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03.204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대마도주 항복
대마도는 조선 땅이다
태종은 대마도를 점령하고 있는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에게 훈련관 최기를 보냈다.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는 것은 죄를 묻는 데 있고 많이 죽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경은 나의 생각을 몸 받아 적(賊)이 투항하여 나에게 오는데 힘쓰도록 하라. 또한 왜놈의 마음이 간사하니 방비가 허술하면 일을 그르칠까 염려 된다. 7월에는 폭풍이 많으니 경은 그 점을 잘 생각하여 오래도록 머물지 말라.”
태종은 군대를 출동한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는 간담이 서늘하게 해주었고 명나라에는 군대를 출동할 수 있다는 힘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정벌군을 조직할 당시부터 대마도를 점령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또한 대마도에서 무찌를 대상은 적(敵)이 아닌 도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대마도 도주(島主)는 도도웅와. 아버지 종정무(宗貞茂)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도주가 되었으나 부쩍 커버린 왜구(倭寇)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오히려 세력화된 왜구의 우두머리 소다가 도주를 위협할 정도였다. 소다는 오자끼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노략질로 부를 쌓아 도주를 넘보고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으니 철수하라
조선 수군이 출동하기 전, 오자끼가 왜구들의 소굴이라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당연 대마도 정벌군의 공격 목표였다. 조선군이 최초로 전투를 벌인 곳이 오자끼다. 오자끼는 소다의 영역이다. 접전하여 전과를 올린 129척의 배와 114명의 왜구들은 소다의 졸개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주(島主)를 넘보던 소다는 조선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궤멸되어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대마도 정벌군이 분쇄하고자 했던 적은 일본 정예군이 아니라 소다 휘하의 왜구들이었다 해도 큰 무리는 아니다. 이제 소다의 왜구들이 분쇄되었으니 철수하겠다는 것이다.
태종의 명을 받은 야전 사령관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에 하륙한 지 13일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빼낸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소다는 궤멸되었으나 명분 쌓기다.
“선지(宣旨)하노라. 대마도는 경상도의 계림에 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바다 가운데 있어 우리 백성들이 살지 않는지라 너희들이 왜국에서 쫓겨나 모여 살며 굴혈(掘穴)을 삼은 것이다.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宗貞茂)가 정성을 다한 것을 어여삐 생각하여 이(利)를 꾀하는 상선(商船)의 교통도 허락하였으며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수만 석이 넘었다. 보내준 식량으로 굶주림을 면하고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깨달아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생각하였으나 너희들이 배반했다.
우리의 위풍(威風)에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어 생활 하게 할 것이다. 만일 혼슈에 돌아가지도 않고 우리에게 항복도 아니 하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쳐들어가 칠 것이다.” - <세종실록>
너희들의 항복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이 항복 권고문을 가지고 대마도로 떠났다. 대마도는 옛부터 우리 땅이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항복하라는 것이다. 위기를 느낀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가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에게 신서(信書)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빌고 인신(印信)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다.
수강궁에서 긴급 전시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마도는 지금 비록 궁박한 정도가 심해서 항복하기를 빌기는 하나 속마음은 실상 거짓일 것이오. 만약에 온 섬이 통틀어서 항복해 온다면 괜찮겠으나 그렇지 않는다면 어찌 믿을 수 있겠소.”
“비록 온 섬이 통틀어서 항복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처치하는 것 역시 어렵습니다.”
우의정 이원이 난색을 표명했다. 대마도민 전체가 투항해온다면 그들을 먹여 살릴 일이 걱정이라는 것이다.
“수만에 지나지 않는데 그 정도를 처치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태종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생각이었다. 전체가 항복해오지 않으면 쓸어버리겠다는 위협이다. 태종은 대마도 전체의 투항을 설유(說諭) 하도록 했다.
“너희 섬사람들은 시초에는 도적질하는 것을 일삼아 우리 땅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다가 그 후 종정무(宗貞茂)가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빌기에 우리는 차마 그를 끊어버릴 수 없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따랐다. 허나 또다시 도적질을 하여 사단을 일으켰기에 병선을 보내 그 처자들을 잡아 오게 명했더니 너희들은 명령에 항거하여 감히 응전해 왔다.
병선을 5, 6백 척 내어 너희들을 다시 공격하면 스스로 굶주림과 곤란을 초래하여 그 자리에서 죽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 네가 와서 수호하기를 빈다마는 앞서도 수호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그같이 흔단(釁端)을 일으키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반드시 도주가 친히 와서 투항한다면 그 때에는 너희들이 항복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이다. 60일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 투항해 오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최후통첩이다. 선지를 받들고 대마도로 떠나는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곤혹스러운 입장을 표명했다.
“틀림없이 선지에 보인 뜻을 가지고 돌아가서 도도웅와에게 말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도내(對馬島內)의 사람들 모두가 도적이 아니온데 지금 내리신 선지는 다 도적질을 했다고 하였으니 마음 속이 정말 아프고 답답합니다.”
항복을 받아들일 테니 착하게 살아라
당시 대마도 백성들은 두 가지 부류였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바다에 나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도적이 되어 해적과 노략질을 일삼는 사람들이었다. 졸개들을 이끌고 노략질을 일삼던 소다는 산 속으로 도주하고 도적질을 하지 않은 도도웅와는 억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날벼락을 맞은 도도웅와는 조선에 감사해야 할 입장이었다. 자신의 지위를 위협했던 소다를 조선군이 와해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대마도를 다녀온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수강궁에 무릎을 꿇고 도도웅와(都都熊瓦)의 항복을 전했다. 조선 국왕이 자신을 대마도 도주로 상대해준 것만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태종은 항복을 가납하고 교유했다.
“사자(使者)가 서신을 전해 너의 항복의 뜻을 알았노라. 본도인(本島人)을 돌려보내는 것과 인신(印信)을 내려달라는 것이 가상하다. 너희들이 작은 섬에 모여들어 굴혈을 만들고 마구 도적질을 하여 자주 죽음을 당하는 바 이는 하늘이 내려 준 재성(才性)이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작은 섬은 대개 다 돌산이므로 토성이 교박(磽薄)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박혀 있어 물고기와 미역의 교역에 힘쓰나 사세가 그것들을 대기에 어렵고 바다 나물과 풀뿌리를 먹고 사니 굶주림을 면하지 못해 양심을 잃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니 나는 이것을 심히 불쌍하게 여기노라.
이제 너희들의 소원에 따라 비옥한 땅에 배치해 주고 하나하나에 농사짓는 차비를 차려 주어 농경의 이득을 얻게 하여 굶주림을 면하게 하여 주리라. 마음을 돌려 순종하고 농상(農桑)을 영위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섬의 행정을 관리할 자를 나에게 보내와 내 지휘를 받도록 할지니라.”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를 대마도로 돌려보낸 태종은 정벌군의 전면 철수를 명했다. 두지포에 진을 치고 있던 좌군과 우군이 철군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의 정치질서 속에 편입되어 조선 국왕이 관직을 내려주는 통치권속에 예속되었다.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면 한국 땅은 누구의 땅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조선군이 대마도에 주둔하지 않고 왜 철군했는지 아쉽다. 허나, 그것은 현재의 생각일 뿐 당시에는 조선군이 대마도에 꼭 주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마도는 조선 땅이었기 때문이다.
대마도 정벌군 사령관 이종무 장군이 두모포에서 출정할 때 2장의 지도를 휴대하고 떠났다. ‘조선팔도도’와 박돈지가 일본에서 들여 온 일본 지도였다. 이회가 그린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에는 대마도가 조선 땅으로 그려져 있고 박돈지가 들여온 일본 지도에는 대마도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이 두 개의 지도에 중국과 아랍지역을 합쳐서 만든 것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다. 현존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로 알려진 혼일강리역대국지도는 태종 2년에 제작되었다.
훗날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할 때 휴대한 일본지도에도 대마도는 없었다. 당시 조선과 왜국의 영토인식은 대마도는 조선 땅이라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 간과해서는 아니 될 일이 있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현재화 하면 혼란이 온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 ‘대마도는 우리 땅이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유 있는 항변임에는 틀림없다. 지자체 마산시에서는 대마도의 날까지 지정했다. 하지만 너무 감정적이었다.
대마도는 조선 수군이 분명 점령했다. 대마도 도주가 인신(印信)을 청했고 조선 국왕은 인신을 내려 주었다. 조선 국왕이 인신을 내렸다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 하면 우리가 대대로 중국의 고명(誥命)을 받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종무가 정벌했다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 하면 중국에 수없이 침략당한 우리나라는 중국에 수없이 편입되었단 말인가? 대마도 타령을 하다가 한국사 전체를 통째로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04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대마도 정벌군 개선하다
70년 묵은 때를 한 방에 보내다
대마도 정벌군이 개선했다. 태종은 병조참의 장윤화로 하여금 조강 어귀에 나가 동정군(東征軍)을 영접하라 이르고 세종을 대동하여 친히 낙천정에 거둥했다. 낙천정은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만년을 보내기 위하여 한강변에 지은 하계 별장 겸 이궁이었으나 중요 국사를 구상하는 산실이었다.
한강에는 한양 10경 중 하나로 꼽히던 제천정을 비롯하여 망원정, 천일정, 희우정, 효사정, 압구정 등 수많은 정자가 세워졌으나 낙천정은 그 격이 달랐다. 여타의 정자들이 먹고 마시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는 곳이었다면 낙천정은 국정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곳이었다.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구체화시켰던 곳이 낙천정이고 정벌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삼판선의 시험운행과 수군들의 진법 훈련을 진두지휘했던 곳이 낙천정(樂天亭)이다.
지난 9월, 낙천정이 준공되었을 때 참찬(參贊) 변계량이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지어 바쳤다. 변계량은 당대의 명 문장가였다. 태종은 명필 권홍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판에 새겨 낙천정에 걸어라 이르고 변계량을 불렀다.
“낙천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는가?”
“좌상 박은대감이 지었습니다.”
“무슨 뜻이라 하던가?”
“주역의 계사(繫辭)에서 낙천(樂天)이란 두 자를 따와서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경은 어떻게 해석하나?”
“주상전하께 왕위를 물려주신 상왕전하께서 때때로 보시고 노시며 만년을 편하게 보내시라는 뜻이라 사료됩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 편하게 놀아라?”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짓던 태종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때 태종 나이 52세였다.
“낙천이란 두 글자를 풀어보도록 하라.”
“범인(凡人)들은 세상과 인생을 즐겁고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라 하나 하늘이라는 것은 이치일 뿐이요, 낙이란 것은 억지로 애쓰지 아니하고 자연히 이치에 합하는 것을 이름입니다. 대개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이 묘하게 엉기어서 사람이 생기는 것인즉, 천리가 사람에게 품부(稟賦)된 것은 이와 같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경과 같이 박식한 신하가 있다는 것이 내 심히 마음 든든하도다. 허나 낙천(樂天)을 요천(樂天)으로 생각하는 미욱한 신하가 있을까 염려된다.”
한자는 상형문자다. 그러나 상형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개념과 존재가 있다. 이를 모양(形)과 소리(音)와 뜻(義)의 세 요소로 표현하도록 한 것이 육서(六書)다. 육서에 전주문자(轉注文字)가 있다. 락(樂)이 음악(音樂), 오락(娛樂), 요산요수(樂山樂水)로 표현되듯이 낙천을 요천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한 마디로 더 일해야겠다는 자신을 신하들이 알아주지 못한다는 질타다.
그릇이 큰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형
삼각산을 뒤로 하고 태종이 좌정했다. 옆자리에 세종도 자리를 잡았다. 태백준령 깊은 골에서 발원한 한강물이 넘실댄다. 도도하지만 낙천정 아래다. 강 건너 송파진까지 넓은 강폭에 짙푸른 한강물이 바다와도 같다. 남한산과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확 트이고 시원하다. 끝이 아스라한 잠실벌에 천군만마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 그릇이 큰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형이다.
대마도에 출정했던 야전군 총사령관 이종무 장군을 필두로 우박·박성양·서성재·상양·이징석이 상왕 태종과 임금 세종에게 승전을 보고했다.
“제장들의 승전으로 백성들의 걱정을 덜어주었고 나라의 근심을 씻어주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늘날의 계획으로는 병선을 더 만드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다. 함길도와 평안도에 명하여 각각 병선을 더 만들게 하였는데 강원도에는 소나무가 많을 것이니 강원도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하여 경상도로 보내어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수군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태종은 환관 최한으로 하여금 장수들에게 술을 치게 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태종을 배행했던 종친과 대신들도 참례한 연회는 날이 저물어서 파했다.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위로한 태종은 선양정으로 삼도도통사 유정현을 초치하여 별도로 주연을 베풀었다. 이종무·최윤덕·이지실·이순몽·우박·박성양·박초·이천 등 여러 장수들도 참례했다. 4품 이상의 종사관과 병마사가 모두 참석했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수성이다
연회는 흥겹게 베풀어졌다. 여러 장수들이 차례로 잔을 올리고 번갈아 춤을 추었다. 우의정 이원과 최윤덕이 각기 적군을 방어하는 계책을 토론했다. 영의정 유정현이 태종에게 술을 올리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창업의 어려움과 수성(守成)의 쉽지 않음을 날마다 생각해야 하실 것입니다.”
“내가 할 말을 영상이 하는구려.”
흡족한 미소를 띠우던 태종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종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수성이란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상은 잘 들어 두어라.”
이러한 태종의 소신은 유시(諭示가 되어 세종14년, 함길도 북변에 김종서를 보내어 4군과 육진을 설치함으로서 현실화 되었다.
왜구를 크게 무찔러 공을 세운 장수가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다. 아기바투(阿其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대파하여 황산대첩(荒山大捷)의 위업을 작성한 곳이 남원 운봉이다. 내륙 깊숙이 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를 당하고 몰아낸 것이 아니라 쫓아가서 항복을 받아낸 것이 대마도 정벌이다. 발상이 다르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평범한 진리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태종은 연회가 파할 무렵, 유정현과 이종무에게 각각 말 한 필과 안장 한 벌씩을 하사했다. 윤덕 등 일곱 사람에게는 각각 말 한 필씩을 하사하고, 병마사 이하 군관 중 정벌에 나가서 공이 있는 자에게는 차등대로 상을 내리게 하였다. 또한 동지총제 이춘생에게 술을 하사하여 동정군중(東征軍中)에 나아가 제장들을 위로하라 명했다.
승전보에 고무된 조선 조정은 잔치가 벌어졌다. 논공행상이다. 이종무를 의정부 찬성사, 이순몽을 좌군 총제, 박성양을 우군 동지총제로 승차 임명했다. 정벌에 참여한 여러 절제사는 모두 좌목(座目)을 올리고 전사한 병마부사 이상은 쌀과 콩 각각 8석, 군관은 각각 5석, 군정은 사람마다 3석을 위로품으로 내려주었다. 동정(東征)에 공을 세워 상직을 받은 자가 2백여 명이었다.
전쟁이 끝났다.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가 조선의 정치 질서 속에 편입되고 부하 시응계도(時應界都)를 보내왔다.
“섬사람들을 가라산(加羅山)에 주둔하게 하여 밖에서 귀국(貴國)을 호위하도록 하겠으며 조선의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의하여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또한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오나 백성들이 섬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땅에서 세금을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 쓰게 하옵소서.”
도도웅와의 청을 가납한 태종에게 경상도 관찰사가 장계를 보내왔다.
“일본국왕이 보낸 사신 화자·양예와 구주총병관(九州摠兵官) 사인(使人) 등 다섯 행차가 도두음곶(都豆音串)에서 사로잡혔던 전 사정(司正) 강인발과 대마도를 정벌하러 갔을 때 포로가 되었던 갑사 김정명 등 4인을 데리고 부산포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의 대마도 정벌은 섬나라를 흔들었다. 강진이었다. 조선은 승전을 만끽하고 있는 사이 규슈를 비롯한 일본열도는 여진이 계속되었고 일본 국왕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13일간의 점령이 아쉬웠지만 고려 말부터 70여 년간 우리나라를 괴롭혔던 왜구 문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