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는 고종의 늦둥이 딸이다.
옹주는 한일합방 2년 뒤에 태어났고 고종이 61세에 양귀비에서 얻은 딸이라
옹주를 매우 사랑하고 귀여워했다.
그러나 자주권을 잃은 조선 말기 역사 속에서
일제의 볼모로 타국 생활을 오랫동안하면서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상처받은 영혼을 회복하지 못하고
거의 평생 정신질환으로 고생했던 불운의 황녀이기도 하다.
사주를 추적해보니까 정관격이고
편관과 비겁의 흉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시가 정확하므로 사주도 정확하다.
1912년 5월 25일을 음력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종실록 이후는 양력으로 기록하기 시작했으므로
덕혜옹주 탄생도 음력이 아니라 양력이다.
1912년 5월 25일이 양력임을 입증하는 홈피주소(조선왕조실록 순종부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坤 덕혜옹주 양력 1912.5.25 19:55 丙申년 105세
96 86 76 66 56 46 36 26 16 06 時 日 月 年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甲 戊 辛 乙 壬
未 申 酉 戌 亥 子 丑 寅 卯 辰 戌 丑 巳 子
78세 己巳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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巳 정관은 원래 식상을 싫어하고 편관을 싫어하는데
이 명조는 壬水 식상이 戊 인수에 제어되므로
식상의 흉은 작동하지 못하므로 원국은 길국인 것이 분명하다.
초년 甲辰癸卯는 목 재성 운이라 반길반흉하다.
8세 己未년은 乙이 墓에 앉고 축미충이 작동해서 未中乙 재성이 손상되어 부친사망했다.
월간 乙 재성이 부친인데 약하게 투출해있으므로 부친과 조년 이별 징후가 있다.
14세 乙丑년 3월, 덕혜는 일제의 강제 유학 방침에 따라 일본 유학의 길에 오른다.
일제는 영친왕(1897~1970)에게 그랬듯이 덕혜에게도 일본 유학을 강요했다.
일제의 압박에 굴복한 순종은 1925년 3월 24일 덕혜의 동경 유학을 명했다.
14세의 어린 소녀는 정든 궁궐을 멀리 떠나 일본이라는 낯선 이국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乙丑 대운 乙丑년은 길흉이 다 있는 세운이다.
그렇다면 이 강제적 유학은 틀림없이 덕혜에게 못마땅한 유학이 되었을 것이다.
식상이 강왕한 사주라면 이때 의연히 거부하고 궁궐에서 도망이라도 쳤겠지만
戊 인수가 태왕한 옹주는 못마땅해도 법을 준수하는 천성을 지녀서 유학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유학은 불행한 유학이었다.
매초부터 흉운에 떠난 유학은 그 결과가 좋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원칙에 부합한다.
土 인수가 정관의 용신인 옹주가 水에 둘러쌓여있는 일본으로 가는 것도 그렇고
토속적이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소박한 고향을 좋아하는 성품(土인수)에
반하는 유학인 것이다.
그녀의 몸은 생모를 여의고 강제로 떠나나 그녀의 영혼은 이미 상처받고 있었던 것이다.
木은 신경이고 金은 신경을 치는 비겁이다.
이후 일본에 도착하여 낮설은 곳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때마다 그녀의 영혼은 고독하고 외로움을 감수해야만 했으나
여러 정황상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18세 己巳년에 또한 금국 비겁 흉운이 작동하므로 모친 사망했다.
모친마저 사망하자 타국에서 고아가 되었고 오갈 고향이 없는 자신의 신세가 더욱 우울했다.
그렇게 19세 庚午년은 매우 우울한 한 해가 되어 최초로 정신질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庚午년의 庚 겁재는 흉신이고, 午戌火局도 편관 휼신이므로
庚午년은 흉신이 중첩되어나타났다.
설사 水식상이 와서 丁 편관을 제압한다해도 庚 겁재가 흉으로 작용하고,
庚 겁재를 제합하면 火局 편관이 작동하므로
庚午년은 놀라는 일이 있고, 정신이 혼미한 해이다.
이때의 정신적 상처는 평생 치유될 수 없는 질병의 시작이 되었고
그녀가 평생 안고 가야하는 불운의 원인이 되었다.
20세 辛未년은 좋지 못한 해이다.
대운 卯와 未가 합하여 재성이 작동하므로 일제의 강제적 결혼.
21세 壬申년 식상이 작동하여 딸을 낳았다.
딸을 낳고 대마도에의 생활은 한 동안 마음이 평화로웠으나
섬에서 지내는 생활은 차차 답답함과 외로움을 해소해주지 못하므로
다시 즐거운 일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우울증은 재발했다.
이때가 壬寅대운이다. 寅戌火局 편관이 작동할 때이므로 주기적으로
불안정이 찾아온다. 다행히 壬 식상이 편관을 제해서 대흉한 일은 없었다.
덕혜옹주에게 대마도 생활은 외로움과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辛丑庚子 대운은 비겁 흉신이 날뛰는 대운이다.
사람들은 덕혜를 잊은양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하에서
15년간 정신병동에서 갇혀서 지냈다.
51세 壬寅년은 길신 동방 재성지이고
壬 식상이 인술화국 편관을 제어하는 길운이 작동해서 귀국했다.
그러나 비로소 안정했던 고국에서도 그녀의 병은 낫지 못했고
설상가상 실어증까지 겹쳐서 평생을 안고 가는 지병이 있었다.
己亥戊戌 20년간은 토 인수 길운이다.
낙선재의 생활은 편안하고 고요했다.
그러나 형제친척이나 자식이 성공해서 모여드는 다복한 가족은 없었다.
겨우 어릴 때 유모가 찾아와서 평생 간병을 해 주었을 뿐
그녀의 영혼은 이미 치유되기 힘든 상태였지만
그나마 다정한 가족들이 자주 찾아와서
성처난 영혼을 치유해볼 기회는 없는 20년이었다.
혹자는 신왕한 명조이기 때문에 인수를 흉신이라 볼 수도 있으나
인수를 흉신으로 보면 명리 정법이 아니다.
이 경우 인수는 길신이다. 토 인수는 수 식상을 제하기 때문이다.
丁酉 대운은 丁 편관이 투출해서 종명하는 운이다.
대개 사람들은 편관이 투출한 운에 사망하는 법인데
이 명조는 편관이 흉신이라 흉운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세운에서 火가 오면 그 때가 위험하다.
78세 己巳년은 남방 화운이 시작되는 첫 해이다.
巳 관성이 丁 편관을 도우므로 흉하다.
己인수가 화살한다고 해도 또한 巳酉金局 비겁이 작동하므로
이 또한 흉운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명조는 정관격, 인수격과 신왕재약과 인중식경 이론으로 명조를 풀면 오차 없이 풀린다.
불운한 인생의 원인은 일제가 제공했으나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덕혜옹주의 선천적 쇠약한 신경과 시시로 다가오는 흉운에 있다하겠다.
청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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坤 덕혜옹주 양력 1912.5.25 19:55 丙申년 105세
96 86 76 66 56 46 36 26 16 06 時 日 月 年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甲 戊 辛 乙 壬
未 申 酉 戌 亥 子 丑 寅 卯 辰 戌 丑 巳 子
08세 己未 1919년 1월 21일 고종 승하.
10세 辛酉 1921년 4월 덕혜는 일본 거류민이 세운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에 입학했다
14세 乙丑 1925년 3월 24일 덕혜의 동경 유학을 명했다. 14세의 어린 소녀는 정든 궁궐을 멀리 떠나 일본이라는 낯선 이국 땅에 발을 디뎠다.
14세 을축 1925년 3월 30일 덕혜가 동경에 도착해서 간 곳은 오빠인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가 거처하던 집이었다.
15세 丙寅 1926년 오빠 순종 사망.
18세 己巳 1929년 생모 양씨사망. 덕혜는 이국 땅에서 고아가 되었다.
19세 庚午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20세 辛未 1931년 5월 8일 대마도 백작 (당주)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적 결혼, 대마도에 머물면서 결혼 1년 후 딸 정혜(正惠)가 태어났고 덕혜옹주는 얼마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35세 丙戌 1946년 본토 정신병원에 입원. 이후 정신병동에서 15년간 같혀서 생활함. 남편은 법적 보호자였던 영친왕과의 합의를 통해 남편과 이혼하고 일본 여자와 재혼했다.
44세 乙未 1955년 이혼.
45세 丙申 1956년 딸 결혼,실패, 실종.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흘러가는 데로>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25세)에 결혼하였지만 실패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51세 壬寅 1962년 1월 26일, 37년 만에 조현병을 안고 귀국, 실어증이 있었다. 덕혜옹주는 귀국 후 수강재에서 머물렀다. 덕혜옹주가 돌아온 이듬해에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 1901~1989)도 귀국해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1963년에 환국한 영친왕 이은(李垠)도 낙선재에서 기거하다 1970년에 생을 마쳤다.
78세 己巳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9일 뒤인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생을 마감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덕혜옹주 메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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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참고
당시 고종의 일상을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贊侍室: 오늘날의 비서실) 일기에는 “오후 7시 55분에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탄생하였다. 8시 20분에 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납시었다.”고 하여 덕혜옹주의 탄생과 함께 고종이 직접 산모를 찾았음을 기록했다. 대개 초칠일이 지나야 산모를 찾는 관례에 비추어 보면 고종의 행동은 이례적이었다. 환갑에 얻은 늦둥이가 그만큼 귀여웠기 때문일 것이다.
1912년 5월 25일이 양력임을 입증하는 홈피화면 (조선왕조실록 순종부록)
첫댓글 장문의글 수고하셨습니다.
토를 희용으로 보시는듯 합니다
저는 조금 다르게 보며
상관견관이 되었으며 축,술로 남편성은 지키기 어려운명으로
토를 기신으로 봅니다만
덕혜옹주는 맞아요
이력은 부정하지 못하지 말입니다
여름철
정관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