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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미카 예언서의 말씀 5,1-4ㄱ>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 1,1-16.18-23>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성탄 대축일>
축하합니다.
오늘은 '성모 탄생 대축일'입니다.
또한 오늘은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연합회>의 주보 축일입니다.
오늘 '성모 성탄 대축일'로부터 열 달을 거슬러 올라가는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입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곧 구원 역사의 중요한 국면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됩니다.
곧 구세주께서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이제 시작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범죄 하기 전부터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죄보다 먼저 축복이 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이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탄생으로 준비되었습니다.
참으로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요,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그 은총과 복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드님과 형제가 되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그분 안에 수렴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요한 1,16 참조).
흔히들 “부모의 기쁨은 자녀에게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이처럼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면류관을 쓰셨으며, 구세주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고,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특별히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은총과 복을 주신 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어머니의 노래로 기뻐합니다.
“내 영혼이 내 구세주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루카 1,46-48)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 1,1)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소리와 제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저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자기 홍보 시대>
현대를 자기 PR 시대라고 합니다.
자기를 알려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이력을 과대 포장하고 심지어 거짓으로 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지는 법이고 마침내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대통령 영부인을 보며 속끓이는 이도 많습니다.
그래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으로 피알시대의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를 바라며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모습에 견주어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접한 요셉은 그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마태 1,19).
그는 법대로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입니다.
드러내지 않으려는 행동은 마리아를 위하는 배려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친절하며 그의 성숙한 인간성이 하느님의 계명과 잘 융화되어 빛을 발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 인간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에 걸맞게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조사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약혼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으니 요셉에게는 얼마나 큰 고뇌와 의혹, 심사숙고, 마음의 동요, 당황스러운 모습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드러내어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도 바보이지만 그는 역시 의로운 사람으로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는 온유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말을 듣고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버지의 특권과 아이를 낳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마리아는 아기를 낳고 요셉은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름에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마태 1,21)
요셉의 마음고생 못지않게 마리아의 마음도 고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까닭입니다(루가 1,45).
마침내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았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 안에 항상 함께하시며 한 번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기에 행복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즉 육화,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성모님을 거치지 않고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모님은 신앙의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입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의 은혜를 못 누릴 따름입니다(차동엽).
그러므로 성모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성모님께 나아가면 예수님께로 인도됩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마리아처럼 굳은 믿음과 온유함 속에 꿋꿋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주님 안에 머물면 주님께서 필요할 때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묵묵히 위엄과 사랑과 믿음 안에서 피할 것 피하고, 알릴 것을 알리는 지혜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리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대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께서 평생 동정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 성체 영할 때 한 번만 ‘아멘!’하면 끝일까?>
ENA 병영 드라마 ‘신병’은 군생활을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신병 박민석 이병은 사단장의 아들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최일구 상병은 그에게 신병 놀이를 하며 괴롭힙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는 아닙니다.
장난 수준입니다.
박민석 이병은 사단장 아들임에도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소속된 부대에서 전역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사단장인 아버지는 그를 육군본부로 보내고 싶어 합니다.
박민석 이병은 아버지의 말에도 불구하고 부대원들에게 정이 들어 그들과 끝까지 가기로 합니다.
얼마 후 박민석 이병과는 반대되는 신병이 들어옵니다.
성윤모 이병입니다.
그는 밖에서 불법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다 도피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고문관인 척하며 자기를 괴롭히는 이들을 일일이 적어서 밤에 중대장실에 넣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욕이라도 하는 선배가 있다면 영창을 갑니다.
그러다 우연히 박 이병이 그가 전화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가 일부러 자해까지 하며 군 생활을 편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박민석 이병은 일부러 그를 불러내어 따끔하게 혼을 냅니다.
그가 사단장 아들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윤모는 또 쪽지를 써서 중대장실에 넣습니다.
하지만 중대장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만큼 참아줬으면 됐다고 하며 심하게 그를 야단칩니다.
또 부대원들은 전화부스에 휴대전화를 놓고 그가 통화하는 것을 녹음시켜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한 그를 재판받게 합니다.
군에 머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군대에서 요구하는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몸만 머무는 것이지 진짜 군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군에 들어가겠다고 받아들였다면 그 군에서 요구하는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군대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데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 탄생 축일입니다.
성모님을 부를 때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서 동정이신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왜 평생 동정이시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개신교 측에서는 한결같이 예수님의 친동생들이 있었다고 말을 합니다.
사촌들도 당시 다 형제라고 했었음에도 예수님의 형제들을 굳이 친형제라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모 마리아를 보통의 한 인간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평생 동정이라고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낳으시기까지 동정이심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 1,23)
여기서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동정성이 없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동정성은 남편을 받아들일 때 사라집니다.
남편을 받아들임은 남편의 ‘뜻’을 받아들임입니다.
결혼하면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겠다고 생각하는 신부는 없습니다.
그러면 순결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동정성은 한 남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자기 비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남자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하느님의 뜻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집인 에덴동산에서 살게 됩니다.
성모님은 기계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는 도구가 아니셨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떠나갔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나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동정성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뜻을 봉헌한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낳으면 더는 동정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까요?
아이를 낳고 끝내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모기와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는 부모는 자녀를 계속해서 낳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번 따르기로 했다면 계속 따라야 옳은 것입니다.
누군가의 뜻을 따르면 그 누군가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 누군가 안에 들어가 삽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잉태하시게 된 것은 곧 하느님 안에 사시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아버지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곧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요한 14,10)
이것이 아버지 앞에서 그리스도의 동정성입니다.
순결함입니다.
이 순결함이 아버지 품 안에 머물게 함인데 그 순결함을 잃으면 동시에 아버지 품 안에서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은 곧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되셨음을 의미하는데, 이 동정성이 깨지면 또한 하느님 품에서 떠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남편을 받아들여 그의 뜻 안에 머물러야 옳겠습니까?
내가 누군가의 뜻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번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에덴동산에 살게 된 순결한 성모 마리아는 에덴동산에 머물기 위해 그 순결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럴 분이셨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셔서 당신 품에 살게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실수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군생활이 끝나는 것일까요?
끊임없이 군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를 영할 때 한 번만 ‘아멘’하면 끝일까요?
끊임없이 자신 안의 성체에 '아멘'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나라에 살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아멘 한 것은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곧 에덴동산에 살게 됨이었습니다.
들어가면 끝일까요?
성모님의 아멘, 곧 동정성은 그 이후로도 영원히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정성, 곧 아멘은 혼인 서약과 같이 계속 이어져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평생 동정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성체를 영할 때 하느님의 뜻인 성체가 나를 계속 지배할 수 있도록 평생 동정의 마음으로 아멘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닮기를 위한 영적 훈련 - 사랑, 경청, 관조, 겸손>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님, 복되니이다.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온갖 찬미를 마땅히 받으시리이다.”
(복음환호송)
흡사 성모님을 닮은 우리 어머니들의 탄생 축일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돌아가셨든 살아 계시든 상관없이 오늘은 우리 모든 어머니들의 생신날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성모님인 모든 고통중인 우리 어머니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이 참 반갑고 기쁜, 각별한 느낌이 듭니다.
작년 12월 8일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후 만 9월만에 탄생하신 마리아를 기리는, 참 기분 좋은 성모님 탄생 축일입니다.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과 요한 세례자, 그리고 탄생 축일을 지내는 분은 성모님뿐입니다.
오늘 축일을 참으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분명히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마리아가 잉태된 순간부터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고, 평생 동안 자유로웠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죄로 더러워진 몸으로 잉태된다는 것은 교회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니 이 또한 교회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교회는 이미 7월 26일 축일을 지내는 요아킴과 안나라는 부모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와 로마의 서방교회는 6세기와 7세기부터 마리아의 탄생을 경축해왔습니다.
전례는 6세기 성 안나 대성당으로 알려진 예루살렘 교회의 봉헌으로 그 기원을 추적합니다.
그 이전에는 요아킴과 안나의 집으로 추정되는 ‘양치기의 들판’으로 알려진 장소에 마리아를 기리는 5세기 대성전이 있었습니다.
그 성전은 성녀 안나에게 봉헌된 6세기에 새로운 대성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동방의 수도승들은 7세기에 로마에 축제를 가져왔고, 이어 서방교회에 퍼지게 됩니다.
13세기에는 장엄한 8부 축제와 금식일인 철야로 엄숙하게 격상되었고, 교황 세르지오 1세(687-701)는 축제를 위해 포로 로마나에서 성모 마리아 대성전까지 행렬을 마련했습니다.
교황 성 비오 10세의 전례 개혁에 따라 축일에는 단순한 8부 축제만 있다가, 1955년 교황 비오 12세는 8부를 완전히 폐지했고, 이제 전례는 축일의 등급을 갖게 됩니다.
동방교회에서 마리아의 탄생은 12대 전례 중 하나로 거행되며, 축일은 ‘하느님을 낳으시고 영원히 동정이 되시는 마리아의 높으신 모후의 탄생’으로 명명합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축일의 유래를 살펴봤습니다.
교회의 전례가 얼마나 깊고 풍요로운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지 새삼 경탄하게 됩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일반 알현 시간에 성모님 탄생 축일을 앞두고 모든 어머니들을 위해, 특히 아이들로 인해 다양하게 고통받는 어머니들이 성모님과 하나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특히 교황님은 세계 곳곳에 있을 고통받는 어머니들과 가까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선교와 일치된 ‘어머니’로서, 또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한 ‘딸’로서 몸소 하느님의 부드러움을 체험하셨다.”
참으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cloness)’과 ‘부드러움(tenderness)’의 두 특성을 지니신 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셨던 마리아 성모님은 본능적으로 기쁘게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과 부드러움을 평생 훈련하시며 살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삼 영성생활에 영적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어제 ‘행복은 선택이요 발견이자 은총이다’라고 강론 제목을 했다가 아침식사 중에 벼락같이 ‘훈련’이란 말마디가 떠올라 즉시 ‘훈련’을 추가하여 ‘행복은 선택이자 훈련이요, 발견이자 은총이다’로 정정하니 마음이 참 개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성생활은 영적훈련입니다.
어제 수녀님과 면담 고백성사시 한없이 강조한 영적훈련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영적 훈련에 평생 영적 훈련병이란 수도자의 신분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영적훈련이 없어 무기력, 무감각, 무의욕으로 인해 내외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삶인 것입니다.
도대체 영적 훈련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도 회개도 찬미도 감사도 기쁨도 행복도 사랑도 겸손도 경청도 관조도 가까이 있음도 부드러움도 모든 수행이 사랑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저 역시 사랑도 훈련이란 깨달음에 매일 강론 쓰기는 물론이고 요즘 모든 편지 성격을 띠는 모든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반드시 “사랑하는”이란 말마디를 이름 앞에 붙입니다.
사소한 경우라도 사랑의 훈련이란 생각으로 아름다운 동영상이나 사진, 그리고 섬세한 문자 메시지를 선물로 보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겸손을 배우며 훈련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닮아 평생 사랑과 겸손, 침묵과 관조, 경청과 순종의 영적 훈련에 전념했을 마리아 성모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제1독서의 미카 예언자 역시 겸손의 영적 훈련에 달인이셨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미카 예언자를 통해 당신의 겸손한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이미 아득한 그 옛날 마리아를 통해 구세주 예수님 탄생이 예고됩니다.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민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올라간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참으로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은 사람들과는 달리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작고 가난한 겸손한 이들을 통해 묵묵히 일하심을 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삶의 스타일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를 보십시오.
하느님께는 버리실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참으로 별별 사람들 모두가 구원 역사에 한몫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눈엔 모두가 소중하며 가난하고 겸손하고 약한 이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특히 다말, 라합, 룻, 바쎄바, 구약의 기구한 팔자의 네 여인들이지만 참으로 눈밝은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은 이들을 당신 섭리의 귀한 일꾼들로 삼으시고, 마치내 신약의 마리아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 탄생때까지 그 오랜 세월 묵묵히 기다리신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겸손한 사랑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겸손과 인내의 사랑을 배우며 훈련하는 것이 바로 영적 훈련의 핵심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
이어 마리아의 천생 연분, 의로운 요셉을 통해 그의 지극한 겸손과 인내의 사랑에 대해 또 감격하게 됩니다.
영적훈련의 대가 요셉은 마리아와 더불어 우리의 영성생활에 영원한 멘토로 삼아야 할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들인 성 마리아와 성 요셉 부부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주님의 영원한 영적 훈련병인, 또 하나의 예수님들인 우리들 역시 영예스럽게도 또 하나의 이름이 수여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뜻의 ‘임마누엘’입니다.
정말 우리 모두 임마누엘답게 평생 겸손한 사랑의 영적 훈련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대로 이 아름답고 거룩하고 경건한 마리아 요셉 부부를 통해서 구세주 탄생이란 미카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예언이 실현되었고 우리는 착한 목자 예수님을 통해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라.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바로 우리의 평화이신 착한 목자,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평생 주님의 ‘평화의 전사’가 되어 오늘 탄생하신 마리아 성모님과 함께 영적 훈련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침 성무일도 시 아름답고 풍부한 즈카르야 노래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천주의 성모 동정녀여,
당신의 탄생은 온 세상에 큰 기쁨을 전하였나이다.
당신은 정의의 태양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를 낳으셨으니,
그분은 저주를 풀으시어 축복을 주시고,
죽음을 물리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중국의 현인 맹자의 모친은 맹자의 교육을 위해서 3번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시장 근처에 살았을 때는 장사하는 놀이를 했고, 장의사 근처에 살았을 때는 염하는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서당 근처로 이사하니 맹자는 글 읽는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맹자의 모친이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노력했다는 고사성어를 ‘맹모삼천’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학자인 율곡 이이의 모친인 신사임당은 뛰어난 학식과 예술적 소양으로 자녀들을 교육했다고 합니다.
신사임당의 자녀들은 학자가 되었고, 예술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2020년 9월 10일에 어머니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어느덧 2년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는 코로나 팬데믹이 엄중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맹자의 모친처럼 교육을 위해서 3번 이사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는 8번 이사하였습니다.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신사임당처럼 학식이 빼어나거나 예술적인 소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가족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머니는 가족들의 생일과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은 꼭 기억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추운 겨울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더운 여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계절만 대충 기억하는데 어머니는 정확하게 날을 기억하였고, 기일에는 가족들이 함께 미사 참례하고, 연도하도록 알려 주었습니다.
음력으로 지내는 가족들의 생일도 늘 기억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큰 형은 음력 8월이고, 작은형은 음력 11월이고 동생은 음력 9월이고, 저는 음력 4월입니다.
저는 정확한 날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늘 가족들의 생일을 기억해 주셨고, 미사 봉헌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어머니께서 꼭 하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제가 가야 할 본당이 정해지면 어머니께서는 먼저 성당을 방문하였고, 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토록 사랑했던 자식들을 위해서 먼저 하느님 품으로 가신 아버님과 함께 기도할 것입니다.
죄송하게도 저는 어머니의 생일도 음력 3월인 것은 아는데 정확한 날을 기억 못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기일은 꼭 기억해서 기도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바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성모님의 탄생을 생각하며 ‘성모찬송’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치신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때에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을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기도합시다.
하느님, 외아드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을 마련해 주셨나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이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오니 저희가 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우리는 생일을 맞이하는 분들에게 선물을 하곤 합니다.
선물은 주는 분이나, 받는 분이나 모두 즐거운 법입니다.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선물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기도, 우리들의 선행, 우리들의 나눔을 성모님께 생일 선물로 드리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글 쓰는 방법을 배운다, 책을 열심히 읽는다, 일상의 삶을 잘 관찰한다 등등의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직접 쓰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이 어떻게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완벽하게 하겠다고, 책만 읽고 글 쓰는 방법만 배우고, 일상 삶을 관찰만 하다 보면 그냥 그 모습에 멈출 뿐입니다.
알면 알수록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습니다.
글을 정말로 잘 쓰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강론을 위해 쓰는 원고를 보면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평소에 많은 책을 읽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일상의 삶을 잘 관찰하십니다.
여기에 깊은 묵상도 하니 깊이 있는 글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글을 혼자만 간직하지 마시고, 출판해서 신자들에게 나눠주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일에 앞서 잘 준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실 ‘준비’라는 이름으로 ‘두려움’을 표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서 계속 미루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을 얻지 못합니다.
이는 준비가 아니라 두려워서 고백하지 못한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종종 두려워하지 말라고, 또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맞이합니다.
성경에 성모님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던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공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역사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출생 내력이라고 할 수 있는 족보를 제시합니다.
그 역사가 영광과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함께 공존하는 역사이지요.
그 모든 시간이 지나야 메시아가 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을 잘 따라야 합니다.
파혼의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 예수님 잉태 때의 많은 일들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두려워하지 않고, 또 걱정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굳게 믿음으로 가능했습니다.
성모님 탄생 축일에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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