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야속하게도 방송국에서는 좀처럼 우리의 곡을 틀어주지 않았다. 아마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보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앨범은 냈지만 전혀 알려지지 못한채로 88년의 봄과 여름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앨범을 내고 그것으로 가수로서 우뚝 선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한국의 대중음악계가 결코 어릴적 우리가 생각하던 것처럼 허술하지도 않고, 음악이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것도 아니란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가을 찬바람이 쓸쓸히 불기 시작했다. 그 찬바람에 우리의 마음은 더욱 황량하고 쓸쓸해졌다.
그러나 찬바람과 함께 조금씩 우리의 앨범판매고는 오르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서서히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3] 첫 콘서트는 실패, 두번째는 성공
(송경호)
89년초 그때까지 내가 속해있던 그룹 태백산맥이 멤버들간의 의견차이로 해체됐다.
그 소식을 들은 영석이형이 달려왔다. 서울음반시절 같은 연습실에서 만나며 친해졌고, 푸른하늘 1집을 낼때 드럼 세션을 해준적도 있어 우리는 이미 둘도 없는 음악단짝이었다.
영석이형이 이 기회에 푸른하늘에 합류하는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의견을 비쳐왔다. 나 역시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날 이후 드디어 나는 푸른하늘의 드럼주자가 된 것이다.
푸른하늘에 합류하자마자 우리는 우리의 콘서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집 <겨울바다>가 서서히 좋은 반응을 일궈가고 있으니 이 기회에 콘서트를 열어 대세를 몰아가자는 것이 우리의 의도였다.
우리는 일단 서초동 영석이형집 지하실에서 연습실을 차렸다. 그리곤 매일 그 집으로 집결, 밤낮없는 연습에 들어갔다. 집이 단독주택이라 주위에 신경쓸건 없어 좋았는데 문제는 집안 내부에 있었다.
지하연습실 바로 위에 1층 식당이었는데 우리가 연습을 하면 쿵쿵거리는 소리에 영석이형 아버님이 진지를 제대로 드시지 못한다는 거였다. 특히 좋은 비트를 위해 온 힘껏 북을 때리는 내 소리가 특히 귀에 거슬린 것은 당연한 일.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아무리 좋은 곡을 연주하고 있을때라도 아버님 식사시간이 되면 중단하고 우리도 식사를 하는 것으로 습관을 들였다.
음악연습을 하는 틈틈이 우리는 외모치장에도 열을 올렸다. 패셔너블 그룹이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우스웠던 만큼 당시 우리에게는 재미있는 목표였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지지고 볶고 이태원, 신촌, 이대앞 등지를 돌아다니며 요란한 옷을 사입었다. 얼마나 요란했던지 어떤때는 길가 쇼윈도에 비친 우리 모습에 우리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드디어 콘서트 날짜가 됐다. 장소는 계몽문화센타 아트홀이었다.
공연 전에 공연장 문을 지켜보았다.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공연이 시작돼 무대에 올라 언뜻 객석을 보았더니 전체 객석의 3분의 1정도 사람으로 차 있었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무대에 불이 들어오고 우리 모습이 드러나자 "쟤들이 푸른하늘이야" "모습이 왜 저래"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패셔너블한 우리 모습은 요란함에 노래만을 듣고 우리를 상상하던 관객들에게 실망을 주는 모양이었다.
그때가 89년 7월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큰 반응이 일었다.
라디오에서도 우리 노래가 자주 나오기 시작했고, 레코드가게 앞을 지나다가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음반판매량이 부쩍부쩍 늘었다. 우리는 신났다. 열심히 만든 만큼 보람도 큰것 같았다.
우리는 처음보다는 훨씬 자신을 가지고 다시 2번째 콘서트를 기획했다. 63빌딩이었다.
무대에 오르니 객석은 빈틈없이 차 있었고, 더러는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일어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영석이형 얼굴을 힐끗 보니 영석이형 얼굴도 기쁨에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쁨에 떨리는 것도 잠시, 이번에는 어마어마한 관중 앞에서 긴장으로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드럼스틱을 잡을 손이 와들와들 떨려 그대로 드럼에 갖다대면 덜덜덜 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질 것 같았다.
긴장속에서도 첫번째 콘서트보다는 훨씬 만족할만한 연주와 노래를 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바로 방배동의 단골 선술집으로 몰려가 자축연을 열었다. "브라보" "푸른하늘 만세"등을 외치며 우리는 엉망으로 취해갔다.
취중에도 2집 앨범에 대한 세상의 반응과 그날의 콘서트 상황을 생각하면 바보처럼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때 TV에 많이 출연했었다. KBS-2TV <젊음의 행진>을 당시는 양기선PD님이 연출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5주 동안 연속으로 출연했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무슨 치기로 그랬는지 5주동안 똑같은 옷을 입고 나갔다. TV에서도 별 가식없이 우리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5주 동안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게 우리의 본모습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도 연출자께서 우리들을 이해해준게 지금 생각하면 고맙다. 사람은 실수를 너그럽게 감싸주는 어른들로 인해서 커나가는 것 아닌가. 멤버 중의 또 한사람이 나가고 드디어 푸른하늘은 나와 영석이형 둘이 오롯이 남게 됐다.
전혀 멤버 보강의 생각은 없었다. 우리끼리 편하게 하면서 그때그때 나머지 부분들을 보강하면 되리라 여겼다.
지금까지 둘이 별 무리없이 진행해 온걸 보면 그때 우리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4] 발라드 위주의 2,3집
(유영석)
첫 콘서트의 실패를 딛고 우리는 다시 2집 준비에 들어갔다.
콘서트는 실패했지만 경호가 우리 팀에 들어와 있어서 든든했다. 일단 몸집이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 늘 옆에서 사람을 훈훈하게 해주는데다 드럼 또한 정확한 비트에다 풍부한 감정을 섞어 누구보다도 든든하게 우리의 음악을 흔들리지 않게 해주었다.
그 사이에 멤버가 줄었다. 멤버중 1사람은 군에 입대하고, 키보드를 치던 친구는 개인사정으로 나갔다. 더 보강하지는 않았다. 건반과 드럼, 기타가 있고, 나머지 필요한 악기는 그때그때 세션맨들에게 협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3명으로 2집 준비를 시작했다. 2집에서 심혈을 기울인 곡은 <눈물나는 날에는>이었다. 발라드 위주의 산뜻한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녹음이 시작됐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번 해본 녹음과는 영판 달랐다. 최고의 스튜디오에 최고의 기자재를 쓰는 녹음이었다. 자유롭게 음악을 하던 경호도 메트로놈으로 엄격하게 박자가 구획지어져 가는 녹음은 처음인 듯 했다.
경호는 녹음이 중간쯤 진행됐을때 급기야 메트로놈 공포증을 일으켰다. 술이 취하면 어디선가 똑딱거리는 메트로놈 소리가 들려온다고도 했다.
그 즈음 돌아가신 김현식 선배를 만났다.
김현식 선배와의 첫대면은 동아기획 사무실에서 였다. 가만히 숨죽이며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어깨를 툭 치곤, "네가 유영석이냐"고 심드렁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얼른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현식 선배는 회사 여직원에게 1천원을 주고는 소주, 오징어, 담배를 사다줄 것을 부탁했다. 내 머리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주, 오징어, 담배가 1천원으로 될것 같지 않았는데 여직원은 선뜻 나가서 그것들을 구해왔다.
소주를 간단히 딴 김현식 선배는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부었다. 그러더니 불쑥 내 앞으로 내밀곤 "마셔"라고 전했다. 어느 선배의 영인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마셨다. 그렇게 간단히 둘은 소주 한병을 비웠다. 그것도 훤한 대낮에.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짖궂은 장난도 많이 쳤지만 언제나 후배들에게 정이 많았던 선배였다. 무엇보다도 음악에 관한 열정만은 대단했다.
녹음이 끝나갔다.
<눈물나는 날에는>은 나 혼자 15번이나 불렀고, 또 그룹이 같이 5번 이상을 연주한 끝에 2번째 앨범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2집 후에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있다. 같이 자주 만나 음악얘기도 하고, 가끔 술도 마시고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음악 때문에 생기는 쓸쓸함을 털어버리는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친구라기보다는 음악과 인생에 있어서 선배들이었던 이 사람들은 바로 박학기형과 장필순 선배다. 같은 소속사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러가지 음악에 대한 생각들이 잘 맞아 유난히 자주 어울렸다.
누구 공연이 끝나면 어김없이 방배동의 <오두막>으로 모여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박학기형은 노래만큼이나 따스한 말로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줬고, 학교선배이기도한 장필순 선배는 항상 한쪽에 앉아서 가만가만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음악에 댜한 화제가 나오면 느닷없이 끼어들기도 했다.
이 그룹들이 우리의 3집중 <우리 모두 여기에>라는 노래로 같이 모였다.
노래제목이 <우리 모두 여기에>인 만큼 우리는 모두 여기(녹음실)에 같이 모였고 함께 노래를 불렀었다.
그렇게해서 90년 9월경에 3집이 나왔다.
<우리 모두 여기에>외에 <이밤이 지나도록>등이 3집을 내고나니까 조금은 정체된 느낌이었다. 무엇인가를 시작해서 몰두하다가 어느 경지에 오르면 정체되는 듯한 느낌 뭐 그런 것 비슷했다.
경호와 나는 그런 느낌을 버리기 위해서라도 또 하나의 변신에 몰두했다.
발라드 위주로만 가꿔오던 우리의 분위기를 좀더 록 쪽으로 바꿔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첫시도는 일단 라이브무대였다.
그즈음 자주 갖기 시작한 라이브무대에서 일단 좀더 열정적으로 우리의 분위기를 바꾸고 그렇게해서 축적된 것들을 다시 앨범에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다시 복장이 요란해졌다. 긴 바바리 코트를 입고 무대에 올랐고, 될 수 있는대로 색안경을 썼다. 그리고 경호는 드럼을 치기 대문에 앉아 있어야 하지만 건반 외에 기타를 치면서 움직일 수 있는 나는 될 수 있는대로 무대를 폭넓게 썼다.
그러면서 우리의 4집 준비에 들어갔다. 장필순 선배 역시 코러스를 맡아 우리의 앨범을 충실하게 해주었다.
[5] '마벨러스 가이스'와 '유토피아'
(유영석)
나의 음악출발은 역시 피아노였다. 어릴 적부터 배운 나의 피아노 실력은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는 정평이 나있었다.
중3때이던가 학교에서 내노라하는 걸물들이 그룹사운드를 만든다고 법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필이면 고교입학 시험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굳이 왜 그랬는지, 그것도 일종의 사춘기 반항심리였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룹사운드를 만든다는데 내가 빠질수는 없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피아노 달인인 내가 빠진다는 것은 그 생겨날 그룹사운드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친구들에게 주지시켰고 그 친구들 역시 나의 말에 꼼짝없이 동의할 수밖에.
그래서 탄생한 그룹이 <마벨러스 가이스>였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음악이라고는 진짜 조금밖에 알지 못하고 얼굴에는 솜털도 제대로 가시지 않은 어린 녀석들이 그룹사운드라고 만들어 놓고 '놀라운 녀석들'이라는 이름을 지었으니 누가 옆에서 봐도 코웃음을 칠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룹 이름 그대로 놀라운 녀석들이 되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나는 선반도 맡았고 때에 따라서는 기타도 쳤다. 신났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속했던 그룹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같이 모여서 신나게 연주하고, 우리 딴에는 제법 심각하게 기성 가수들을 성토하고 그러는 것이 일이었다.
물론 신나게 연주하고 집에 들어가면 아들이 혹시 잘못된 길에라도 빠지는 것이 아닌가를 염려하는 부모님들에 의해 혼쭐이 나는 것도 그때 우리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때 나는 1집에 들어있는 <겨울바다>를 작곡해 놓았다.
그 '놀라운 녀석들'에 속해있던 어느날 집에서 무심코 치다가 <겨울바다>의 중심이 되는 멜로디를 만들어냈고 친구들에게 그 곡으로 나의 작곡실력을 과시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교에는 무사히 들어갔다. 경기고등학교였다. 들어가자마자 각종 학교에서 들어온 내노라하는 어린 뮤지션들이 끼리끼리 모였다.
'누구는 기타를 기자 막히게 친다더라, 누구는 목소리가 뛰어나고 또 누구는 키보드 연주가 프로 연주자들 실력이라더라...' 우리는 그런 얘기들을 하며 서로를 견제했고, 물론 그런 얘기들 속에는 "유영석이는 피아노도 잘치고 기타도 만질 뿐만 아니라 작곡하기도 했대"하며 과장되게 떠들어댔다.
어느날 음악에 관심있는 애들이 '유토피아'라는 이름이 거창한 그룹을 조직했다.
나도 당연히 건반 주자로 참가했다. 그 얼마 뒤에는 유토피아가 해체되고 '달과 6펜스'라는 묘한 아름의 그룹에 참가하기도 했다.
고교시절의 그룹생활은 지금보다는 훨씬 젊었던 만큼 재미있었다. 모여서 연습보다는 당시 한창 이름을 날리던 가수들 얘기가 더 많았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연습을 하면 또래들 사이에서는 실력있는 음악인으로 통해 우쭐해하기도 했다.
운이 좋은 때는 여학교 예술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그런때는 짧은 머리를 만지고, 또 만지고 잘 나지도 않는 모양을 한껏 내었다.
당시 나의 우상은 김수철선배였다. 노래도 노래지만 그 선배의 현란한 기타연주가 TV로 나올때면 정신없이 몰입했었다. 방송이 끝나면 그 선배가 기타치던 모습을 그리며 그것을 흉내내 보기도 했다.
우리끼리는 고교만 졸업하면 바로 TV에 나오게 되고 우리는 엄청난 스타가 될줄로 알았다. 우리가 가진 좁은 세상에서는 우리의 음악이 굉장한 것으로 스스로 믿었다.
고교시절 어느날 우연히 TV에서 그룹 마그마의 연주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현란한 기타연주에 충격을 받았다.
그날부터 나는 피아노를 팽개치고 기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기타 애드립이 없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 좋아하던 엘튼 존의 음악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음악은 무조건 서정적이어서만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에는 사이키델릭한 음향이 가져다주는 몽환적인 아름다움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매일 기타를 붙잡고 유명 기타리스트드르이 연주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음악을 좋아하기 해도 점잖게 피아노만 치던 아이가 어느날부터 앰프 기타로 시끄러운 소리들을 울려대기 시작했으니 부모님들이 놀라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중단하지 않았다. 서서히 학교에서 기타에 관한 내 열정과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경기고교에서 가장 기타를 잘치는 학생이 돼갔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교실 맨 뒤에서 봉걸레 자루를 기타처럼 들고 나의 현란한 손놀림을 과시했다. 봉걸레가 여의치 않으면 테니스부 친구들의 테니스라켓도 이용했다.
자연히 성적은 시베리아 겨울에 수은주 떨어지듯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교1학년때까지의 성적은 아주 좋은 편이었는데, 기타에 몰두하면서부터 처음에는 10등 밖으로 밀려나고, 그 다음에는 중하위권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기타 실력만 오르면 그때는 좋았다.
그 기타실력에 잔뜩 자만하고 있던 그 즈음.
우연히 고등학교 밴드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지금 시나위라는 그룹을 이끌고 있는 신대철씨가 그때 기타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자만심은 여지없이 깨졌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이제 겨우 기타를 시작하는 셈이었다.
예술적 기예에서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을 만났을때 드는 그런 열패감과 당혹감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뒤바꿀 수도 없고, 어쩔수없이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그때 나에게는 대단한 고통이었다.
같은 학교 1학년으로 손무현이란 친구가 입학했다해서, 그의 연주솜씨를 보러간 적도 있었다.
세상에는 왜 그리 기타 잘 치는 사람들도 많은지, 더구나 손무현은 나보다 연배가 어린 학교 후배 아닌가. 그것은 신대철씨를 보았을 때와는 또다른 당혹감과 열패감이었다.
[6] '드럼 잘 치는 애'
(송경호) 이제 어린 시절의 얘기를 할 때가 된것 같다. 너무 어린 시절은 말고 내가 기타도 아니고, 피아노도 아닌 드럼이라는 악기에 심취하게된 중학교 시절의 얘기부터 해야되겠다. 어쩌면 그때가 가장 내 삶에서 무엇을 배워 보겠다는 의욕이 불타던 때였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드럼을 처음 본 것은, 아니 그 전에도 그냥 세상에 있는 정물로서 본적은 있지만 그것이 악기라는 생각으로 심각하게 본 것은 중학교 3학년시절, 친구들이 다들 고교입시에 바쁠 때였다.
학교에 있는 음악서클에서 우연히 한 친구가 드럼치는 모습을 보았다. 내 또래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무척 어린 나이인데도 그 친구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신나게 드럼을 쳐대고 있었고, 그 동작은 꽤 그럴듯한 소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연히 다른 친구를 만나러 그 방에 들렀던 나는 그 모습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동작, 신나는 소리... 그런 것들이 그때 내가 머리속에 떠올린 단어들이었고, 그날 이후 나는 드럼 열병에 걸렸다.
그리고 엄마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드럼 학원에 다니게 해주세요" 나는 부엌에서나 안방에서나 엄마를 따라 다니며 그렇게 졸랐다. 엄마는 그때마다 "아니 기타도 아니고, 피아노도 아니고 웬 드럼이냐, 더구나 고교입시를 눈 앞에 둔 아이가"하며 나를 혼내셨다.
그럼에도 나는 지칠줄을 모르고 졸랐다. 식음을 전폐함은 물론, 뜻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공부까지도 전폐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 중학교 3학년 아이에게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나왔는지, 그렇게 졸라대기를 일주일, 내 눈빛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엄마는 드디어 협상을 제의해왔다.
"다음달 성적이 학급에서 10등 이내에 들면 그땐 드럼학원에 보내주마"
엄마의 제의를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로 나는 내 방에 틀어박혀서 내 삶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에 열중했다. 드디어 그 다음달 나는 10등 이내 진입에 성공했다. 물론 여유있게 진입한 것은 아니고 턱걸이였다.
그러나 계약은 계약이었고, 성적표를 늠름하게 엄마에게 제출한 즉시 나는 드럼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학교가 파하자마자 가방째 들고 학원으로 달려가 북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소음이었지만 차차 음악의 리듬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씩 발전돼 가는데 스스로 느껴질 때마다 뛸듯이 기뻤다. 공부를 그런 열정으로 했으면 지금쯤 노벨상 정도는 타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서히 나는 학교에서 '드럼 잘 치는 애'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고교때 나는 서브웨이라는 경신고등학교 그룹사운드에서 활동했다.
당시 나는 우리 또래에서는 드물게 기타를 치는 편이었기 때문에 여러 그룹들에서 나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있었다. 우리 역시 평소때 틈틈이 연습하면서 실력을 닦아 봄, 가을이 되면 각 학교 축제에 출연했다.
특히 기억남는 것은 고려대학교 역도부 형들이 여름에 합숙훈련을 가면 우리는 여름 캠핑 겸 그 형들의 여흥을 돕기위해 떠나곤 했다.
낮에 형들이 연습을 하면 우리끼리 놀다가 밤이 되어 여흥 시간이 되면 우리 그룹 서브웨이의 연주실력이 발휘되었다.
체격이 우람한 역도부 형들과 같이 있으면 불량배들에게 맞을 염려도 없어 좋았다. 그때 내 체격을 보고 역도부 형들은 드럼을 치는데도 어울리는 체격이지만 역도에도 어울릴 체격이라고 역도를 권하기도 했었다.
70년대 음악을 하던 선배들과 우리 세대는 그 음악을 접하게되는 시작부터 많이 달랐다. 선배들이 통기타를 들고 어렵게 음악을 해왔다면, 우리 세대는 어릴적부터 여러 악기를 접하며 비교적 풍족하게 음악을 한 편이다.
과거의 부모님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많이 이해하지 못했다면 우리 세대의 부모님들은 비교적 자식이 음악하는걸 많이 이해하시는 편이었고 그 중에는 비싼 장비를 사주면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부모님도 계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또래의 어떤 가수들은 어릴때 피아노를 배우며 신시사이저와 컴퓨터 시스템까지 갖춰진 음악실을 집에 만들아 놓고 일찍부터 좋은 조건에서 음악에 몰두했던 친구들도 있다. 유복한 집안 출신의 가수가 최근 많아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고교 입학하면서부터 나는 그룹 사운드 조직에 강한 욕망을 가졌다. 기타를 좀 치는 애들에게는 "너 베이스 한번 쳐보지 않을래"하며 말했고, 피아노를 좀 친다는 애들에게는 "키보드가 더 어울리겠어"라고 말했다.
결국 그렇게해서 그 친구들을 다 각 악기를 연주하는 학원에 등 떠밀다시피해서 보냈고, 얼마만큼 시간이 지났을때 그 친구들을 모아 그룹사운드를 만들어 연주를 시작했다. 해가는 과정에서 많은 멤버들이 바뀌었지만 지금 들국화에서 전인권선배님과 같이 활동하고 있는 민재현이라는 친구는 기억이 난다.
우리는 미아리에 있는 한 연습실에서 연습을 했는데 그때 지금은 굉장한 스타가 된 신해철도 그 연습실을 오갔던 걸로 기억한다.
얼마후 우리는 그 연습실 사람들의 소개소개로 멤버를 보강, 태백산맥이라는 헤비메탈 그룹을 조직했다. 최근 <드라이브>라는 노래로 인기를 끌고 있는 최용준이 그때 그룹의 리드싱어였다.
우리는 열심히 연습했고, 강남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음악수준이 좀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강북지역 고교생들 중에서는 거의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엄청난 자만심을 키우며 연습해 나갔다.
3학년이 되어서 다른 친구들이 대학입시에 정신이 없을때도 나는 음악에만 몰두했다.
집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나는 걱정의 말들이 나올때마다 "나는 고교만 졸업하면 단숨에 인기스타가 될거야"라고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말하곤 했다. 그때 생각에는 진짜 조금도 대학갈 생각이 없었다. 온세상이 음악뿐이었고, 나의 길은 그 사이에 있었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한철동 선생님이셨는데 선생님은 "네가 세상에서 가장 잘할 자신이 있는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 대학입학이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라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선생님이셨다.
[7] 대학시절과 그룹 태백산맥
(유영석)
3학년이 되었다.
대학진학이 눈앞에 오면서 아버지는 "네가 정 음악이 좋다면 음대에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 음대에 가면 록음악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음대에 가기는 싫었다.
성적은 여전히 떨어져 있었다. 3년동안 해온 음악이 실상 대학진학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시험일짜가 되었고, 나도 시험을 쳤다. 특별히 어느 대학 어느 과에 가야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있는 실력대로 최선을 다해서 일단 합력고사를 쳐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85년 아주대학교 공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산업공학에 특별한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점수에 맞춘 선택이었다. 같은해 입학한 산업공학과 신입생은 99명이었는데 여자는 1명이었다.
막상 입학은 했으나 학교에 나가기는 싫었다. 늘 음악만을 하다가 딱딱한 공학을 대하니 전혀 흥미가 일지 않았다. 1학년 1학기를 억지로 마치고 그 다음부터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집에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좀더 내 흥미에 맞는 학교를 가려고 남몰래 재수를 시작했다.
아침에 학교가는 것처럼 집에서 나와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물론 가방에는 대학 교재 대신 고교 참고서 등이 들어 있었다. 그해 다시 학력고사를 봤다. 점수는 오히려 떨어졌다. 그 점수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학교, 학과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때 한 친구가 서울예전을 추천했다. "아마 그 학교에 가면 너가 하는 음악을 계속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 친구가 말했다.
나는 전후기 아무 대학에도 원서를 넣지 않았다. 그리고 서울예전 작곡과에 응시했다. 실기시험을 볼때 기타를 연주할까, 피아노를 연주할까 고민하다가 피아노를 선택했다. 아무래도 피아노를 더 오랜 시간동안 연주해와서 자신이 더 있었다.
실기 때보니까 기타로 시험을 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하나 같이 현란한 기타솜씨를 갖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거의 기타리스트가 된다는 꿈은 포기했다.
합격이었다. 그리고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박학기형, 조갑경, 김건모 등이 과는 달랐지만 나와 서울예전 동기동창생들이다.
대학 1학년때 많이 한 일은 무용음악을 만들었던 일이다. 학교에 박일규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이 피아노 연주실력이 괜찮다던데 무용음악을 만들어보라고 권했다. 그때부터 크고 작은 무용음악을 만드느라 이뮬레이터라는 시스템 악기를 붙들고 밤을 샜다.
<검정불의 춤>이라는 대한민국 무용계 참가작품의 2부에 쓰이는 음악을 만드느라 머리를 싸맨 일도 있었다.
어떤 때는 무용음악을 만드는 일이 워낙 힘들어 몰래 도망가 있으면 박일규 선생님이 찾아와서 나를 데려갔다.
자의든 타의든 열심히 해서인지 <검정불의 춤>은 그해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평론가 음악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1부 음악을 맡으셨던 김영동 선생님 때문이지만 나도 기여를 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그해 대상작품은 김수철 선배님이 음악을 맡았던 <영의 세계>인가하는 작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무용음악은 곧 싫증이 났다. 행동에 맞춰가며 음악을 하는게 그리 신나지는 않았다. 또한 내 취향의 음악들이 곧잘 변형되는 것도 썩 즐겁지는 않았다. 어쨌든 무용음악에 몰두한 공로로 학교에서는 장학금을 주었고 학점도 잘 나와서 나중에 나 혼자 생각으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우연히 선배를 통해서 <비상탈출>이라는 그룹에서 건반을 맡았었다. 나중에 유명해졌던 그룹 <벗님들>의 전신격인 그룹이었는데 음악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또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결성된 그룹<푸른하늘>을 통해서 뭉쳐나타나는 것 같았다.
(송경호)
드디어 고교교육의 모든 교과과정이 끝났다. 졸업식도 하기전 우리는 머리를 한껏 기르고 83번 버스를 탔다. 신촌에 있는 록월드라는 음악 카페로 가는 길이었다. 가서 오디션을 보고, 그 무대에서 유급 연주를 할 계획이었다.
연주를 하다보면 우리의 연주실력에 감탄한 제작자들이 서로 몰려들어 앨범을 내자고 할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만만했다. 83번 버스에 각자 악기를 챙겨 올라탄 우리 5사람은 마치 OK목장으로 결전을 향해 가는 건매들 바로 그 모습이었다.
드디어 우리 태백산맥의 멤버들은 카페 록월드에 입성했다.
전무라는 분이 우리를 맞았다. 전무는 잠시 위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긴장을 풀지않고 각자 멋진 자세를 취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마침 시나위라는 그룹이 앨범 준비를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우리는 아무말도 안했다. 이미 처음의 노련하고 멋진 자세는 당혹감으로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우리는 그냥 그 카페를 나왔다. 돌아오는 길은 훨씬 참담했다.
이미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굉장한 스타라는 우리의 자부심은 온데간데 없었다. 아무말없이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각자 집에서 초라해진 우리 자신들에 괴로워하는 시간이 계속됐다.
보름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 연주 한번에 우리가 너무 주눅든것 아니냐." "그래 힘내자." 한 사람이 그런 얘기를 꺼내자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다투어 그런 말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보름전 그 참담했던 순간도 어느 정도 잊혀지는 듯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연습실로 가서 다시 악기를 챙겨들었다. 그리고 다시 록월드로 갔다.
이번에는 손무현씨가 있던 셀프서비스라는 그룹이 연주하고 있었다. 아무말도 못꺼내고 이번에도 한참을 보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러나 집으로들 돌아가지 않았다. 곧바로 직행한 곳은 연습실이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밤새 연습했다. 이미 우리가 최고라는 환상은 낱낱이 깨진 뒤였다. 연습에 또 연습만이 우리를 키워줄 뿐이었다. 세상에는 우리 보다 연주를 잘 하는 그룹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 속에서 진정한 최고로 올라서는 길은 연습 밖에는 없었다.
졸업식이 있었고 친구들은 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런 중에도 우리는 지하연습실에서 연습만 했다.
그렇게 몇달을 연습한뒤 드디어 이태원에 있던 록카페 라이브로 진출했다. 유급연주였지만 받는 돈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신났다.
어느날 강남사회복지대학의 종강파티가 카페 라이브에서 있었다. 그 학생들은 우리에게 10만원을 보수로 줄테니 자신들의 파티를 위해 음악을 연주해 달라고 말했다. 흔쾌히 우리는 받아들였다. 댄스곡 위주로 준비를 했다.
파티날 우리의 연주에 많은 학생들은 즐겁게 놀았다. 부러웠다. 갑자기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가슴속에 몰려들었다.
[8] 나의 가족과 어린 시절
(유영석)
우리 가족에 대한 소개를 좀 하자. 그동안 최근 얘기부터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정신없이 얘기하다보니 우리 가족에 대한 얘기가 빠진것 같다.
아버지는 교육계 쪽에서 일하시는 공무원이다. 말씀이 많지 않으시고 엄하셔서 늘 대하기가 어렵지만 젊은 사람들의 심정을 결정적인 고비마다 잘 이해해 주시는게 무척 감사하다.
어머니는 집에서 그 아버지의 내조와 우리 4남매의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언제나 애쓰신다.
우리 형제는 4남매다. 2남2녀인데 내 위로 누나가 있고, 밑으로 동생이 둘 있다.
누나는 지금 음대에서 조교로 일하며 플루트를 전공하고 있다.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서로의 일에 많은 조언을 한다. 특히 내 연주와 노래에서 부족한 부분들을 자주 지적해서 보완하도록 충고해준다.
남동생은 스포츠맨이다. 운동에는 두루 능해서 어릴적부터 운동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나갈 정도로 열심이었다. 지금은 군대에 있는데 5살 차이인데도 녀석은 남성적인 면모가 있어서 다소 여성적 취향을 가진 내게는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이름이 유원석인 관계로 우리 형제들끼리는 "보석도 아니고, 인조석도 아니고 원석이제"하며 농담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밑에 홍익대 미대대학원에 다니는 여동생이 있다. 언제나 보아도 귀엽기만 하다가 어느날 문득 성숙한 여성으로 내 앞에 서있어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어린 시절의 사진들 이 많았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엔가 지금 생각하면 정확히 이유를 모르는채 모든 사진들을 없애 버렸다. 사춘기의 반항심리 같은 것이었나 보다.
유치원때였나 보다. 아니 그보다 더 먼저 내가 세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눈뜨던 때쯤 나는 엄마 손을 잡고 피아노 선생님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선생님의 지도하에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피아노는 나에게 무척이나 신기한 것이었다. 무슨 커다란 통같은 것에서 사람 이빨같이 생긴 건반들을 만지면 소리가 나왔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소음이었다가 악보라는 규칙에 조금씩 익어가면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는 피아노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국민학교에 입학할 대는 웬만한 소품들은 칠 수있는 실력이 되었다. 국민학교 초기에 한동안 피아노 치는 것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직업이 아닌 바에야 어느 정도 피아노를 다룰 수 있는 실력이 되었고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부모님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어느날이었다. 방과 후에 학교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어노느라 늦게까지 있었다. 세수를 하려고 수돗가에 갔을때 어디서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도 몰래 홀린 듯이 그 소리를 따라갔다. 학교 음악실이었다.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인데도 음악실은 아직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한참만에 내 눈이 그 어둠에 익숙해진 뒤에야 나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마전에 우리 학교에 부임해오신 여선생님이었다.
아마 우리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아이들끼리는 젊고 예쁜 선생님이라 '예쁜 선생님'이라는 말로 통했다.
그림처럼 선생님은 피아노 앞에 앉아 계셨고 그러나 조용히 잔물결처럼 선생님의 어깨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에게는 '피아노는 이렇게 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계신것 같았다. 지금도 그 소리를 나는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그날부터 나는 다시 피아노 학원에 나갔고 전보다 훨씬 더한 열정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요즘도 나의 음악하는 자세가 해이해졌다고 느낄 때는 가끔 그때 선생님 모습을 생각하고 다시 마음을 바로 잡는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평범하고 얌전한 학생이었다. 교육계에 계시는 아버지는 엄했으나 자상하셨고, 어머니는 인자하셨다.
성적은 아주 좋은 편이었다. 언젠가 한번 매달 학교에서 주는 우등상을 놓친 적이 있었는데, 괜히 분하고 속이 상해서 밤새 뜬 눈으로 새운 일도 있다.
나는 당시 최고 인기가수로 군림하던 송창식 아저씨를 유난히 좋아했다. 한번쯤 말을 걸겠지..., 피리 부는 사나이 등등 그 아저씨의 노래를 밥상에 앉아서 부르다가 엄마에게 혼찌검이 난일도 있다.
크게 부족한 건 없이 지냈으나 무엇을 사고 싶은 욕구는 언제나 날 부족감에 허덕이게 만들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항상 가난하다 라는 경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흰색 테니스화가 사고 싶었고, 하모니카가 사고 싶었고, 또 청바지도 사고 싶었다. 그런 것들을 사려고 저금통에 용돈을 모았고, 한가지를 살만한 액수가 모이면 가차없이 저금통을 찢었다. 그러나 한가지를 사고 싶어서 용돈을 모으면 다른 많은 것들은 수시로 살 수 없게 되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늘 슬프다. 지나간 시간은 사람에게 슬프게 다가온다. 시간은 지나고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인가. 심지어 어린 시절의 즐거운 일을 생각해도 그것은 갈색의 슬픈 흑백사진처럼 나에게 온다.
그러나 그렇게 추억이 주는 슬픔은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아름다움은 슬픔이다. 내가 만든 노래중 <겨울바다>나 <눈물나는 날에는>등이 다 그런 추억이 주는 슬픔을 표현해 보고자 한 것이다. 잔잔한 슬픔, 가슴이 아프지 않은 깨끗하고 맑은 감정으로서의 슬픔, 그런 것들이다.
어린 시절 얘기를 하다가 엉뚱한 데로 많이 흘렸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음악시간이 좋았다. 선생님이 치는 오르갠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큰 소리로 노래부를 수 있다는게 즐거움이었다.
나는 경복국민학교에 다녔다. 사립학교라 부유한 친구들이 많았다. 중학교때까지는 광화문 부근 효자동에서 살았고 어머니는 피아노 학원을 하셨다. 나의 피아노는 주로 어머니에게 많이 배웠고 어머니의 피아노 치는 모습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어떤때는 내가 워낙 피아노를 지겨워하면 어머니는 '채찍과 당근' 수법을 쓰면서 내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베토벤을 치면 10원, 쇼팽을 치면 20원의 용돈을 준다는 전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튼 나는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피아노를 잘 치는 애로 소문이 나 있었고 음악시간이나 오락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나는 내 실력을 과시했다.
국민학교 3학년때인가, 학예회가 있었다. 나는 예상했던대로 반 대표로 학예회에 나가 피아노 실력을 과시했다. 그런데 잠시 후 같은 학교 6학년 여학생이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쳤을때 나는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어린이들 중에서는 세상에서 누나가 피아노를 잘 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여학생은 누나보다도 훨씬 더 피아노를 잘치는 것이었다.
빠르기나 정확함, 감정 등이 도저히 국민학교 6학년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 여학생이 지금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서혜경이었다는 것은 훨씬 뒤에 알았다.
중학교에 진학해서 나는 세상을 알았다. 국민학교때는 부유하고 다들 집안이 좋은 친구들이라 세상은 어쩌면 그런 것인줄 알았다. 그러나 중학교에는 그런게 아니었다. 일단 도시락 반찬에서부터 국민학교 시절 급우들과는 차이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내가 잘 모르던 가난에 대해서 눈을 떴고 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남자들끼리의 친구관계라는 것도 알았다. 세상은 장미빛인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쑥스럽지만 그때 어린 나에게 중학교시절 친구들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가르쳐준 사람들이었다.
중학교 시절 내 꿈은 만화가였다. 스케치는 잘 했는데 채색에 자신이 없어서 화가가 되는 건 어려울것 같았고, 대신 만화가가 돼서 예쁘고 감동적인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장은 학교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사람이 되고도 싶었다. 스스로 여성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싸움 잘하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우리 중학교에는 태권도부가 있었다. 내가 늘 여성적이고 약해 보여서 그랬는지 한번은 그 태권도부 중 한명이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는 나를 불렀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싸움을 걸었다. 둘은 학교 뒤편 운동장에서 한판 싸웠고, 결과는 나의 완승이었다. 생각보다 녀석은 허약했다. 다음날 나는 하교길에서 태권도부원 10여명과 만났다. 그리고 실컷 얻어 맞았다. 얼마나 엊어 맞았는지 입 한쪽이 부서질 정도였다. 집에 가니 어머니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나는 아픈 것보다도 그렇게 몰매를 맞았다는게 분했다.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다음날 입 한족에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이고 등교한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더욱 우스운 일이었다. 내 실수와 억울함은 안으로만 내가 감싸 안아야될 일이었다.
피아노를 더욱 열심히 쳤고, 그렇게 3학년에 진학하면서 친구들과 <놀라운 녀석들>이라는 그룹을 조직하면서 내 관심은 학교 공부보다는 음악에 몰두해야 하는 시간들이 이어지게 된것이다.
[9] 어린 시절 얘기
(송경호)
이제 어린 시절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은행에 다니시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자상하게 내조하시는 어머니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얼마나 개구쟁이였던지 일주일에 꼭 신만 1켤레씩을 떨어뜨려 없앴다고 동네분들은 얘기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 동네에 계신 친구분들을 만나러 자주 가시는 편인데 그러면 예전의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신발 잘 떨어뜨리는 아들은 잘 있어요"라고 농담을 하시곤 한단다.
그러나 물론 유치원에 다닐 틈도 없었다. 유치원보다는 그때 우리집 주변에 있었던 산들이 나에게는 훨씬 더 즐겁게 가고 싶은 곳이었다.
성북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입학식날 어머니 손을 잡고, 큰 기대에 부풀어서 학교가는 길을 걸었었다. 평범한 아이였다. 성적은 반에서 10등 정도. '성격은 온순하나 장난기가 많음'이 성적표의 뒷면 담임선생님의 의견란에 자주 등장하던 메뉴였다.
어머니의 기억으로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즉시 책가방을 벗어놓고는 나가, 다시 저녁 식사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들어왔다가, 저녁식사가 끝나면 부리나케 다시 나가 깜깜한 밤중에 돌아왔다고 한다.
3학년때인가. 나는 학급 부반장을 맡고 있는 여자애를 좋아했다. 물론 좋아한다는 감정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몰라도, 그애가 있을만한 곳이면 괜히 가봤고 수업시간에도 그애와 눈을 맞추려고 자주 돌아봤던 걸 보면 어린 마음에 은근히 애틋한 것이 있었나보다.
그해 가을 담임선생님의 자리 재배치에 다라 그애와 내가 짝이 되었을때 그 즐거움이란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벅찬 것이었다.
그 시절 꿈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었다. TV를 통해서 보는 정치가들의 모습이 무척 멋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방에 있는 신동아, 월간조선 등의 정치관련 잡지들을 집어다가 뜻도 모르면서 열심히 읽는 흉내도 냈었다.
4학년때 미아리에 있는 화계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집이 그쪽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헤어져서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그대는 왜 그렇게 싫었는지... 전학가는 날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었다.
그때 학교 옆에는 지금도 있는 대지극장이 있었다. 매일 등하교때마다 그 극장을 오가며 언재 기회가 되면 꼭 극장에 들어가 간판 위에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배우들을 보리라고 내딴에는 굳은 결심을 하곤 했다.
국민학교때 피아노도 잠깐 배웠었다. 그러나 곧 그만두었다. 내가 잠시도 앉아있으려고 하지 않고 워낙 말썽을 피우니까 피아노 선생님이 집에 연락을 해 나에 대한 피아노 교육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비췄다고 한다.
태권도 도장에도 다녔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나는 무엇에도 오래 맘을 붙이지 못하는 성격이었나 보다.
그러나 형은 항상 1등이었다. 국민학교때를 비롯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형은 공부로 늘 1등이었고, 그런 형밑에서 나는 늘 2등이 되지않고 1등이 되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음악에 있어서는 형보다 우월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화계국교는 그 시절 야구로 이름을 떨치던 학교였다.
정영철이던가 그때 우리 학교 야구부인 중심 선구가 같은 반이었고, 방과 후면 나는 그애가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서로 던지고, 치고 하면서 놀았었다. 운동이라면 남들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나는 거의 매일 그렇게 그애와 야구를 하며 지냈다.
나는 거의 야구부 감독선생님이 나에게 야구부에 들어오라고 제의했다. 내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 선생님은 집에까지 찾아오셔서 엄마에게 말했다. 그러나 엄마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됩니다."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두말도 없이 자리를 떴다. 그렇게 국교시절을 보내니 어느덧 졸업이었다.
나는 안암동 고려대학교 옆에 있는 용문중학교에 입학했다. 국민학교때와는 달리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나이키운동화가 신고 싶어졌다.
그러나 엄마에게 사달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1달이 넘게 등하교를 걸어서 하면서 모아진 버스비로 그 신발을 샀다. 걸으면 1시간이 넘어 걸리는 그 길을 매일 걸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 때문에 그 신발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강했는지 웃음이 나온다.
엄마에게는 학교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오느라 늦는다고 말했었고, 아마 지금까지도 어머니는 내가 그렇게 그때 운동화를 산줄은 모르고 계실 것이다.
중학교때 본의 아니게 파출소에 간 적이 있었다.
친구와 같이 오던 하교 길에서 우연히 길에 떨어진 칼을 친구가 주웠다. 조그맣고 날카로워 어떻게 보면 예쁘게도 생긴 칼이었다. 친구는 그걸 주워서 얼른 가방에 넣었다. 그러나 몇걸음 못가서 불심검문이 있었고 우리는 흉기를 소지했다는 혐의로 경찰 아저씨의 인도 하에 파출소까지 갔다.
겨우 상황을 설명해서 "아무거나 줍지 말아라"는 경찰 아저씨의 충고와 함께 풀려났지만.
1,2학년때부터 나는 음악 듣기와 공개방송 보기로 '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부터 공부에는 큰 취미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내 인생에는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일찍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아바와 올리비아 뉴튼존이 그때 나의 스타들이었다. 나는 책받침도 올리비아 뉴튼존의 책받침을 썼고, 아바와 올리비아 뉴튼존의 사진을 수십장씩 모아서 보관했다.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친구들에게 우쭐댈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취미는 방송국 공개방송에 가는 것이었다.
젊음의 행진, 영 11이 그때 나의 주 공략프로였다. 방송국 앞에서 줄을 서고 차례가 오면 입장했다. 스타를 실물로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더구나 공개녹화를 보면 그 주에 그 프로그램에 누구, 누구가 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우쭐대며 학교 친구들에게 그 프로그램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해주면 그 주의 방송은 마치 내말대로 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음악에 가까워 갔다. 외국 팝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왜 이건 좋게 들릴까, 왜 이건 나쁘게 들릴까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방송국 공개방송을 보면서는 가수들이 보여주는 무대 매너에 감탄하기도 하고, 또 그런 자리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그들의 실제 모습을 보이는 그들의 실제 모습을 보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중학시절이 흐르고 있었고, 그 중학시절의 막바지에서 나는 드럼을 만나게 되었다.
[10] 더 좋은 음악으로 보답해드릴 것을 약속하며
(유영석)
요즘은 온통 6집 생각뿐이다.
대단한 6집, 위대한 6집이 돼야할텐데, 더욱이 6집은 우리 음악의 일정기간을 정리하고, 또 그 앞을 내다보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어느때보다도 우리에게 의미가 크다.
현재 대강 잡아놓은 곡들도 더 다듬고, 편곡 보완해야 할텐데 언제나 그렇듯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 되리라.
그렇게 힘든 봄이 되기전, 이 추운 겨울의 가장 큰 보람은 이 지면을 통해 우리를 한번 더 정리해봤단 얘기다. 일단 새로운 출발을 위해 정신적인 준비는 돼있는 셈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지면에 연재된 우리의 이야기를 보고 연락을 해왔다.
"그래 이 사람이 바로 너구나" "반갑다"는 옛친구들의 즐거운 연락에서부터, "이건 사실과 다르잖아"라는 항의성 전화도 있었다. 내 기억들의 어느 부분이 혹시 본의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있었다면 그점 심심히 사과드린다.
어쨌든 이 지면을 읽는 것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표해준 독자여러분들에게 진짜 고맙다.
더 좋은 음악으로 보답해드릴 약속을 해본다.
(송경호)
이제 서서히 우리의 이야기를 정리해야 할 때가 된것 같다.
얘기를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전에 우리의 일을 봐주는 박성배 형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때로는 우리의 따뜻한 친구로, 때로는 꽉 짜인 스케줄로 우리를 정신없이 몰아대는 매니저로 성배 형은 언제나 우리 옆에 있다.
다소 엉뚱한 것이 어느때는 부담스러워도 보이지만, 자주는 바로 그 점때문에 더욱 든든하다. 성배 형은 내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지금도 우리의 콘서트를 위해 대구, 부산등을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인복이 많은 편이다.
이글을 쓰면서 다시 많은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내 얘기도 내 얘기지만 영석이형 얘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던 형의 면면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둘이 매일 같이 다니고 노래 부르고, 같이 술 마시고 하면서도 아직 못다한 얘기가 있었다니.
그런 점들이 우리가 이야기한 소득일 것이다.
이제 우리 얘기를 끝맺는다. 물론 우리의 현재와 과거 전부가 언급되긴 힘들었을 것.
그러나 가능한한 나는 정직해지려 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정직함은 내 스스로에게도 필요한 것들이었으니 바로 내 앞날을 위해 다져진 기반이 돼야하니까.
그러나 내 게으름과 정리부족으로 얘기가 수선스러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혹시 우리 글들을 열심히 읽어주신 독자분들이 계신다면 우선은 고맙고, 그러나 바로 위의 점들때문에 죄송스러움도 아울러 표시해야 될것 같다.
바로 앞에 대구와 부산 콘서트가 있고, 새 봄부터는 6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바빠질 시간이다.
이렇게 많은 얘기를 해놓고도 나는 솔직히 내 미래에 그려질 그림들을 정확히 감잡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성숙된 음악인으로 또 얼마나 성숙된 삶을 살고 있을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미래의 그림을 위해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참, 영석형과의 콘서트 준비회의 약속에 늦겠다. 빨리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