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을 거의 다 외우다 싶이 보았다. 물론 아파츄 출판사에서 72년에 출간된 (Diane Arbus : An Aperture Monograph)책이 전부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된 연유에는 필자가 사진집을 볼 때 가지고 있는 습관 중 하나가 사진의 배열 순서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일 먼저 표지사진으로 선택된 이유가 궁금하고, 본문에서 사진들간의 위치가, 그 다음 장 페이지의 사진간의 순서 그리고 마지막 사진이다.
책을 보는 독자가 반드시 페이지 순서에 의해서 보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직접 사진집을 만든다고 생각하면서 보면 사진의 선택과 보여지는 순서의 배열은 그리고 편집디자인의 중요성은 단순히 사진의 의미 이상으로 그 작가와 만나게 되는 의미 있는 공간이다.
물론 편집이 반드시 작가의 의견과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권의 책이 완성본으로 나왔을 때 읽혀지는 맛은 사진 한 장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읽기의 즐거움을 준다.
이런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이 작품집의 표지사진을 보면 일란성 쌍둥이 사진이 있다. 바로 이사진 한 장이 이 작품집 전체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정방형의 프레임에 속의 "일란성 쌍둥이 소녀들" 이들은 아마도 그들의 어머니가 입혀 주었을 똑같은 옷과 헤어스타일로 흰 벽면을 배경으로 나란히 정면을 바라다보고 있다.
그들은 쌍둥이 여서 똑같다. 아니 똑같다는 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입고 있는 옷과 헤어스타일도, 촬영 할 때의 포즈도 같다. 그러나 이 사진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속의 소녀들이 서로 닮지 않았다는 점들을 찾아나가다 보면, 다르다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더 강조하다 보면, 결국에는 이들이 입고 있는 옷과 헤어스타일과 포즈만이 같은 것이고 이 소녀들은 서로 각기 다른 존재자들이 된다.
그러니까 이 사진 속에는 마치 쌍둥이는 똑같은 사람이다. 라는 우리의 편견과(쌍둥이로 보이려고 애쓴 흔적만이 보인다는 점이다.) 이들의 어머니는 우리들이 일반적인 통념으로 쌍둥이를 바라보는 시선(닮아 있기 때문에 똑같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스도 이러한 일반 상식이 더 강조되도록 그들의 포즈를 요구했거나, 혹은 아이들은 그렇게 포즈를 취했고 편집자는 이 사진을 표지 사진으로 선택했다. 그런데 왜 하필 쌍둥이 이었을까?
이 작품집의 대부분은 비 정상인들이 찍혀있다. 본문 첫 장 사진은 노부모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인자식으로 시작한다.
실내에서 스냅 촬영된 이 사진은 기묘하다. 정상인이 사용하는 가구들과 방안은 마치 그 거인 자식으로 인해 소인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다음으로 전개되는 사진들은 포츄레이트 형식의 인물사진으로 정면을 응시한 기념사진처럼 보인다.
대부분 한 사람의 개인 인물사진이 주종이지만, 두 사람일 경우는 부부, 연인, 동성애자, 세쌍둥이, 부모와 자식들이다. 그들은 똑같은 옷을 마쳐 입거나(비키니 수용복을 입은 소녀들, 같은 스타일의 양복을 입고 있는 아버지와 어린아들) 닮아있다.
여기서 닮아 있다는 것은 단지 외형뿐만 아니라 그들의 취미나 의식(볼륨 댄스하는 꼬마들, 동성애자) 한 사람일 경우에도 그의 주의에는 그와 관계되는 것들이 놓여 있다.
예를 들면 그의 방이라 생각되는 실내는 그가 쓰는 물건과 가구, 벽장식 등은 충분히 그들 자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타인의 집에 가보면 그 집의 모든 것들이 그를 닮아 있지 아는가! 이들이 하고있는 의복과 헤어스타일, 장신구, 심지어 애완견의 치장까지 자신이 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누드촌의 집안에서 찍은 나체부부의 뒷 배경에는 누드화가 있으며, 가면을 쓴 사람, 온 몸에 문신을 한 남자(문신 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자신에 대한 표현 아닌가)는 자신의 또 다른 나인 것이다.
그런데 인물사진만 찍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아버스가 이 책에는 풍경사진 4점이 수록되어 있다.
벽 전체를 덮고(벽지라고 말할 수 있는)있는 숲속풍경사진, 디즈랜드의 가짜 성, 헐리우드의 영화 세트장 건물, 크리스마스 츄리가 놓여있는 텅빈방 그 중에서 벽지로 된 숲속풍경사진은 앞 페이지에 누드촌의 벌거벗은 연인이 진짜 숲 속에서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처럼 서 있는 장면이 있다.
전혀 연관될 것 같지 않은 인물사진들과 풍경사진은 편집의 의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하다. 즉 동일성과 차이에서 오는 우리의 상식의 틀이 편견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다음페이지에 수록된 가짜 숲 속이 일어버린 낙원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지 않는가 이처럼 철저하게 계산된 편집의도에서 아버스 사진이 가지는 속내는 사실 비정상인의 인물을 통해서 우리의 연민을 끌어내자는 것도, 신기한 사람들의 모습을 엿보는 관음증의 시선도 아니다.
아버스의 사진속 사람들은 일반인이 아닌 이방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우리의 고정관념의 사고이자 편견의 틀이다.
인물사진들 중간 사이사이에 배치된 풍경사진은 하나같이 가짜풍경이며 일반인이 꿈꾸는 낙원이며 이상이지만 사진속 인물들이 처한 환경과 풍경은 우리의 진부한 진짜현실이다.
보고싶지 않은 지겨운 현실의 모습은 비정상인의 환경으로 밀려나고 일반인의 이상적인 풍경은 텅비어 있다. 롤랑바르트의 말에 의하면 리얼의 세계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그 리얼의 세계는 위험한 것이다.
말하고 싶지 않고 보고싶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 진짜 리얼리티의 발현인 것이다. 아버스의 사진들은 이렇게 우리들의 상식적인, 그래서 신뢰할 만한 믿음의 틈을 갈라 비집고 들어와 우리의 가슴을 찌르고 파헤쳐 상처을 남기고 달아나 버린다. 이 작품집의 마지막 장으로 가면 다운증후군 환자들이 가장무도회 장면이 연속적으로 나온다.
국내의 많은 작가들이 이들을 촬영한 것을 보았지만(사실 흔하게 다큐멘타리 소재로 많 이들 찍어댄다.) 이처럼 아름다운 사진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이들의 모습은 환상이다. 아버스도 그렇게 표현했다.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국내작가들이 하나같이 제시하는 모습이란 연민의 정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사회에서 소외된 그들을 알림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내게는 그리 설득력이 없다.
누군가를 연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동등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상인이어서 다행이고 참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함으로서 정상인의 동일한 범주에서 제외된 "차이"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서 그들에게 덮어씌운 틀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불쌍한 존재가 아니다.
정상인의 다수가 만들어 낸 모든 제도와 규범과 환경이 그들을 불쌍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제발 국내의 많은 사진 작가들이여 이제 그만 그들을 내버려둬라, 꼭 찍겠다면 규정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라! 그리고 아버스의 사진을 참조하라! 아버스의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라
그리고 제발 너무 오래 보지 마십시오! 어쩌면 당신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르니까
이제 아버스의 이력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필자는 한 작가의 작품을 감상 할 때는 그 작가의 이력이나 전기를 읽지 말고 볼 것을 권한다. 즉 최소한의 편견으로 그 작품을 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그에 전기를 소개하는 것은 독자 중에는 작가전기를 알지 못하면 매우 불안해함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아버스는 1923년 3월 14일 뉴욕 5번가에서 백화점을 경영하는 부유한 유태가문의 3형제중 둘째로 태어났다. 개성이 강했던 그녀는 Ethical Culture School과 Fieldstone School를 거쳐, 41년 열여덟의 어린나이에 사진가인 앨런 아버스와 결혼했다.
사진계로 들어선 것은 남편의 영향이었다. 이들 부부는 광고에 눈을 돌려 패션사진가로 15년 가까이 <하퍼스 바자 Haper's Bazaar>를 비롯한 일류패션지를 통해서 활동했다.
점차로 패션사진에 싫증을 느낀 그녀는 55년에서 57년까지 리제트 모델에게서 사사 받고부터는 자신의 사진세계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내면의 표현충동에 의한 사진을 찍기로 작정한 그녀는 어려서부터 관심을 가져온 비정상적인 기인들의 세계로 뛰어든다. 62년 서른아홉이 되던 해에 강렬한 개성 때문에 마찰이 잦았던 남편과 이혼한다.
63년,66년에는 구겐하임의 예술기금을 받게 되었고, 65년에서 66년까지 Parson's Design School에서, 68년에서 69년까지는 Cooper Union School에서 사진을 강의한다. 거의 10년 동안 비정상적인 인간에 대한 집중적인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한 다이안 아버스는 71년 7월 28일 스스로 동맥을 끊고 자살하였다.
그녀의 작품활동은 많은 사진가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었으나 전람회에 선보인 것은 단체전으로 세번밖에 없었다. 72년 11월 뉴욕 현대미술관은 125점의 작품을 모아 추모전을 열었는데 석달간 25만명이라는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이것은 <인간가족전>을 웃도는 숫자였으며 캐나다, 서유럽,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에 순회 전시되어 세계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사진은 그녀가 죽기 전인 67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기획한 리 프리들랜더, 개리 위노그랜드와의 3인 합동전인 전에서 이미 크게 평가받은 바 있고, 사후에도 72년 미국 사진가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 출품되어 크게 호평을 받았다.
그녀의 사진형식은 주인공들을 정면을 바라보게 하고 화면이 중앙에 배치해서 좌우 대칭적인 구성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면(정공법)화면구성은 시간의 정지효과를 통해 현실의 시간이 영원한 시간으로 환원되는 효과를 말하는데, 동작의 리듬을 의도적으로 멈추게 해서 주인공들이 대면하고 있는 관객스스로가 영원한 현재의 시간에 서있게 한다.
사진마다 동일한 자세로 유형화하고 있는 인간은 아우구스 잔더( August Sander )의 작업을 연상케 한다.
그녀가 피사체를 어두운 곳에서 촬영한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정면에서 피사체를 고립시킬 수 있는 플래쉬 조명에 의해 배경과의 극명한 분리를 강조한다.
아마도 그녀는 뉴욕의술집안의 사람들과 거리 광경을 촬영하였던 위지를 본따 이러한 플래쉬 촬영 기술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사용한 플래쉬는 매츠65타입이었다. 그래서 항상 뒷그림자는 좌측편에 있다.
그녀의 인물들은 서구의 시각 문화와 문학에서 “악마의” 혹은 “금기된” 주제(기이한 것들)에 대한 시각을 얻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미국 대중 문화에서 기형과 기인들은 거의 항상 동정 혹은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으며, 이들은 서커스나 축제와 같은 환경에서 오락적 가치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에 주요 포토저널리즘에서 상당히 유행하였다. 아버스도 잡지들을 위해 이러한 "기인" 포토에세이를 촬영한 바 있다.
대중잡지에서 다른 작가들이 촬영한 모델의 기이하거나 괴상한 사람들의 사진들은 잔인하고,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과 같았지만, 그녀가 촬영한 대부분의 피사체들은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인" 포토에세이의 이상한 사람들과 같이 불쌍하거나 구미에 맞아 보이지도 않는다.
보통 뚱뚱하고, 종종 어리석어 보이는 모델의 피사체들은 마치 동상처럼 그녀의 사진 속에 단순히 존재한다. 이들의 대부분을 강한 자연광에서 촬영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주름살, 반점, 살이 접힌 부분등이 뚜렷이 강조하여 이러한 특징이 만들어졌다.
아버스는 전시했던 기이한 주제들의 몇몇 사진들에서 이와 동일한 생기없는 동상과 같은 특징을 어느 정도 만들어 내었다.
그녀의 기이한 인물들의 클로즈업 사진을 촬영할 때에도 워커 에반스의 "다큐멘터리 형식"을 사용하였으며, 에반스나 FSA 사진가들이 한것처럼 거리나 실내 환경을 포함시키기 위해 촬영하였다.
다이앤의 첫 번째 책인 'An Aperture Monograph"에 실린 글에는 왜 그녀가 기형인의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기형사진이야말로 내가 가장 많이 찍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대상중의 하나로서 내게는 지독히 흥분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숭배하곤 했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중 몇몇을 좋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들은 수취심과 경외심을 합쳐놓은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수수께끼에 답을 요구하는 동화 속의 인물처럼 기형인들에 대해서 특징적인 전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당한 뒤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된다.
기형인들은 이미 이러한 인생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삶을 초월한 고귀한 사람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