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공원 조형물 錦城羅氏 姓鄕碑文(안)
나성(羅姓)은 본시 축융의 후예인 광정공이 나국(羅國)에 봉해지면서 성씨를 얻게 되었고 한고조 때 주(珠)공이 예장 땅 영주가 되면서 예장나씨(豫章羅氏)가 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예장나씨 단본<單本>이다.
당태종 때 상서좌복야로 있던 나지강(羅至强)공이 고구려 정벌논의에 반대하고 망명길에 올라 지금 나주지방에 배를 댔으며 그 후 통일신라조정에 출사하여 좌승상에 이르고 자손들도 십 여대가 나주지방에 거주하였다.
지강공이 우리나라에 정착한 최초의 시조이며 후손이 통일신라에 벼슬을 하고 살았지만 당시의 족보가 없어 기록과 댓 수가 불분명하므로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나총례(羅聰禮)공을 시조로 하였다.
고려시대 총례공의 후손 중에서 십이봉군(十二封君), 칠대광(七大匡), 삼정승(三政丞), 삼상서(三尙書), 사유현(四儒賢), 오대장군(五大將軍)이 나왔으니 고려조정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이름난 씨족이었다.
고려조에 큰 공을 세운인물로는 충문공 나총례, 금성군 나유, 양절공 나익희, 송은 나계종 4인이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으며 서해도 안렴사 문규공은 문장과 행위가 한 세상의 으뜸이었다.
조선조에 와서 송재공 나세찬은 대사헌에 오르고 탁영시(擢英詩)에 장원하고 호당에 들어 당대에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다.
임진왜란 당시 나대용 장군은 거북선을 제작하여 왜군 섬멸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 합천군수 청유공 나적은 의병대장으로 일문삼절(一門三節)의 충신이 되었다
삼일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나용환공, 나인협공은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고 나석주공은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했으며 나월환장군은 광복군 제5지대장으로 항일투쟁에 큰 기여를 했다.
우리 씨족은 고려조의 명문이었으며 융성과 쇠퇴를 맞는 천지의 이치를 겪으면서 40 여대를 굳건히 전통을 지키며 살아왔으니 그 자손이 5만 여명에 이른다. 이제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옛 조상의 영광을 찾고 씨족의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금성나씨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