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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희 시 모음 61편
《1》
3월에는
최영희
어디고 떠나야겠다
제주에 유채꽃 향기
늘어진 마음 흔들어 놓으면
얕은 산자락 노란 산수유
봄을 재촉이고
들녘은 이랑마다
초록 눈,
갯가에 버들개지 살이 오르는
삼월에는
어디고 나서야겠다
봄볕 성화에 견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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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9월에 부르는 노래
최영희
꽃잎 진 장미넝쿨 아래
빛 바랜 빨간 우체통
누군가의 소식이 그리워진다
망초꽃 여름내 바람에 일던
굽이진 저 길을 돌아가면
그리운 그 사람 있을까
9월이 오기 전 떠난 사람아
지난해 함께 했던
우리들의 잊혀져 가는
그리움의 시간처럼
타오르던 낙엽 타는 냄새가
올 가을 또한 그립지 않은가
가을 오기 전
9월,
9월에 그리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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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난한 사람들
최영희
시장 좁은 골목
싸-아 한 바다 내음
가난한 사람들
봄을 팔고 있다
바다를 뿌리째 건져 올린
물미역, 파래, 멍게
산이며 들이며
봉긋 봉긋
햇살 한 소쿰, 바람 한 소쿰
그리고 양옆에는 파릇한
쑥 한 소쿠리, 달래, 그리고 냉이 한 소쿠리
달래 사세요
냉이 사세요
아니, 봄 사세요
가난한 사람들
목소리에
봄처럼 물이 올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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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난한 엄마의 노래
최영희
좋아라
주머니 탈탈 털어
지난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
괭이눈처럼 지친 아들네가 안쓰러워
찬바람 나는 기계 하나 달아 주니
올 여름엔
아들 손자, 며느리
원두막 같은 집에 누워
하늘에 별도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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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슴에 심은 나무
최영희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슴에
그리움의 나무 한 그루 심었습니다
세월 지나며 그리움도 지병처럼
가슴속 혈관 곳곳 뿌리내려
해마다 봄이면 움이 돋고
여름이면 숲을 이룹니다
내 생에 그토록
하늘, 별, 그리고
가슴 시리도록 불어 내는
휘파람새 소리까지 사랑했을까
울컥울컥
그리움, 그리고 사랑도 병이라
점점 깊어만 가는데
겨울 오름 산
봄은 또 그리
안개 빛으로 오는가
한 보습 젖은 땅을 찾는
내 가슴 속 나무처럼
그리움의 젖줄 대는 봄이 오면
난, 또 한 번
심한 열병을 앓아야 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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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을 길
최영희
얼마쯤
가셨을까
낙엽 위에
남기고 간
발자국들
내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지금
그 이야기들을
가슴으로 듣고 있습니다
소복이
낙엽 쌓인
가을길
님들이 가셨던
이 길을
지금, 나도
그리 걷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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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을 속에서
최영희
하늘은 맑고
거리마다
우수수∼∼∼
빨간, 노란
나뭇잎
별처럼 내려앉는,
아∼ 저 길을 돌아, 돌아
한 사람 걸어가네
또, 한 사람 걸어가네
모두가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인처럼 걸어가네
그대, 그리고 나
붉은 잎 뚝! 뚝! 떨어지는
단풍나무 아래
다하지 못한 사랑
선 채로 불러 보네
바람은 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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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을의 시
최영희
저 허허한 공간에
한 수씩 적어 내는 가을의 무언의 詩
나는 가을 만치 시를 쓸 수 없어
가을 내내 필을 들지 못했다
가을이 써내는 묵언의 서정서정
하늘 가운데 구름 한 점이 허허함이라면
나는 ( ,,,, )표로 대신할까
어제 지나온 하얀 갈대 숲길이
떠나는 임의 아쉬움을 말하는
무언의 손짓 같은 것이라면
나는 다시 맹목으로 기다림을 결심하겠지
그렇게 한 걸음씩 임은 가시고
이제 은행잎 노란 나비 떼처럼 날아 내리면
가으내 앓았던 임의 앙상한 갈비뼈만
다시 나를 슬프게 하겠거니
아- 저 허허한 공간에 가을이 썼다가 지우는,
그리고 다시 쓰는 절절한 언어
그리고 말없이 떠나는,,, 계절의 시성, 가을
나는 가을처럼 사랑하고도
가을처럼은 시를 쓸 수 없음이라
가을 내내 필을 들었다 놓기를 거듭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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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개화
최영희
어젯밤
내내
고요한 달빛
멀리
새신부 옷고름 푸는 소리
방금 우리 집 창가 진달래
앞섶이 열리고
살짝 보인다
꽃술 속 연분홍 가슴
난 아무 것도
본 것도 들은 것도 없다는데
오늘 아침
진달래는
고향집 우물가
물동이 이고 나온 새언니 얼굴보다
더 수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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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겨울 강
최영희
흐르는 물결로만
그 아픔의 깊이를 알 수 있을까
핏기 마른 억새풀
쉰 소리로 우는 날
물안개 설움인 듯
소복으로 내려앉고
외로운 검은 강은
은빛 슬픈 별을 삼킨다
오늘따라
물고기의 푸른 눈은
더욱 어리고
철없는
천둥오리
가슴속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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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겨울로 가는 길
최영희
수북이 낙엽으로 쌓인 숲속 길
이제는 성근 가지로선 나무들
난, 지금 그 쓸쓸함 마져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가고 있다
어느 詩 낭송회장에서 노(老) 시인이 불던
오카리나의 맑은 음색을 떠올리며
푸른 날 새들의 살아 낸 이야기로 가득한
전설 같은, 내 가슴엔 아직은
그들의 이야기가 수런수런 들리는
빈 숲 길을 걷고 있다
은행나무 검은 가지 사이로
아슴히 비치는 햇살
추억으로 가득한,
내가 사랑한 바다도
이제는 하늘의 조각구름 가득 싣고
먼 여행을 떠나고
내게 주어진 고적한 이 시간이여!
나는 지금 나의 나에게 묻고 싶다
내 삶에서 그토록 사랑한 것이 무엇이며
지금도 목말라 하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초겨울, 마지막
어미를 쫓아 길을 떠났을 산새소리
가슴이 젖어 오고
길가에 저 감나무도 아직은 곰 익은 감
떨구지 못하고 있구나
겨울로 가는 하얀 새벽 길
다 하지 못한
뭉쿨~한, 이 그리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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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 섬에는
최영희
남해 끝 동백섬
서른 세 명이 살고 있는
지심도
자꾸 그 섬이 생각이 난다
민박집 주인아주머니
한 예순 살쯤 되셨을까?
스무 살에 그 섬으로 시집을 왔단다
아들딸 낳아 모두 육지로 내 보내고
지금도 그 섬을 지키고 있다
섬에 들어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아주머니
그 섬에는 아주머니의 육지에 대한
그리움만큼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동백 섬, 지심도(只心島)
그 섬에는 지금도
한 여자가, 어머니가
동백 꽃잎 같은 삶을
지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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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대 날 사랑하거든
최영희
그대 날 사랑하거든
우리 늙어 감을 슬퍼하지 말아요
그대 날 사랑하거든
고왔던 추억만을 그리워 말아요
아름다웠던 추억은
우릴 그리움에 젖게 하고
현재의 우릴 슬프게 해요
그대 진정 날 사랑하거든
현재의 우릴 함께 사랑하도록 해요
장밋빛 같은 사랑도 아름다워요
그러나 자연의 순리를 사랑하며
말없이 피었다 지는 들꽃 같은 사랑은
눈물나게 아름다워요
그대 정령 날 사랑하거든 슬퍼 말아요
우리 함께 그리, 그리 부는 바람과 별을 사랑하며
고요히 피었다 지는 들꽃 같은
그런 사랑을 하다가요
난, 언제나 현재의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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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대가 그리운 날
최영희
오늘은 당신의 창을
열어봐 주세요
당신의 창가에 부서져 내린
내 그리움
얼마나 마른 풀잎을 적셔 냈는지
풀잎이 누운 자릴 보아주세요
보고픈 마음
얼마나 그대 창가를 서성이다
돌아갔는지
당신이 잠든 밤
별빛처럼 추녀 끝에 그리움 내려놓고
보풀린 와인 한잔에 마음 적시는
오늘,
그대가 몹시도
그리운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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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대는 참 곱다
최영희
가을, 그대는
참 곱다
겨울 지나
봄부터
햇살 따라 바람 따라
사분사분
준비하고 싹 틔우고
푸르고 열매 맺고
한 생을 다 했는가
아름다운
떠날 채비
그 모습
참 곱다
꽃보다 곱다.
검은 가지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나는 주어진 시간만큼 원 없이 사랑했노라."라는
그대의 엽서 같은
빨간 노란 남은 잎은
그대, 올 때보다 곱다
떠나는 모습이 더 아름다운
그대는,
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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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리움
최영희
창문을 연다
아이 적 우리 집 뒷산
큰 나무 위에는
산새들이 집을 짓고
저들만의 언어로 노래를 하곤 했다
때론 슬픈 노래
또 어느 땐 맑은소리로 사랑을
그 소린
혼자 있는 내 창가에까지 들리곤 했다
지금 들릴 듯한
영혼을 맑히던
소리, 그 소릴 찾아
13층 아파트 창가에 선다
그러나 내 시선은 새들이 떠나고 난
빈 둥지 같은 회색 빛 아파트건물의
사각 창에 머물다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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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림 속의 여자
최영희
한 여자가
낯선 세계 속에
고개를 숙이고 내 그림자처럼 서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니 어쩌면 처음인 듯한
풍경화 속 여자
우중충한 고층 빌딩 숲 사이로
잎을 지우는 여인을 닮은 슬픈 장미
울음 빛이 피처럼 붉은데
세상은 슬프도록 아무 동요動搖도 없다
한 폭의 풍경화로 고요할 뿐
난 이만치에서
그림 속의 여자를 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당신도 나처럼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금방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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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도
최영희
기도한다는 것은
나를 바꾸는 것
물들고 오염된 나를 씻어
진실한 마음으로 맑히는 것
마음을 비우고 허공처럼 넓혀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나를 내리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지혜로워지는 것
우주의 에너지를 내 안에 담아
잠자던 본성이 밝아지는 것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받아들여
진리와 함께 충만해지며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누어주는 것
바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키워 힘을 얻는 것
너와 나를 허물어 자비를 베풀며
세상과 더불어 하나 되고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큰 뜻을 세우는 것
참회하고 원력을 굳건히 하여
다 같이 행복한 세계로 가는 것
남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남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어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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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의 슬픔에게
최영희
이제 나를 위해
슬퍼하지 말기를
고요한 새벽
호수 위를 걸어가는
아침 이슬처럼
비 온 뒤 뒷산을 오르던
구름 안개의 그 고요함처럼
서서히 내게서 사라져 주기를
그래도, 그래도 내가
젖은 풀잎을 보고도 슬프다 하거든
누군가를 못 잊어 슬프다 하거든
하얀 백지 위에 한 줄의 시詩를 쓰고
가슴으로 울게 하기를……
아, 이제라도 사랑하고 싶은
나를 위해서는
슬퍼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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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나의 영혼아
최영희
지친 영혼아
해지는 서녘 하늘가에
머무는 시선아
오늘도 한 줄의 시를
가슴으로 읽었느냐
땅거미 지는 길을 걸으며
먼 옛날 시인이 남긴
헌 시집 속에
꽃의 말을 들어보자
스치는 바람의 소리를 들어보자
외로움에 흔들리는
너의 그림자
나의 영혼아
가슴에 담자
위로받을 수 있는
한 줄의 시
그리고 알아보자
그 속에 있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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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
최영희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나를 보고 진실처럼 웃어주던 모든 것
사랑하는 어머니가 그랬고
들녘 가는 곳마다
방긋이 웃어주던 꽃이 그랬고
내가 최초에 사랑을 느낄 때쯤
사랑하던 사람이 그랬고
함박눈처럼 폭폭 쏟아지던 우리들의 풋풋한
이야기가 그랬습니다
내 곁을 스치는 모두가
한 점 현실 같은 영상이었다가
바람이었습니다
난 지금도 한 점 바람일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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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소사에서
최영희
능가산자락에 자리한
내생(來生)의 염원을 담았다는
내소사(來蘇寺)를 가려면
먼저 송진 냄새로 가슴 싸-한
이 전나무 숲을 지나야 한다
전나무 숲 사이로 들리는
아-, 바람 소리 독경소리 천상의 문이 열리고
이제 천 년의 시간은 그림자로 내 안에 드나 보다
대웅전 꽃살문의 꽃들은
바람에 씻긴 채 햇살에 바래인 채 선명하고
마당에 수문장처럼 우뚝한
수령이 천 년이라는 느티나무 한 그루
천 년의 비밀을 안은 듯 바람에 너울너울 푸르다
대웅전 처마 밑을 돌아 나오면
돌 수반 속, 천 년 우주를 담았을까
하늘이 물에 들고 푸른 나무그늘 사이로
연잎 위 동동 수련 한 송이
내생(來生)에 반드시 소생하겠다던
어느 스님의 넋인 양 해맑고
저, 하-얀 연꽃이 세상을 맑히는 우주라면
우주의 중심 같은 노란 꽃술 속에 안긴 벌 한 마리
저놈도 지금 내생을 꿈꾸는 중일까, 잠든 듯 고요하다
사찰을 돌아 나온,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영원할 바람이여! 바람이여! 천 년 후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그대 다시 만날까.
* 내소사(來蘇寺)는
‘내생(다음 세상)에 반드시 소생(蘇生)하겠다. 라는
의미심장한 소망을 담아 건립한 사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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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눈 내린 날
최영희
처음의 세상처럼
첫눈 내린 날
멀리 성당의 종소리
새 한 마리 날아 오르고
누군가 가장 깨끗한 발로
저 눈길을 걸으라는데
난
눈으로
눈으로만 동화 같은 은빛세상
새처럼 날아오르다
내 발을 보았네
세상의 처음 같은
첫눈 내린 날
누가 저 눈길 처음 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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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눈 오는 풍경
최영희
하늘에서 눈이 오네
다독다독 이불 끌어 덮어주던 어머니 손길처럼
하늘에서 눈이 와
온- 세상
하얀 눈 이불 덮어주네
하늘에서 어머니 사랑처럼
눈이 내리네
욕구불만 아이를 달래듯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폭신폭신한 눈 이불 덮어주네
왁자지껄하던 거리도 집도 자동차도
금세 잠든 듯 고요하고
마술에 걸린 듯 요동도 못 하네
어머니 손길 같은 고요함
세상이 온통 쌔근쌔근 잠이 든
착한 아가의 얼굴처럼 평온하네
아- 나도 저 포근포근한
사랑의 마술에 걸리고 싶어라
눈맞으러 가야겠네.
☆★☆★☆★☆★☆★☆★☆★☆★☆★☆★☆★☆★
《25》
늙은 호박 속을 가르며
최영희
딸아이 해산 부종을 빼려
늙은 호박을 샀다
꼭지를 위로 두고
오분의 사쯤에 칼을 댔다
쩍-,
가르고 나니
벌건 피가 뭉클!
솟아오른다, 뜨겁다
한 움큼
물컹한
얽히고설킨 살점을 뜯어내며
어머니 그 속을 보았다
사리처럼
옹이 박힌
여자의
사랑 법
어머니……
늙은 어머니의 그 속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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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당신은 누구십니까
최영희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이 땅에 태어나
한 포기 풀잎처럼 살아도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 속에서 꿈을 꾸게 하는
하늘, 땅, 바람, 산, 들, 그리고 바다, 태양
모두가 나를 위해 있는 것 같게만 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가슴 모두를 내어 주시며
살아라, 평안하라, 행복 하라
이 땅에 태어나게 허락하시고
들에 산에 내가 노력한 만치
풀을 뜯는 사슴처럼 살라시는
당신은,
아-, 참 좋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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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모르고 있었다
최영희
내가 잠든 시간에도
세상은 가고 있다는 것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 그 목련이 지면서 진달래 피고
진달래 지면서 장미가 피고
장미가 지면서
잎이 푸르고
잎이 지면서
내가 지고 있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
《28》
목련 꽃 지는 밤
최영희
바람도 잠시 숨을 멈춘다
예견된
슬픔
삼월 그믐 밤
달빛은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어둠에 내려앉는
날개 젖은 흰나비처럼
넋으로 혼절하는
하얀 순수
사랑한 기억
목련꽃 지는
봄밤이 섧다.
☆★☆★☆★☆★☆★☆★☆★☆★☆★☆★☆★☆★
《29》
바다로 가는 길
최영희
한 방울 한 방울
링거액,
무색무취의 링거 줄을 타고
나의 바다를 가고 있다
시곗 바늘처럼
똑, 똑,
규칙적으로
아직은 기쁨으로
살아 있는, 나의 바다
꿈이 살아 있고
기억이 살아 있고
추억이 살아 있고
탱글탱글, 첨벙첨벙
링거액의 즐거운 여행이다
나는 오늘
살아 있음의 축복으로
링거액으로 하여금
나만의 바다
그 깊은 곳의
여행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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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바람 분다
최영희
바람이 분다
목련 꽃 벙그는 서울의 담장 밑
열 여덟 내 친구 순이야!
아직은 차가운 3월의 연두 빛 바람
우리들 함께한 그때 그 언덕
묻어 둔 추억은 실어서 넘었겠지
봄은 오는데
무심히 스치는 사람, 사람들
누구라도 좋다
등에 대고 “순이야!” 하고
불러보고 싶은 날이다
이 바람 부는 날은.
☆★☆★☆★☆★☆★☆★☆★☆★☆★☆★☆★☆★
《31》
바람같이 살려네
최영희
바람같이 살려네
간혹 마음이 울적할 땐
숲을 이룬 소나무 사잇길을 걸으며
오랜 기억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묵은 솔잎 위에 앉아
지나는 새 소리도 들어 보려네
사랑하는 사람들
한둘 떠나버린 비어 가는 공간의
아픈 상념
훠이 훠이
실어 내는
바람같이 살려네
한적한 들길도 걸어 보려네
풀잎끼리 부딪는 내음이
어릴 적 함께 한 친구의 정겨움처럼
코끝을 시큰하게 하는
들길에 누워도 보려네
어디고 머물렀다 흔적 없이
훨훨 날아가는 바람이 좋아
바람처럼
살다 가려네.
☆★☆★☆★☆★☆★☆★☆★☆★☆★☆★☆★☆★
《32》
봄길
최영희
얼마나 돌아온 길인가
메마른 숲길을 지나
서글픈 바람 속에서
발밑에 떨어져 쓸려간
낙엽을 기억한다
고뇌의 긴 그림자
땅을 비집고 파고드는
삶의 고뇌 속에
아팠던 시간 누이고
봄이 오는 길을 걷는다
남녁에서 오는 꽃향기에
철없는 민들레 풀섶마다 내려앉고
논두렁, 밭두렁엔
국수댕이, 냉이, 봄쑥이 지절대는
참으로
오랜만에 걸어보는
이 봄길
나비야 춤추어라
나의 사랑한 기억
봄의 왈츠를 타고 있다.
☆★☆★☆★☆★☆★☆★☆★☆★☆★☆★☆★☆★
《33》
분수
최영희
네게도 분노는 있었구나
흐르면 흐르는 대로
담으면 담는 대로
밑으로, 밑으로만
흐르던 너
네게도 욕망은 있었구나
하늘로 솟고 싶은
하늘을 날고 싶은
그래, 어찌
낮은 자라 낮게만 있으랴
뿜어라, 분노가 있으면
파편 같이 부서져
다시 네 가슴에 박힐지라도
낮은 자라
어찌
낮게만 있으랴.
☆★☆★☆★☆★☆★☆★☆★☆★☆★☆★☆★☆★
《34》
사랑에 대하여
최영희
사랑은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한 사람을 선으로 자라게 하고
세상 바라보는 눈을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웁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 안엔 나를 키운 사랑이 있습니다
작은 풀꽃에게서도 세상을 품어 안은
사랑을 봅니다
가난도 사랑으로 보면 따듯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세상은 따듯합니다
슬픔 안에서도 나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따듯함이,
사랑이,
나를 키운 때문입니다.
☆★☆★☆★☆★☆★☆★☆★☆★☆★☆★☆★☆★
《35》
사랑의 그림자
최영희
웃고 있는 꽃을 보셨나요
당신은 늘 웃고 있는 제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어제는 나도 역시 웃고 있는 당신의 얼굴을 보았어요
어느 날인가는
꽃대 밑
나, 그리고 우리의
숨은 그림자를 보았어요
젖어 있었어요
비 오는 날
내 가슴 속 잎이 넓은 후박나무의
젖은 그림자처럼
그것은
우리들의 삶의 빛이었어요
우리들이 그토록 사랑하며 살아온
삶의 그림자였어요.
☆★☆★☆★☆★☆★☆★☆★☆★☆★☆★☆★☆★
《36》
사랑하는 일
최영희
사랑하는 일은
꽃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리나 아름다움만,
그리고 비 오는 날
잎에 흐르는 눈물 같은
빗물만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 깊숙한 꽃의
마음을 보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나비를 바라보는 일만이 아닙니다
이른 아침
이슬에 젖은 나비의 날개를
맑은 햇살이 그러하듯이
마음으로 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
《37》
사모곡
최영희
어머니
당신이 내 어린 손을 놓고 가신 뒤
세어보니
쉰 번째 유월이 왔습니다
처음 그 해는
제게는 낮과 밤이 없었습니다
내 앞엔 영원히 밤만 있을 듯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봄마다 새로 돋는
풀잎을 봐도
슬픔이더이다
죽을 것만 같던 세상
그래도 살아 지더이다
나처럼 가난한 한 남자를 만나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다하지 못하고 가신 사랑까지
원 없이 사랑했습니다
정말 죽을 것만 같던 캄캄한 세상
어머니는 사랑하는 법만은 제 가슴에 심어주고 가셨습니다
어머니!
오늘도 창 밖 저 산등성이로는
노을이 타는군요
저 노을이 다 타고나면 어머니, 잊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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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산은 말씀이 없다
최영희
산은
아파도, 아파도
참 과묵도 하시던
내 아버지만큼이나
말씀이 없다
새들이 오면
새를 울게 하고
꽃이 피려면
꽃으로 피게 했다
짐승들이 소리 내 울면
짐승들의 괴성도
순하게 들었다
고단한 자 쉬게 하고
맑은 공기 맑은 물
이 나라, 이 땅
푸르게, 푸르게 묵묵히 지켰다
그러나 21세기 인류문명의 폭거
여기저기 파헤쳐진 산
허리가 잘리고, 뚫리고, 뭉개지고
허-연 피를 흘리고 있다
지금 산이 곳곳 아프다
그러나 산은 말씀이 없다
그때 내 아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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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상념
최영희
어느 호기심 많은 아이가
상자 속에 내 몰골을 닮은
달팽이 한 마리를 넣어 두고
부처님 손바닥만 한 세상을
깔아 주었다
아이는
그 손바닥만 한 세상을 허덕이며 기어다니는
꼭, 나를 닮은 달팽이를 날마다 들여 다 보며
마음이 아팠으리라
깎은 절벽 같은 상자의 벽을
기어오르다간 떨어지고 또 기어오르고
그러다 오르기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달팽이의 뒷모습이
무척 안타까웠으리라
아이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찾는 듯
반 자만큼 젖은
상자 속 세상에서
골몰하며 헤매는 달팽이를
보고 있다
내 모습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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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리꽃
최영희
하얀
내 마음
그대의
차가운 눈빛
난
꽃으로 피네
하얀 서리꽃
어둠 속
푸른 빛
내 하얀 마음
더 맑으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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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시월 어느 날
최영희
타는 듯
붉게 붉게 쏟아 내는
나뭇잎들의 깊고 깊은
이야기를 듣고도
슬퍼하지 않으려
구순을 앞둔 스승님
낙엽 밟는 소리
낙엽,
밟는 소리
슬퍼하지 않으려 했다
낮 달처럼
구름에 젖은 둥근 해가
그 태양이
오늘은
그냥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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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시월의 연가
최영희
시월엔 모두가 떠난다
거리에 자동차도
하늘에 구름도
어딘가 다시 미지의 세계로,
사랑하고 사랑한 거리
익은 열매 같은
애틋한 추억 하나씩 남기고
낯선 거리 낯선 곳
사랑 찾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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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름다움에 대하여
최영희
눈물이 그리 아름다운지
몰랐습니다
아가의
두 볼에 흐르는
눈물,
그것은
작은 육체의 목마름에 대한
무한히 맑은 영혼의 몸짓입니다
난, 오늘
그보다, 더
아름다운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움은
쌓이고 쌓이면
정화된 물방울처럼
가슴속 깊은 곳에 옹달샘같이 맑은
눈물의 샘이 되나봅니다
여든여덟 살 아들이
가난한 세월을 살다 가신 어머님을
가슴으로 그리시는
스승 황금찬 시인님의 노안의
눈물,
난, 눈물이 그리도 아름답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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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억새꽃을 노래한다
최영희
지나는 길
낮은 언덕이었지 싶습니다
산, 들, 바다
한 해 동안의 모든 생각이 누워 잠이 드는데
끝내 스러지지 못하는 소리 없는 하얀 빛 목 울림
눕지도 주저앉지도 못하는
억새꽃 당신을 보았습니다
바람에 너풀거리는 여인의 치맛자락 같은
고요한 슬픔을 보았습니다
고개를 숙이려는 듯하다
가끔은 바람 따라 먼 산을 바라보는
산은 빈 산으로 비어가고
그리움은 영원한 것
사랑은 슬프게도 영원한 것
먼 훗날 우리 떠난 후에도
그곳에 그대로 영원할 것 같은
산을 밟고선 억새꽃 그대 그림자 사이로
천 년의 그리움을 보았습니다
또 하나 지상의 별자리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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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오래된 것에 대하여
최영희
나는 알고 있다
별이 왜 그리 멀리서
빛을 보내며
혼자서 반짝이는지
사막에서 생명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오아시스를 만들어 내듯이
별은 오래된 것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긴 세월 잊히지 않는
잠시 스친 것에 대한 열망,
추위와 더위를 번갈아
불어대는 바람이 그렇고
풀잎과 꽃잎이 그렇고
이웃하던 사람과 사람이 그렇고
내 살던 집과 마을이 그렇고
모두가 순간 스치고 지난 것들이
잊히지 않는 걸 보면 안다
별이 천 년토록 눈이 부신 건
오래된 것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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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8월의 나무에게
최영희
한줄기
소낙비 지나고
나무가
예전에 나처럼
생각에 잠겨있다
8월의
나무야
하늘이 참 맑구나
철들지,
철들지 마라
그대로,
그대로 푸르러 있어라
내 모르겠다
매미소리는
왜, 저리도
애처롭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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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유 있다
최영희
하늘을 나는
새야,
날아라
바람에 이는
풀잎의 작은 흔들림도
이유는 있다
새야,
구름산을 넘는 새야
우리, 세상 속에 들어 보자
깊고 깊은 산골짜기
피었다 지는 꽃 한 송인들
그냥 이야
피었다 지겠는가
새야
너,
그리고 나
그냥 이야 왔을까
잠간 일다 가는 바람도
이유는 있다
우리, 들어(聽)보자
너, 나 그리고 우리 모두
오고 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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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자화상
최영희
하얀 종이에
파스텔로 내 얼굴을
그렸습니다
머리칼도 눈썹도 입술도
하얗게 그렸습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슬픈 나를,
하얀 눈물을 그렸습니다
아무도 내 슬픔은 알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 속엔
나만이 알 수 있는
슬픔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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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제비꽃에 대한 단상
최영희
이름도 많구나
제비꽃, 오랑캐꽃, 병아리 꽃
그리고 장수 꽃, 외 나물, 씨름 꽃
때로는 예쁘다
때로는 오랑캐다
말, 말, 말 많은 세상
보일 듯 말 듯
키가 작아 더욱 가여운 제비꽃아
세상 사람들 입방아가 싫어
여기 산밑 길섶, 풀숲에
숨어서 피었구나
싫기도 하겠지
깊은 산중
올망졸망
진보랏빛, 네 얼굴
너의 눈이 눈물로 글썽 하구나
내 오늘은 너의 마음 아픈 이야기
한 소절 듣고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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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진달래 밭
최영희
구름산 중턱
거기쯤, 진달래
진달래 밭이 있다는데
꽃피면, 꽃이 피면
난, 그 진달래 밭
가야겠네
진달래 꽃잎 속
재잘재잘 내 친구
순이도 만나야겠네
우리 그때 그 빛 바랜 추억
함께, 진달래 꽃 물로
흠씬 젖어도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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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징검다리
최영희
내가 사는 서울에도
마을과 마을 사이
징검다리 놓였다
촬찰찰 흐르는 물소리
돌다리
하나하나 건너면
소 몰고 가신 논갈이 순이 아버지도 만날 것 같고
지게 목발 두드리며 구성진 노랫가락
뽑아내던 옆집 그 오빠도 만날 것 같다
저 돌다리
하나하나를 건너면
온 마을이 한 가족 같던
전설 같은 내 안의 그 마을
닿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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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찔레꽃의 전설
최영희
봄이면 산과 들에
하얗게 피어나는 찔레꽃
고려시대 몽고족에
공녀로 끌려간
찔레라는 소녀가 있었다네
십 여년 만에 고향 찾은 찔레 소녀
흩어진 가족을 찾아
산이며 들이며 헤매다
죽고 말았다네
그 자리에 피어난 하얀 꽃
그리움은 가시가 되고
마음은 하얀 꽃잎, 눈물은 빨간 열매
그리고 애타던 음성은
향기가 되었네
내 고향 산천 곳곳에 피어나는
슬프도록 하얀 꽃
지금도 봄이면
가시덤불 속
우리의 언니 같은 찔레의 넋은
꽃으로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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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청령포 가는 길
최영희
청령포 맑은 물
천 년을 돌고 돌아 흐르고 흐르건만
어린 왕의 천추에 恨
언제나 씻어 낼까
나룻배에 몸을 실어
세월을 건너가니
오백 년, 열일곱 어린 왕의 한숨소리
우거진 솔숲 사이 떠나지를 못하고
망향루에 올라보니 한양 땅 두고 온 왕비를 그리는 그리움
하나, 하나 돌을 쌓고, 두 달여 쌓은 돌은
정한(精恨)의 탑이 되어 오백 년 비바람도 무너뜨리진 못했구나
御所에 걸려있는,
“ 천추에 원한을 가슴 깊이 묻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혀 소란도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는다.”라는
御 製 詩는 내 가슴을 쓸어내고
돌아서는 이내 마음
어린 왕을 이곳까지 후송하고 차마 발길 돌리지 못해
강나루 홀로 앉아 통한의 詩를 읊은 왕방연의 충심에다 비할까만,
왕이시여!
왕위찬탈 1457년 6월 22일,
사약을 받으신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하신 그날의 恨
어느 세월 푸시리까
돌아서 오는 길
청령포 강물의 오백 년 울음소리
시린 귀가 젖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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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친구의 편지
최영희
친구에게서
고향의 구름을 걷어 쓴 편지가 왔습니다
우리가 향수에 젖는 것은
풀 내 나는 비릿한
그리움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람 끝에 묻어, 끝도 없이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에 이끼로 내려앉는
습한 그림자 하나 걷지 못하는
애틋함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갯짓처럼
우리 가슴에는
언제나 허공에 너울지는
고향을 향한 영혼의 몸짓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나고 지는
풀 한 포기도 제 뿌리내린 흙의 내음은
쉽게 덜지 못 하겠거니
우리 가슴에는 늘, 안개처럼 젖어드는
고향이 있었습니다
친구여,
내게 보내 온 편지는 잔잔한 바람이었습니다
누었던 풀 포기가 바람에 일렁이듯
우리의 서러웠던 기억까지 그리움의 물결을 이룹니다
편지 속에는, 학교 가는 길
한낮의 굽이를 넘기는 애절하던 새소리,
그리고 가슴을 에이듯 씽씽 울어 대던
놋재를 돌아온 바람소리도 들립니다
그곳이,
그곳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
《55》
풀꽃 연가
최영희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풀은 풀대로 나는 나대로
변할 줄 모르는
풀하고 나는 아무래도
고향이 같은가 봐
도시에 살아도
먼 산 구름만 바라보다
해지면 어머니 품속 같은 흙이 좋아
흙을 베고 잠에 드는 풀꽃
내 고향은 심심산골 단양
너의 고향은 어디더냐
도시에 몇십 년을 살아도
풀 티,
산골 티를 못 벗는
풀과 나는 아무래도
본래부터 같은 부류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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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풀잎의 노래
최영희
난,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몸짓을
슬픔이라 하지 않겠다
풀잎의 이슬에 젖은 눈빛은
아름다움이라 하겠다
바람이 불어 올 때
그 바람마저도 사랑해야 했듯이
그들도 그러하리라
거센 비바람에 잠시 몸을 누일지라도
다시 일어나리라
그리고 삶을 노래 하리라
우리 그러했듯이
삶은
아름다움이다, 슬픔까지도
풀잎들이
몸으로 부르는
노래처럼.
☆★☆★☆★☆★☆★☆★☆★☆★☆★☆★☆★☆★
《57》
풍경 하나
최영희
오월의 한낮이
에덴의 그 동산같이 평화롭다
멀리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엄마
노란 모자에
노란 가방을 멘 아이의 손을 잡은 여인
언젠가 잡아본 어머니의 그 손이다
꼭- 잡은 손안에 사랑이 가득하다
아-, 저 아름다운 풍경
평화가 가득하다.
☆★☆★☆★☆★☆★☆★☆★☆★☆★☆★☆★☆★
《68》
하얀빛은 슬프다
최영희
언제부터인지
하얀빛은 나를 슬프게 한다
가난하던 날 이밥처럼 쏟아지던
조팝나무 꽃이 그렇고
아버지 허리 굽어 넘던
싸리 재 싸리 골
길섶, 하얀 들꽃들이 그렇고
오솔길 덤불 사이 외 목 늘여
점점 멀어지는 이
하염없이 바라보던
망초꽃의 쓸쓸함이 또한 그렇고
친구가 떠나던 날
백지 위에 올려진 국화꽃의 하얀빛은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그리고 봄날에 쏟아질
부신 햇살 속
한 뼘만큼의 나의 여백
또한 슬프지 않은가
☆★☆★☆★☆★☆★☆★☆★☆★☆★☆★☆★☆★
《59》
햇살 푸른 날
최영희
이른 아침
창문을 열어 놓았어
베란다엔
오늘따라 많은 생각들이 다녀간다
음력 오월 단오
이맘때면
할아버지 기우제 올리시던 심정이
논바닥에 못자리처럼 간절했다지
가난이 목에 걸려
뱉어지지도 않던
시절도 있었어
하늘 때문만은 아니었어
오늘은 어찌
저번 날 지나온 허름한 골목
중고 책 서점에 쌓인 책들처럼
빛바랜 기억들이
내 창 밑
베란다를 이리도
들고 나는지.
☆★☆★☆★☆★☆★☆★☆★☆★☆★☆★☆★☆★
《60》
행복한 기억
최영희
행복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가슴속 그림이 되고
그곳엔 바구니 옆에 두고 한 잎 두 잎 봄 쑥! 봄 쑥! 노래하던
봄이 있었구나, 그 아이 있었구나
논두렁 밭두렁 묵은 풀숲 사이 쏘-옥 쏘-옥 돋아나는 봄 쑥!
아- 파릇! 파릇! 그 푸른 눈빛이고서야
아- 이제라도 봄 쑥 돋아나는
그 들길을 가자, 그러면 나는 다시 행복하겠거니
그때 그 아이 만날 수 있겠거니.
☆★☆★☆★☆★☆★☆★☆★☆★☆★☆★☆★☆★
《61》
흔들리는 것에 대하여
최영희
밤에는 달빛이 흔들리더니
낮에는 하늘이,
오늘은
나뭇잎 따라 땅이 흔들린다
모스크바 광장의 붉은 깃발의 색깔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인터넷망을 따라 세계의 지축이
늘어졌다 댕겨졌다 한 눈에 들고난다
쏘아올린 위성은 또
지구의 축을 흔든다
좁은 내 시야 문은 열리고
나를 가둔 나의 성이
흔들거린다
세상이 흔들거린다
빙빙 돌아간다
부서진다
혼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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