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06월02일, 호산나교회, 에스더4:4~17, 만남의 축복과 어른스러움,
하나님 함께하는 인생되어지시길 축복합니다, 믿음의 중심이 있는 신앙인이 되려면 중심과 확신이 있어야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신앙의 품위가 나오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들 하나님으로부터 대접받고요, 사랑받으면,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확신,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떤 형편이든 간에 나는 망하지 않아, 나는 망할 수 없어, 하나님과의 사랑 끊을 수 없어. 믿음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이 당당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 있는 믿음 가지시길 축복합니다. 당당한 것과 거만은 분명 다릅니다.
오늘 말씀은 4장에 나오는 모르드개와 에스더와의 아름다운 관계 이아름다운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려합니다. 사실 왕후가 된 에스더의 인생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에스더 인생의 배후에 모르드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에스더서가 말해 주듯이 에스더가 주인공 같지만 에스더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에스더도 중요하지만 모르드개가 없는 에스더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두 인물의 관계를 통해서 느낀 건데요, 바로 만남의 축복입니다,
인생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에스더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에스더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하는 암담한 현실이었잖아요, 그런 인생 앞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만들어진 모르드개와의 축복된 만남이 에스더에게 있었기에 에스더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더가 모르드개를 축복 속에 만난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에스더가 누렸던 이런 만남의 축복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서로의 관계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복이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한 농부였던 엘리사가 엘리야라는 위대한 선지자를 만나는 그 만남의 순간이 평범한 농부가 위대한 엘리사 선지자로 탈바꿈하는 놀라운 원동력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디모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 후서를 보면요, 주님의 길을, 먼저 걸어갔던 멘토 바울이 얼마나 주옥같은 말씀으로 젊은 디모데를 잘 권면해 주잖아요, 디모데는 바울이라고 하는 만남의 축복이 있었기에 디모데의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대접받는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어른이지만 어른답지 못하고 스승이지만 스승답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받고, 모르드개. 엘리야, 엘리사와 바울 같은 스승 어른다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어른 역할을 잘 감당 해야되겠다, 싶은 생각에 만남의 축복을 통한 인격적인 어른스러움,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모르드개와 같은 만남의 축복을 통한 인격적인 어른스러움을, 위한 3가지 조건을 달아보았습니다.
1, “중심축” 역할 감당하기
우리들이 살아가려면 우리 인생의 테두리를 만들려면 중심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게 쓰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요, 더 소중한 것은 중심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서 한나라를 좌지우지 다스리도록 큰 원을 그릴 수 있도록 은사와 탈란트를 주시는 경우도 있고요,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큰 교회를 이끌고 갈수 있는 큰 원을 그리는 역량을 주시는 목회자도 있고요, 저같이 부족한 목사는 소박하지만 호산나교회를 이끌고 가도록 작은 원을 그리도록 인도 하시는 경우도 있고요, 하나님의 방법은 다양하게 세상이나 교회에 필요로 하는 도구로 활용하시지요, 그게 사명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인생은 큰 원을 그리느냐 여기에 목말라 해서는 안 되고요. 원이 크고 작음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들은 콤파스라고 하는 중심축을 제대로 세워 내 인생의 중심의 축을 가지고 살지만요, 불행한 것은, 중심의 축을 제대로 활용 못하는 것이 불행한 인생이에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모르드개와 같은 인생 멘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첨부터 중심이 있었던 것 아닌 것 우리 다 알잖아요, 첨부터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렇게 한 것 아녀요, 난 못한다고, 난 안된다고, 나 그런 일 할 수 없다고, 중심축이 없던 에스더를 모르드개라고 하는 좋은 인물을 에스더에게 붙혀 주심으로 에스더를 중심 있게 한 거예요, 그렇게 때문에 에스더에게 있어서 모르드개의 역할은 에스더의 중심이 바로 세워지도록 모르드개가 중심축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요,
모르드개가 본문4장에서 말로 무슨 권면을 해서 에스더가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여러 가지 말로서 권면을 하지만요, 사실 그런 권면 말씀 이전에 이미 여호수아가 지도자로서의 그 모세의 모습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지켜보고, 느끼고 관찰하고, 그러면서 인생을 배우고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에스더도 모르드개의 행동을 수없이 바라보고 느끼고 관찰하여 에스더의 인생이 정리가 된 것도 모르드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에스더를 보면 모르드개가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을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참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듯이 말입니다. 모르드개도 바울도 우리들도, 반듯한 믿음 생활 잘하고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참 어른스런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는 것이지요,
시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믿음의 중심이 없어가지고 조금만 위기가 오면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조금만 아픔이 오면 당황해서 어쩌질 못하고, 이런 초라한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면 좋겠습니까?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존재감이 있고 어른스러움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시기를 축복합니다.
2, “책망” 할 수 있는 권위를 회복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위기를 만난 동족들을 위하여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왕에게 나아가서 하만의 음모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라, 그랬더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정황을 정확히 살피지 못하여 못한다고 단숨에 거절합니다. 난 못합니다. 정말 못하겠어요, 그러자 그런 에스더를 향하여 추상같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강하게 책망합니다. 에스더4장13절 여러분도 느껴보세요,
에4: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상황을 자세히 들어 보면 등골이 오싹하지 않나요? 섬짓한 느낌이 안 드세요? 못하는 것을 못하겠다고 하는데 하기 싫으면 관둬 결국 우리집안은 저주로 멸망당할 꺼야, 너 혼자 잘 먹고 잘살아라! 못난 것, 추상같은 불호령의 책망, 성도여러분 제가 여러분들한테 이런 말하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떤 느낌이겠어요,
제가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집안은 숙대 밭이 되고 결국 명망할겁니다. 이래보세요, 당연히 저런 몰상식한 목사 봤나, 말을 저렇게 함부로 하다니. 배운 것도 없나보네, 어디다가 주둥아리를 확 이런 느낌일겁니다. 상처받지 않을 성도 없습니다. 다음 주 교회 썰렁합니다. 다 나가버리고 그리 안 해도 다 나가버리는데요, 지극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사랑해 주는데 자기 배 때지 채울 것 다 채우면 훌 가버리는 세상인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요, 에스더는 그 저주 같은 추상같은 책망에도 상처 받기는커녕 토시하나 달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승복하는 에스더의 모습입니다. 있는 그대로 순종하는 에스더입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르드개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오늘 두 번째 포인트 책망할 수 있는 권위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진정한 어른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이 책망 할 수 있는 권위를 회복해야 됩니다. 아멘~ 딛2: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바울사도는 책망도 권위가 있어야 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집안의 어른들이 디도서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업신여김을 받나요? 저희들 앞서서 목회하신 선배 목사님들은 오늘과 같이 학력이 그리 높지를 못했습니다. 머 고등성경학교 정도로 목사 안수 받아서 목회하고 했잖아요, 그런 분들에게 성도들은 깍듯이 고개 숙이고, 순종하며 존경했잖아요,
오늘날 목회자들이 이런 권위를 다 잃어버렸을까요? 성도들에게 권면하면요, 하나도 먹히지 않는 시대입니다. 왜? 그러나요, 바로 책망할 수 있는 권위를 잃어버린 탓입니다.
우리들의 부모님 자나 깨나 자식 걱정, 오매물망 자식 걱정 나는 먹었다 입었다. 밥 손 밑바닥 걸 거시고 누더기 옷 입으시며 사신 분들이시잖아요, 그런 부모님들께서는 오늘도 자식들한테 업신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들 잘난 맛에. 잘 배운 자식들한테 기죽어 살지요. 잘 배운 며느님들 덕분에 밥 한 끼 제대로 못 얻어먹고 살지요, 책망하면 바락바락 대들고 해준 것이 무엇 있냐고 하면서, 책망의 권위가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디도서2장15절 표준 새 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대는(목사는)권위를 가지고 이것들을 말하고, 성도들을 권하고 책망하십시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오늘날 보십시오, 부모가 자식을 책망 안 합니다. 오냐오냐, 내 새끼 제일이야! 교회 강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책망이 없어진지 오래 됐습니다. 전부 말랑말랑한 설교, 따끈따끈한 설교, 위로, 권면, 격려, 복 받으라, 왜 그러나요, 책망해 봤자, 소용도 업어요, 받아들이지도 않아요, 통하지도 않는데 머라고 책망합니까? 책망하면 깔보는데, 교회 다 떠나는데, 말랑말랑하게 잘 구 슬러 놔야 자리는 보전하잖아요, 잘 구 슬러 놔야, 헌금은 하니까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한국교회 강단에 가장 비참한 현실은 책망의 권위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비참한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비참하게 되었는가 하면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책망을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잘못 인식하고 잘 못 받아들인 탓입니다.
우리들의 가정에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향한 책망의 권위가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보세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아끼지 않고 책망의 권위를 사용하세요, 마가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가신 겁니다. 그리고 다시 나머지 제자들에게 내려와 보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가보니 제자들이 난감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막9: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막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바로 제자들을 향해서 무섭게 책망을 합니다. 막9: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여러분 이 부분에서 그냥 예수님께서 부드럽게 말랑말랑하게 말씀하신 내용 같습니까? 아닙니다. 추상같이 꾸짖는 것입니다. 도대체 너희들은 머냐? 내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가르쳐야 정신을 차리겠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마가복음 이 부분뿐인가요?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적은 자들아! 라고 종종 꾸짖고 책망하십니다.
선지자 나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하12장에 보면요, 다윗이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천하 통일을 이루어 갈쯤, 성적으로 타락하여, 부하의 아내 바세바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부끄러운 일을 행한 다윗입니다. 이 사실을 안 나단선지자는 다윗왕을 무섭게 책망합니다.
자 보십시오, 다윗이 왕인데 신하인 나단의 책망과 지적 앞에, 고양이 앞에 쥐 꼴로 아무 말도 못하고, 승복하고, 순종하고 회개의 눈물로 사죄하잖아요, 이 책망의 권세, 권위입니다. 잘하는 사람에게 누가 책망하나요? 칭찬하죠, 책망은 잘못이 있을 때 그 잘못을 바로잡고 고치기 위함이잖아요, 책망을 들을 때는 쓰디쓴 소태 같지만요, 잘 듣고 잘 새기면 보약중에 보약입니다.
무엇이든지 오냐오냐, 잘한다, 잘한다. 최고, 최고, 오냐오냐, 영적 권위 없는 인생 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날 이 시대엔 어른이 없어요,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시대, 참 불쌍해요,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보여준 모범의 권위, 책망의 권위가 살아나고 보여 지고, 회복되는 저와 여러분 되어야될 줄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정에, 교회에 이런 영적 권위를 회복하여 바른 책망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굳게 세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인격적인 어른이 되기 위한 3번째, 3, “아비의 심정” 회복하기=사랑입니다.
에스더가 오늘 4장에서 모르드개로부터 독설에 가까운 책망을 듣고도, 에스더는 상처를 받지 않는데요, 이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성경 한 구절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에2: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여러분 이 부분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책망할 수 있는 권위를 이 부분에서 부여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러잖아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공치사하고, 내가 너를 키워 주었으니 내가 너를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 마냥, 먼 물건 취급하고, 인격도 무시하고, 인격도 모독하고, 이러면서 막대하여도 되는 이런 것은 진정한 책망이 아니라, 이건 학대에 가깝습니다.
어린 시절 에스더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버렸고, 그런 에스더를 모르드개가 어떤 의무감에 에스더를 키웠다면 모르드개의 인격도 인격이지만 에스더는 진정 아름다움을 간직 못했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만약에 모르드개로 부터 무수히 많은 학대를 당하여 정말 무서움에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에스더가 순종했다면 승복했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순종이 아니라 항복이고, 책망이 아니라, 폭력에 가까운 것 아닐까요? 에스더는 인격 자체가 손상되고 상처투성인 채로 가치 없는 인생이 되었다면 모르드개는 가치도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어떻게 키웠다고요,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본문을 보니 모르드개도 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딸을 키워본 사람은 압니다. 만약에 자신의 딸 보다도 더 잘해주고 키웠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딸들과 동등하게, 흐뜨림 없이 자신의 딸과 동등한 사랑을 베풀었기에 에스더는 당당하고 자신 있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평상시 늘 하던 대로 아비가 자식을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여 주는 모르드개에게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따스함과 사랑스런 온기의 힘을 모르드개로부터 받았기에 늘 경험 했기에 늘 자기 딸같이 양육했더라, 에스더도 늘 아버지와 같이 여겼더라, 입니다. 살전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 주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성경구절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품성을 가지고 에스더를 친 딸 같이 양육했습니다. 에스더가 느끼는 모르더개는 예수님과 제자사이의 신뢰감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에스더에게 스며있었기에 모르드개를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어른스러움으로 살아갈 때 지난 세월에서 채우지 못한 풍성한 은혜를 채워 나가는 귀하신 성도님들이 될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사랑하고 에스더가 모르드개를 신뢰하고 사랑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 같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가짐으로 새롭게 출발합시다. 아멘~
예수님의 심정을 회복하여 보다 나은 인격적인 어른스러움으로,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사랑하는 어른스러움, 호산나교회를 사랑하는 복 된 성도님들 다되어지시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