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발상지
원불교당 건물을 처음 만난 건 1970년대 중반이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 들머리에 위치했고 그 무렵에 막 들어섰던 터라 교당에 붙은 둥근 원불교 마크가 선명했다. 그 원형마크에 소태산 대종사가 궁극적 종교체험인 대각을 이룸으로써 창립된 종교교단이 법신불일원상法身佛一圓相을 종지로 하여 정신개벽을 주창하고 불법의 시대화와 대중화 생활화를 표방한 뜻이 담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였다. 당시 이 마크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교당의 성직자인 교무의 외양이었다. 까만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걸치고 머릴 정갈하게 단장한 모습이 흡사 조선시대 여인상이나 ‘상록수’ 속 채영신을 떠오르게 했던 것이다. 서면교당은 건물이 없어 다락방에서 법회를 가지다가 한국동란이 끝날 무렵 당시의 부산 변두리였던 부전동에 어렵게 교당을 마련한 게 시작이었단다. 그러다가 20여년 만에 부암동 새로운 부지에 교당을 크게 지어 옮길 때는 교세도 크게 늘어나 교인수가 1,300명을 넘었다고 했다.
아미동에 위치한 토성교당을 찾게 된 건 좀 의외였다. 원불교에서 외부인사 특강을 마련하면서 천주교 신자를 강사로 초청한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강사는 신라대 교수이자 소설가였다. 당시 그의 아들도 경남 고성 올리베따노 수도원장을 맡고 있었으니 천주교 신자가 타종교 교회에 출강하는 걸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가톨릭신문은 그 내용을 신문에 싣고자 했다. 신문사 편집자의 요청이 너무 속보여 첨에 난 시큰둥했다가 아니지, 이럴 때 원불교 내부를 구경해야지 하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런 나의 간사한 마음을 알길 없는 교당에서는 취재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대학병원과 가까운 교당은 밖에서 보기보다 성전 내부가 엄청 넓었고 비가 내리는데도 수강에 응한 신자들이 적지 않았다. 서면교당이 들어설 무렵에 임대로 시작했다는 교당이 불과 10여년 만에 건물을 새로 지었다니 원불교 교세확장엔 어떤 노하우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때 원불교 교무들의 활동도 타종교 성직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교화나 포교를 펼치는 것은 기본이고 사회복지시설에 봉사하며 교단 내 교육기관에서 행정이나 가르치는 일을 직접 맡기도 한다는 것. 남자교무는 혼인이 자유롭지만 여자교무는 혼인을 할 수 없고 혼인하지 않은 교무를 남자는 정남, 여자는 정녀라고 부른다니 호칭도 쉬웠다. 남자교무는 정남보다 결혼한 교무가 훨씬 많지만 여자는 전부 정녀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래서 여자교무를 아예 정녀로 부른다니 난센스가 아닐 수 없었다. 근래 들어 예비 여자교무들 사이에선 혼인을 허용하라는 주장을 한다니 종교에도 영원히 지켜지는 계율은 어려운 모양이다.
얼마 전 본 카페에 포스팅한 <영광원자력 방문기>에서 언급한 대로 원불교 발상지는 발전소 견학 덕분에 이루어졌으니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발전소장을 지낸 인사가 이 고장을 훤히 꿰고 있었으니 별도의 해설사가 없어도 좋았다. 전남 영광엔 이런저런 명소와 역사적 현장이 많으나 종교계에선 단연 원불교의 고장을 으뜸으로 꼽았다. 원불교 중에서도 영광읍 중심부로부터 약 10㎞ 거리인 백수읍 길룡리 일대는 종교가 시작된 제1성지로 연중 순례자들의 행렬이 이어진다는 것. 교조 소태산 대종사가 탄생하여 구도 대각하고 원불교의 문을 연 근원성지가 바로 이곳이다.
1916년 소태산 대종사가 개교한 원불교는 흔히 불교와 혼동된다. 그러나 불교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 중 하나가 원불교다. 전통적으로 불교가 출가승 중심의 수행과 승단구조를 갖는데 비해 원불교는 불교의 처처불상 즉 우주만물 어디에든 불성이 있다는 원리 아래 출가승 아니라도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생활불교의 특성이 강하다. 그래서 수행을 통한 깨달음과 견성보다는 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실 세계에서의 실질적인 도덕훈련을 강조한다. 불상 대신 圓을 모시는데 이 一圓相은 시작과 끝이 없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를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란 것. 교단에선 특히 은혜를 중시하며 四恩 즉 내가 받은 天地 父母 同胞 法律 네 가지 은혜를 돌려 갚는다는 것을 핵심 교리로 세우고 있다.
현재 국내에 15개 교구 550여개 교당과 180여 기관, 국외에 5개교구 14개국 51개 교당과 9개 기관 등을 두고 교화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교인은 140만 명. 심성계발훈련과 마음공부확산 은혜심기운동 남북 통일운동 종교협력운동 등을 통해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고 있으며 국내 4대종교 중 하나로 꼽히는 원불교다. 원불교는 서울과 부산 익산에 원음방송국을 연데 이어 최근 군종 진입과 함께 평양에 국수공장을 설립하고 캄보디아에 무료 구제병원을 연 것을 계기로 일반인들에게 훨씬 친숙해졌다. 한국 최초의 대안 중고등학교인 영산성지고와 성지송학중학교를 비롯해 새터민 청소년 교육기관인 한겨레중고등학교 등 7개교를 설립 운영하고 있으며 영어 중국어는 물론 체코어 힌두어까지 21개 언어로 교서 번역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성지는 대종사 탄생 후 29년간이나 구도자의 혼이 묻어있는 곳이라 탄생가를 비롯하여 구도지, 대각지 그리고 교단초기의 각종 행적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적과 유물들이 곳곳에 보관되어 있다. 주위에는 영산수도원을 비롯한 영산원불교대학교와 대안학교인 영산성지고등학교 그리고 영산성지송학중학교 등이 거대한 원불교단지를 이루고 있었다.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 길룡리 영촌마을의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나 1916년 26세의 나이로 깨달음을 이룬 인물이다. 지금도 길룡리 주민들에게 소태산 대종사는 어려서부터 자연현상과 생로병사에 대해 의심이 많았던 범상치 않은 인물로 전해진다.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대각의 기쁨을 표현했다는 소태산 대종사. 그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세우고 9인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불교, 대중불교를 표방하며 창시한 게 바로 원불교였다. 영산 성지가 있는 길룡리 일대는 대대로 궁벽산촌이었고 지금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성지에서 동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선진포에서 법성포까지 배를 이용해 다닐 만큼 바닷물이 성지 인근까지 들어왔고 성지 앞은 개펄지대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 후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바로 바닷물을 막아 이 개펄을 농토로 만든 간척사업인 방언공사다.
제자들과 함께 2차례에 걸친 공사 끝에 모두 5만평 200마지기의 논밭을 일구었다. 이른바 ‘정관평’으로 중국 당태종의 연호인 정관에서 따와서 평화 안락한 낙원세계 건설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대종사는 정관평 간척사업을 하면서 저축조합을 운영했는데 이 저축조합을 독립운동 자금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한 일경들에게 붙들려 수감되는 등 숱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이 정관평 논밭 가운데 130마지기는 원불교 교무들이, 70마지기는 주민들이 나누어 경작하고 있단다. 성지 한가운데 자리 잡은 초가집 영산원은 대종사와 제자들이 방언공사를 하면서 공사사무실 겸 집회소로 썼던 원불교 최초의 건물이었다.
영산원은 지금 전국에 퍼져있는 교당들의 효시 격이다. 1918년 지금의 성지에서 400m 떨어진 생가 터 옆에 지은 구간도실九簡道室이 원래의 건물이었으나 1923년 성지를 조성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구간도실이란 가로세로가 각각 세 칸인 아홉 칸 방에서 제자들이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는 집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 구간도실에는 원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지혈인白紙血印이란 이적의 전설이 담겨있다. 방언공사를 끝낸 대종사가 여덟 명 제자들에게 각각 칼을 나누어주고 원불교의 큰 뜻 즉 공도를 위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무여한死無餘恨의 정신을 시험했던 것.
대종사로부터 자결할 것을 명령받은 제자들이 자결하기 전 흰 종이에 맨 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었는데 모두 핏자국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교단의 신성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설로 통하지만 원불교 교역자인 교무들은 하나같이 교역의 으뜸정신으로 되새긴다. 석가모니불의 영산회상에 연원을 두었다는 영산.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은 영산회상을 재현할 것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 일군 이곳을 떠나 1924년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에 본산인 총부를 세웠다. 하지만 대종사가 득도했다는 대각 터에 세워진 대각기념비에는 지금도 만고일월萬古日月의 글씨가 또렷하다.
대종사의 뒤를 이은 정산 종사의 제의로 새겨진 원불교의 과거이자 미래의 압축 상징이다. 만고일월은 한 없이 오랜 세월에도 결코 다함이 없는 해와 달의 광명이란 뜻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지혜 광명을 말한다. 이 세상 형상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밝은 것은 해와 달의 광명이나 소태산 대종사의 광명은 영원한 세월에 해와 달의 광명보다 더 밝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부여와는 달리 조병화 시인이 이곳 비석에 새긴 ‘만고일월’은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어 보는 이의 심상마저 불러일으킨다.
만고일월
/ 조병화
이 바람부는 산천에서
얼마나 적막했길래
만고일월이라 했을까
실로 세월은 만고일월
일체 만물이 흥망과 성쇠
명멸로 이어지며
그 허망을 산다
오, 생존이여
가련한 먼지여
희로애락은
인간이 느끼는 바람일 뿐
어찌 그것을 영원이라 하리
계절의 여왕으로 불리는 5월이라 봄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지만 별천지로 꾸며진 성지 안에 장미와 같은 원색의 꽃들은 두질 않았다. 파릇파릇 돋아난 나뭇잎들이 신록으로 바뀌고 있는 성지엔 신비스런 별천지의 기운이 가득 맴돌고 있었다. 숫자가 적은 우리 일행에게 정성껏 성지 곳곳을 자상하게 안내하던 잘생긴 해설사 얼굴이 떠오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옛말이고 요즘은 이삼 년에도 천지개벽을 하는 세상 아닌가. 10년 전 그날 녹색으로 가득했던 성지에서 카메라에 담긴 단풍나무 잎이 눈길을 끌고 있다. 앞으로 10년 후에도 이 추억사진들을 대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