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諸侯國)의 하나. 뒤에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BC 221∼BC 207)를 이룬 국가이다. 주나라 제후국으로서의 진
신화와 전설에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이행기(移行期)는 비자(非子)의 기록이 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주나라의 효왕(孝王)은 대구(大丘)에 있었던 비자에게 목축을 시켰고 진나라의 땅을 주며 성을 영씨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양공(襄公)은 주나라의 내란 때 평왕(平王)을 도왔기 때문에 처음으로 제후에 임명되었고 기산(岐山;지금의 陝西省岐山縣北東) 서쪽의 땅을 주어 진공(秦公)이라고 하였다(BC 771). 이때 산짐승으로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은 서융(西戌)의 습속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문공(文公) 때 웨이수이[渭水(위수)]와 견수의 합류점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고 <삼족죄(三族罪)>를 정하였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부모와 처자 그리고 형제까지도 연좌하는 법률로 군주권의 신장을 나타냄과 동시에 융적(戎翟)의 관습을 법제화한 것이다. 영공(寧公) 2년(BC 714)에 도읍을 평양(平陽;지금의 陝西省鳳翔縣南西)으로 옮겼다. 그 뒤 무공(武公) 10년(BC 688)에 규와 기(冀)를 토벌하였고 여기에 처음으로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두(杜)와 정(鄭)을 현으로 만들었다. 덕공(德公) 때에 옹(雍;지금의 陝西省鳳翔縣)에 도읍하였으며 목공 때에 비약적으로 세력을 강화하였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와 유여(由余)를 등용하였다. 본래 백리해는 우(虞)의 대부(大夫)였다가 목공의 부름을 받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 유여는 진(晉)나라 사람이지만 당시에는 융왕(戎王)의 밑에 있었는데 책략을 써서 신하로 삼았다. 이와 같이 객신(客臣)을 이용하여 군주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방침은 진나라의 전통이 되었다. 유여는 예악법도(禮樂法度)를 물리치고 상하일체의 융적사회를 본받도록 목공에게 권하였다. 이는 군주권을 억제하는 종족(宗族)과 귀족세력을 약화시키는 길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강대해진 진나라는 하서(河西)의 땅을 차지하고 서융의 땅을 쳤기 때문에 영토가 사방천리(四方千里)에 이르렀다고 한다. 목공이 죽었을 때 따라서 죽은 신하가 많았으며 이것은 생전에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것은 군주가 부하를 사신(私臣)으로 마음대로 다루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진나라 군자(君子)들로부터 이에 대한 비난을 받았으나 이것도 신장(伸張)된 군주권의 한 표시였다.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로서의 진
진나라는 그 뒤에 나라 안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더 이상 동쪽으로 나아갈 힘이 없었다. 그러나 BC 403년 진(晉)나라가 한(韓)·위(魏)·조(趙)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헌공(獻公)은 약양(지금의 陝西省臨潼縣東)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방경략(東方經略)을 꾀하였다. 그의 아들 효공(孝公)은 제후였으나 융적이라 하여 멸시당하고 동방의 회맹(會盟)에 가담하지 못하자 동방제후들에게 힘을 보여주기 위해 널리 인재를 구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하려 하였다. 위(魏)나라로부터 위(衛)나라의 공족출신(公族出身)인 공손앙이 찾아와 제왕(帝王)의 길과 왕도(王道), 그리고 패도(覇道) 등에 대해 효공에게 말하였는데 앞의 2가지는 효공이 채택하지 않았지만 패도에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상앙은 패도를 실행하는 것이 장차 제왕의 길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효공에게 발탁된 상앙은 상과 벌을 엄중히 하여 농업과 전투의 결과에 따라 작위를 주고 작위를 가진 사람만이 평가받는 신분제사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인(隣)=오가(伍家)라는 공동체(小宗族的) 단위를 기초로 하여 국가에 협력한다는 체제를 십오제(什伍制)라고 하여 이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군주가 <오(伍)>를 파악하는 것으로서, 중간 세력을 억제하고 가부장적 권력의 신장을 꾀한 것이었다. <오>를 단위로 하여 취(聚)를 만들었으며 그 위에 향(鄕)과 현이 행정단위로서 성립되었다. 천맥제(阡陌制)를 시작한 것도 상앙인데, 이것은 소단위가족의 창설정책인 <분이법(分異法)>에 의해서 나왔고, 들을 농토로 개척한 자제의 토지를 정리하기 위해서 설치한 동서토지구획선으로 추측되지만 정설은 없다. 상앙변법은 1·2차에 걸쳐서 시행되었으며 제2차변법은 도읍을 센양[咸陽(함양)]으로 옮긴 뒤에 시행되었다. 센양은 그 뒤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였다. 효공은 변법으로 강해진 국력으로 동정(東征)을 전개하였고 위(魏)나라로부터 하서(河西)를 탈환하였다. 위나라는 패전의 결과, 도읍을 안읍(安邑;山西省候馬)에서 대량(大梁;河南省開封)으로 옮겨야만 했다(BC 340). 진나라의 동정은 동쪽 여러 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등이 내세운 유명한 합종연횡(合縱連衡)의 타협책과 대항책은 모두 진나라의 중심 외교정책이었다. 한편 효공이 죽은 뒤에 진나라에서는 혜문왕(惠文王)이 뒤를 이었는데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상앙을 주살(誅殺)하였으나 정책의 기본이 되는 군주권의 신장이라는 방침만은 답습하였다. 그리고 국력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 파촉(巴蜀;지금의 四川省)을 제압하고 초(楚)나라에 속했던 한중(漢中)을 차지하였다(BC 312). 또 소왕(昭王) 때에는 양쯔강[揚子江(양자강)]을 따라 남하한 장군 백기(白起)가 초나라의 수도 영(지금의 湖北省江陵縣)을 함락시켰다. 동쪽으로는 위나라의 하동지방(河東地方)을 병합하였고 범수로 하여금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구사하게 하면서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BC 260). 소왕은 뒤에 서주(西周)를 멸망시켰고 동주군(東周君)도 진나라의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에 의해서 멸망되었다(BC 249). 시황제의 등장과 중국통일
장양왕 자초의 아들이 진왕(秦王) 정(政)이다. 그는 어려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태후(太后)와 승상 여불위(呂不韋) 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후의 애인인 노애를 제거하고(BC 238) 그를 태후에게 추천했던 여불위도 권좌에서 추방하였으며 마침내 자신이 친정(親政)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승상에 이사(李斯)를 기용하고 법가주의적(法家主義的) 정책을 채택하여 종실과 귀족세력을 억제하면서 전제적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이때에 왕전 등의 장군을 파견하여 정복을 계속하였다. 진나라가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BC 230년이며 이때부터 10년 동안 다른 5나라도 차례로 진나라의 위력 앞에 굴복하여 진나라는 마침내 중국 전역을 통일하게 되었다(BC 221). 그는 진나라가 영원하기를 희망하여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하였고 만세에 이르도록 건재하기를 원했다. 그는 승상과 태위(太尉)·어사대부(御史大夫)를 배치하여 행정과 군사 양면으로 황제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국가의 통치형태는 봉건제가 아니라 상앙 이래의 군현제를 채택하여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었으며 군에는 수(守)·위(尉)·감(監)을, 현에는 영(令)·장(長) 등을 두었고 군사는 현위(縣尉)에게 맡겼다. 전국을 집권화하기 위하여 도량형과 화폐 그리고 서체(書體) 등을 통일시켰다. 또한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무기를 모아서 녹여 금속상(金屬像)을 만들었다. 북쪽의 흉노를 막기 위하여 장성(長城)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화난[華南(화남)]까지 세력을 뻗쳤다. 사상의 통제를 위해서 일으킨 분서갱유(焚書坑儒)는, 농예(農藝)·의약(醫藥)·점복(占卜) 등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태웠으나 관청에 보관된 유가의 경전 등 제자백가의 문헌은 남겼다. 분서의 주된 목적은 서적이 개인적으로 유포되어 진나라의 정책을 비난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갱유도 시황제를 비방한 방사(方士;道士)들과 거기에 관련된 유생들만을 처벌한 것으로 유가의 말살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 광대한 제국은 아시아에서는 최초의 규모였으며 진(秦)이라는 이름이 널리 서양에까지 전파되었다. 차이나(China)라는 호칭의 기원이 진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법가적 위압은 더욱 강한 세력을 가진 귀족과 소종족을 기초로 한 농민층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황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능묘와 궁전의 건축에 소요된 막대한 노동력은 그 부담이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2세 황제 호해(胡亥)도 조고(趙高)로 하여금 같은 정책을 취하게 하였다. 조고는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군주권의 강화를 꾀하였으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때에 진승(陳勝)·오광(吳廣) 등의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이것에 촉발되어 귀족과 호걸들도 반진(反秦) 깃발을 높이 들었다. 호해의 후계공자(後繼公子) 영이 항우(項羽)의 부장(部將)이었던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에게 항복하면서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바침으로써 3대 15년의 치세로 멸망하였다(BC 207).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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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
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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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나라,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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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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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平陽;陜西)으로 도읍을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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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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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繆公) 즉위. 백리해(百里奚)·건숙(蹇叔) 이 보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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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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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나라 양공(襄公), 목공을 무찌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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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 |
목공, 서융(西戎) 제패 선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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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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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나라, 제(齊)·송(宋) 등의 제후와 함께 진(秦) 나라를 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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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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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魏)나라, 진(秦)나라의 하서(河西)지방을 빼앗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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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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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韓)·위·조(趙)나라를 석문(石門;陝西)에서 대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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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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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의 제1차변법(變法) 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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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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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부터 강국이 됨. 셴양[咸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현제(縣制) 시행. 상앙의 제2차변법 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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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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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孝公) 죽음. 상앙, 실각 후 주살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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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
소진(蘇秦), 합종책(合縱策)을 주장하고 6국의 재상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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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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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를 침. 위나라, 하서 땅을 진(秦)나라에게 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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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
장의(張儀), 진(秦)나라 제상이 되어 합종책을 무너뜨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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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
혜문왕(惠文王), 처음으로 왕호 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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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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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의 연횡책(連衡策)이 시행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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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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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나라가 서제(西帝), 제(齊)나라가 동제(東帝)라고 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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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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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政;뒤의 始皇帝) 태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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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
주(東周)를 멸함. 주나라의 왕통이 끊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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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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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呂不韋), 진(秦)나라의 상국(相國)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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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
진왕(秦王) 정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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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
정국거(鄭國渠) 개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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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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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를 물리치고 친정(親政) 시작, 이사(李斯) 중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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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
한비자(韓非子)를 붙잡아 자살하게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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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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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를 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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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
조나라를 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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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
자객 형가(荊軻)의 암살 미수 사건 일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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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
위나라를 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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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
초(楚)나라를 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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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
연(燕)나라를 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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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
제나라를 멸하여 중국 통일 완성.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전국적으로 시행. 병기를 몰수하고 도량형·화폐·문자를 통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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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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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 북순(北巡)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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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
시황제, 동순(東巡)하고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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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
장군 몽염(蒙恬), 흉노(匈奴) 토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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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
이사, 승상이 됨. 만리장성 축조 시작. 남월(南越)을 쳐서 광둥[廣東]·광시[廣西] 지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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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
분서갱유(焚書坑儒)(~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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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
아방궁(阿房宮)·여산릉(驪山陵)의 조영 착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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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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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 죽음. 조고(趙高)·이사, 2세 황제로 호해(胡亥) 옹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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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 일어남. 항우(項羽)·유방(劉邦) 등, 군사를 일으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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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
이사 살해됨. 조고, 승상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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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
조고, 2세 황제를 죽이고 공자(公子) 영을 세움. 공자 영, 조고를 죽이고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 멸망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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