니다. 한 마디로 “골육”이란 말은 살과 뼈, 피가 통하는 혈통, 친척. 동족으로서 가족을 말합니다.
지금 요셉은 9년 만에 만난 형들에게 제가 바로 ‘골육’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과 뼈, 피를 나눈 골육이므로 여러분들이 애굽에 팔았다고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친족, 곧 골육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골육상쟁(骨肉相爭)에 대한 이야기와 골육상생(骨肉相生)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야곱과 외삼촌 라반의 이야기는 골육상쟁의 이야기입니다. 이에 반하여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이야기는 골육으로 인하여 서로 다툼을 피하는 골육상생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3:8에서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골육)이라”고 하여 서로 다툼을 피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월이 지난 후 에서와 야곱도 골육이기에 결국 서로 화해의 포옹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요셉을 봅니다.
지금 요셉은 애굽의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있고 형들은 초라한 자세로 곡식을 사러와 있습니다. 요셉이 22년 전에 꿈을 꾼 그대로의 모습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복수를 하려면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그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3-4)라고 말하며,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5a). 여기서 “한탄하지 마소서”(알 이하르, יחר־אכ)는 ‘노하다’, ‘불쾌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하라’(חרה)의 명령형으로 본문에서는 부정 불변사 ‘알’(אל)이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직역하면 ‘당신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놀라지 마소서’가 되므로, ‘자신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애태우며 안타까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당시 요셉의 형제들이 과거의 일을 회상하고 깊은 자책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반가운 마음보다 과거에 자기들이 지은 죄로 인해 매우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오히려 위로와 평안의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요셉이 형들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속에 골육 의식, 곧 형제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골육 의식이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을 미워할 수 없게 했으며. 그들을 향하여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폭염과 폭우 등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몹시 힘든 시기에, 이 땅의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이 막말과 싸움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정치란 것이 국민들의 한(恨)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국민들의 한을 풀어주기는커녕 한을 더 키우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합니까? 요셉입니다. 골육 의식, 형제 의식을 가진 성숙한 요셉이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하고 있습니다. 갈라진 형제 사이를 회복합니다. 사랑은 증오를 극복합니다. 요셉은 형제애로 이 모든 것을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누가 잘했고 누구의 책임이 크다 적다 말이 없습니다.
남북의 문제도 마찬 가지입니다. 최근에 윤 대통령께서 ‘담대한 구상’이란 제목으로 대북 화해와 지원 제안을 내놓았는데, 북한 김정은 정권은 온갖 험한 말과 망언으로 걷어 차버렸습니다. 자그만 동포애와 형제 의식이 있다면 반목질시와 미움을 줄이고 대화할 수 있을텐데... 그런데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이 언젠가는 통일이 올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끊임없이 내밀므로 남북이 한민족이라는 골육 의식, 형제 의식을 회복하고 통일의 그 날을 대망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는 남북의 화해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골육 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예수님으로 구원받았고, 한 성령으로 인침받은 성도들이 서로가 높이 담을 쌓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유언비어로 서로 헐뜯고 비난하고, 교회의 건강성을 해치면서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므로 전도의 문을 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말로만 ‘주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한 형제자매입니다.’ 하고 실제로는 끼리끼리 모여서 세상 사람 계 모임하듯이 밥 먹고 놀러가고, 심지어는 교회 예배도 빼먹고 놀러가며, 다른 사람이 나도 그 모임에 같이 하고 싶다고 하면 문을 꽝 닫고는 절대로 문을 열지 않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말로만 골육 의식을 이야기하지, 실제로는 골육 의식, 형제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요셉처럼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팔았던 형들을 골육 의식, 곧 형제 의식으로 용서하고 골육상쟁(骨肉相爭)이 아닌 골육상생((骨肉相生)을 이뤄가는 모습을 본받아, 끼리끼리 모이면서 높이 쌓았던 우리 사이의 모든 벽과 담을 허물고, 참된 골육 의식, 형제 의식을 통하여 참된 일치와 화해를 이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 주권 의식과 역사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5b-8).
‘이 세상과 그 만물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되 자기의 깊으신 뜻대로 통치하신다.’는 것이 하나님 주권 사상입니다. 또 우리 인생과 역사를 보는 눈을 ‘관점’(觀點),혹은 ‘역사관’(歷史觀)이라고 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인생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은 엄청나게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은 자기 인생과 역사를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기초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고 형들을 위로한 후에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7-8)라고 말합니다. 신학자 휴즈(Hughes)는 특별히 7절을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노예로 팔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세주로 보내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요셉은 5-8절에 걸쳐 세 번이나“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셨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인생을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당신들이 한 일이 아니요. 내가 한 일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팔려서 이 자리에까지 온 것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뤄진 섭리요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감정이나 아니라, 내 시각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권자이자 주관자이십니다.”하나님의 시각으로 역사와 인생을 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과거에 형들이 분명히 자신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형들은 분명히 요셉이 죽기를 바라며 애굽의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 요셉이 지금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있습니다.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으며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과 같이 자신 또한 형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하며 형들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큰 구원을 베풀기 위해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낸 것입니다. 형님들이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7-8).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흉년이 와서 2년이 지났는데 앞으로 5년이나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때에 우리 가족을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우리 가족을 살리시기 위해 나를 먼저 보내어 준비시킨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려워 마십시오”(6-7)
얼마나 멋있습니까? 얼마나 길고 넓게 보는 인생 안목이요. 주권 의식이요, 역사 의식입니까? 복수의 기회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살리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리로 보내시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사관을 넘어 구속사적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보존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펼치고자 이 모든 일을 그 백성을 통해 진행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8:28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우리가 겪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루기 위하여 허락하신 삶이라는 것이 섭리 의식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과 만물을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합시다. 우리의 인생과 삶,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읍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할 것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히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믿고 기다립시다. 남북이 대치하고, 정치가 당리당락을 쫓아 지리멸렬하고, 교회가 분열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에 순종하는 섭리적, 구속사적 역사 의식입니다. 잘못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마침내 선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부름받은 공동체인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일치와 통일을 이뤄가야 합니다.
3. 봉양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11)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다’는 주권적 역사 의식은 곧바로 요셉의 봉양 의식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봉양하리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킬르칼르티’(כלכלתי)는 ‘담다’, ‘제공하다’, ‘유지하다’, ‘양육하다’라는 뜻으로, ‘정신적, 물질적으로 끊임없이 보살핀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전에도 “봉양”(奉養)이란 ‘받들어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보내사 많은 어려움 후에 이렇게 축복하신 것은 바로 형제들과 모든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 섬기고 봉양하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라고 고백합니다. 요셉은 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고백하고 실천했습니다.
우리도 이 요셉의 부모와 형제들을 보살피겠다는 봉양 의식을 본받아야 합니다. 내가 나의 가족들을 먼저 보살피겠다는 봉양 의식, 가족애가 있어야 합니다. 8.15 광복절을 보내면서 아직도 미완인 광복은 남북 통일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분단된 남북이 하나 되기 위해서도 이 섬김과 봉양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 남한은 북한보다 더 나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도 핵이나 미사일로 위협만 할 것이 아니라 남한을 위로하고 섬겨야 합니다.
더불어 교회가 이 요셉의 섬김과 봉양 의식을 본받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경로대학’을 하고, 금촌역 앞에서 ‘밥․퍼’를 통해 사랑 나눔을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봉양 의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교회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성도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고, 교회와 성도가 손가락질 받고 욕을 들어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부 사이비 이단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와 성도가 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희망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도하는 것도 참 힘이 듭니다. 교회 이미지가 나쁘면 어떤 전도 수단을 동원해도 결코 부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문을 열고 교회 주변의 이웃들을 섬기면서 ‘교회가 당신들과 함께 하고, 당신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라는 인식을 시켜주면서, 교회 이미지를 개선한 후에야 전도도 되고, 부흥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늘 말씀드리죠.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문 닫으면, 사회도 교회를 향하여 문 닫는다’고,... 교회가 부흥하려면 세 가지 자랑하면 된다고, ‘하나님 자랑, 교회 자랑, 목사 자랑’, 제가 이전에 금촌(비저니아)교회 와서 누누이 강조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교회 이미지를 개선하자’고, ‘과거에 분열된 모습을 극복하자’고...
전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들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바로 생명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교회와 성도가 서로 모든 벽을 허물고 사랑이 넘칠 때 주변의 이웃들은 ‘나도 한번 교회 가보고 싶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또 교회가 봉양 의식을 가지고 이웃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고 그들의 필요(needs)를 채워줄 때 그들과 공존할 수 있고, 그들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III.
오늘 본문의 요셉과 형제들의“용서와 화해의 만남과 생명 살림”을 보며 생각나는 한 분이 계셔서 소개하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제가 가끔 화해의 대명사라고 말하는남아프리카공화국故 만델라 대통령입니다.
‘남을 이해한다’는 뜻의 영어 단어 ‘언더스탠드’(understand)는 ‘아래의’라는 전치사 ‘언더’(under)와 ‘서다’는 동사 ‘스탠드’(stand)의 합성어로 ‘아래에 서 있다’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UnderStand’ 이지, 결코 ‘OverStand’가 아닙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할 때는 눈 높이를 맞추면 안 됩니다. 오히려 눈 높이를 낮추어서 상대방을 올려다보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는 본래 변호사였습니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극단적인 인종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기꺼이 무장 폭력 단체의 투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국가 전복 혐의로 체포되어 ‘로벤 섬, 풀수무어’ 등 악명 높은 감옥에서 27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생사를 오가는 감옥 안의 극한의 고통과 깊은 침묵 속에서, 투쟁과 대립보다는 화해와 용서가 더 값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 아주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는데, 그가 수감됐던 감옥의 교도관이었던 “제임스 그레고리”였습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포옹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도관은 만델라의 품위와 인격에 감동하고 그를 존경하게 됐습니다, 그레고리는 만델라가 주장하는 정의를 이해했고 둘 사이에는 우정이 싹텄습니다. 그리고 그레고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만델라를 보호했고 그가 대통령이 되자 교도관 직을 사임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백인들에게 보복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재판을 주도했던 “페르시 유타”를 만났을 때도, 만델라는 미소를 지으며 한때 적이었던 84세의 노인에게 “이제는 모든 일들이 과거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만남 이후 유타가 만델라를 덕망 높은 사람으로 묘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관대함이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이 다시 또 다른 사랑을 낳는다”는 진리입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우리가 만일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아량을 베푼다면, 세상의 비참함과 오해 가운데 4분의 3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자기를 죽음의 길로 내몰았던 형들을 22년 만에 만납니다. 그리고 이 만남은 자신이 꾸었던 꿈이 22년 만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을 만나면서, 결코 형들을 원망하고, 각을 세우고, 복수의 칼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골육 의식, 즉 형제 의식을 가지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위로하고,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뤄졌다는 섭리적, 구속사적 역사 의식을 가지고, 부모님과 가족들을 봉양하겠다는 요셉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며,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벽과 담들을 허물고 하나님 자랑, 교회 자랑, 목사 자랑, 교인 자랑하며 좋은 소문을 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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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1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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