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성은 물리학에 중점을 둔다.
핍진성은 작품 그 세계의 물리학에 중점을 둔다. 생생함, 박진감, 세부묘사를 통해 확보됨. '작품 세계, 배경, 설정에서 나올 수 있는 관계인가
개연성은 작품 그 세계의 인물들과 규칙 등, 인과관계에 중점을 둔다. '이야기 속 인과관계의 올바른 정도'를 의미
핍진성과 개연성
핍진성
[ Verisimilitude ]
핍진성이란 용어의 원래 의미는 외견상 사실적이거나 진실해 보이는 정도나 질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이야기에 대해 요구했던 '그럴듯함', 혹은 '있음직함'이라는 개념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용어인데, 이것이 주요한 문학용어로 등장하게 된 것은 구조주의 문학이론가들에 이르러서다.
어떤 사건들의 연쇄, 혹은 그것을 통해 꾸며진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일련의 사건을 일관된 전체에 맞추면서 텍스트의 틈새를 채워 넣은 독자들의 능력에 의존하는데, 조나단 컬러는 이를 소쉬르 용어를 빌어와 서사적 능력(narrative competence)이라고 정의한다.
말하자면 어떤 관련 상황을 택하거나 구축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이 핍진성이란 환상은 비단 독자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관습에 의존하는 문화적 현상이다.
한 사회에서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른 사회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거나 해석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같은 사회라 할지라도 시기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상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구조주의자들은 이 핍진성이라는 것을, 해당 작품보다 선행했던, 한 사회 내의 적합한 행동의 텍스트들에 의해서 누적적으로 확립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박진감 혹은 생생함이라는 용어로도 불려지는 이 핍진성은, 현실반영의 원리를 금과옥조처럼 견지하는 리얼리즘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나 문학성을 기법과 동일시하는 러시아형식주의자들에게서는 그리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형식주의 이론가인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는 문학작품이 어떤 외적 현실을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대상을 생소화(예술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미적 기능에 부수적인 효과의 하나로 간주하고 이를 동기부여(motivation)라고 부른다.
이 견해에 따르면 동기부여가 되어 있는 핍진성 있는 작품은 예술적인 생소화라는 미적 변용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높은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김경수)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1.30, 국학자료원)
핍진성
[ Verisimilitude ]
제라르 주네트의 용어인 vraisemblance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박진감이라는 말로도 번역된다.
이 용어는 문학에서 실제적인 것보다는 그럴듯함(plausibility)에 호소하는 오랜 전통, 혹은 서사물들에 사실적인 신빙성을 부여하는 오랜 관습과 관련되어 있는데, 관습(convention)이나 자연화(naturalization)에 관한 논의와 더불어, 이 용어의 개념은 주네트, 조너선 컬러 등의 구조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바 있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에게 문학에 있어서의 핍진성과 자연화는 동일한 맥락을 지니는 개념이다. 자연화의 개념은 서사물의 생산이나 수용이 이루어지는 관습적 토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서, 서사적 관습을 자연화한다는 것은 곧 그것이 지닌 관습적 성격 자체가 의식되지 않은 채로 서사물의 생산자나 수용자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서사물을 인위적으로 가능한 것, 혹은 있을 법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특정한 문화적 관습을 자연화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떤 서사적 허구가 그 생산자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질지라도 그 자연스러움 혹은 그럴듯함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엄격한 문화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어떤 서사물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관습의 토대는 사회에 따라, 또 같은 사회 내에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서사적 허구에 사실적인 개연성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수용하는 관습화된 이해의 수준을 충족시키는 핍진성의 주요한 소설적 장치로는 동기 부여(motivation)나 세부 묘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현대 소설에서 세부 묘사는, 주인공에 대한 정보의 제공 및 플롯의 전개에 필요한 것 이외에는 세부 묘사를 기피하거나 간단한 요약적 설명으로 대신했던 이전의 소설들에 비해, 이야기의 전개에 불요불급한 나날의 삶의 무의미하고 비본질적인 세부들을 포함함으로써 이야기에 보다 사실적인 실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주의적인 동기 부여나 비본질적인 세부 묘사는 서사물에 신빙성을 부여하는 관습들 가운데 단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주의 시학》에서 컬러는 핍진성을 이루는 관습적 요소들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놓고 있다.
그 첫째는 허구를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조건으로서, ‘현실적인 것’ 그 자체, 즉 삶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취해진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이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생각하고 상상하고 기억하고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이 자연화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 범주는 문화적 핍진성으로서, 컬러는 그것을 ‘상투화된 문화적 관습이나 지식들…… 첫 번째 유형과 같이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지는 못하지만 문화적 관습에 의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영역’으로 정의한다. 문화적 핍진성은 한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습, 혹은 인과적인 필연성을 갖춘 행위나 지식을 이루는 것으로서, 작가는 그에 대해 다만 한두 마디 언급하는 것으로도 독자에게 작품의 사실적인 실감을 전달해주는 핍진성의 효과에 이를 수 있다.
세 번째 범주는 문학적 관습들과 관련된 것이다. 이를테면 사실주의적 서사물의 경우 그것이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독자가 그러한 서사 유형에 관습적으로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작가가 작품 속에서 이야기가 허구라는 것을 밝힌다고 해도 그 때문에 작품의 핍진성이 손상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문학의 핍진성은 그 이야기가 허구인가 아닌가라는 명시적인 확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자연화해서 우리에게 믿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습화된 문화적 장치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단계는 작가가 어떤 서사물에서 사용되는 장치들의 인위성을 드러냄으로써 관습으로부터의 이탈을 통해 진정성에 이르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자연화의 전형적인 과정은 서사물의 규범적인 장치들을 거스르는 형태로 이루어지거나(여러분은 다음에 X라는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한 일은 단지 책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라는 식의), 혹은 인물 묘사 등을 통해서 어떤 사건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효과는 문학적 관습들에 대한 패러디이다. 작가는 기존의 문학적 관습들을 폭로함으로써 개인 혹은 집단의 행위를 지배하는 관습화된 규약이나 믿음들을 의심스럽게 보이게 한다. 그러나 핍진성의 관습적 토대를 풍자하거나 무너뜨리려는 이러한 문학적 행위 역시 또 다른 관습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적 행위는 어떤 삶이나 문학이 의미 있는 것은, 다만 그것이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동안일 뿐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따라서 삶과 문학에 있어서의 선택의 영역은 관습과 관습 밖의 진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습과 관습 사이에 있는 것이다.
핍진성 [Verisimilitude] (소설학 사전, 1999.2.25, 문예출판사)
개연성
[ 蓋然性 , Probability ]
사건이 현실화될 수 있는 확실성의 정도 또는 가능성의 정도.
허구적인 작품의 어떤 내용이 실제로 있다는 충분한 근거는 없지만, 현실화될 수 있거나 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사용하였다.
흔히 허구는 거짓을 뜻하지만, 문학에서 허구는 개연성을 띤 허구, 곧 현실성이나 진실성을 띤 허구로 간주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허구의 이러한 성격을 두고, 그것이 역사적 사실보다 더 철학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허구가 개연성을 통해 보편성에 접근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연성이 문제시되는 것은 특히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이다. 제라르 쥬네트, 츠베탕 토도로프, 조나단 컬러 등 구조주의 이론가들은 개연성의 문제를 핍진성(逼眞性, verismilitude)이나 그럴듯함(vraisemblance, plausibility)과 관계지어 논한 바 있다.
이들은 소설이란 허구의 산물이므로, 그 허구를 독자들이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신뢰감과 설득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렇게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 중 대표적인 문학적 장치들을 인과 관계에 의한 연결(필연성), 복선에 의한 암시 등으로 보았다.
한편 조나단 컬러는 허구가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요소를 다음과 같이 든다.
첫째, 너무도 자명한 현실 또는 삶 자체의 물리적 조건들,
둘째, 보편적인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문화적 관습이나 인과적 행위와 지식들,
셋째, 독자가 사실을 제시하는 것으로 흔히 간주하는 명시적인 문학적 관습들,
넷째, 그러한 명시적인 문학적 관습에 의존하지 않고 이탈함으로써 도리어 그 작품에서 말해진 바를 더욱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 등이다.
여기서 네 번째 요소는 문학이 관습에서 출발하면서도 그 관습을 벗어날 때 더욱 진정성을 가지게 되는 것임을 뜻하는데, 컬러는 이것 또한 문학의 중요한(암시적인) 관습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이 개연성이라는 말은 역사와 문학을 구별하는 용어로 쓰기도 한다. 역사가 이미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기술하는 것에 비하여 문학은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음직한 사건을 서술한다는 것이다.
개연성 [蓋然性, Probability]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1.30, 국학자료원)
https://naver.me/59ALrk0y
핍진성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은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을 때 객관적인 관측자가 진실에 가깝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이르는 형이상학적 성질로, 주로 철학과 문학에서 사용된다. 문학적 핍진성은 '문학 작품에서, 텍스트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다고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정도'를 의미한다.
2. 정의
핍진성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아래 핍진성의 정의는 대부분 문학에서의 핍진성을 가리킨다. 칼 포퍼를 필두로 한 철학자들이 구획 문제 논의 등에서 사용하는, 철학적 핍진성(truthlikeness)은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문서(영어)를 참조.
핍진성은 극적인, 또는 극적이지 않은 픽션 속 현실의 외형으로, 묘사되는 행동이 독자 스스로의 경험 또는 지식에 비추어 수용할 만 하거나 설득력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는, 사이언스 픽션이나 초자연적 설화 등을 제공함에 있어, 독자가 기꺼이 의심을 멈추고 이야기의 틀 안에서 있을 수 없는 행동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진실되어 보이거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질.
그녀는 이야기에 핍진성을 부여하기 위해 책 속에 사진들을 끼워넣었다.
또한, 이에 대응하는 한국어 사전에서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 #
핍진-하다2(逼眞하다) 형용사
1. 실물과 아주 비슷하다.
대저 진상(眞像)을 그림에 있어 핍진하게 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가령 대면해서 모사(模寫)한 칠분의 진본(眞本)이라 할지라도 털 하나 머리카락 하나가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기는 어려운 것인데….
<<번역 정조실록>>
2. 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
그리고 심유(沈攸)의 소(疏)가 묘사한 것이 너무나 핍진하여, '심극전(沈極傳)'이라고 하였다.
<<번역 숙종실록>>
고려대학교 한국어대사전의 정의
핍진성(逼眞性) 명사
(형태: ±逼眞-性)
1. 문학 작품에서, 텍스트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다고 독자에게 납득 시키는 정도.
소설을 이해하거나 평가하는 데 있어 핍진성이나 리얼리티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핍진-하다2(逼眞--) 형용사
(활용형: <불규칙 활용> 핍진하여 핍진해 핍진하니 / 형태: ±逼眞-하_다)
1. (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
그 작가의 필치는 생동하고 표현은 핍진하다.
그는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는지 핍진하게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무엇이) 실물과 아주 비슷하다.
3. 어형과 역사[편집]
원어 'verisimilitude'는 신고전주의에서 '현실성', '도덕성', '일반성'의 부속 개념으로, '정말인 것 같음', '진짜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용어로서의 'verisimilitude'는 17세기 영국에서 라틴어 verisimilitudo(truth-like)의 변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는 이 용어를 'truthlikeness(진실성)'나 'fidelity(충실도)'로 풀어 쓰기도 한다. 한국어에서는 영미권 해석인 'truthlikeness'를 번역하여 현실성(現實性), 진실성(眞實性)의 유의어로 설명한다.
국립국어원은 'verisimilitude'의 번역으로 '핍진성', '정말 같음'을 제시했는데, 용어의 한자 뜻을 풀이해 보면 逼(핍박할 핍), 眞(참 진), 性(성품 성)으로 '진실에 가까운 정도'가 된다. 다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상기 정의처럼 '핍진-'은 '핍진하다'의 어근으로서만 제시하고 있고 '핍진성'을 단독 명사로 등재하지는 않았다.
이 '핍진성'이라는 어휘는 이전부터 문학계에서 쓰여 왔던 '핍진하다'라는 말로부터 유래했다. 이러한 어휘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20년대 내외로 추정되며 ("1921년 '핍진한 회화'의 예", 조선일보), 일제강점기의 문학 비평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
오늘날 '핍진하다', '핍진성'이라는 말은 일상 회화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용어지만,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자주 쓰인다.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단어는 아니므로 비평문, 특히 대중문화 비평문에서 핍진성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면 비평문에 익숙치 않은 대중들에게 자칫 현학적으로 보여 독자들과의 거리감이 생길 수도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4. 유사 개념과 비교
4.1. 개연성과의 차이
개연성과는 다르다. 개연성은 '이야기 속 인과관계의 올바른 정도'를 의미하지만, 핍진성은 '작품 세계, 배경, 설정에서 나올 수 있는 관계인가'를 의미한다.
개연성의 예시
그 사람이 나의 친구를 죽였다. → 오랜 세월 끝에 복수에 성공했다.
마왕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당이다. → 용사는 미련없이 그를 죽였다.
친구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았음에도 고백했다. → 세 사람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핍진성의 예시
봉건 군주 앞에서는 경칭을 사용하며, 자세를 낮춘 상태로 대화한다. → 왕 앞에서 반말을 했으니 불경한 일이다. (현실성, 핍진성 둘 다 있음)
반란은 중범죄로, 도모하기 위해선 큰 결단이 필요하다. → 반란을 모의하다 잡힌 사람은 큰 처벌을 받는다. (현실성, 핍진성 둘 다 있음)
신체 자체가 어지간한 흉기에도 사람이 쉽게 죽지 않으며, 부상을 입어도 회복이 쉬운 세계이다. →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서 사망한다. (현실성은 있지만 핍진성은 없음)[2]
엘프는 자연을 사랑하며 폭력을 싫어한다. → 인간이 숲을 파괴한 행위에 엘프들은 분노할 것이다. (현실성은 없지만 핍진성은 있음)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죽는다. → 이름이 알려지면 살해당할 수 있다. (현실성은 없지만 핍진성은 있음)
어지간한 흉기에도 사람이 쉽게 죽지 않으며, 부상을 입어도 회복이 쉬운 세계이다. → 근거리에서 초대형 폭탄이 터져도 죽지 않을 수 있다. (현실성은 없지만 핍진성은 있음)
초공간에 진입해 광속을 넘는 속도로 이동이 가능하다. 유의미한 물리적인 피해를 줄 수 없다. → 이를 이용해서 함선을 파괴하는 자폭 돌격을 감행한다. (현실성이 없으며 핍진성도 없음)[3][4]
핍진성이 떨어지는 작품은 읽다가 개연성과는 다른 의미로[5] "뭐야 이게 말이 돼?"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작가가 자신이 만든 작품 속 세계의 규칙이나 법칙을 어긴다면 핍진성을 상실한 것이다. 보통 작가가 자신이 세운 세계의 규칙을 간과, 혹은 까먹었거나 미리 생각해둔 줄거리가 자신이 앞서 만들어온 세계의 규칙을 어기게 될 때 수정하지 않고 앞서 만들어온 수많은 이야기들과 엮여 있는 세계의 규칙을 뒤늦게 수정할 수는 없으니까 어거지로 이야기를 끼워넣어 서사를 이어가면 이런 일이 발생하며, 일반적으로 설정오류 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현상은 이런 핍진성 부족을 의미한다.
핍진성은 해당 사건과 연관성이 있는 사실적인 작품 내 바탕(=배경설정)이고 개연성은 해당 사건과 연관성이 있는 작품 내 과거 사건(=전개)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쉽게 말해 그 작품 속의 인물이 그 작품에서의 발생하는 상황들을 봤거나 들었을 때 사실적이라고 생각되면 그 이야기는 핍진성을 지킨 것이고 아니라면 핍진성을 어긴 것이다.
4.1.1.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핍진성은 확보한 개별 예
고전 문학에는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핍진성이 좋은 사례가 많다. 대표적으로 그리스·로마 시대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전개의 연극을 들 수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연극에서 이야기 마무리에 모든 사건과 갈등이 신의 등장으로 한방에 다 해결되는 스토리 전개를 일컫는데, 이는 분명 개연성을 심각하게 해친 부분이다. 하지만 당대 연극은 대부분 신화의 신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신탁, 계시, 예언 등의 방법으로 작품 초반부터 신에게 물음을 구하고 애초에 이야기 자체가 신이 내린 과업이나 신들 자체가 등장인물이 되는 일이 많았다. 신들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인간의 갈등 구조 따위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존재들이며 관객들 또한 이에 충분히 공감했다. 따라서 핍진성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셈이다.
이러한 양상은 현대에도 성경과 같은 종교 문헌을 읽는 독자들에게서 유사하게 발견할 수 있다. 신자로서 성경을 읽는 이들은 기적과 같이 개연성을 어기는 현상이 일어나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며, 신이라는 인물이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음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기적들을 통해 신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 역시 성경 독서의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들 수 있다. 먹을 게 없다는 난관을 그냥 음식을 복사해서 해결한다는, 다소 개연성 떨어지는 전개로 끝내는데 의문을 표하는 독자는 없다. 오히려 그게 신의 권능이고 기적이라고 받아들인다.
중국의 대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연의 역시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핍진성이 좋은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작부터 유비, 관우, 장비가 만나 도원결의를 맺고 의기투합하는 모습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뜬금없게 보일 정도로 개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황건적이 날뛰고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운 시대상, 나라를 걱정하는 세 젊은이의 등장,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는 충의(忠義) 정신의 부각이 '이런 사람들이 나올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함으로써 좋은 핍진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고전 문학들은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결말에서 알 수 있듯 대체로 스테레오타입적이며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흘러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인물들 사이에 개성이 떨어질 경우 오히려 지루한 전개와 뻔한 결말만 보기 쉬워진다는 단점이 있다.
4.2. 사실성과의 차이
그래서, (나의) 우주에는 소리가 있다. 이제 와서 아무 소리도 없이 날아다니는 우주선을 만들 수 없는 것은 내가 그런 우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이미 내 은하의 규칙 중 하나로 굳어졌고, 나는 그 규칙과 함께 살아야 한다.
조지 루카스, '왜 스타워즈 시리즈의 우주에서는 소리가 있냐?'는 질문에 대해
핍진성은 '작품 안에서 설정된 세계'를 근거로 현실적인 정도를 판단하기 때문에 사실성과 구별된다. 사실성은 작품 속 세계가 현실 세계의 모습을 반영하지 못하면 사실적이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지만 핍진성은 작가가 설정을 그렇게 짰다면 현실의 세계는 어떻든 관계가 없다. 오직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작품 속 세계에 맞게 살아가는지만이 중요하다.
만약 이종족과 마법과 주술이 난무하는 판타지 소설이라면 판타지는 원래 허구이기 때문에 사실성을 따질 수가 없다. 하지만 허구성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설정이 정교하게 짜여있고 작중 사회와 등장인물들이 서로 적절히 어우러져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라면 핍진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인기 만화인 헌터×헌터에서 작중 등장하는 국가나 집단, 넨 등의 능력은 완전한 허구지만 그 안에 국가체제, 인터넷 등 통신 인프라, 국가간 대립구조, 협회 규정 등이 나름의 합리성이 있기 때문에 독자는 허구성을 쉽게 느끼지 못한다. 혹은 마찬가지로 중세 판타지인 왕좌의 게임이나 이 분야 끝판왕 반지의 제왕 또한 사실성은 떨어진다 할 수 있겠지만 핍진성과 이야기 연출력은 굉장히 정교하다고 평가받는다.
단, 어떤 작품이 명백한 현실에 기반한 작품, 예컨대 역사 소설이나 사극[6] 혹은 현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라면 핍진성과 사실성은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작품에서 설정해둔 세계가 곧 현실의 사람들이 만든 세계이므로, 핍진성을 따지는 것이 곧 사실성을 따지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배경의 작품이라 해도 사실성이 바로 핍진성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핍진성은 어디까지나 작품 향유자가 느끼는 사실감이며, 이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인식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그 사실이 물리적으로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인지의 여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추신구라를 보면 중세 일본에서는 칼싸움이 벌어지면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까지 할복하는 게 일반 통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맞춰 창작물에서도 그런 전개를 넣으면 그 사실을 모르는 현대인으로서는 '무슨 저런 말도 안 되는 세계가 있냐'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설령 현실의 일이라 해도 독자가 핍진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충실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현실과 다른 관념을 지닌 세계를 그리는 작품에서는 독자들이 그런 세계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초반부에 그런 규칙을 활용한 상황들을 제시해주곤 한다.
여기에 더해서 사람은 사실성과 개연성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혀 개연성 없는 일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현실이 오히려 사실성이 없게 느껴지는 것 역시 낯설지 않은 현상이다.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 자신의 문명권을 구한 전쟁영웅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죽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런 일은 개연성 없이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창작물은 현실이 그렇게 개연성이 없다 해도 창작물로서 최소한의 개연성은 확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창작물의 확률적 요소, 즉 운이란 작가가 설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7] 개연성 없이 확률적으로 전개한단 건 사실상 작가 맘대로 전개해놓고 운이 좋아서 그랬다고 우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핍진성 역시 창작물에 적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개연성은 있어야지만 그것을 현실감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즉, 핍진성이란 사실성과 동시에 개연성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야지만 느낄 수 있는 개념인 것이다. 괜히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8] 소설은 어느 정도는 개연성이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연성이 없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실화를 그대로 묘사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벙찌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실화 배경 작품들도 우연한 사건들을 두고 앞으로 일어날 일의 징조였다느니 하는 (현실적이진 않고 오로지 창작물 상의 개연성만을 위한) 복선을 넣어 개연성을 보강할 때가 많다.[9]
5.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오크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집요정의 예[편집]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세계에 등장하는 오크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세계에 등장하는 집요정, 두 종족을 비교해보자. 오크는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말마따나 힘과 명예를 중시하고 다른 종족으로부터의 지배를 거부하는 반면 집요정은 남에게 복종하고 봉사하는 것을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종족이다. 이러한 뒷설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난다면 워크래프트의 오크가 다른 종족의 지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이야기나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주겠다는 인간들의 권유를 오히려 거부하는 집요정들의 행보가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똑같이 허구의 존재들이고 서로 상반된 전개임에도 독자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핍진성이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워크래프트의 스랄처럼 오크 하나가 탄압받는 동족들을 구하기 위해 반란을 도모하는 이야기로 간다고 해보자. 워크래프트의 지식이 없더라도 반란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범죄이며 매우 큰 소동이 될 것이라는 걸 독자들은 예상이 가능하다. 이처럼 작품 내 명시된 설정이 없을 때 독자는 현실의 핍진성을 작품 내 세계에 대입시키게 된다. 즉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냥 안 넘어가겠구나'하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가 붙잡혀 처형된다거나 스랄처럼 반란에 성공한다거나 하는 전개가 찾아오면 독자는 이를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된다. 반란을 일으킨 중죄인이 처형되거나 반란에 성공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개연성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무런 사전 설명이 없었는데 집요정 캐릭터 하나가 등장하여 탄압받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반란을 도모하는 전개가 등장한다면 독자는 위화감을 받게 된다. 이는 개연성을 해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새로운 전개'의 등장은 명제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A라는 원인이 있으니 B라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 부분의 'A'에 해당되는 부분이 처음 언급됐을 뿐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분명 설정상 집요정 종족은 남에게 복종하고 봉사하는 것을 즐기는 종족인데, 반란을 일으키는 전개는 어색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핍진성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이를 자연스럽게 바꾸기 위해서는 작가가 핍진성을 보충해주어야 한다. 즉 집요정의 예를 다시 들자면, 집요정 도비가 그렇게 자기 종족의 본성과는 다른 행동을 한 데에는 루시우스 말포이라는 요인이 필요하며, 도비가 특이한 건지 종족 전체가 생각이 바뀐 건지 등 보충 설정으로 핍진성을 보충해야 한다.
6. 차용을 통한 핍진성 보충[편집]
핍진성 보충을 위해 실제 현실이나 다른 유명한 작품을 끌어오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영화, 게임, 소설, 만화 등 많은 창작품들이 나오지만 보다 보면 어디선가 봤을 법한 설정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마따나 쓰다 보니 우연히 겹쳐진 것도 있지만 이미 존재하는 작품의 설정을 차용함으로써 핍진성을 세우는 데 소모되는 자원을 줄이려는 것이다.
한편 각 분야에서 소위 '대작'을 넘어 '바이블'로 취급받는 작품들은 이러한 핍진성을 밑바닥부터 세운 경우가 많으며, 더 나아가 다른 작품에까지 영향을 주곤 한다.
6.1. 현실 개념 차용
현실의 개념을 가져오는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제국', '황제' 같은 단어를 쓰거나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프로토스 종족의 직책에 '집정관', '법무관' 같이 로마 제국 시대의 단어를 주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배경이 우주인 SF 장르이고 외계 종족의 직책은 창작자가 어떻게 설정하든 자유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개념을 넣어줌으로써 독자들은 현실의 그 개념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게 된다. 프로토스는 초능력과 오버 테크놀러지가 난무하는 외계 종족임에도 플레이어는 고결함, 싸움에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 등 고대 로마의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스타워즈 또한 마찬가지로 은하계를 배경으로 하는 서사물에 전근대시기에나 존재했던 황제와 제국이라는 단어를 넣었음에도 관객들은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제국이란 단어가 주는 위압감과 지배욕, 무력 등을 자연스레 연상하게 된다.
반대로 스타워즈 시리즈의 '은하 제국'이 다른건 모두 같지만 이름만 '은하 깐따삐야'였다고 해보자. 창작물의 명칭은 창작자가 어떻게 설정하든 자유지만 이렇게 해버리면 독자들은 현실의 배경지식에서 오는 이미지와 심상을 얻을 수 없게 된다. 이를 구축하기 위해선 '은하 깐따삐야'라는 국가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고 왜 현실의 '제국'과 같은 분위기를 보이는지를 따로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순수 100% 밑바닥부터 가상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의 핍진성을 끌어올리려 하다 보면 많은 분량과 역량이 필요하다. 이는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묘사할 결과물이 결국에 공화국, 제국처럼 현실에 있는 것이라면 현실의 배경지식을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크지 않다.
이러한 실제의 개념이 차용된 세계는 엄밀히 말하자면 실재할 가능성은 낮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세계와 전혀 연관이 없는 세계가 만약 실재한다면 '제국(Empire)'이라는 표현을 쓸 리도 없고, 국가 체계도 실제 세계와 비슷할 순 있어도 완전히 같을 리야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물에서 가상 세계를 만드는 것은 완벽히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데에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이입을 시키는 데에 주안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점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톨킨이 기존 언어/문화 표현을 활용하는 방법을 쓰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 것은 앞선 단락에서 언급한 "이런 세계가 실재할지도 모른다"와 같은 사실감까지도 표현하기 위함이다.[10] 이와 같은 시도는 핍진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운 개념이기에 독자들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워지고 작품의 허들이 높아진다. 핍진성을 밑바닥부터 끌어올린 것도 모자라 퀘냐 같은 인공언어까지 창조했음에도 그 정교함과 사실감에 많은 독자들이 감탄하고 이입하는데 성공한 톨킨의 창작이 그만큼 대단한 창작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개연성/현실성/핍진성을 설명하는 위의 이미지가 유명하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민간인들이 매트릭스가 만든 세상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19]은 작중 세계의 인물이 자신들의 '현실'에서 핍진성이 어긋나는 감각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https://naver.me/GMRsi5xz
개연성
1. 개요
개연성(蓋然性[1], plausibility[2])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을 말한다.[3] 문학에서는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루는, 문학의 보편성을 가리킨다.[4]
전통적인 논리학에서는, '아마도 그럴 것이다.'[5]라는 추상적인 가능성을 구체화하여 셀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하여, 이를 '개연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확률(確率), 또는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확실성(確實性)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문맥에 따라 '확률' 또는 '확실성'으로 해석해도 된다. 핍진성, 사실성이나 당위성과는 구별된다.
2. 문학적 개연성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작중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인과가 들어맞으며 앞뒤가 이어지는지에 대한 것이다. 문장 속에서 A라는 설정이나 원인이 등장했는데 B라는 행동이나 결과가 나오는가를 따지는 말이다. 이러한 인과관계가 짜임새 있게 서술된 글을 '개연성 있는 글'이라고 한다. 흔히 말도 안 되는 인과관계가 등장하는 플롯을 두고 "개연성이 없다"는 평가를 한다.[6]
예를 들어 판타지 작품에서 마왕에게 가족을 잃은 용사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가족의 복수를 하겠다고 칼을 갈던 사람이 갑자기 뜬금없이 마왕의 편에 붙어버린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혹은 용사에게 마왕을 물리칠 수 있는 전설의 검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이 검을 놔두고 노송나무 봉을 들고 마왕과 싸우다가 패해서 죽어버린다. 행동이나 결과의 인과관계가 이상해져 버린 것이다.
작품에서의 개연성은 독자의 시선이 주체가 된다. 작가가 어떻게 상상의 날개를 펼치든 간에, 독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독자의 눈에 비추어지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리 숨겨진 설정을 미리 준비해놨다 하더라도 독자가 이야기를 보던 도중 이 실마리 자체를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면 개연성이 없다고 평론된다.
개연성은 독자와의 약속이며, 암묵적으로 독자들에게 "다음 장면에 이러이러한 장면이 나올 수 있을 겁니다."라며 미리 약속하는 것과도 같다. 장르가 액션물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액션을 보여줘야 하고, 러브스토리라면 끝까지 러브스토리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그런 기분을 구매하러 작품을 관람하기 때문에 개연성은 약속 안에서 독자에게 제공하기로 한 감정을 최대한 제공해야만 한다. 만약 중간의 내용이 부실해 독자들이 감정이입하지 못했다거나, 결말이 사람들이 기대한 방향성이 아니어서 자신이 원하는 감정을 이입하지 못했다면 다음날 평론은 분명 개연성부터 언급하게 될 것이다. 개연성은 작품에 있어서 핵심 주제이며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약속이다.
지금까지 앞에서 설명한 것을 예시로 다시 정리하자면, 두 경우에는 이렇게 개연성이 적용되는 것이다.
마왕에게 가족을 잃은 용사의 경우, 정말 아무 설명도 없는 상황에서 마왕의 편에 섰다면 개연성이 깨진다. 독자들은 상식적으로 복수귀를 보며 마물들에게 복수하는 장면을 떠올리지, 갑자기 마물 편에 빌붙는 장면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개연성을 챙기고 싶다면, 관련한 부연 설명으로서 "알고보니 진짜 원흉은 따로 있었고 마왕도 피해자였다.", "마왕이 용사에게 마법으로 수작을 부렸다"는 등의 내용을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한다. 물론 이런 설명은 중요한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끝마쳐져 있거나 미리 복선을 던져놓아야 한다. 장면이 이미 지나간 뒤에 뒤늦게 보여줘봤자 독자는 속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설의 검으로 죽일 수 있는 마왕과 싸우는 용사가 아무 이유 없이 노송나무 봉을 들고 싸우다 죽었다면 개연성이 깨진다. 이 경우 전설의 검을 드는데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다는 등 적절한 이유를 넣는다면 개연성이 깨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냥 평범한 검 놔두고 노송나무 봉을 들었는지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여기에 또 개연성을 위해 추가 설정을 넣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적지라서 보급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챙겨온 모든 무기가 격전으로 망가졌다든지.
캐릭터들의 성격, 성향 등 캐릭터 해석에 한정되었을 경우 캐릭터 붕괴, 줄여서 캐붕이라고 부른다. 입체적 인물이라면 의도적으로 제작 사이드에서 성격에 변화를 줄 수도 있지만, 그 개연성이 부족하거나 너무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면 캐붕 취급을 받게 된다.
시나리오 및 스토리 업계에서는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 때 에니어그램을 주로 쓰는데, 에니어그램이 등장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 개연성있게 예측하고 움직이게 할 수 있고, 이 결과 캐릭터의 성격의 변화가 개연성이 있어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공식에 대입하듯이 성격을 만들게 되어 너무 전형적이 된다는 비판도 많다.[7]
3. 유사 개념
혼동하거나 착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기본적으로 개연성은 사실성, 현실성과 전혀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
애초에 현실은 온갖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 개연성이 별로 없다. 괜히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8]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에어푸르트 변소 사고는 귀족들이 한 곳에 모여있다가 바닥이 무너져서 똥통에 빠져죽은 아주 말도 안 되는 사건이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인데, 이런 걸 소설로 쓰면 황당하다며 비판받을 게 뻔하다.[9]
핍진성: 작품 세계 내의 현실감과 관련된 개념이다. 핍진성은 현실성과 관련이 있으며, 사실성과는 다른 단어이다. 현실성은 예를 들어 좀비라는 존재는 현실에 '실재(實在)'하지는 않지만, 이야기 내에서 좀비에 대한 설정이 일관되게 유지가 된다면 관객들은 좀비를 이야기적 '현실'로써 받아들일 것이다. 즉, 일관적 현실성(핍진성)은 이야기 전체적으로 설정이 일관되게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성(事實性, Actuality): 사실성은 현실에서 벌어진 일들이 작품에 반영된 정도를 뜻한다.
한편 현실성(Realistic)은 현실에 벌어진 일은 아니어도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일인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즉, 현실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이므로) 사실적이지는 않으나 현실적일 수는 있다.
종종 현실성(Realistic, 리얼리스틱)과 혼용(내용 일부)되는 경우가 있다. 현실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를 뜻하고, 사실은 실제로 일어났거나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을 가리키는데, 이는 일반 대중들이 사실과 현실이라는 단어를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단어를 혼용하는 것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아예 둘 모두를 뜻하는 것을 Reality(리얼리티)라고 쓰기도 한다.
창작물의 반영 오류(구 고증오류)는 현실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현실성과 사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이를 구별하기 위한 좋은 예시로 아래의 이미지가 있다.
위 핍진성 이미지 참고
저 짤만으로 이해가 안된다면 이렇게 구분해보자. 현실성과 핍진성, 개연성은 각각의 주체가 다르다.
현실성은 물리학에 중점을 둔다.
핍진성은 작품 그 세계의 물리학에 중점을 둔다.
개연성은 그 세계의 인물들과 규칙 등, 인과관계에 중점을 둔다.
현실에선 현실성을 무시할 순 없어도 개연성이 무시될 수 있다. 다윈상은 멍청한 유전자를 스스로 제거하여 인류 진화에 기여한 공로한 상인데 실제로 해당 내용을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방식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다. 개연성이 없는 방식으로 사망했으나 현실성엔 문제가 없다.
가상의 세계에선 현실성이 무시될 수 있어도 그 세계의 물리법칙을 무시할 수 없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머글이 마법을 부릴 순 없고, 원피스같이 신체 자체가 어지간한 흉기에도 쉽게 죽지 않고, 부상을 입어도 회복이 쉬운 세계에서 고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한다면 현실성이나 개연성에 문제가 있다 보긴 힘들지만 핍진성엔 문제가 있다.
배경이 가상의 세계든 현실의 세계든 거기에 소개된 등장 인물이 법을 어기거나 규칙을 어길 수 있다. 그러나 빌런의 목숨까지 동정할만큼 선한 마음을 가진 히어로가 도시 안에서 빌런과 전투를 하면서 정작 자기가 지켜야 할 도시가 파괴될 걸 걱정하지 않고 필살기를 남발해서는 안된다. 물리적으로 말은 되기 때문에 현실성, 핍진성에 문제가 있다 말하기 힘들지만 개연성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핍진성과 개연성 모두 작가가 설정하는 것이므로, 두 개념 모두 아우러서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이론이 바로 장폴 사르트르의 '소설적 자유'다.
그렇기에 개연성은 설명하는 방법과 인과에 더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세계가 전제하는 설정 안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며 앞뒤가 맞기 때문에' 납득이 되는 묘사라면 개연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전달할 때에도 추후에 일어날 일을 설명하기 위해 그 일이 전제될만한 설명을 충실히 묘사해 주거나 인과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개연성은 단순히 작품 내에서의 논리를 따지지 않는다. 작품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따진다. 앞뒤 이야기가 맞고 나름대로 흥미로울법한 구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재미없는 작품이 존재한다거나, 비사실적인 묘사로 가득 차 있지만 재미있는 작품이 존재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독자가 아닌 작가의 입장에서 따진 경우고, 후자는 독자들의 시선에서의 논리를 따진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작가가 창작을 할 때 개연성을 너무 공들여 신경 쓸 필요 없이 독자의 눈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논리를 맞추면 되겠다. 하지만 큰 줄기에서까지 개연성의 법칙을 간과한다면 깊이를 내기 힘들어 독자들에게 혼란이 오고 이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작가 스스로 만들어 둔 큰 줄기 상의 개연성이 무엇인지 신경 쓸 필요는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앞뒤가 다소 맞지 않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스토리텔링 기법에 전제하여 논리의 중요성을 감추면 작품의 질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흔히 클리셰라 부르는 것들은 이러한 기법이 수도 없이 노출된 것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너무 남발하면 진부함만큼은 감추기 힘들 것이다. 이 때문에 각종 창작물에서는 비사실적인 일들이 많이 나오지만, 작가의 설명과 독자들의 이입을 방해하지 않는 개연성이 충분하다면, 기본적으로 독자들이 수긍을 한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현실 반영을 열심히 고려하면서 창작하다 보면 분명히 창작에 도움이 된다. 스토리가 그만큼 풍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연성'이라는 말을 '그럴 듯하다, 있을 법하다'라고 핍진성과 유사한 것으로 풀이하면 현실 반영이 섬세할수록 현실성과 개연성이 크게 증가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현실 반영이 작품의 질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의 부피를 너무 늘리지 않는 선 안에서만 그리한다. 다시 말해 스토리 라인에서의 현실 반영은 스토리 라인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만 한해서 작품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뜻. 충분한 개연성을 담보할 수 있으면 현실 반영이 없어도 작품의 질은 우수할 수 있다. 반대로 스토리 라인에 직접 영향이 없음에도 현실 반영에만 집착하거나 현실 반영이 오히려 스토리의 개연성을 저해하면 현실이 잘 반영되었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설정과 개연성은 분명히 다르다. 설정은 세계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법칙이다, 현실의 물리법칙같은 것으로 절대 변하지 않는다. 개연성은 할 법한 행동을 하지 않거나 할 리 없는 행동을 한다는, 어색함과 위화감 정도의 수준이다. 절대 법칙 수준까지는 되지 않는다.[10] 설정이 어긋난 경우는 문학적 핍진성에 더 가깝다.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설정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으로, 설정에 오류가 발생하면 반드시 개연성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설정 오류를 별것 아닌 경우로 치부하는 경우 대부분이 창작물이니 허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데, 반박하는 쪽의 입장에서는 사실 허구성이나 오류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설정 오류로 인해 발생한 개연성과 핍진성의 하락을 지적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로간의 의사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이다.
아래에는 유사개념 사례가 여럿 포함되어 있는 삼국지 관련 야사 중 하나이다.
삼국시대에 관우의 부하인 주창은 적토마를 타고 다니는 관우를 항상 보좌하면서 그가 필요할 때마다 청룡언월도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주창은 평소에 천리를 간다는 명마 적토마와 같은 속도로 달리기를 할 수 있었고 이 능력으로 관우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관우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이유를 묻자 주창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 발등에는 비모(飛毛)라 하는 털이 한가닥 있는데 이것 때문에 적토마와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관우가 비모를 뽑으라고 명령하자 주창은 망설이다가 털을 스스로 뽑아버렸으며 이후 빠르게 달리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현실성, 핍진성, 개연성을 따지자면 아래와 같이 된다.
현실성: "사람이 말과 같은 속도로 달린다"라는 소재는 현실적이지 않다. 다만 세간의 민담에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워낙에 많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 사람들은 크게 반감을 갖지는 않는다.[11]
핍진성: "비모가 있으면 빨리 달릴 수 있다"라는 (현실성은 떨어지는) 설정이 있고, "비모가 있으면 빨리 달린다고 했는데 비모가 없어지자 보통 사람과 같은 속도를 갖게 되었다"라고 설정에 따라 전개가 이루어져 핍진성이 지켜졌다.
개연성: 이 설화는 이 부분에서 다소 이상하다. 관우가 비모를 뽑으라고 하는 것은 자기 부하를 약하게 만드는 일인데, 일반적인 상황에서 상관이 부하의 편리한 능력을 없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상관으로서 부하가 상관을 능가하는 것이 두려웠다든지 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으나, 이 가능성 역시 "주변에 감히 대적할 자가 없는 성향"이라는 관우라는 인물 캐릭터 해석을 감안하면 개연성이 떨어진다.
옛날 사람들도 이 부분이 이상하다는 것은 느꼈는지 적의 계략에 걸려서 비모를 잃는 것으로 수정된 판도 있다. 뜬금없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부하의 능력을 없애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강대한 능력을 가진 적의 능력을 없애려고 계략을 쓰는 것은 말이 되기 때문. 아니면 관우 대신에 원래부터 말도 안 되는 짓을 많이 하는 성격의 인물을 배치하면 '그 사람이니까 그럴 만하다'라고 납득할 수 있다.[12] 아래 개연성 밈 문단에서 소개하는 "캐릭터 존재 자체가 개연성"인 것 중에는 이러한 케이스도 있다. 다만 그런 전개는 이 짧은 일화 하나만으로는 성립하기 어렵고 캐릭터를 설명할 더 많은 이야기가 앞에 더 있어줘야 한다.
3.1. 개념의 혼동
이런 개념의 혼동이 있다보니 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데도 일부 작가들이 문제 의식이 없거나 혹은 그 작품을 선호하는 팬들로부터 쉴드를 받을 때 개연성이나 다른 문제로 인해 몰입을 방해하는 걸 핍진성, 현실성이나 설정 개념을 끌고와서 억지로 쉴드를 칠 때가 있다. 이 경우 왜 독자들이 괴리감을 느끼고 불편함을 느끼는지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개연성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고민하지 않은 케이스다. 즉 개연성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가 있는데 개연성이 있다고 우기거나 반대로 개연성이 없는 걸 다른 문제를 가져와서 억지로 옹호하려는 것. 예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개연성과 현실성
Q: 작품 내내 주인공과 척을 지던 인물인데 아무런 사건도 없이 갑자기 아군으로 전향하는 게 말이 되느냐?
A: 현실에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뾰족한 귀를 가진 종족도 없다. 이건 말이 되고 적이 갑자기 아군이 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현실성을 따진다면 전자에 대해 이미 따졌어야 하는 거 아니냐.
현실성과 개연성을 구분하지 못한 대표적인 오류이다. 마법이나 초능력 등이 나오는 건 작품에서 이미 독자들이 그런 게 있다고 합의한 부분[13]이고 적이 갑자기 아군이 된다거나 하는 건 억지로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 인과관계도 없는 사건을 부여한 것인데 전자에 합의했다고 후자에도 합의했으리라 잘못 생각한 것이다. 당연히 비현실적인 판타지, 초능력이 난무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라도 스토리를 지닌 작품으로서 기본적인 개연성은 갖추어야 한다.[14] 또한 이러한 오류들을 지적하는 것은 감상하는 입장에서 작품에 몰입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일종의 의사표현이다. 인과관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창작물이라는 이유로 모두 넘어가줄 수는 없는 것이다.
슈퍼맨의 예: 주인공이 '외계인 초능력자' 라는 설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 이것은 슈퍼맨의 기본적인 설정이며, 모두가 슈퍼맨은 외계에서 온 초능력자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런 전제가 존재하는 이상, 슈퍼맨이 손가락 하나로 트럭을 묵사발 만들어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슈퍼맨이 아침에 출근하다가 자동차와 정면으로 충돌해서 교통사고로 전치 5주의 부상을 입는 장면이 나왔다고 생각해 보자.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장기 치료가 필요할 만한 부상을 입는 것 자체는 현실의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현실적이지 못하다'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트럭을 묵사발낸다는 설정의 인물이 고작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었다면 그 전까지는 어떻게 트럭을 부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설정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작품의 기본 설정이 어긋났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더 이상 슈퍼맨 이야기에 몰입할 수가 없다. 왜 슈퍼맨이 부상을 입을 수 밖에 없었는지 추가적인 설명이 더 나오지 않는다면,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된다.
이후 이런류의 비판을 여러 제작자들이 의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사실 ON/OFF스위치로 슈퍼맨의 몸 상태와 평범한 일반인의 몸 상태를 왔다갔다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설정을 추가하는 관례가 생겼다. 이런 관례도 전술한 엄청난 비판이 있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예: 인기 작품들을 예시로 들면 '원피스의 아카이누가 마그마가 불보다 상위에 있다고 하는데 억지 아니냐?', '드래곤볼에서 초사이어인까지 된 손오공이 총에 부상을 입는 게 말이 되느냐', '스타워즈 오리지널 삼부작에서 굉장히 정의롭게 묘사된 루크가 왜 스타워즈 시퀄 삼부작 중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술에 쩔어있는 귀차니즘 쩌는 할아버지가 된거냐'[15] 등등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 '그래서 악마의 열매가 현실에 존재하느냐?', '사람이 날아다니고 별을 부수는 건 말이 되는가?', '우주선이 나오고 외계인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그런 걸 따지느냐?'는 식으로 반박하는 것 역시 지적한 사람은 개연성을 지적한 것인데 반박한 사람은 "현실성이 없으니까 괜찮다"라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4. 중요성
독자, 시청자, 관객처럼 작품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은 작품을 보면서 추론, 공감한다. 사람들은 작품을 볼 때 이야,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이런 걸 이렇게 해볼 텐데. 어? 내 생각이 그대로 나오네. 공감되네 혹은 이야,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일이 진행이 되지? 놀랍고, 갑작스럽긴 해도 설명이 딱딱 들어맞잖아? 난 왜 이런 추론을 하지 못한 거지? 재밌다!!라는 생각을 곧 잘 한다. 그러한 마음을 속 시원하게 잘 긁어주면 개연성이 높은 작품, 그러한 마음을 작품이 방해하면 개연성이 망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내러티브(narrative)'[16]의 주된 정의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도 개연성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주된 요소 중에 하나인데, 이런 개연성을 효과적으로 확립시키기 위해선 복선이나 떡밥이 중요하다. "술 마시고 운전하다가 결국 일을 내버렸다."라는 전개를 예로 들자면, "술 마시고 운전하다가"라는 행동들이 훗날 일을 내는 복선으로 작용되어 결국 일을 내고야 마는 것이고, 이를 통해 이 전개의 개연성은 확립이 되는 것이다.
중등교육과정에서 다루는 바와 같이 개연성 있는 전개는 근대 문학의 상징과도 같다. 흔히 고전 문학의 특징으로 우연성을 자주 드는데, 이는 개연성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구성했음을 의미한다. 기사. 현실도 우연적이기는 매한가지이지만, 근대 문학에서는 이를 얼마나 '말이 되게'(개연성 있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하다.
주인공 및 주변 인물들의 내면 묘사도 중요하다. 이 심리 상태 묘사도 작가가 필력이 떨어지면 내용이 지루해지고, 독자들에게는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이 생각만 하느라 전개를 질질 끌어 웹소설이나 웹툰이라면 페이지에 쓴 돈이 아까울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내면 묘사는 개연성과 인물의 특징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하게 한다.
아크플롯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인과성에 맞춰서 사건을 선택하고 배열해야 한다. 동기가 부여되어 있는 하나의 행동이 어떤 극적인 효과를 유발시키고, 이렇게 유발된 효과가 또다른 효과의 원인이 된다. 이처럼 인과관계로 연결된 사건들 간의 연쇄 작용을 통해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도록 주도하는 것이 인과성이다. 아크플롯에서는 이야기의 작은 부분부터 거대한 요소까지 모두가 하나의 인과적 사슬로 연결되어, 제대로 파악할 경우 인물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과성의 네트워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야 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매체에서는 인식 때문에 일반 매체보다 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식의 무성의함이 은근히 보인다. 예를 들어 어린이 영화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전개가 많다.[17]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무성의해 보이는가도 중요한데, 권선징악이나 성선설을 기반으로 희망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함에도 등장인물들이 전반적으로 다소 지나치게 선량하게 그려지는 건 어른들 입장에선 황당하고 어이없다고 받아들여지기는 좋아도 무성의하다고 해석하지 않는다. 아이들 작품에서도 인기있는 작품들은 보통 주제가 보편적이고 1차원적이더라도 메세지 전달에 충실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반공 영화나 반공 드라마가 자주 만들어지던 시절에는 교훈과 정의를 중요시하는 당시 검열이나 심의 덕에 전혀 개연성이 없이 내용이 진행되는 영화나 드라마가 많았다.
성인물에서는 목적부터가 성적 판타지 욕망 추구라는 특성상 개연성 없이 작품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완성도나 재미조차 무시한 채 과도한 서비스신과 성적 코드를 이용해서 화제를 사려고 하는 작품이 많은데 사람들이 이를 뽕빨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성인물도 개연성이 있는 게 작품성이 더 좋다보니 성공하기도 한다. 한국의 성인 웹툰은 한국 특유의 성적 억압에 따른 규제와 개연성을 중시하는 한국 서브컬처의 경향이 합쳐져 일본 상업지에 비해 비교적 스토리를 중시한 것이 해외에서도 먹혀서 그런지 2020년대 들어 Manhwa에서 따온 Pornhwa(폰화)라고 불리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도 한다. 어반 딕셔너리(번역, 번역 2)
아무리 상영시간을 줄이거나, 검열을 했거나, 쓸데없이 늘어진 부분이 있거나, 흥행 때문에 촬영분을 잘라낼 수 밖에 없다지만 감독판이나 확장판의 늘어난 분량을 보면 생략된 몇몇 자잘한 장면을 살린 것을 넘어서서 몇 장면이 캐릭터의 개성을 살리거나, 훗날 복선 및 떡밥이 될 만한 것까지 있어서[18] 이것이 상영판에 있어야 개연성이 있다며 팬들이 쓴소리를 하기도 한다. 물론 미디어 믹스화마저도 거부하는 극렬 원작주의자 정도는 아니더라도 원작을 중시하는 팬들은 개연성이 있냐 없냐 정도가 아닌 늘어지는 내용이더라도 원작에 그 내용이 있으면 추가하면 좋다는 의견을 내기도 하고, 감독이 팬인 경우[19]를 매우 좋아한다.
이는 영화의 감독판은 아니더라도 소설(웹소설) 원작 만화(웹툰)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웹소설 원작 웹툰의 경우 보통 웹소설 2~3화(글자수 10000자~15000자)를 웹툰 1화(5000자) 정도로 압축하다 보니 복선 및 떡밥을 삭제해 버려 나중에 떡밥 회수를 하는 부분에서 웹소설과 달리 웹툰의 경우에는 뜬금없어 보여 소설을 먼저 본 독자들에게 원작과 다르다는 비판을 듣는 경우가 있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설정을 현실적으로 짜고 사건의 개연성을 갖추면 운이 좋은 경우 현실을 예견한 작품이 되어 뜻밖의 높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5. 주의점
소설 뿐만 아니라 만화나 영화를 비롯, 스토리 등의 서사를 다루는 그 어떤 창작물에서도 개연성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고,[20] 또 보다 높게 평가받는다. 개연성은 곧 논리와 직결되는 것이기에, 그 논리적인 부분의 차이가 차원이 다른 몰입감과 감정이입 등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개연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감이 있다. 이른바 떡밥 회수라는 것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떡밥을 잘 뿌려서 잘 회수하면 스토리에 대한 평이 좋아지고, 반대로 떡밥을 잘 안 뿌리거나 떡밥을 많이 뿌려놓고 회수를 못하면 평가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실 이 나무위키[21] 포함 한국 서브컬처 팬덤 전반이 떡밥 회수나 복선이 드러나는 것, 개연성이 맞는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강하며 사이다가 유행하게 되면서 이 성향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창작자가 여러 해석을 열어두기 위해서 은유나 상징으로 한 연출이나 문장을 보고 "떡밥이네" 하고 단정지어서 생각했다가 나중에 구체적인 설명이 안 나오면 "떡밥 회수를 안 했다."라고 항의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또한, 영상 매체 같은 경우에는 스토리가 글과 글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출과 이미지, 음향으로 설명되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단순히 대사로만 따라가다 개연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경우는 일반적인 관객일 경우에 2회차, 3회차를 거듭하면서 해소되곤 한다.
떡밥 및 복선을 미리 제공해 지속적으로 개연성을 확보했더라도 연출을 못하면 떡밥 및 복선이 다른 전개 쪽으로 오해하기 쉬워져 본래 정한 전개대로 갔을 때 개연성이 없어 보일 수가 있다.
재미가 있다면 개연성을 조금 희생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창작물을 더욱 즐기기 위해 개연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때그때의 연출과 전개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을 무시하고 작중에 표현된 바가 개연성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작품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때문에 작품성은 좋은데 개연성 오류가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상황이 많다. 설정에 무리가 있는 부분이 생기더라도 독자들이 크게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상관이 없는데도 무리하게 파고들어 개연성 오류라고 지나치게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나 연재 중인 작품에서 중간중간 예상할 수 없는 전개마다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개연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작품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무조건 개연성이 없다라는 말을 오남용하는 것의 영향이다. 엄밀히 말해서 떡밥(복선을 포함한다)이 미리 투척되는 것은 개연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추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원인이 설정되어 있고, 그 원인이 나중에 드러난다면 그 사건은 완벽하게 인과적이고 개연적인 사건이다. 단지 독자가 예상할 수 있게 미리 그 원인을 '보여주지' 않았을 뿐, 작중에서 그러한 사건은 이미 일어난 것이다. 작중에서 주인공이 화장실에 가는 장면이 묘사되지 않았다고 해서 생리적 현상을 처리하지 않았으니 개연성이 없다고 하지 않듯[22]이 말이다. 다만 등장인물이 화장실에 들어온 이후의 행적이 공백으로 남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여 예상치 못했던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수단을 써서 반전을 만드는 식 등의 서술 트릭을 쓰기가 쉽다. 정말 개연성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큰 것은 미리 떡밥이 제공되지 않았을 때가 아니라 뿌려진 떡밥이 회수되지 않은 경우이다.
떡밥이 미리 제공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문제점은 순수하게 작품 자체의 논리적, 과학적인 차원의 개연성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독자의 감성 및 본능, 그리고 장르의 관습 때문이다. 진화론적, 뇌과학적으로 인간은 이야기, 서사에 대해 특정한 본능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것을 인과적으로 예측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미리 원인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것은 미리 예측을 하여 급격한 변화와 충격을 감소시키려는 인간의 본능과도 연관된다. 게다가 오랜 세월 축적된 장르적 관습으로 인해 특정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있다. 현대의 창작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할리우드의 영화이고, 할리우드 영화에는 많건 적건 미스터리 장르의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만화, 소설 등 여러 매체에서는 미스터리적 요소가 많이 개입되어 있고, 미스터리 장르의 특성상 미리 단서를 주고 감상자가 능동적으로 짐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가 미리 전개를 예측할 수 있는 떡밥을 제공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떡밥에 의한 예측은 논리적인 경우도 있지만,[23] 많은 경우에는 논리와 별개의 관습이나 창작물 자체의 한계에 의한 경우도 많다.[24] 물론 창작자의 특정한 의도가 있다면 이런 법칙마저 깨뜨릴 수 있다.
어쨌든 이런 태도는 지양하는 것이 좋다. 개연성과 떡밥이란 것은 작품 전체를 놓고 판단할 문제기 때문이다. 추리하길 좋아하는 복선덕후, 설정덕후들이야 사전에 설명이 무조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사후 설명만으로도 작품의 개연성은 충분히 챙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용사를 보필하던 충신이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리고 난 후 본색을 드러내 새로운 마왕이 되고자 한다는 줄거리의 작품이 있다고 하자.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리기 전에 복선이나 설정을 깔아놓지 않더라도 이 충신이 왜 용사를 도왔는지, 이제까지 자신의 정체를 꽁꽁 숨긴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숨겼는지 등 설명을 차후에 충분히 하면 개연성을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배신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할 독자들에게 사후 설명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작품의 완결성 내에서 설명이 제대로 된다면 작품의 개연성은 깨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순차적으로 서술이 되어있지 않다 하여 개연성에 대한 시비를 남발하는 것은 옳지 못한 자세다. 개연성에 대해 진지하게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다면 작품이 완결된 후 논하자. 그 이전에는 지나친 반전으로 몰입도가 떨어진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6. 의도된 파괴
위에서 보듯 설정을 너무 꽉 짜여지게 짜면 개연성 있는 전개의 가짓수가 매우 적어지기 때문에 스토리 진행의 유연성을 위해 일부러 설정을 헐겁게 짜놓곤 한다. 또한 이미 짜여진 설정 역시 무시해도 큰 문제가 없도록 가끔씩 개연성을 파괴하기도 한다.
장르문학이 대개 그렇듯 장르의 경계선을 정하기란 어렵지만, 대체로 후술할 공포물이면서도 코미디 성향이 강한 작품들은 코미디 공포물이라고 한다. 특히 둘 다 개연성과 명확한 결말이 없어도 되는 장르라서 '호러와 코미디는 사실 종이 한 장 차이다.' 라는 말도 있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공포물을 개그로 느끼고 웃음을 터뜨린다거나, 블랙 코미디를 보고 공포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추구하는 분위기 외에는 공통점이 많기도 하다. 두 장르를 동시에 번갈아 만드는 창작자도 꽤 많다.
이외에도 아방가르드 예술(전위예술)은 개연성과 핍진성을 그냥 대놓고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