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화 시집「초록나비」해설 / 허형만

[흐르는 물]

김연화 시집 해설

<초록나비>(천년의시작 2019.1)

시간과 기억, 인간의 정신을 느끼는 서정

허형만 (시인)

시간과 기억들은

지름길로 오지 않고

빛과 바람 타고 온다

우리는 조용한 바다 위로

미소 지으며 걸어간다.

-후안 라몬 히메네스, 『히메네스 시선』

  김연화 시인의 첫 시집은 신선하게 읽힌다. 한 편 한 편의 시마다 진솔한 삶, 맑고 순수한 눈빛이 가슴에 어린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 했으니, 시인 또한 시처럼 맑고 순수하리라. “시는 창조하는 혼 안에 절대적인 순수와 빛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 말라르메를 떠올리게 하는 김연화 시인의 시들은 낯이 익은 듯하면서  낯선 언표들로써 과거의 시간과 기억을 오늘에 되살려 내고 있다. 그것은 히메네스가 말하듯 “빛과 바람”을 타고. 또는 막스 피카르트가 “침묵 속에는 미가 존재하며, 그 미는 침묵하면서 모든 것에 스며들어 가는 시로부터 생긴다.”고 했을 때의 그 ‘침묵’으로부터 말이다. 먼저 다음 시를 보자.

  고샅길 초입 느티나무 숲이 있었다 작은 내를 끼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야 마중 나오는 늙은 집 나보다 두 살 위인 소몰이꾼이 무화과나무 잎에 몸을 숨긴 채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해 주던 뒤란 백작약 꽃을 뿌리째 뽑아 흙과 함께 비닐봉지에 싸서 열두 살 가슴에 안겨주던 날이 역마살 짙은 바람으로 떠돈다 새들이 흔들어놓은 미루나무 숲길을 역류해 작약 뿌리에 매달린 ‘매기의 추억’ 하모니카 소리가 내 무릎 치마에 휘감길 때까지 걷는 미루나무 숲 서른 해나 지난 세월이 머리를 헤치고 흰 사슴을 몰고 나에게로 올 거라는 생각을 했다 새벽 4시면 교회 종탑에서 잠 덜 깬 종소리가 쏟아져 내리고 성경책을 끼고 사립문을 여시던 엄마는 나의 바다 빛깔 물방울무늬 그려진 원피스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서둘러 별을 따라 떠나셨다 흔들리는 언덕 위 벽오동잎 무리 지어 무너져 내리는 어스름이 오면 이슬 맺힌 풀잎마다 수리부엉이가 울었다 그 긴 세월 흔들리는 고샅길 휜 그림자 너머 상현달이 뜬다 달의 이마 위 새겨진 그리움 하나 빈집이다 빈집 가득 달빛이 남긴 그늘 두텁게 쌓여 있다.

                        -「빈집」 전문  

  지금은 빈집. 그러나 그 빈집도 한때는 “두 살 위인 소몰이꾼이 무화과나무 잎에 몸을 숨긴 채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해 주던 뒤란 백작약 꽃을 뿌리째 뽑아 흙과 함께 비닐봉지에 싸서 열두 살 가슴에 안겨주던” “열두 살”의 천진난만한 풍경이 숨 쉬던 집이었고, “성경책을 끼고 사립문을 여시던 엄마”가 계시던 집이었다. 지금은 빈집. “서둘러 별을 따라 떠나”신 뒤, “고샅길 흰 그림자 너머 상현달이” 뜨면 “달의 이마 위 새겨진 그리움 하나 빈집”, “달빛이 남긴 그늘 두텁게 쌓여 있”는 빈집. 시인은 그 빈집에 대해 “긴 세월 흔들리는” 시간을 오늘에 호명하며, 달빛에 의해 두텁게 쌓인 시간을 켜켜이 들추어내고 있다.

  사실 달빛을 볼 수 있는 행운은 “수리부엉이”처럼 깨어있는 자의 몫이다.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달빛은 깨어 있으면 볼 수 있을 텐데 자느라고 보지 못한 아주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에 잠겨 달빛을 걷는 사람은 달빛만으로도 만족하고 그 빛은 그의 내면의 빛과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달빛을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은은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을 변용하여 “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태어난 마을은 역이 있는 읍내 마을이었다
역 대합실에는 작은 매점이 있었는데 그 매점은
기차가 들어올 때만 문이 열리고 전등이 켜지고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 매점에서 저마다
종합선물세트라든지 과일이라든지 술을 사서
신작로로 나와 윗길로 아랫길로 흩어지곤 했다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불이 꺼지고 문이 잠기곤 했다
우리 집 마루에서 놀다가도
기차소리가 나면 달려가던 

                        -「봉화역」 전문     

  “내가 태어난 마을은 역이 있는 읍내 마을이었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는 시인이 태어난 마을의 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역은 ‘봉화역’. 영동선이다. “기차가 들어올 때만 문이 열리고 전등이 켜지”는 역 대합실의 매점에 대한 묘사와 “저마다 종합선물세트라든지 과일이라든지 술을 사서/신작로로 나와 윗길로 아랫길로 흩어지곤” 했던 봉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추억함으로써 ‘봉화역’은 오늘에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특히 시인에게 있어 ‘봉화역’은 “우리 집 마루에서 놀다가도/기차소리가 나면 달려가던” 유년의 추억이 어린 공간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추억의 역이 있는 고향에서 김연화 시인은 “밥을 참기름에 비벼 주먹밥을/만들어 내 손에 곧잘 쥐어주시곤 하셨”던 (「주먹밥」) 어머니와 “젖니 빠진 볼우물 깊던 아이/맨 종아리 도랑물에 온종일 담그고/풀꽃들과 해지도록 함께 놀았”던(「고마리꽃」)일, “네 살 때 내성천에서 자갈 모으시”던(「내성천에서」) 할머니, “일곱 살 때 나는 울보였다(…)흰 백합꽃과 작약 그리고 감나무가 무척 많던 아재네 집/사월이면 하얀 백합꽃을 한 아름 꺾어 내 가슴에 안겨 주었”던(「아재의 연」) 아재를 떠올린다. 이 모든 기억들은 어려서부터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숨 쉬며 자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의 서정시인이 된 내공으로 읽힌다. 그렇다. 서정시란 삶의 원초적 경험을 오늘에 호출하여 시인의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일이지 않던가.

비 내리는 저녁 강가에 달맞이꽃 이파리마다 빗물 흐릅니다

불어난 강물 속으로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떠내려옵니다

백로 한 마리 날개를 접고 그걸 타고 내려옵니다

아득한 상류로부터 초록 나뭇잎과 잔가지들이 달린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오던 백로는 날개를 펴고 다시 상류쪽으로 날아올랐습니다

백로는 마침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던 겁니다

새도 풍류를 안다고 새가 내게 말했습니다

폭우가 쏟아져 강물에 파도가 치니 새들도 파도를 타고  

내 일곱 번째 늑골에도 바다가 밀려와 파도가 쳤습니다

나도 세속의 옷을 벗고 새가 되어 그 강가에서 오랫동안

노 저었습니다

파도가 높을 때마다 배는 기우뚱, 달빛에 젖고

강 언덕의 달맞이꽃잎에 내 몸도 흠뻑 젖었습니다

                        -「비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전문   

  청나라 왕부지王夫之의 『석당영일서론夕堂永日緖論』에 의하면 “정情과 경景은 둘이나 실제로는 나눌 수 없다. 시에 뛰어난 자는 이 둘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가장자리가 없다. 빼어난 시는 정 가운데 경이 있고, 경 가운데 정이 있다.”고 했다. 시에서 정경론情景論의 대표적인 견해다. 시인은 비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불어난 강물 속으로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떠내려”오고 “백로 한 마리 날개를 접고 그걸 타고 내려”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어서 “아득한 상류로부터 초록 나뭇잎과 잔가지들이 달린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오던” 백로가 “날개를 펴고 다시 상류 쪽으로 날아”오르는 광경을 관찰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나도 세속의 옷을 벗고 새가 되어 그 강가에서 오랫동안 노를” 젓는다. 이는 곧 경景을 보고 정情을 일으킨 ‘정수경생情隨景生 촉경생정觸景生情’의 방식을 쓴 현대적 정경시이다. 다시 말해 새와 하나 되는 화자의 모습, 물아일체物我一體 자연동화自然同化의 한 폭의 묵화에 다름 아닌 셈이다. “강 언덕의 달맞이 꽃잎에내 몸도 흠뻑 젖”은 이미지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침묵의 환상에 다름 아니다. 바로 여기에 서정시가 자리하거늘 정情만으로도 다음 시는 참으로 얼마나 곡진한가.

울초가 피는 집에

엄마랑 아기가 살았네

엄마 품에 안겨 아기가 젖을 먹는데

아기한테서도 젖냄새가 났네

아기는 새순 같은 손가락 하나

엄마의 입에도 넣어 주었네

엄마도 배가 고플까봐

엄마도 먹고 싶을까봐

                        -「울초가 피는 집」 전문  

  울초는 튤립의 순우리말이다. 울초의 꽃말은 애정, 사랑의 고백이다. “울초가 피는 집에” 사는 “엄마랑 아기”는 그 집에 피고 있는 울초와 잘 어우러져 독자로 하여금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한다. 동요로 읊어도 좋을 이 동심어린 시는 얼마나 맑고 순수한가. “아기는 새순 같은 손가락 하나/엄마의 입에도 넣어 주었네/엄마도 배가 고플까봐/엄마도 먹고 싶을까봐”. 그렇다. 문여기인文如其人, 시가 곧 그 사람이라 했거니, 아기에게 초점이 맞춰진 한 폭의 영상 같은 이 시의 서정적 아름다움은 “까치와 한상에서 밥 먹”(「겨울들녘」)는 것이나 “정구지 찌짐 부쳐 볼이 터지도록 밀어 넣으면/천지는 푸른 풀밭/나는 그 푸른 풀밭의 귀가 빨간 하얀 토끼”(「정구지 찌짐」)가 되는 환상적 동심이 시인의 심성 그대로인 듯하다. 그러기에 김연화 시인의 서정성은 특히  어른이 되어 그리움의 심상을 많이 간직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사색자로서 사유의 내면을 언어로 드러내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다음 작품을 먼저 보자.

비 온 후 불어난 강물이 모래톱을 범람해
샛강을 만들다가 어느 지점에서 다시 합류해서
만나면 그 둥근 물길에 갇힌 뭍은 섬이 되어버리지요

강을 맨몸으로 건너
오랫동안 그 섬이었던 곳에 가보았지요
새들의 깃털이 떨어져 있고 새들의 똥이 널브러져 있었고
순간 자신이 새들의 터전을 침입해서 새들의 밀실을
훔쳐보고 있는 듯한 낭패감에
급하게 그 섬을 빠져나오다 깊어진 강물에 갇혀
어지럼증을 견디어야 했던 날은
꿈 속에서도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지요

강에 갑니다
따뜻한 햇살이 데워 놓은
강가의 은모래 길을 맨발로 걷다가
자연산 재첩 껍데기를 주워 하트를 만듭니다
그 하트 속에 적어 넣은 네 이름 두 자

                        -「그 하트 속에 적어 넣은 네 이름 두 자」 전문

  이 시에서 그리움의 대상은 “너”다. 강에 가서 “따뜻한 햇살이 데워 놓은/강가의 은모래 길을 맨발로 걷다가/자연산 재첩껍질을 주워” 만든 “하트”는 곧 간절한 그리움의 표상에 다름 아니다. 어찌 보면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의 무게”(「내 마음의 고가古家」)를 감당할 수 없는 심리적 거리를 시인은 “하트”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심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해 “강을 맨몸으로 건너/오랫동안 그 섬이었던 곳에” 가보았고, “급하게 그 섬을 빠져나오다 깊어진 강물에 갇혀/어지럼증을 겪어야” 하기도 했을 만큼 기억의 시간은 온통 “너”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그러면 이 시에서 “하트 속에 적어 넣은 이름 두 자”의  “너”는 누구인가? 아마도 어느 환한 여름 날 오후 그리는 마음 바닥까지 번지는 “그대”(「편지」)이며, 또한 어느 한 순간 신비스러워지는 눈이 큰 “당신”(「얼굴」)이지 않을까. 또는 “당신과 내가 아득 먼 곳에 살아/첫눈이 함박눈으로 쏟아진다고/편지를 드려도/당신께선 아무 말씀 없으셨”(「우리가 늙은 어느 날에는」)던 바로 그 당신일 터이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밉다는 말만 하고 돌아서는데/마저 못한 사랑한단 말/가시 되어 목에 걸”(「아까시나무가 되었습니다」)리게 한 그 사람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지. “때론 살다가/풀뿌리 바람에/흔들리는 소리로/울고 싶을 때/내게로”(「달빛 한 장」)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김연화 시인에게서 새로이 읽는 기억과 시간의 이미지들은 이렇게 시인 못지않게 읽는 이도 간절해질 수 있음을 본다. 아울러 존 홀 휠록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모든 행위나 사건은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거니와 김연화 시인의 시 또한 주관적 우주에서 살고 있는 인간 정신의 깊이를 느끼는 서정성이 돋보인다.

꽃들 잔칫상 물린 자리

오월 끝자락 잎들의 세상은

사람만 두고 모두 초록이다

잎사귀의 꿈이 나비가 되었을까

초록 날개 저어 봄을 건너온 유월

금오산 기슭에서 본다

표본실에서도 본 적 없는 초록나비

눈부시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봄꽃 떠난 세상을 온통

휘젓는 초록의 날갯짓이

평온하다

                        -「초록나비」 전문      

  우선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은 금오산이다. “돌 흙더미 절벽 위에 소롯이 피어/해맑게 웃고 있는 민둥제비꽃”(「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말 듯한 민둥제비꽃」)을 만난 장소도 금오산이다. 시간적 배경으로는 오월 끝자락. “꽃들 잔칫상 물린 자리/잎들의 세상은/사람만 두고 모두 초록”이니, 이 초록 잎사귀가 우화羽化하여 나비가 된 상상력을 보인다. 이 나비는 학창시절 “표본실에서도 본 적 없는 초록나비”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우주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같은 금오산에서 끝이 없는 벚꽃 길을 걷다가 비탈진 하늘을 휘어 도는 금오산 입구에서 “발랄한 호수가 내게로 밀려올 때/상현달이 호수 면에 수많은 깃털을 달고/우화羽化의 날갯짓을 하고 있”(「금오산 벚꽃 길」)는 광경과 닮았다.

  비록 벚꽃 길에서의 꽃잎과 벚꽃 진 뒤에 솟아난 잎사귀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 시에서 “하늘과 땅, 아득한 거리/온통 은비늘로 사닥다리를 놓아/날렵한 물고기 한 마리/가장자리로 힘차게 솟구치고 있”는 모습과 「금오산 벚꽃 길」에서 “눈부시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봄꽃 떠난 세상을 온통/휘젓는 초록의 날갯짓”이 생동하면서 우주는 늘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철학적 사유까지 갖게 한다. 그만큼 김연화 시인의 시적 사유가 인간정신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서정성을 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는 김연화 시인의 시를 읽으며 후안 라몬 히메네스가 쓴 “시간과 기억들은/지름길로 오지 않고/빛과 바람 타고 온다”는 시를 함께 음미할 수 있어 참으로 행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