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렬 시인>>
<<이성렬 시인의 양력>>
* 1955 서울 출생
* 서울대학교 및 KAIST를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받음.
* 2002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 수상 : 2013년 문학청춘 작품상, 2017년 “시와 경계” 문학상 등 수상
* 시집 :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2003)”, “비밀요원(2007)”, “밀회(2013)”
*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이며 웹진 『시인광장』편집위원 · 번역위원.
<<이성렬 시인의 대표 시>>
루비콘 강에 내리는 유성우/이성렬
-일상다반사 3
어느 흐린 일요일에 K는 보르헤스의「갈라지는 길들의 정원」을 읽다가 용산 근처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때 열차의 좌석을 구성하는 모반의 분자들과 그의 둔부를 지탱하는 우울한 세포들 사이 미세한 불화 때문에 K는 철로 위 공중에 떠 있었다.
남영역을 지난 열차는 후암에 정차했다. 후암역이라니?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1호선 전철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남영역과 서울역 사이에는 후암, 동자역이 확실히 놓여 있었다.
그의 맥박은 평소의 1/3로 뛰었고, 손목시계의 초침도 1/3의 속도로 움직였다.
남대문역 승강장에서 백인청년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동족의 머리가죽 네 개로 저글링을 연기하였다. 가시면류관과 황금도포로 장식한 흑인 사제들이 <귀여운 바바리안녀석이군!>이라고 외치며 환호했다.
삼성생명역 구내 벽에는 암적색의 플래카드 <만국의 CEO들이여 단결하라!>
종각역에서 내려 K는 종로서적 2층 매장으로 올라갔다. 신문에서 본 광고 – 오래 짝사랑했던 배우 이은주의 후일담집「나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요?」팬싸인회를 두 시간 기다려 그녀의 서명을 받았다.
KAL의 새로운 노선 종착지인 체코공화국의 마을 노베흐라디의 위치를 찾으려 여행서적을 살펴보았으나, 국가별 분류가 사라졌음을 알았다. 세계지도를 펼치니, 모든 국경이 폐지되어 지구는 주홍색 땅덩어리였다.
단일 색상이라니… 세계는 통일된 것인가, 아니면 핏빛 픽셀들로 무한히 분열한 것인가?
직장을 잃은 외교부와 방위부 고위관리들의 몇 세대 가족들이 파고다공원에 모여, 외계인침공대책특위 신설을 촉구하였다.
인사동 거리를 지나 안국역 계단을 내려가다가 뒤가 무거워진 K는 화장실로 향했다. 이라는 상표의 변기*가 샹들리에처럼 눈앞에 흔들리는 장면에 경악하여 항의했지만, 거기는 예술가 전용이라고 안내원은 답했다.
안국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탄 K는 교외로 향했다. 차체 측면에 <루비콘>이라는 로고를 부착한 찝차들이 자유로의 바깥, 벼랑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렸다.
만능줄기세포 과학자에게 신도들을 빼앗긴 교주가 독주를 마시며, 고양 벌판의 잔디밭 한 조각에 올라타 정발산 너머로 사라져갔다.
긴급재난문자가 도착. 오늘밤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쏟아질 것이니, 자외선에 눈이 먼 남극 펭귄을 반려동물로 키우는 생태시인들은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불현듯 전화가 걸려왔다 작가님, 오늘이 원고 마감일임을 알려드립니다>. 작가라니? 지적 허영에 젖은 고객상담사에게 웬 기담인가? 중얼거리는 사이
맞은편의 검은 기관차가 차선을 바꾸어 돌진해 들어오자 그는 비명을 내질렀으나, 두 유령들은 짧은 포옹 후에 천천히 멀어져갔다.
돌아오는 길, K는 서울역을 지나 다음역인 남영에서 내렸다. 쓸쓸한 휴일 저녁에.
*마르셀 뒤샹의 작품.
암전 2/이성렬
-마지막 연금술사
1
기다리던 폭우가 오지 않아 한쪽 눈에 인공눈물을 뿌리니
빼어든 휴지가 흰 비둘기로 변신해 창밖으로 날아오른다.
이제 쓸모없는 마술만이 남아 괴롭히는군, 그는 중얼거린다.
흐린 별빛으로 가득한 무대 위의 모략과 살인의 연대기
안개와 같은 확신이 연옥을 밝혔던 세기를 읽는다. 꿈속에
자주 나타나 한밤의 잠을 깨우는 먼 나라의 왕후 그대는
가시나무 숲 너머 색색의 대리석 기둥을 바람으로 갈며
유폐된 수녀원의 끔찍하게 지루한 생과 컴컴한 분노를
다음세상에서 펼칠 현란한 분신술로 다스려 견디었던가?
2
어항 속 금붕어들이 역린逆鱗을 저으며 서녘으로 향한다.
그 동안 식단을 점령한 보랏빛 우울은 관상용이었던가?
창밖은 컬트무비의 세계, 세도가의 폐색된 경동맥을 대체하려
진화를 거듭한 환형동물들이 주목朱木 뿌리를 타고 오른다.
군주의 총애를 받던 미희들의 흉부에서 금박으로 치장된
접선들이 중력의 밧줄에 묶여 지하실로 하강하는 시각
낭하를 지나는 누군가 음울한 음향을 휘파람에 실어 보낸다.
흰 공단을 입은 밤들은 종말에 이르지 않네*, 그는 도록을 열어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포스터의 검붉은 배경을 응시한다.
3
침묵하는 벽, 딱딱한 대기, 성대를 잃은 서신들이 문밖에 눕는다.
전 세기의 기관차처럼 화분에 박혀 부화된 욕망의 검은 껍질들
풀리지 않는 반응식들이 쇠사슬을 쩔렁이며 세상을 떠나는 사이
양피지 위 지워진 암호로 가득한 비늘구름이 구릉 위로 떠오른다.
정금으로 변신하기를 거절하는 원소들에 작별을 고하며 묻는다
이 밤의 기획자는 오늘도 거리에서 눈가리개를 나누어주는가?
격노하는 열차를 껴안아 산산이 부서지는 시간의 늑골을 본 자는
살아남지 못하니, 부디 잘 살기를, 늘 웃어넘기기를! 부르튼 혀에
짠맛이 내릴 때 먼 나라의 소금꽃이 벽돌 아래에 침묵하고 있다.
*Moody Blues,
**독일의 표현주의 호러 영화
블루클럽/이성렬
늦은 가을 저녁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 나의 텅 빈 시선 끝에, 그곳은 심해에 내려진 어항처럼 홀연히 떠올랐다. 방파제 바깥을 응시하는 밍크고래의 매끄런 뱃살을 닮은 푸른 간판에 손을 대었을 때에 - 나의 동공에는 사막에 세운 조화의 두텁고 매끈한 이파리들이 부유하였다. 그 적막한 클럽 안에서는 반짝이는 은빛 도구들이 부딪는 차가운 소리만이 간간이 흘러나올 뿐, 비스듬한 의자들의 미간에는 표정이 없었다. 맞지 않는 틀니처럼 생경한 삶과 결별하고자 낯선 빛살로 가득한 그 해연에 내려앉으니, 빛나는 머리칼을 말끔히 빗어 넘긴 그곳의 과묵한 현자는 한 달 동안 자란 나의 미망을 무심히 잘라내어 바닥에 흩뿌릴 뿐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내가 고백하려 할 때에,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후 내 몸에 걸린 수도자의 푸른 도포를 냉정하게 거두었다. 안경을 벗긴 채로 몇 분 사이 거울 앞의 생을 가늠하려 한 나를, 아무런 실마리도 없이 - 다시 캄캄한 성간으로 돌려보내며.
6월의 응혈/이성렬
-그림자 도시에서 12
외로운 시인의 무덤처럼 풀꽃을 흔들며 날은 저물어
이윽고 두려운 별들의 침묵이 창가에 내린다
아무도 모르게 지갑 속에 쌓이는 먼지에게 말을 걸며
무작위로 배치된 옷본들 앞의 침통한 재봉사처럼 묻는다
이 낮은 저녁에 너는 적멸을 생각하고 있는가?
굶주린 문장들이 사생결단으로 부딪는 세간을 떠나
얼음과 물과 수증기 사이의 머나먼 통로들을 가늠하려는
그 열망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잠시 너의 방으로 날아들었다가 홀연히 가버린
날개를 다친 새의 가까운 비명을 들으며 짐짓
영원을 떠올리는 것은 아득하지 않겠느냐, 그것은
시간표를 뜯어보며 시시각각 만나고 헤어지는 열차들의
이마를 떠올리는 고독한 결핵환자*의 몽유와 같은 것
매번 주인이 바뀐 술집과 다시 화친하려는 술꾼이나
밤의 카페에서 소녀가장 시절을 회상하는 여자처럼
사건들의 표리가 만나는 지평을 서성이다가 너의 지도는
그 잔혹한 거리로 말없이 돌아오는 것이겠지, 누군가
드나들 때마다 파안대소하는 주렴의 부서지는 손길에
죽은 새의 날개가 품은 무거운 수증기가 반짝, 너의
눈가에 내리는 이슬방울의 설렘으로 빛나는 그날에는
*마츠모토 세이초,「점과 선」
새벽 네 시 반의 조율/이성렬
1
꿈에서 퍼뜩 깨어난다. 낯선 바다를 표류하고 있었다. 그곳의 기후는 척박하여 폭설과 돌풍, 격한 일교차를 달래는 물의 표피에 투명한 표정으로 얼음산들이 떠 있었다. 그 거대한 냉혈의 하반신에 새겨진 흑암은 사나운 파도 아래 보이지 않았다. 휘어진 척주를 내보이며 서로의 유속에 기대는 물고기들의 빛나는 아가미로부터 짐작했을 뿐. 시공간의 전이가 운명을 바꿀 수 없으나, 심한 저체온증이 얼어붙은 눈꺼풀을 열어젖힌다.
2
거센 물살의 집요한 손목을 뿌리치고 순간이동 - 이 우울한 행성은 아직 건재하다. 손을 뻗어 단단한 바닥을 만져본다. 육중한 단절의 벽들이 지면을 떠받치고 있다. 이 도시에서는 수직단층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지진학자들의 결론에 고개를 끄덕인다.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세찬 중력이 세포벽을 짓누른다. 인력이 없는 가볍고 명랑한 공간에 머물기를 원하나, 저항에 대응하지 않는 진공 속의 동작은 무명함을 나는 알고 있다.
3
탁자 위 선인장에 물을 흩뿌린다.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자폐의 식물은 언젠가 호소하였다 - 햇빛 한 점, 비료 한 줌 스스로 발밑에 내릴 수 없는 운명에 대하여. 도대체 왜 여기에 서 있게 되었는지? 탁자는 말끔하다. 며칠 전에 찾아온 친구가 어둠의 무늬를 손수건으로 찬찬이 닦아 주었기에. 하지만 그간 쓰려고 작정했던, 신이 지상에 실수로 흘린 얼룩들에 대한 짧은 시를 미루어야 했다.
4
뻐꾹시계가 두 번 뻐꾹거린다. 아니, 틀렸다 - <뻐꾹>거리지 않는다. 그것을 문자로 기록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긴 글을 쓰려 하겠지만, 그러나 뭔 대수인가? 잠을 이루지 못할, 먹지도 못할, 비명을 내지를 정도의 간절한 사연인가? 뻐꾹시계의 울음(아니, 틀렸다, 울지 않는다)에 관해 누가 물어온다면 직접 채취한 음파를 들려주면 될 것임을.
5
나는 차라리 거대한 허위와 지독한 소외, 무자비한 폭력의 검은 옷들을 감싸는 이 도시의 실상 앞에서 심장을 오그라뜨린다. 실상이라니… 실상의 그림자,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나는 고백한다 – 사랑을 잃고 만취하여 거리를 헤매다가 전봇대에 한쪽 눈을 잃은 친구의 쓰라린 기억과, 결코 물러서지 않는 충격량의 법칙 - 그것이 내 시의 씨앗인 실상들임을.
6
화면에서 배우들이 물러가고 스탶의 이름들이 흐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그 상형문자들은 십 수 년 동안 벽을 향해 중얼거린 나의 시편들을 닮았다. 힘센 그들의 가공할 무기-침묵*에 대해 다시 곰곰 생각한다. 어지럽다. 그러니 나는 독한 외로움과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의 노래를 창가에 올리며 잠든다.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십일월의 깊은 밤에 말러를 듣다」
**한영애, <조율>
프리즘/이성렬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60년대 아주 추운 날 아침,
유담뽀를 안은 채 잠이 깬 내 머리맡에 놓인,
깊고 따뜻한 주머니를 가진,
질기고 강한 고무줄을 두 겹 넣은,
내 다리보다 한 뼘이나 더 긴,
대바늘 사이로 수많은 한숨이 무늬를 새겨 넣은,
내 가슴 속 깊이 무지개의 화석으로 박힌,
지금 흐린 겨울 하늘에 갑골문자로 눈물겨운,
어머니가 뜨개질 부업에서 남긴 색색 털실로 짠,
총천연색 얼룩말 무늬 스웨터 바지 한 벌
늦게 부른 노래/이성렬
서른 살에 시인이 되었더라면
많은 여자들을 만났겠지
술집에서 못 일어나는 밤이 잦고
우체국 간판이 붉은 이유를 진작 알았겠지
가난한 하늘에서 떠돌이별은 마음에
더 가까이 항해했겠고
밤의 푸른 목소리에 반하여
자주 떠나버렸겠지
그러나 마찬가지였겠지
기억할만한 사랑은 오래 아픈 법
낡은 가방과의 이별도 나중에 오는 것
늦은 가을날 빛과 어둠 사이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모든 길들을 지운 뒤
정강이에 와 닿는 매 시간과 헤어지며
모두 가엾은 죽은 살과 살아있는
껍질들을 쓰다듬고 있을 테니
북쪽의 얼굴-그림자 도시에서 4/이성렬
긴 미몽에서 깨어난 듯
별들은 대지에 내려앉는다.
아픈 시간들의 명치를 재우며
늦은 식사를 마주하는 밤.
세상은 소나무 껍질처럼 어둑한데
나는 북쪽 어딘가에 묻힌
부릅뜬 눈동자를 떠올리는 것일까.
붉은 잇몸을 드러내며 태어날 듯
빙하의 온도를 가늠하는 얼굴을.
보르헤르트*를 만난 오래전
봄날을 기억하는지. 물질의
차가운 손금을 살펴야 했을 시각에
그 검은 연극을 보러갔을까.
나는 문밖에서 서성이는
엘베강가의 유령에 매혹되어
그것이 세상을 거스른 내 행적의
단서가 아니었는지. 팜플렛 속
희미한 그림자로 남은 배역처럼
자정의 술집들을 찾아다니며
고독한 목을 뿌리째 뒤집으며
남루한 뒷골목 극장에서
비 내리는 흑백영화들의 슬픈
뒤통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는지.
아득한 전장에서 돌아와 누운
지친 병사에게 손을 내저으며
빗장처럼 문들은 돌아앉는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운명이 외면하니
이제 남은 나날들을 걸어 잠근 후
녹슨 열쇠꾸러미를 묻으며
기억들로 가득한 수첩을 펼치어
내 마음 속 변두리 연보를 기록할 뿐.
누군가 알몸으로 북극의 눈썹을 녹여
지평선에 모닥불을 지필 때까지.
*볼프강 보르헤르트 (1921–1947)
독일 함부르크 태생의 전후세대 작가, 책방점원, 연극배우.
대표작 「문밖에서」(러시아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의 이야기).
풀꽃에게/이성렬
불온한 이슬점들을 온몸에 두른 미명은
버려진 정원 문턱에 부르튼 발목을 접는다.
어둠의 품을 떠나는 새들은 묵묵히
손바닥에 찬 바람무늬를 새겨 넣는다.
무엇을 찾아 나왔더냐, 구름 너머로 걸어 나간
풀씨의 기별이냐. 가로막는 울타리의 침묵이냐.
이곳에서는 주어진 혈통의 무늬
바깥으로 나가는 건 이단이라는데. 벗을 수 없는
단단한 껍질 안에서 불어나는 몸을
견디다 못해 그늘의 화석이 된 애벌레가 있다지. 그러나
늘 적의와 시기심을 품는 굵은 뿌리들을 재우려면
기후를 조율하는 수밖에 없다는구나.
밤을 새워 씨앗들의 신상을 문초하는 서릿발의
싸늘한 눈초리는 너무 두려워. 흐르지 않는 물은
망명하는 종이배들의 귓속에 닻을 찔러 넣은 후
어두운 서랍에 첩첩이 접어 넣었다.
참으로 옹졸한 이 땅의 굳은 단층을 넘어
광활한 벌판, 검푸른 물에 몸을 담그며
<이렇게 넓다니!>*, 외치는 달그림자의 슬픔을 알겠지.
오늘의 지형을 견딜 수 없어도 후생을 기약해야 하지 않느냐
지도 위 사막에 초록색 크레용을 칠하는 아이처럼.
시든 꽃잎에 소금을 재워 넣는 붉나무 수액처럼.
*일리야 레핀의 그림 제목
로드무비 3-우연한 여행자/이성렬
밤 늦게 도착, 서둘러 모텔에 들다. 밤새 깜빡이는 길 건너 술집의 붉은 네온등을 보며 잠들다.
꿈속, 물밑을 배회하며 잔뜩 긴장하는 전기뱀장어의 핏빛 신경다발을 헤집다.
모텔 <워커힐>과 소주 & 호프집 <쓰리 몽키스>, <교동반점>. 이 장소들은 어떤 근거로 나의
생에 들어왔던가.
내 마음 속 포구의 <작은 다리>, 지친 걸음으로 소나무 숲속에서 스러지는 <지인길>, 사소한 이름들은.
오전 10시, 버스를 타고 해변으로 항하다. 창밖으로 이층 카페 <나마스떼>의 낡은 간판이 스
쳐 지나가다.
눈 쌓인 해변 사진을 익명의 번호들에 보내다. 너무 멋져요! 라는 답신 한 개가 도착. 포옹하는
연인들. 부활의 <Never ending story>를 듣다.
네루다의 시를 보내다. <어둑한 슬픔으로 나는 발코니에 섰네,/ 어제처럼 내 어린 날의 담쟁이
덩굴과 함께,/ 아무도 살지 않는 나의 사랑 안에서/ 대지가 날개를 펴기 바라며>.
나의 망막을 스쳐간 장면들은 어느 먼 행성의 사진관에 걸려 있을까. 옛 기억을 찾아 종로 2가
<반쥴>의 어두운 나무계단을 내려가는, 점점 굽는 내 어깨와
십 년 넘어 간직한 스와로프스키를 목에 걸어주던, 이태원 뒷골목 <산토리니>의 맑은 웃음들은.
오후 3시경, 다시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다. 작은 숲을 기웃거리다. 바짝 마른 짐승의 잔해를 덮
는 대지의 손길.
일식집 <귀선(歸船)>에서 회식하다. 가시 많은 생선의 실핏줄 투성이 내장과 조우. 해초 형상
의 수의(壽衣)를 입은 붉은 알들을 들여다보다.
집이 비었다는 후배를 일찍 보낸 후 폭설 속을 걷다. 사라진 가수의 <가리워진 길>에 취하여
눈길에 몸을 눕힐 뻔하다.
모텔로 돌아와, 11시 뉴스를 듣다가 문자를 보내다. 2500만 년 후에 만나면 달라질까… 그동안
힘들었으나, 즐거움도 있었으니…
동거하는 창부와 육체를 나눈 후 행복하게 죽는 술꾼*의 마지막 들숨에 귀 기울이다.
올해의 가장 시린 멘트를 노트에 적다. 세상은 거의 우연이지만… 고통이 클수록 우연은 줄어드는 것**
자정. 창문을 활짝 열어, 겨울바람이 마음껏 몰아치도록 허락하다. 맥주 세 병, 감자칩 한 봉지
를 소비한 후 잠들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로베르토 볼라뇨, 『2666』
카페 유비아/이성렬
-단편으로 본 미시근대사 제30화
왜 이 한적한 장소의 상호가 Café Lluvia일까?
조용한 거리의 3층 건물에 자리 잡은 찻집은
전면에 까다로운 발음의 이름을 내어 걸었다
2층의 유비아 바리스타 양성소 간판이 아니면
나는 그 뜻과 음성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카페의 바깥주인일 3층
금정작은교회 목사님의 멋진 생각이었을까?
나란히 침묵하는 두 문자 L과 엘을 보니
오전 중에 카페 카운터를 지키는 아들이 어쩌면
스페인어 학부를 나온 것일까? 그리하여 그는
언젠가 이 건물을 팔고 희망 없는 살 터를 떠나
스페인의 지중해 휴양도시 시체스의 잔잔한
바다를 그려본 것일까? 그곳에서 카페나
식당을 차려 고요히 사는 꿈을 꾼 것일까?
이따금 친지들이 들러 커피나 주스를 나누며
밀린 소식을 나누는 이 카페가 왜 유비아일까?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lluvia가 스페인의
축축한 단어 비雨임을 알아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도시의 중심상가에서 번영하는
이마트의 승강기에서 유비아 바리스타 양성소의
광고를 본 듯도 한데, 터무니없는 주인의
자신감과는 달리 3층 건물의 벽면에는 시간의
빗물이 내리듯 수직의 자국들이 얼룩져 있다
그러면 나는 지금 국화차 한 잔을 마시며
이곳 식구들의 행복을 기도하는 것인가?
그런 간절함이 남아 있을지 자신이 없는 나는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이 카페를 찾아와서
스페인어 사전을 뒤지며 네루다의 시편*을 읽고
아침이면 하늘이 열리고 구름 너머로 하루가
저물어, 떠나는 이와 돌아오는 이, 울음 사이로
생겨나는 목숨의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소도시의
소소한 분초들의 가난과 불안한 평화를, 멀리
지나는 흐린 전철 불빛에 기대어 보는 것이다
*「슬픔에게 II」, <너의 느린 피와/ 찬/ 비를 다오,/ 너의 무서운 날개를 펼쳐 다오!>
초행/이성렬
매운 눈발에 도시가 묻히고 있다.
길들의 이름은 침묵에 잠겨
수레에 매달린 나귀 한 마리
표백되어가는 눈을 감은 채로
빈 모퉁이에 묵묵히 서 있다.
길 건너편 털모자를 깊이 눌러쓴
사내의 어깨가 전봇대에 지워진다.
등에 납작 눌린 낡은 어구에서
한 줌의 비늘이 삭풍에 떨고 있다.
어선들이 응고된 물속에서 잠드는
이 항구는 한때 잃어버린 땅이었다.
예전 세관이 아직 굳게 자리한 곳
<공출>이라는 붉은 단어에 시인의
탄식이 머물 여백은 너무 비좁다.
마주 보는 낮은 처마들 사이로
분주히 세간의 메아리를 전하던
마을 철길은 이제 쓸모를 잃었다.
철로마저도 버려지는 날이 이르니
대지의 손길은 실상 얼마나 냉정한가.
기꺼이 내장을 포기한 물고기들이
길가 횟집의 도마 위에서 안식한다.
어머니의 젖은 앞치마에 뺨을 묻는
어린 남매의 낮은 투정을 들으며
오래전 간이식당의 흐린 창으로 좁은
골목을 내다보던 소년을 기억해낸다.
바다의 차디찬 망막에 저녁이 하나둘
가난한 시간의 잉크 방울들을 뿌릴 무렵
더운 씨방을 목으로 넘기며 길을 접는다.
대합실의 노파가 열중하는 작은 책자
「급수한자級數漢字 3500」을 눈에 담으며
개찰구로 나서는 누군가의 발걸음에
세상의 끝은 턱을 당기며 무쇠 난로의
체온 바깥쪽으로 한 뼘 물러앉는다.
유령 8/이성렬
뚝섬 못미처 시작된 승객들의 말싸움은 지친 듯 금세 사그라졌다. 열차의 규칙적인 마디음에 섞여 신음하듯, 왕십리를 지났을 때 기차 바퀴가 발을 끄는 소리가 아닌 –이를 가는 듯한 삐익삐익 또는 낑낑 소리와 같은 음향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 것인가… 신당역에 내려 반대 방향의 열차로 갈아탔을 때, 소리는 두 역 사이 1/3과 2/3 지점, 기억 속의 광무극장과 중국집 육합춘의 옛 자리에 일치하였다. 겨울날 무쇠 난로에 손을 데우며 보던 영화 <지옥문>과 모친의 곗날 회식의 추억이 서린 곳. 왜 이제 누구를 부르는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물었지만, 그 낡은 숨결들은 어느 날 가게를 접은 후에 시장 밖으로 걸어 나간 표구점 주인의 의족처럼 간 곳 없었다. 조악한 극장 간판의 울긋불긋한 색상을 다시 모을 수 있다면. 육합춘 잡탕밥의 고소한 냄새를 실어온 공기 입자들의 떨림을 재현한다면. 어떤 결심 때문에 세상 밖으로 사라져갔는지. 숨을 접은 두 유령의 사연을 알아볼 수 있을까. 지금의 이 난전은 그때의 연옥이 맞는가? 이들이 소멸하기로 작정한 순간, 우리는 혹시 다른 세상으로 갈라져 나온 것 아닌가? 골목을 건너는 고양이가 애매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광무주차장에 쭈그려 앉아 오래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가로수 잎사귀에 새겨진 늙은 패잔병들의 유서가 몸을 뒤틀었다. 길 건너 빌딩 우듬지의 전광판에서, 최초의 인류 루시가 거닐던 대륙의 병든 아이가 마른 입술을 달싹여 속삭였다. 우리는 용도가 소진되면 껍데기만 남게 되는. 모든 기억을 소거한 후 세상 밖으로 스러질. 언제라도 시장으로부터 내쳐질 시간의 잔상이 아닌가? 그나마 남은 생을 탕진하며– 아무도 읽지 않는, 어떤 무대에도 오르지 못할 검은 대본을 그림자 속에 펼치는 희곡 작가의 기침 소리처럼. 빈터에 울려 퍼지는.
일상다반사 2/이성렬
-12월의 꿈속은
짓궂은 낙타가 모래를 뿌리며 충무로 네거리를
활보하여, 다음 날 아침에는 가는 싸락눈이 명징한
손톱으로 낮은 집들의 굳은 양철 고막을 깨운다.
날개를 떼어낸 후 고치 속으로 기어드는 나비의
파리한 겹눈을 비껴보며, 조증躁症의 시인을 닮은
박새가 생의 밑바닥에 한 무더기 색색의 작은
종이학들을 묻어놓고는, 언젠가 지구를 구원할
명왕성을 향해 푸른 노래를 우짖는다. 속주머니에
몇 주일 간직했던 볼펜 속의 잉크가 줄줄이
빠져나와, 수첩에 <깊이. 새로이.>라고 또박또박
적어 놓고 좁은 골목으로 돌아가 창을 닫는다.
12월의 꿈에는 검은 수맥이 주문을 끊어낸 뒤
세찬 인연의 결을 따라 먼 바다에 가만히 닿으며
심해에 내려온 해시계를 물살에 연마해 부레로
장착한 물고기가 떠올라 투명한 겨울 하늘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따뜻한 초록빛 소매가
고독한 회랑에 걸린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속
고깃덩어리에 육탈한 속죄양의 외투를 입혀주고는
모든 출생의 비밀들을 찾아 되돌아가는 동짓날에
오징어뼈에 대한 몽상/이성렬
해변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비극적인 모습으로 모래에 반쯤 파묻혀서 침몰 직전 수면 위에 남은 배의 마지막 이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가가서 까끌까끌한 면을 손톱으로 긁었을 때 표면에서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났다. 그것은 겹겹의 각질층으로 싸여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뒤집어 보았을 때 그 속살은 너무나 부드러운 해면체와 같은 연약한 분말의 다발이었다. 한편으론 단단하고 한편으론 푹신한 손가락 끝의 느낌을 말로 옮기기엔 내 혀가 석고처럼 굳어 있었다. 잠시 혀를 내밀어 흩어지는 분말을 감촉했다. 귀에 대었을 때 거기서는 다공성 석회질에 흡착되어 있던 물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한여름 밤 가위눌린 꿈과 같은 목숨의 최후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은 우연히 나의 생과 마주친 한 조각 가벼운 중력의 흔적이었을까.
봄날, 단풍나무와 함께/이성렬
나는 생각했네.
먹이감과 살 터를 찾아 눈먼, 인간 에어리언들의 공중전과
그 버팀목이 되는 가슴 없는 세계.
-이연주, 「겨울나무가 내 속에서」
봄날의 고적한 뜰에 깊은 녹음을 드리운 단풍나무는 전란을 피하여 떠도는 옛 시인의 분신처럼 외로이 서 있다. 지평의 반대쪽으로 부푸는 상현달의 모습을 입은 채, 세상의 모두를 물리친 후 한쪽 귀만을 열어, 빽빽한 꽃들과 잎사귀로 발등에 짙은 그늘을 마련한 나무는 잠잠히 눈을 감고 있다.
먹이사슬의 장막 바깥으로 나간 듯, 자식나무 한 그루 곁에 두지 않은 무심한 자세로, 햇살에 싸인 담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초록 발우 형상의 단풍나무를 평화라 하겠는가. 모든 내력을 버린 뒤 짧은 계절의 안식을 찾아 지상으로 내려온 한 줌의 숨결을, 거친 껍질 속으로 물의 상처를 핥는 희미한 빛의 족적을.
낮은 처마에 눈길을 맞추어 나무는 느린 춤사위를 펼치고 있지만, 그 손끝은 품안의 무성한 소리들, 파닥거리는 벌들의 날갯짓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무수한 별들의 운행을 품는 은하의 가슴처럼, 나무는 그 안의 많은 사연들을 한꺼번에 고백하고 있는 듯 잉잉대는, 수많은 궤적들에게 더운 부력을 불어넣고 있다.
나무는 벌들을 짐짓 이곳으로 불러 모은 것인가, 낙원을 찾는 지상의 호흡들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여 돌아오는 것인가, 양식과 종족과 노역과 계급의 세상 안으로. 산발한 유령처럼 툇마루에 신발을 벗은 채, 사소한 정분도 가녀린 인연마저 어찌할 수 없다는 듯, 어차피 곧 몸이 굳을 때가 될 것임을 짐작이나 하는 듯이.
저무는 뜰에서 젖은 눈으로 서성이는 단풍나무를 무간無間이라 하겠는가, 목숨들의 불화와 투쟁을 껴안은 채 육중한 슬픔으로 서 있는 봄날의 음각을. 그렇다면 그대여, 이 꽃들이 모두 스러진 늦가을의 붉은 모습을 투영함은 크나큰 죄악인가, 이윽고 꽃도 잎도 모두 벗겨 내리는 시간의 처연함을 예견하는 것은.
-전주 한옥마을 <동락원>에서 씀.
기쁜 우리 젊은 날/이성렬
그날, 십이월의 잿빛 하늘 아래
아직 생겨나지 않은 오랜 고난과
이별의 악수를 나누는 몽상 끝에
빈 숲에 부르짖는 검은 자세로
얼어붙은 겨울을 헤매었는데
차디찬 저녁의 까마득한 골짜기를
위태로이 건너는 두 칸 경전철에서
시인보다 더 불행한 서른 살의 내가
차창에 비추인 앙상한 시간의
낡은 늑골을 마주했던 것인데
덫에 걸린 발을 잘라내려 몸부림치는
겨울 들판의 작은 포유류처럼
숲의 캄캄한 목소리에 기대어
지나온 정거장들의 발자국을 지우며
눈 내리는 뒷길로 사라지려던
그날, 내 마른 시야를 찢는 삭풍
핏줄 벽에 쌓이는 서리꽃 송이
공중의 마른 이파리들에 닿아
물방울로 스며든 협궤의 종소리와
그리운 밥집의 먼 불빛
최초의 물가/이성렬
해변을 거닐다가 바위틈으로 숨는 돌게를 보았다
한쪽 집게가 우스꽝스럽게 큰 갑각류의 단단한 등은
내일이 사라질까 두려운 목숨들을 위해 새벽마다
하늘의 귀퉁이를 비추는 시간의 등피를 닮았다
태초에 누군가 빛이여 있으라, 명했던 것처럼 처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절망한 작은 생명은 팔에게
간청했을 것이다, 부디 강대한 무기로 변신해 다오!
이번 세상의 조물주는 조용히 수면 위를 거닐다가
가공할 수력으로 엄하게 인간의 잘못을 문책했음을
자서전에서 피력했으나,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으니— 내 기억 속 최초의 물은
맨몸에 닿은 어둡고 따뜻한 체액, 억센 손아귀가
나를 그곳에서 끌어냈을 때 손끝에 도착한 까끌한
강보의 감촉과 귓가의 낯선 웅얼거림, 그리고
물가에서 멀어져 가는 기미에 폐부로부터 터져 나온
첫 울음— 그러면 이 시간 손금에 미로를 새기듯
무엇이 명확한가? 그것은 잎사귀를 비수처럼 벼리며
어둠 속을 응시하는 가로수와 먼 빙하를 맞이하려
유속을 버리는 지하 수맥, 사방으로 질주하는
망국의 소문들과 암벽에 부딪히며 저물어가는 물의
육성— 그러나 오랜 후 물기를 품지 않은 불덩어리
거대운석이 이 행성으로 돌진하는 그날에는 묵은
흑암이 덜어질까, 물가에 일렁이는 구름의 차가운
발바닥에 붉은 뺨을 댄 아이가 말없이 건져 올리는
물미역 줄기처럼 질기고 미끌미끌한 죄의 잎맥이
누구에게 전화하는지/이성렬
그녀의 얼굴 변천사를 보면 진실은
바닥없는 구덩이 밑바닥에 있지.
원래 얼굴이란 원래 없는 것,
그녀가 돌잔치에서 화장품을 집어 들었다거나
버는 돈 모두 부모에게 맡긴다거나
소주 한 잔 마시면 병원에 실려 간다는, 등등
사실이 아니면 어떤가, 그들에게
환상을 줄 수 있다면, 가령
그녀의 허리가 굵어지면 포샵으로 깎으면 되고,
젖꽃판 내보인 사진을 흘리며
기자들에게 촌지 좀 쥐어주면
기관원들에게 꼭지 떼였다는 소문은 사그러들지.
무리해서 쓰러졌다는 소문을 보내면 그들은
힘내세요, 사랑해요! 라고 응원하지.
감각의 제왕,
무지개를 뿜는 그림자,
봄꽃 시들면 여름나비로 옮겨가네.
샘솟는 아이디어를 수첩에 올리고
달마다 그녀의 치마 뒷춤을 잘라먹으면 되지.
잠들기 전 냉동실에 입을 넣어두면
아침까지는 산뜻 멸균된다네.
중요한 건 결정적 순간
누구에게 전화 걸 수 있는지!
부드럽고 질긴 괴벨스,
세상을 스토킹하네.
근황/이성렬
무슨 소식이 있는지 물어온다면, 말한다
행성들이 아직은 별빛을 거절하지 않는다고
어떤 이는 벼락을 맞은 후 피아노狂이 되었고*
막장드라마에 저주를 퍼붓던 누구는
쇼펜하워의 염세론을 읽고 난 뒤에
사악한 여주인공을 찬찬히 이해하기 시작했다는데
홰홰 고개를 젓는 시계추가 더 이상 밉지 않다는데
그러나 모르지, 언제 지구의 맥박이 목숨을 건너 뛰어
착한 물의 한쪽 가슴을 허물어뜨릴지
좋은 소식이 있었는지 묻는다면, 계절 내내
이주하는 나의 짐가방이 제법 서정적이라고 말한다
가을 상가喪家의 화투치며 노는 웃음소리가
실은 사라짐을 기꺼워하는 고인의 것이라는데
이미 오래전에 배정된 여로의 중간기착지들을
수시로 바꾸는 지도 위 검은 점과 선들에게
물안개의 살갗을 사정없이 벗기는 차디찬 빗줄기에게
겨울 틈틈이 읽은 초월주의자의 잠언집은 종이날개
바람이 시지프스의 수의壽衣에 심은 보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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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리버 삭스,『Musicophi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