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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 9월 6일 임자 1번째기사 1785년 청 건륭(乾隆) 50년
보덕 정술조가 《예학집요》를 올리고 동궁의 교육에 대해 상소하다
국역
보덕(輔德) 정술조(鄭述祚)가 상소하고 《예학집요(睿學輯要)》를 올렸는데, 소장(疏章)에 대략 이르기를,
"고사(古事)를 본떠 세자(世子)에게 도움이 되는 옛부터 내려오는 격언(格言)과 가모(嘉謨)를 모아 장절(章節)을 나누어 모범(謨範)이 될 만한 말을 조열(條列)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는 국본(國本)을 정하는 일이요, 두 번째는 덕성(德性)을 기르는 일이요, 세 번째는 후손(後孫)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이요, 네 번째는 효제(孝齊)를 돈독히 하는 일이요, 다섯 번째는 빈료(賓僚)를 가리는 일이요, 여섯 번째는 교도(敎導)를 부지런히 하는 일이요, 일곱 번째는 학문(學問)에 힘쓰는 일이요, 여덟 번째는 게으르고 안일(安逸)함을 경계하는 일이니, 이름하여 《예학집요》라 하였습니다. 이어 생각건대, 우리 동궁저하(東宮邸下)께서는 어린 나이가 이미 4세인데 예질(睿質)은 하늘에서 타고났고, 덕성(德性)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이제 초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돌고 있으니 빈료(賓僚)로 하여금 번갈아 입대(入對)하여 기거(起居)와 언어 동작(言語動作)의 즈음에 돌보아서 도우게 하고 웃고 놀 때에도 좌우에서 함양(涵養)하도록 하며, 또 《동몽수지(童蒙須知)》와 《동몽선습(童蒙先習)》의 두서너 구절(句節)이나 혹 10여 자에서 쉽게 깨달을 만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해석하면 앞날의 진덕 수업(進德修業)하는 근본에 어찌 도움이 적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그대가 여러 해 궁료(宮僚)로서 도움이 되게 한 일이 적지 않았다. 작년 가을 시강원(侍講院)을 신설(新設)한 뒤에, 그대에게 궁함(宮銜)을 다시 임명한 것은 내가 기념(記念)하는 뜻이니 그대는 이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동궁의 생일이 내일인데 그대의 상소가 마침 들어왔으니 그대의 성의(誠意)를 내가 실로 가상히 여긴다. 덧붙여 올린 《예학집요》는 더욱 초학(初學)에 먼저 읽히는 것에 합당한데, 책 첫머리에 서문(序文)이 없을 수 없다. 서문을 바야흐로 내가 지으려고 하니 써서 내리기를 기다려 교서관(校書館)에 보내어 원서(原書)와 함께 간행(刊行)하여 서연(書筵)을 열 때에 진강(進講)하도록 하라. 끝에 진달한 궁료의 소접(召接) 문제는 삼가 고사(故事)를 상고하면 숙종조[肅廟朝] 때 서연(書筵)을 보령(寶齡)이 5세 때에 비로소 행하였으니, 곧 을사년155) 9월 초9일이다. 나도 성조(聖祖)의 고사에 따라 조금 동궁이 더 자라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공부하도록 하려 하였는데, 세갑(歲甲)이 거듭 돌아온 해가 마침 이때이니 기이(奇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글피에 그대들은 성조(聖祖)의 을사년에 진강(進講)한 《효경(孝經)》을 가지고 소대(召對)를 행하고 그대는 오늘 입대(入對)하라."
하고, 궁관(宮官)들에게 동궁(東宮)에 입대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좌정(坐定)하니 동궁이 곁에 모시었다. 임금이 보덕 정술조(鄭述祚)에게 말하기를,
"보덕은 옛날의 궁료(宮僚)로서 지금 또 입대하였으니 진실로 귀한 일이다. 어린이를 교육하는 방법은 일용 사물(日用事物)에 있는 것이므로 일찍이 비단[錦]옷을 입히지 않았다."
하니, 정술조가 말하기를,
"복(福)을 아끼려는 성상의 뜻을 신은 실로 공경하여 우러릅니다."
하였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효창묘(孝昌墓)에 세워진 신도비(神道碑).
원자료제목
· 표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명(文孝世子孝昌墓神道碑銘)
[내용 및 특징]
1786년(정조 10) 5세의 나이로 사망한 정조(正祖)의 장자(長子) 문효세자를 기리기 위해 정조가 직접 지어 세운 신도비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성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다. 휘는 순(㬀),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순조의 이복형이다. 1782년 10월 13일(음력 9월 7일) 새벽에 정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가 두 살 때 바로 왕세자로 책봉했다. 1786년 6월 6일(음력 5월 11일) 미시(未時)에 5세의 나이에 홍역으로 창덕궁의 별당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문효세자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 수립 후 태자로 추증되었다.
《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명(文孝世子孝昌墓神道碑銘)》의 서(序)에서 정조는 문효세자의 죽음을 두고 ‘지극한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 없다’는 심정을 토로하며 세자의 기질과 성품 등을 적어나갔다. 정조의 글에 의하면 세자는 백일이 안 되어서 병풍 속의 글자를 분별하였으며, 자라면서 기완(器玩)에 대해서는 좋아함이 없고 오직 서책을 좋아하였다고 하고, 『천자문』을 주고 빈료(賓僚)를 두었지만 개강(開講)을 허락하지 않았음은 너무 일찍 깨닫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자가 병고를 겪을 때의 상황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창경궁의 별당에서 병으로 누워있을 때 불을 좌우에 밝혀 두고 잠을 자는데 세자가 부르는 소리를 주위사람들은 잠자느라 알지 못하였지만 정조는 알고서 등불을 얻어서 급히 가서 구완하였다고 하였다. 또 정조는 오직 세자의 병에 대한 근심으로 뒤척이고, 약을 구할 수 없어 차마 그 사별하여야 함에 이르러서는 부모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는 등 안타깝고 비통한 심정을 절절히 묘사하였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디지털 장서각
읽는것도 어렵긔 ㅠㅠㅠ
세자가 총명하니 진도를 앞서서 예학집요를 배우게 하는게 어떠냐고 한 상소에 정조 왈, 원래 선조들도 5세에 배워서 세자도 그때 배우게 하려고 했는데 (후략) 이렇게 대답하신듯
너무 똑똑했는데 안타깝긔 ㅠㅠ
첫댓글 보통 아들머라는 외탁한다는데 모든걸 다 갖춘 의빈을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긔 ㅠㅠ 홍역걸려서 다 나았는데 갑자기 하루만에 상태가 위중해져서 떠났다고 하던데요 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222ㅠㅠㅠ 넘나 안타깝긔ㅠㅠㅠㅠㅠㅠ
33333 ㅜㅜㅜ
55 둘 다 머리 좋아서 정조 넘는 천재 기대해 볼만 했긔…
6666 ㅠㅠㅠㅠㅠㅠㅠㅠ
의빈이 똑똑했으니 .....반면 순조는 예........파고들면 순조도 어마어마한 암군이긔
2222 세상 무기력한데 재위 기간도 넘나 길었고요.... 아버지 반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았을텐데 네....
역사에서 '만약에'를 생각하다보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많은 것 같긔ㅠㅠㅠㅠ
역사공부에서 제일 의미없는 일이라지만 그만큼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어서 자꾸 생각해보긔 ㅜㅜ
역사에 만약이라는건 부질없다지만 문종이랑 정조는 진짜 너무 안타깝긔ㅠㅠ
아부지 어무니 다 저렇게 똑똑한 사람들인데 오죽했겠냐긔 흑흑ㅠㅠ
에고 ㅠㅠㅠㅠ 타임머신타고 진짜 홍역백신 갖고 가고싶긔 절대 문효 못건들게하고 암살당하겠지만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정조도 오래 살았을 거고요?ㅠㅠㅠㅠ 모두가 행복했겠넴ㅠㅠㅠ
안타깝고 안타깝긔ㅠㅠ
예방접종만 있었어도 ㅠㅠ 제가 과거로 가서 주사 놓고 오고싶긔..
저도 이런생각하긔 ㅠㅠ
안타깝긔 ㅠㅠ..
진짜 마음 시리긔 ㅠㅠ 너무너무 맘 아프긔 ㅠㅠ
정조 손자 헌종도 총명 했다는데 너무 빨리갔긔.. ㅠㅠ
세종이랑 정조 둘다 성군인데 다음 왕이 다 무슨일들이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과거로 가서 문효세자 예방접종 해주고 싶긔
홍역 개갞끼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