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꽃 배롱나무가 신천 둔치 드문드문 피어있다. 녹색과 대비되어 꽃이 더 눈에 띈다. 원래는 꽃이 오랜 핀다는 의미로 백일홍이라 불렸는데, ‘배기롱’에서 지금은 ‘배롱나무’로 더 알려져 있다. 꽃은 분홍과 붉은색을 합해놓은 것 같다. 분홍보다는 붉고, 붉음 보다는 덜 붉다. 백일을 꽃피우기 위해 얼마나 인내했을까? 분홍으로 남기에는 붉음이 아쉽고, 붉음을 유지하려 해도 세월을 못 견뎌 색이 바랬다. 그래서 분홍빛을 띤다. 떨어지면 다시 피우고, 다시 떨어지면 또다시 얼마나 피웠길래 백일 동안 필까? 물론 ‘백일’이란 건 은유이다. 오래 핀다는 것을 은유한다. 꽃은 피는 게 아니라 피워내는 것이다. 얼른 보면 꽃이 만발하지만, 그 순간에도 떨어지는 꽃은 많다. 대한민국 역시 지금까지 수많은 민중의 희생으로 해서 자란 나무이다.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배롱나무는 안동 병산서원 앞마당과 강진 백련사 만경루 앞뜰에 있는 배롱나무이다. 병산서원의 외삼문인 복례문 앞뜰에 배롱나무가 많이 있다. 방문객을 맞아 활짝 피어있다. 만대루 계단 양옆에도 두 그루 있다. 배롱나무는 병산서원의 안팎에 있으면서 서원과 앞의 검은 병산을 이어주는 꽃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앞뜰의 녹색 잔디와 대조를 이루면서 서원에 들어서는 사람의 마음을 활짝 피어나게 한다. 서원 앞을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는 병산 때문에 막힌 마음을 훨훨 열어젖히게 한다. 만대루에 올라 병산을 바라보면 마치 꽃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다.
강진 만덕산 백련사 만경루 앞뜰의 배롱나무는 시안 색의 만경루 창살 문과 어울려 더욱 진한 이미지를 풍긴다. 시안 색은 녹색과 파란색을 띠는 색이다. 난 개인적으로 이 색을 참 좋아한다. 이 색과 배롱의 붉은 꽃이 어우러져 절정을 이룬다. 백련사와 초당을 동백 숲이 다리 놓고 있다. 이 동백 숲을 지나 다산과 혜장은 서로 오고 가면서 학문을 논하였을 것이다. 혜장 선사가 백련사로 온 것은 1805년 그의 나이 서른넷일 때다. 다산이 혜장을 처음 방문한 것은 그해 4월 17일이다. 그땐 동백이 활짝 핀 길을 따라 백련사로 왔을 것이다. 다산과 혜장은 초당과 이 절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학문적 소통을 했으리라! 이 두 사람은 혜장이 마흔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교분을 유지했다. 혜장이 서른넷, 다산이 마흔넷의 나이에 둘이 처음 만났다. 이들의 교분은 6년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만경루에 앉아 창으로 배롱나무를 내려 다 보면서 둘 사이의 우정을 돈독히 했을 것이다. 다산과 혜장은 서로 유교와 불교라는 두 학문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그 다리는 동백숲으로 가꾸어져 있다.
배롱이 여름에 꽃을 피우지만, 동백은 겨울에 꽃을 피워 동백(冬柏)이다. 동백은 모두가 지고 난 후, 겨울의 흰 눈 속에 붉은 귀족으로 핀다. 온갖 시련을 다 이겨내고 피어난 겨울 손님이다. 어느 순간 동백은 통째로 낙화한다. 권력의 무상함을 닮은 듯하다. 동백은 낙화해도 여전히 붉다. 떨어졌어도 여전히 붉은 동백이듯, 권력의 뒤안길로 들어앉았어도 다산은 여전히 곧은 선비이다.
동백에 둥지를 튼 동박새에 얽힌 사연도 깊다. 포악한 왕이 자식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왕위를 동생의 아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왕은 자리를 물려주기 싫어 두 조카를 죽일 궁리를 한다. 이를 알아챈 동생이 두 아들을 멀리 보내고, 아들을 닮은 소년들을 데려다 두었다. 이것마저 알아챈 형은 동생에게 두 아들을 죽이라고 명한다. 차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일 수 없었던 동생은 자결하여 동백으로 피었고, 두 아들은 새로 변하여 날아갔다. 날아갔던 두 아들은 새가 되어 동백나무에 둥지를 틀었다. 이 새가 동박새이다. 형인 왕의 권력욕으로 인해 무너져버린 슬픈 가족사가 담겨 있다. 동생은 떨어져 자결한 꽃으로 은유된다. 슬퍼 더욱 아름다운 꽃이다. 하늘의 신을 숭배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가족이 폐족이 된 다산의 슬픈 가족사와 겹쳐진다. 다산이 동백인 이유이다. 다산은 동백의 정원에서 유배의 아픔을 치유한다.
난 강진을 세 번 찾았었다. 나의 책 욕망으로 성찰한 조선의 공간을 쓰면서 다산을 만나기 위해서다. 대구에서 하루로 다녀오기는 다소 멀다. 하지만 갈 목적이 있으면, 물리적 거리가 그리 문제가 안 된다. 초당으로 오르는 길의 뿌리나무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무슨 애달픈 사연이 있길래 뿌리가 흙을 뚫고 나왔을까? 정조대왕과 죽은 형 약종과 바다 건너 유배지 흑산도에 있는 약전을 그리워하는 다산의 마음을 읽는다. 내친김에 정호승의 시 〈뿌리의 길〉을 따라가 보자.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 길/지상(地上)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地下)에 있는 뿌리가 /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 준다는 것을/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茶山)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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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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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서원 안, 절집, 고택에 많은 배롱나무,
한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에,
"배롱나무 기둥이 껍질이 없어서 안팎이 따로없는 청렴성을 상징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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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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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