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고의 예배
[로마서 12장 1-2절]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매년 첫 주일은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출신 MBC 권석 PD의 책 [아이디어는 엉덩이에서 나온다]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화 “What women want”에서 “여자가 원하는 것을 알면 세상은 당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방송 선수들은 이 말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Target Audience를 중장년 여성에 맞춰야 성공한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리모컨은 이제 엄마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공부하기에 바쁜 아이들은 프로그램을 TV를 통해 보지 않습니다. 버스에서 혹은 DMB로, 컴퓨터에서 다운을 받아 보지요. 채널은 여자가 결정하고 남자는 부인 옆에 앉아 아내가 보는 TV를 시청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40대 여성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TV 프로그램을 하나 만드는데 있어서도 대상을 어디에다 맞추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목적은 그 타겟을 향해 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고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타겟, 지향점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는가?
사실 이 말씀은 지난해 여름 로마서를 묵상하면서 이 설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자를 쓰시는 하나님!
다윗, 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예배자”입니다.
그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었고,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실 때,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죠.
지난해 호주에서 청년들 집회를 하는데 개그 플러스라는 팀이 와서 그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가 바라는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세요!”라고 하지만 세상은 늘 우리의 외모와 조건을 본다고요. 오직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안 계시다고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배자가 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의 특징은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어졌느냐는 것이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을 받을 만한 외적인 이유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에게도 잊힌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새의 아들 중의 하나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찾아갑니다. 이새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섰을 때의 장면입니다. 6-7절입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성경 어디에서 다윗의 외모에 대하여 칭찬한 구절이 없습니다. 이새가 사무엘 앞에 아들 하나하나를 선보일 때 다윗은 그의 아버지의 생각 속에서도 잊힌 아들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그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정말 하잘 것 없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 보이는 시간입니다. 시편 78편 70-7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다윗의 중심을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일약 하나님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는 자로 발탁하셨습니다. 그가 뛰어난 재능과 환경, 인맥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가 될 때 일어날 일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 수 없습니다.
문제는 “진정한 예배자”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예배자가 된다는 것을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 보니 여러분에게 꼭 들려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산에 있는 어떤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인데, 그분이 교회 간지 얼마 안 돼서 한 집사님이 상담을 요청했답니다. 그런데 상담을 요청한 그분의 외모가 범상치 않습니다. 큰 선글라스를 쓰고 들어 왔습니다. 궁금해서 목사님이 안경 좀 벗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더니 억지로 벗었는데,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습니다. 이유를 캐묻자 남편에게 얻어맞았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분인데 남편은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반대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런데 대구에서 집회가 있어 새벽에는 못 가지만 낮, 저녁 집회에 참석하다 보니 남편의 퇴근하는 시간에 집에도 있을 수가 없었고 밥도 차려주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 부부 싸움을 했답니다.
“내가 언제 교회 가는 거 막았느냐고, 그래도 밥은 해 놓고 다녀야지.”
남편이 그렇게 따지자, “내가 늘 그랬느냐고, 특별히 부흥회니까 그렇지.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해.”
그렇게 싸움을 하다가 아내는,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왔는데 남편 때문에 은혜를 쏟는다고 생각을 했는지 이렇게 해 붙었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랬더니 남편이 바로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는 것이죠.
이분을 위로하려고 생각하던 목사님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남편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남편을 사탄이라고 했는데 한쪽 눈만 때린 걸로 봐서는 참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나 같으면 두 쪽 다 때렸을 것이라고.”
그 교회 안에는 의외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가정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봉사하는 것 때문에 가정에 불협화음이 있고,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가정일수록 심하다는 것을.
그래서 어느 날부터 이 목사님은 여자 전도사님을 데리고 “암행어사 심방”을 하기 시작했답니다. 갑자기 찾아가서 벨을 누르고는 전도사님이 먼저 들어가 싱크대와 옷장을 열어보고 장 정돈이 안 되어 있으면 “교회 봉사 금지령 6개월”을 선포하기 시작했답니다.
교인들이 수군거릴 때, 목사님이 이렇게 선포했답니다.
“살림이 예배다!”
살림을 하는 사람이 그 살림을 예배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막살 수 있느냐고?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여자는 살림을 잘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믿음 좋은 남자라도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예배자의 삶은 아니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산 제물로”라는 말이 얼마나 무섭고 어려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목회자로서 설교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설교를 앞에 두고 있으면 컨디션을 조절해야 하고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모릅니다.
제가 공황장애를 앓으면서부터 생긴 현상 중의 하나입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설교하기 전에 얼마나 두려운지 모릅니다. 갑자기 증상이 나타날까 봐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다가도 설교를 마치고 나면 마음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그렇게 설교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교인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것은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 영성, 도덕성, 탁월함,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탁월함”에 대한 말씀을 조금 드리고 싶습니다. 탁월함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도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들만 우대한다고요. 누군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1등만 대우받는 더러운 세상이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요?
아니요. “탁월함”이란 최고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강영우 박사가 피츠버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죠. 그 논문의 핵심이, “오늘날 교육의 문제는 상대 평가하는 것이다. 교육은 절대 평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 말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한 주인이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에 있다 와서 회계할 때, 뭐라 말하나요? 절대로 누구와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네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했는지를 물었을 뿐입니다.
실천
문맥상으로 보면 오늘 본문은 12장 1절의 “영적 예배”란 우리의 몸을 산 제로로 드리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고, 이어서 2절에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영어성경 NLT version에 보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know
what God wants you to do, and you will know how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his will really is.“
한번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기지요.
과연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그다음 말씀과 연관성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둘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만,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 양식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마음을 새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J. B. 필립스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너희를 둘러싼 세상이 너희를 세상의 틀에 집어넣게 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과 생각을 바꾸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삶의 양식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먼저냐?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켜야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인가?
물론 우리는 이 땅에서 수없이 많은 기적을 체험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에도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역사는 우리 행동의 결과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이 왜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는지도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서 12장 1-2절의 말씀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참된 예배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라에 이미 예배자로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
오늘 말씀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크리스천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능력 있는 삶”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로마서가 말씀합니다.
언젠가 유학생들을 위한 집회 kosta의 한 해 주제가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전한 말씀이 “예배자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용기는 “우리의 삶과 몸으로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배자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ritual’입니다. 이 ‘의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예배의 중요한 전통 중의 하나가 ‘remember’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기억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즉, 예배는 우리의 “생각의 방식” - way of life- 을 바꿔주는 힘이 되는 것이죠.
예배 가운데 산다는 것이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만 드리고 예배자의 삶을 살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고, 그리고 예배자의 삶을 살기 위해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충분히 예배자의 삶을 살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예배를 드리지 않고, 예배자로 살아가는 힘을 공급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새해에 어떤 삶을 계획해야 하는 지가 명확하지 않습니까?
제가 만나 교회 9년을 목회하면서 흥미로운 패턴을 봅니다. 우리 교회가 평균적으로 1년에 10% 정도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 해 성장의 10%가 예외 없이 1월과 2월에 이뤄집니다. 3월부터 10월까지 조금씩 줄었다 늘었다 반복하다가 12월이 되면 처음의 10%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 1월과 2월에 예배자가 10% 정도 늘어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매년 처음 예배자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지키지 못하고, 다시 결심하기를 반복한다는 것이죠.
예배자의 능력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시도록 내어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결심이 깨어지고 삶이 흐트러지는 것은 여지없이 예배의 삶이 흐트러지면서부터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죠?
정직하게!
새로운 삶의 방식
예배자가 갖게 되는 특권이 무엇일까요?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새로운 삶의 방식이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듯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예배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고민하게 됩니다. 고민하지 않는 신앙의 자기 편의적이고 바리새적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예배는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순간에 습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착각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겠다고 생각하죠. 그 순간부터 “나의 기쁨과 하나님의 기쁨”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선하다!”라는 것도 어느 순간에서부터 나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해 정죄의 칼날을 들이대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나는 선한데 그 선함 때문에 누군가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가 누구를 향한 말씀인 줄 아시나요?
우리는 그동안 그 말씀을 전도하는 데 많이 사용했습니다. 실상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이야기하신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떠난 탕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있는 참 기쁨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큰아들” 같은 유대인을 향해 하고 계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9-32절의 말씀을 보세요.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큰아들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무엇이 가장 마음 아프셨을까요? 하나님께 불림 받은 유대 백성이 큰아들처럼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기쁜데 그들이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늘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의롭다!”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닐까요?
잃어버렸던 아들이 돌아와 기쁜데 전혀 기쁘지 않은 큰아들이 잘못되었지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전도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 늘 술 담배를 입에 대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해병대에 입대하게 된 것입니다. 이등병을 달고 처음부터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 것이 ‘술’ 문제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 회식 자리에서 고참이 술을 따라 주는데 “저는 술을 안 먹습니다!”라고 했는데, 문제는 술을 안 먹는 자신이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위의 고참들이 매를 맞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자신이 술을 안 먹는 것 때문에 고참들이 매를 맞고 피해를 보게 되면서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답니다.
내가 술을 안 먹는 것 때문에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데, 너무나 착한 고참,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고민하게 되었답니다.
“나의 의로움을 지키는 것이 정말 의로운 일인가?”
백령도에서 근무를 할 때, 일주일에 한 번씩 회식을 하게 되는데 정말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나의 의를 지키기 위해 술을 먹지 말아야 하나요?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매를 맞는 고참을 위해, 그리고 너무나 선하게 나를 지켜주려는 선임병을 위해 술을 먹어야 하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답을 주시지 않더랍니다. 한잠도 자지 못하고 회식자리에 참석하게 되었고, 술자리가 시작되었는데, 내무반의 최고 고참이 자기 옆에 안더랍니다. 본래 해병대는 한참 고참이 신임병과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제는 큰일이 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묻더랍니다.
“네가 술을 안 먹는다며?”
일단은 “예 안 먹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는데, 그 고참이 술을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제부터 네 술은 내가 먹는다! 그리고 담배도 내가 핀다!”라고 선언을 했고, 그때부터 그 고참이 제대하면 다음 고참이 알아서 자기 것을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전도사님의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간증 거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귀한 것은 그 전도사님의 고민이었습니다. 자신의 의를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 구조적인 악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무리 군대라고 해도, 선배라고 해도 먹지 않는 술을 억지로 권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습니까? 구조적인 모순 가운데서 우리 신앙을 지키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키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신앙을 가장한 나의 의가 되지 않는가? 말입니다.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술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삶의 방식”이 시작되는 것이죠.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아들이 유치원을 다닐 무렵, 차를 타고 가는데 아이가 갑자기 “저기 나쁜 사람 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바라봤더니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보고 하는 이야기였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신앙교육을 잘못시키고 있구나!’
신앙을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를 쉽게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여러분의 판단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고 하는지 말입니다.
최고의 예배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우리의 삶을 맞추어가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 삶이 점점 더 하나님 가까이 가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죠.
페르난도 오르테가의 찬양 중의 “Give Me Jesus"라는 곡이 있습니다.
예배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려주는 찬양이 될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예수님을 내게 주소서
이 세상 다 가지셔도 되오니, 예수님만 내게 주소서
내가 외로울 때 예수님을 내게 주소서
이 세상 다 가지셔도 되오니, 예수님만 내게 주소서
또 내가 죽음에 이를 때 예수님을 내게 주소서
이 세상 다 가지셔도 되오니, 예수님만 내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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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