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체꽃처럼 아름다운 우애와 효행의 산실,
안동 체화정(棣華亭)
체화정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풍산태사로 1123-10(상리 2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민적(1702~1763)이 1760년대에 세운 정자로, 형 이민정과 함께 학문을 닦고 우애를 길러 형제애로 유명한 곳이다. 체화정이란 정자명은 다닥다닥 함께 모여 피는 상체꽃을 형제가 모여 사는 것에 비유하여 형제애를 상징한다. 이민적 집안의 남다른 형제애를 기려 풍속화가 김홍도가 ‘담락재’라는 편액을 쓰기도 하였다.
체화정(棣華亭)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풍산태사로 1123-10(상리2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민적(李敏迪:1702~1763)이 1760년대에 세운 정자로 학문을 닦던 곳이다. 이민적은 본관이 예안(禮安)으로, 자는 혜숙(惠叔)·혜중(惠仲), 호는 만포(晩圃)이다.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이이문(李以文)이다. 1744년(영조 20)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체화(棣華)라는 정자명은 『시경(詩經)』 「소아 상체(小雅常棣)」편의 “활짝 핀 아가위꽃 정말 아름다워라. 이 세상 누구라 해도 역시 형제만한 이 없네[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는 구절에서 ‘체(棣)’와 ‘화(華)’를 따온 것이다. 『시경』에서 상체꽃이 한 데 다닥다닥 붙어 꽃피는 모습을 형제가 우애 있게 사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1761년에 이민적이 종인(宗人) 이상진(李象辰:1710~1772)에게 체화정 기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자 이해에 이상진이 「체화정기(棣華亭記)」를 지었는데 내용 중에 “선성(宣城) 이군(李君) 혜숙(惠叔)이 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그 앞에 못을 파서 잉어를 기르고 좌우에 좋은 꽃을 심어 백형 처사공(處士公:이민정)과 더불어 침식을 같이하니, 그 즐거움이 비할 데 없었다.”라고 한 바와 같이 체화정에서 이민적은 형 옥봉(玉峰) 이민정(李敏政)과 함께 살면서 우애를 다져 형제애로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1760년(영조 36)에 이상정(李象靖:1711∼1781)이 이민적이 지은 「체화정(棣華亭)」이라는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 「차운이혜숙민적체화정(次韻李惠叔敏迪棣華亭)」에 체화정에 심어있는 상체꽃을 언급하며 체화정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이 시는 이상정의 문집 『대산집(大山集)』 권2 시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정자와 누대 짓는 것도 전날을 인연하니[亭臺開廢亦前緣]
뉘 말하랴 거친 언덕에 홀연히 지었다고[誰道荒厓忽采椽]
십 리 자욱한 안개 속에 냇물은 아득하고[十里烟霞川浩渺]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에 달빛은 어여뻐라[千家砧杵月嬋娟]
낚시 파한 물가에서 차를 나눠 마시고[苔磯釣罷分茶飮]
바둑 마친 저녁 언덕 백로 함께 잠드네[夕塢碁殘共鷺眠]
뜨락엔 한 떨기 상체나무 있으니[庭畔一䕺常棣樹]
동풍에 그 뜻 알아 세월을 보내네[東風解事度年年]
1760년의 체화정에 관한 시와 1761년의 「체화정기」로 보아 체화정은 1760년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정자의 구조는 정면 세칸, 측면 두칸의 아담한 이층 누정의 형태의 팔작지붕 집이다. 자연석 기단을 2단으로 쌓은 바닥에 자연석 원형 주초를 놓은 위에 나무로 된 원형 기둥이 올라 서있는 형태다. 정자 평면 가운데에 온돌방이 꾸며져 있고, 좌우 협칸에는 마루로 되어 있다. 온돌방과 마루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내어 달고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사면에 둘렀다. 마루방 앞쪽으로는 4분합 들문을 달아 놓아 전체를 개방할 수 있게 하였다.
체화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전면 가운데 칸에 설치된 문이다. 반 칸 너비의 들어열개 격자문이 중앙에 설치되어 있고, 그 양쪽 변을 4등분 했을 때 한 등분 너비의 좁은 여닫이문이 달려 있는데, 평상시에 방을 드나들 때 이 문을 사용한다. 날씨가 더우면 양쪽 여닫이 문을 일단 들어열개 문에 포갠 후 전체를 들어 올려 고정하면 실내외가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된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문 속의 문이다. 중앙의 고정된 문 가운데를 뚫어 작은 이분합 띠살문을 달고, 양쪽 문에는 육각의 작은 빗살창을 냈다. 그리고 창호지를 바르되, 중앙의 작은 띠살문과 양쪽 빗살창은 안쪽에서, 나머지 부분은 밖에서 창호지를 발라 띠살문과 빗살창이 뚜렷이 대비되게 하였다. 밖에서 보면 흰 창호지 바탕과 문살의 산뜻하고 아름다운 조화가 매력적인데, 이것은 한국인의 미감과 생활의 지혜가 낳은 걸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정자 뒤쪽으로는 숲이 우거진 나지막한 산이 가려져 있고, 정자 앞에는 수초와 수변 식물이 무성한 연못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 삼층도지(三層島池)라는 연못에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는 세 개의 인공섬인 방장(方丈)·봉래(蓬萊)·영주(瀛洲)의 3개의 작은 인공섬이 있다.
정자 안에는 ‘효자정려(孝子旌閭)’와 ‘담락재(湛樂齋)’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효자정려’는 이민적의 아들 용눌재(慵訥齋) 이한오(李漢伍:1719~1793)가 노모에게 효의 도리를 다한 것을 가상히 여겨 순조가 하사한 것이고, ‘담락재’ 현판은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가 1786년(정조 10)에 안기찰방(安奇察訪)을 이임할 즈음에 이곳에 들러 쓴 것이다. ‘담락(湛樂)’의 의미는 『중용(中庸)』의 “군자의 도를 비유해서 말하자면 ‘먼 길[遠]’을 가는 것은 반드시 ‘가까운 데[邇]’에서부터 하고, ‘높은 곳[高]’을 오르는 것은 반드시 ‘낮은 데[卑]’서부터 하는 것과 같다.”고 한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도를 행함에는 차례가 있고 나아감에는 순서가 있으므로, 낮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잘해 나가면 저절로 높고 먼 곳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처자식과 형제를 놓고 본다면, 형제는 이(邇)가 되고 처자식은 원(遠)이 된다. 형제담락(兄弟湛樂), 즉 형제가 서로 사랑하며 화락한 뒤라야 처자식과도 즐거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형제를 부모와 대응해 보면, 부모는 고(高)가 되고 형제는 비(卑)가 되어, 형제가 먼저 화합한 뒤라야 부모에게 참된 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화정의 이민적·이민정 형제의 우애는 상체꽃처럼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였기에 아내와 자식들도 본받아 화목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면 부모에게 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체화정은 건립 당시의 형태가 잘 유지되고 있으며, 예안이씨 일가의 효성과 우애와 충의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체화정의 건립자 이민적이 만년에 속세의 번다한 인연을 끊고 한적한 곳에 정자를 지어 유유자적한 삶을 구가하는 모습을 읊은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늙을수록 나는 속세 인연 끊고 싶어[老來我欲斷塵緣]
물을 끌어 오고 바위에 기대어 몇 기둥을 얽었네[並水依巖結數椽]
고요한 빈터 연기 나무에 갇히어 푸른빛 띠고[寂歷墟煙籠樹翠]
차가운 밤 달빛은 주렴에 들어 아름답네[蒼寒夜月入簾娟]
동북쪽의 창가에선 산을 보고 읊조리고[快牕東北看山詠]
일상의 베갯머리 여울 소리 들으며 자네[幽枕尋常聽瀨眠]
일찍이 그간의 많은 취미 아노니[早識這間多趣味]
이십여 년이나 헛되이 달리려고 했네[肯敎虛走卄餘年]
ㅡ 집필자 장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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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14
안동 체화정(棣華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