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9. 주일오전예배
마 21:1-11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구약의 사건을 온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첫 지역인 여리고에서 라합의 집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무지몽매함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안 라합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 전에 여러 왕들을 전멸시킨 일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이 잃을 정도였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을 하였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늘과 땅에서 너희의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시오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에도 자신의 집이 살아 남았습니다. (수 2:9-13)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시는 여정가운데 여리고에서 두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3일에 사신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누가 큰자인지, 누가 더 좋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 따지며 영적으로 눈이 감긴 자들처럼 행동했습니다. 그에 반해 여리고의 두 시각장애인은 구약 여리고성의 라합처럼 영적으로 눈이 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앞에 섰을 때 그들은 오직 주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위해 소리칠 뿐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기름부음 받은 왕앞에 종들이 엎드려 은혜를 받기를 구하는 자세로 예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시각장애인들의 눈을 밝혀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 특히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 있을 일을 들은 제자들의 영적 어두움과 대비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첫 지역인 여리고성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이 어떤 땅이고 그들이 싸워서 다 멸해야 할 그 지역과 사람들의 특징을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이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얻어야 할 지역이었습니다. 싸우기 위해서는 전투력에는 전략, 전술과 함께 무기 또한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사람들의 정신력이나 싸움에 임한 자세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미 여리고성에 들어간 정탐꾼들은 라합의 말 즉 ‘가나안 사람들의 두려워서 간담이 다 녹았다’는 말에 승리를 확신했을 것입니다. 이미 정신은 이겼습니다. 그러나 정신만 이긴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싸울 사람과 무기도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말씀을 설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자신이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다
3. 하나님과 화평을 주셨다
지금 이어지는 예수님의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1절에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갔다” 라고 기술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여정 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동쪽 1km 떨어진 곳에 감람산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에는 이 산이 예루살렘과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과 가까운 거리의 산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십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구약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최종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최종 목적지를 가까이 산 위에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 했지만, 사람을 먼저 보냈고 그들도 무엇인가를 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구약의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약속된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향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돌아 가나안 땅 목전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신 34장) 느보산에서 가나안 지경을 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알아보기 위해서 소위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각 지파 중 지휘관 된 한 명씩 총 12명을 보냈습니다. 그 12명 중 단 두 사람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차지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친 그들은 그 땅의 과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과일을 보여주면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면서도 그 땅의 모든 백성의 신장이 장대같아서 자신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하면서 그 땅을 자신들이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악평했습니다.(민 13장)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느보산에서 바라보기만 했을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이스라엘의 구원자였지만, 정작 자신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모세보다 더 큰 진정한 구원자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그에게 약속된 사명인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할 장소인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십니다. 그분은 모세보다 큰 진정한 구원자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예수님은 어떻게 이루십니까? 예수님은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함께 풀어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5절은 멍에 매인 짐승이라고 분명히 지시합니다. 민수기 19:2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제사의 제물을 바친 내용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6장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법궤를 빼앗아 온 후에 그 땅에 여러 재앙이 벌어져서 다시 그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내는 내용 중에서 7절에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이 재앙이 법궤가 내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시험해 보기 위한 목적으로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소를 선택했습니다. 멍에를 메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안장을 얹지 않은 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탓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인즉슨 아직 나귀 새끼는 멍에를 메지 않은 안장을 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특별한 목적 즉 제사에 사용된 짐승은 멍에를 메지 않은 송아지를 사용했음을 상기 시킵니다. 예수님은 멍에 메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시므로서 앞으로 그에게 특별한 일이 있을 것임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는 데 이 기간이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최대 절기로서 이 날은 모든 사람이 흠 없는 멍에 메지 않은 소나 송아지로 제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맞은 편 마을에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이 사람이 유월절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쓰려나 보다 했을 수 있습니다. 물론 21: 12절의 매매하는 사람들을 볼 때 이 나귀와 나귀새끼가 제물로 사용될 가능성은 낮습니다만, 어쨌든 맞은 편 마을 사람은 유월절이니 필요한 모양이다 하고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주께서 이 일을 위해서 맞은 편 어떤 사람을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이 맞은 편 익명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 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우리의 관심은 그 무명의 예수님의 종을 너무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무명의 예수님의 종은 예수님의 때에 예수님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비한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유월절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26장에 유월절 떡과 잔을 받으시고 그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유월절을 어디서 지낼까 할 때, 18절에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것과 비슷합니다. 건너편 마을로 가서 나귀와 나귀새끼를 가져오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고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준다는 것 뿐입니다. 유월절 명절을 지내는 것도 성 안 아무에게 가서 거기서 하겠다고 하시는 데 여기도 이름없는 어떤 아무게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데 사용된 나귀와 나귀새끼 그리고 유월절을 보낼 집을 마련한 사람은 아무게 또는 무명의 어떤 사람입니다. 이 중요한 예수님의 구원의 일과 관련된 사건에 준비한 사람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칠 때를 상기시킵니다. 창 22:7-8입니다.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할거야. 여기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할 것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로 드린 이 모리아산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고,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 성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처음에 한 일은 성전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쫗으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비둘기 파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만 성전 제사에 쓸 제물을 파는 상인들도 다 내 쫒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제사의 제물로 성전안의 제물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성전의 매매하는 자들을 내 쫒으셨다는 의미를 설교하겠습니다만, 오늘 본문과 관련해 핵심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제물로 유월절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새끼를 가져오라 하시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한 바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멍에 메는 짐승 즉 어디 나귀를 타고 갈 수도 있는데,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즉 멍에 메지 않은 새끼를 타고 간 것은 예수님이 친히 번제할 어린양이 되실 것을 암시합니다. 구약에 멍에 메지 않은 짐승을 제물로 드렸던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멍에 메지 않은 새끼를 타시므로서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실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유월절 떡과 잔을 준비하는 것도 아무게의 집에서 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은 유월절 제물이 자신이 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그것을 준비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했으니 그것을 예수님 자신이 성취할 것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구약의 제사를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심으로 성취하시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일을 친히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맞은 편 마을에서 가져오라고 하실 때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 하면 그가 바로 반응하는데 그것을 “즉시”라는 부사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즉시 보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 무명의 누군가의 순종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교육전도사 때 그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사실 사람중심의 설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 “즉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던 그 때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이제 이삭은 아브라함의 칼에 죽기 직전입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기 직전에 바로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두 번 불렀습니다. 즉시 라는 단어는 없지만 아브라함을 두 번 부른 것은 부름의 긴박성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친히 준비하시는 것이 긴박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기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이 여정의 긴박성, 예수님이 멍에 메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시면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희생제물이 되실 것의 긴박성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 무명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순종을 강조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순종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나귀와 나귀새끼를 가져오라고 한 말의 주도권은 그것을 즉시 준 사람도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가져오도록 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신분이 한 개인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시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탓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분명히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구약 스가랴의 말씀을 순종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나귀 새끼니라”(9:9)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분은 구원을 베풀고 공의를 실현해야 할 왕입니다. 여러분, 공의, 구원하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강력한 힘을 필요로 합니다. 공의를 실현하려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할려면 힘이 필요하고 속박당하는 자들을 구원하려면 그 속박하는 자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 공의와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그것도 왕의 신분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상징적인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예배당 건물이나 인테리어, 그 안의 많은 사람들과 웅장한 사운드의 음악과 여러 프로그램으로 압도되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하고 그 교회를 이끄는 담임목사는 다른 작은 규모의 교회의 담임목사와는 다른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입어 하나님이 더 크게 쓰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아직도 왕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에게 내가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더 강한 어떤 쇼나 장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무리들에게는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11절)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겸손하셨습니다. 이것은 첫사람 아담과 대비되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첫 사람 아담도 왕이라면 왕이었습니다. 단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왕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하나님께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같은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피조물이며 그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큰 은총을 입은 영광의 혜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은총을 잊고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이 되려 했습니다. 온 우주만물의 왕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버리고 반역한 것입니다. 호세아 6:7절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나를 반역”했다고 말씀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알았음에도 어기고 반역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첫사람 아담과 대비되는 창조주이시면 제 2위 되시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담처럼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아담처럼 자신의 위치를 버리고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담을 지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온 우주 만물의 영원한 왕이시며 주이신데도 겸손하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말씀합니다. 스가랴서는 이 겸손은 공의와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심에도 겸손한 왕이시고 그 겸손은 공의와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놉니다. 끼리끼리 놀 수밖에 없습니다. 공통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도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 목사들끼리 대화하고 대형교회는 대형목사들끼리 대화합니다. 그들의 대화 주제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회사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회사의 사장과 대화할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같은 동료 직원과 많은 대화와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신데, 우리와는 다른 궁중에 홀로 계시거나 으리으리한 방탄 차를 타고 그의 궁중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감히 그분과 같이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단들도 보면 교주는 엄청난 저택에서 살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집안에 들어가 교주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혜와 은덕을 누린 것으로 알고 신으로 받들지 않습니까? 지금도 대통령실에 가서 대통령과 대화를 했다면 얼마나 영광으로 알겠습니까?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대통령을 만나고 대화한다면 그리 큰 영광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드문 일이기에 희소성 있는 인물과 만나고 저택에 들어갔다면 자랑거리가 되고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왕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그분께 나가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진정한 우리의 중보자이신데 그것도 우리가 같은 수준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은 나귀새끼를 타실 정도로 우리가 같은 그룹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위치로 겸손하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여 그분께 배울 수 있습니다. 그분께 나가는 자들에게 온유하신 분이시고 겸손하게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3. 하나님과 화평을 주셨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셨지만 강력한 힘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공의와 구원을 행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싸움의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 바로 옛뱀인 사탄과 싸우시는 왕이십니다. 그분이 싸우시는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도 다릅니다. 세상은 강력한 힘은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합니다. 또는 강력한 정치력과 대인관계등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귀새끼를 타고 가시는 것처럼 그러한 힘이 전혀 없으신 분이시고 사람을 결성해서 정치 세력화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손에 무기를 들고 선동하신 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은 분명히 사탄과 싸우셨습니다. 그분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왕이시며 사탄의 머리를 치실 유일한 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또 하나의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스가랴 9: 9-10절을 읽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시는 왕이시지만 그의 힘은 강력합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의 병거와 말등 전쟁하는 모든 무기를 끊으실 뿐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까지 화평을 전할 것입니다. 그의 다스림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나아가 땅끝까지 이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화평을 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이고,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나약한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옛뱀과 싸우시는 방식은 혈과 육의 무기가 아닙니다. 그분은 멍에 메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셨지만, 죄와 사망의 멍에에 매여 있어 참된 왕과 주인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에게 싸움과 전쟁이 있는 그들에게 화평을 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사이에 화평을 전하실 중보자시며, 사람과 사람사이에 화평을 전하실 구주시며, 이스라엘과 이방인간에 화평을 이루실 공의로우신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화평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혈과 육의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왕이시며, 사탄에 매여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왕이시며, 죄에 매여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과 화평을 주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과 모든 이방인까지 화평을 주시는 겸손하신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자신이 대제사장으로서 죽으시며, 겸손한 왕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온 세상에 화평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과 사탄과 죄를 이기는 방식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자신을 비어 종이 되어 죽으시는 것으로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