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지역의 고대문명
5. 튀르키예(Türkiye)의 고고학(考古學) 명소들<1>
튀르키예 각 지역 / 카파도키아 바위 동굴 / 하늘을 나르는 니케(Nike) 여신(Efes-에베소)
튀르키예는 우리가 지금까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으로 불렀는데 일명 토이기(土耳其)라고도 불렀다.
위치는 아시아의 서쪽 끝으로 유럽에도 국토 일부(이스탄불)가 속해있는 나라이며 수도는 앙카라(Ankara)이다.
튀르키예(Türkiye)는 위 지도의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을 건너면 유럽대륙인데 유럽 지역에 튀르키예의 대도시인 이스탄불(Istanbul)이 있는데 예전에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이 이스탄불은 BC 8세기, 그리스(Greece)인들이 비잔티움(Byzantium)제국을 세우고 수도로 정하였던 곳이며 AD 4세기에는 로마(Rome)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1세가 동로마제국의 수도(首都)로 삼았던 도시이다.
이스탄불(Istanbul)은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이며 인구가 1,500만이 넘는 대도시이다.
이곳은 다시 AD 15세기, 투르크(Turk)족이 세운 오스만(Osman)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가 1923년에 터키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를 앙카라(Ankara)로 옮기고 도시 이름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Istanbul)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스탄불은 위치상 흑해(黑海:Black Sea) 입구 삼각형 모양의 반도(半島) 요충지에 있으며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동양과 서양을 잇는 통로로 옛 실크로드(Silk Road)의 종착지이기도 하였다.
튀르키예(터키)는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페르시아(Persia), 아랍(Arab), 비잔틴(Byzantine), 오스만(Osman) 및 서유럽 문명 등 다양한 문화가 꽃피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중심부는 광활한 아나톨리아(Anatolia) 고원이 펼쳐져있는데 이곳의 역사를 잠시 되짚어 살펴본다.
BC 7,000년 이전에 정착민들이 자리 잡았던 이곳은 BC 1,900년경에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히타이트(Hittite)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이집트(Egypt)의 왕 파라오(Pharaoh-람세스 2세)와 전쟁(Qadesh 전쟁 등)도 자주 있었다. 이후, 페르시아(Persia) 제국이 BC 6세기에 이 지역을 차지하여 찬란한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BC 1세기경에 로마(Rome)제국이 차지하게 되는데,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 대제(大帝)가 수도로 삼고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라 하였으며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3~14세기 들어 오스만(Osman) 제국이 자리를 잡고.... 이후 다시 튀르키예 공화국이 들어서는데 1, 2차 세계대전의 시련을 겪은 후 1952년에는 NATO에 가입하고 1950년 6·25전쟁에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한국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튀르키예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혈맹(血盟)이다.
튀르키예의 근대화를 이끈 선구자는 튀르키예 공화국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로 일명 케말 파샤(Kemal Pasha),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이라고도 부르는데 아타튀르크(Atatürk)의 의미는 ‘투르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괴레메(Göreme) 국립공원>
관광도시 괴뢰메 / 카파도키아 바위산 / 관광객을 태운 벌룬(열기구 관광)
튀르키예(Türkiye)는 전 국토의 1/4이 삼림(森林)지대로, 현재에도 거의 개발되지 않고 있는 곳이며 그 일부가 카파도키아(Cappadocia)이다. 괴레메(Göreme)는 카파도키아 지역을 관광할 때 관문(關門) 도시로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Ankara)에서 보면 남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이다.
카파도키아는 암굴(暗窟) 도시로 알려졌는데 흡사 깔때기를 엎어 놓은 모양의 수백만 개 기암괴석들이 갖가지 형태로 계곡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고 아직 공개되지 않은 30여 개의 지하도시도 있다고 한다.
땅 위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기기묘묘하여 사람들로부터 ‘요정(妖精)의 굴뚝’이라 불린다.
이곳은 화산폭발(火山爆發)에 의한 화산재와 용암(鎔巖) 등이 오랜 세월을 거쳐 바람, 비, 눈, 강물, 호수의 물 등에 의해 침식되고, 지진도 겪으면서 기암괴석들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기암(奇巖)들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도시를 만들었는데 미로처럼 얽힌 곳이 많아 로마 시대 후기에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 교인(敎人)들이 숨어 살았던 곳이었다고 한다.
발견된 지하 교회만도 천 개 정도로 추정된다니 최대 200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숨어 살았던 지하도시라고 추정되며, 그들의 신앙심에 대한 경이(驚異)와 존경(尊敬)으로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진다.
이곳은 워낙 넓고 기암괴석이 얽혀있는 구릉지대(丘陵地帶)다 보니 어떤 이들은 마치 ‘화성에 온 것 같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터키 정부에서는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열기구(Balloon)를 띄워 관광을 하는 방안을 고안해 냈는데 대 히트 쳤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으로 이곳을 선택하기도 한다는데 이곳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 지정되었다.
<핫투사(Hattusa) 유적>
히타이트 성곽(城郭) 유적 1,2 /람세스 2세 전투장면 / 람세스 2세 조상(런던박물관)
핫투사(Hattusa)는 세계 최초로 철기문명(鐵器文明)을 이룩한 것으로 알려진 히타이트(Hittite) 제국 초기의 수도(首都)였던 유적지인데 당시 히타이트는 어머 어마한 면적의 강대국이었고 이곳에는 지금도 점토판 문서 등을 비롯하여, 당시 히타이트족의 유적(遺蹟)과 문명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의 파라오(Pharaoh-황제) 람세스 2세(Ramesses II)와 히타이트의 왕 무와탈리 2세(mNIR.GÁL II)의 군대가 맞서게 된 것은 두 나라의 국경지대인 카데시(Qadesh)였는데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꼽을만한 대규모 전투였다고 한다.
히타이트(Hittite)군은 대략 보병(步兵) 4만 명과 전차(戰車) 3,700여 대, 용병(傭兵) 1만 1천여 명이었고 이집트군은 보병(步兵) 1만 6천 명과 전차(戰車) 2천여 대, 용병(傭兵) 4천 명으로 이루어졌다고 추측한다니 히타이트군 병력이 2배 이상 많았던 전투였다. 전쟁의 결과는 서로 군사를 퇴각시키고 전투를 마쳤는데 이집트령이던 우피(Upa-현 시리아의 수도 Damascus)지역을 히타이트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 후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의 카데시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을 들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는 항의 서한을 보냈고.... 이 서한들이 현재 이집트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