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행함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구나 자기 '개인의' 뜻(즉 사람의 판단력이나 의지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그것이다)을 가지고 있으며또 그 뜻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주 예수님께서도 그분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셨음을 요한복음 6장 38~39에서 밝히 볼 수 있다. "내가 …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주 예수님은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분께서 아버지를 떠나서는 결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내가)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주 예수님은 그분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그분의 삶의 원칙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행동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이었다. 주 예수님의 뜻은 피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인 것이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도록 뜻을 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운 뜻을 꺾어 피동적으로 그분의 뜻을 행하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자기 의지를 사용하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분은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 밖에서 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과 동행하신 소극적인 면 - 자기 뜻을 구하지 않음 - 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주 예수님의 양식임
요한복음 4장 34절은 적극적인 면에서 주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는가에 대해 말한다. 그분께서 자기 뜻애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이것이 바로그분의 능동적인 선택이다. 여기에서는 피동적인 발자취를 조금도 볼 수 없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 말씀하실 때가 아니라 - 행하실 때에 신성한 양식을 얻으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뜻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그분께서 당신을 위해 정해 놓으신 계획에 따라 한 걸음도 더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생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독자적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정하셨다. 우리는 뜻을 정하는 것이 마치 배의 키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뜻으로 정했다면 하나님은 일하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당신은 마땅히 "이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 자신의 뜻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신의 뜻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나타내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뜻을 정하셨고 한 순간도 그분의 뜻에 동역하는 것을 잃지 않으셨다. 그분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 "내가 온 것은 당신의 뜻을 행하려 함"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둘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3절은 "내가 원하노니('그럴 뜻이 있다'로 번역할 수 있음)깨끗함을 받으라" 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뜻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동역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한 예이다. 문등병자가 왔을 때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서 즉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그분께서 틀리지 않다는 것을 간증하기 위해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셨다. 문둥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 운행되어 "내가 원하노니 … 받으라" 라는 말에서 나타난다.
만일 우리의 생활의 원칙이 하나님과 완전히 뜻을 같이하는 것이라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첫 번째 질문을 던질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할 두 번째 질문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이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성경께서 주신 능력으로 악한 영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게서 떠날지어다"라고 말할 것이다. 환경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은 필히 믿음 안에서 당신이 행할 일을 증거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당신에게서 나타나게 하실 것이다. 마귀는 종종 당신이 '자신의 뜻'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게 함으로써 승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일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즉, 당신의 뜻을 그분의 뜻에 둠으로써 그분의 이름안에서 권위의 말씀을 원수에게 말하는 것이다.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뜻
누가복음 22장 42절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심한 고통을 당하고 계실 때조차도 이러한 말씀을 하심으로서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것이다. 압력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그분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는 그리스도께서 뜻을 세우신 태도였다. 그 일 전에 그분은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요 12:27)라고 기도하셨다. "내가 …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셨는가? 아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데에 두었다. 비록 압력이 심했지만 그분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 편에두셨기 때문에 그분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그 환경을 견딜 수 있었다. 그때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겼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영적 생명의 원칙으로 삼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택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골고다의 승리를 당신에게 더하실 것이다. 당신에게 다른 사람을 구원시킬 능력을 더하실 것이며, 악한 영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아셨는가? 그분은 영 안에서 이것을 아셨다. 요한복음 4장 4절에서 그분은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의 축어역은 "그분은 밀어냄을 당하듯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께서 사마리아로 가시는 것이었다. 그분의 영은 심히 온유했기 때문에 그분은 이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당신의 영이 강퍅해서도 안 되고 완고해서도 안된다. 당신의 영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아주 온유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영 안에서 이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일치하게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없다. 또한 당신이 내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반드시 해야겠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두지 않은 것이다. 주 예수님은 변경할 수 없는 확고한 계획을 세우신 적이 없다. 그러면 당신은 "우리는 어떤 계획도 세워서는 안됩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물론 당신은 계획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계획은, 마땅히버려야 할 것이라면 쉽게 버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온유하게 순종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당신은 결코 늘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온유한 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앎
당신은 온유한 영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부흥의 첫째 원칙이다. 예를 들어 집회에서 하나님의 운행함에 온유하게 순종하지 않을 때 성령의 일에 큰 방해를 준다. 사람의 영은 성령의 느낌에 아주 예민해야 한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행 8:29)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즉시 깨달았다. 이렇게 하여 성령은 그분의 뜻을 당신에게 지시하시고 당신으로 하여금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게 하신다. '온유한 영'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킬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은 니고데모의 필요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를 가까이 했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당신의 태도가 어떠하면 하나님의 뜻도 그렇게 당신의 영 안에 나타날 것이다. 당신의 영이 열리지 않고 닫혀 있거나(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심) 혹은 듣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산 진리를 그에게 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영 안의 작은 느낌이라도 좇아 행한다면 그 느낌은 점차 예민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당신에게 지시하실 것이며 그 느낌은 온전히 그분의 말씀과 일치할 것이다. 성령께서 당신의 영 안에서 지시하신 하나님의 뜻은 결코 그분의 말씀 안에서 지시한 바와 상반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다 영 안에서 행한다면 무엇이 영 안에서 한 말이고 무엇이 생각에서 한 말인지 분별하게 될 것이며, 또한 생각 안에서 한 말이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의 영은 마땅히 사람의 생각을 밝게 비출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영이 성령과 동역하지 않는다면 생각은 협조하지 않을 것이며 좋은 결과도 낳지 못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영 안에 성경께서 계심을 깨닫는 영적 생명의 단계에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행한 모든 것이 성령과 크나큰 관계가 있음을 알 것이다. 영적인 생활이 후퇴할 때 당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현재 처해 있는 영적 단계에서 후퇴하고 벗어난다면 당신은 반드시 영적인 능력을 잃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즉각 회복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 깊은 실패를 체험할 것이다. 이러한 손실은 당신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당신과 관계된 사람에게도 영향을 준다. 당신은 원인도 모르는 채 뒤로 물러서게 될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종의 말을 반대하거나 그를 오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의 오해와 합당치 않은 태도가 깨끗이 제해지지 않는 한, 당신은 영적으로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한 번은 평소 당신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최고 높은 수준의 생활에 머물러야 하며 하락된 생활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당신의 영적 생명이 어떤 단계에 이른 후 다시 거기서 하락한다면 당신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조차도 흑암의 권세가 당신을 공격할 것이다. 당신이 얻은 최고의 높은 생명의 지점에 살 때만이 당신의 생활과 행함 가운데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다(빌 3:16).
위축되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함
실패할 때 당신은 원수가 당신을 괴롭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어째서 하나님의 능력은 끝내 나타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당신은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결국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후에 당신이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물을 때 비로소 당신이 위축되어 있어 마땅히 알아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당신이 성령과 동역하지 않고서 어찌 그분께서 일하기를 바라겠는가? 당신이 약간 주저할 때도 당신의 영성은 하락하게 된다. 당신이 "주여!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기 원합니다" 라고 말할 때만이 하나님의 능력이 다시 나타나 모든 일이 순조로워질 것이다.
원수는 당신의 영성이 퇴보한 것을 알지 못하게 당신을 속인다. 당신은 양심이 둔해져서 자신을 안위하며 많은 변명을 할 것이다. 당신은 무렷한 경지에 떨어져서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결국 당신은 고뇌에 빠지게 되고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께서 이르게 하신 영적 생명의 단계에서 철저하게 살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하나님께서 이르게 하신 그 최고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몇 가지 본(本)을 보기로 하자.
요한복음 4장 34절은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주님을 우물가로 인도하셨는지를 보여준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음식의 문제에 대해 답변하실 때 그분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 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7장 3절과 6절에서 그분의 형제들이 그분에게 "여기를 떠나"라고 말했을 때,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때 성령의 저지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은 그분의 형제들에 의해 요동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11장 5절과 6절은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은 영의 제한을 받아들이셨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 되어야 한다. 비록 사랑하는 이들에게 오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분은 움직이시지 않았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아셨는가? 그분은 시종 바깥 세상에 의해 요동하지 않으셨고 가족들의 비방에도 흔들리지 않으셨으며 또한 조롱과 불신의 말에도 요동하지 않으셨다. 즉 사랑을 베풀어 달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시종 행동을 취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분은 영의 제한을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
판단력의 동의
하나님이시든 마귀든 그들은 모두 우리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록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의지는 사탄의 종노릇을 하지만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자신의 의지(판단력)를 하나님 편에 두어야 한다. 빌립보서 2장 13절은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뜻을 세우게 하는 것을 말한다. "너희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즉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정도는 당신이 소원을 가진 정도에 달려 있다. 그분은 당신을 대신해 소원을 갖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의 소원은 '자의적 숭배'(골 2;23)에 불과하다. 바울은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뜻을 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5)의 말씀처럼 종이 주인의 뜻을 몰라서는 안 된다. 모를 때 그는 벌을 받게 된다(눅 12:47).
우리의 원함이 역사하지 않는 위험
순종이 무엇인지 모를 때 수동적이 된다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은 순종의 참뜻을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 하나님의 …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마땅히 능동적으로 영 안에서 뜻을 세워 활동해야 한다. 당신의 의지는 당신의 영을 보존하고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의 제재를 받는디(고전 14:32). 예를 들어, 때때로 당신의 영은 재제하지 못할 정도로 기뻐하거나 한없이 슬퍼한다. 이렇게 당신의 의지의 통제를 벗어난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다.
당신의 영은 의지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때로 영이 높이 솟아오르고 자유를 얻으며 심히 가벼워질 것이다. 이럴 때 흑암의 권세는 간계를 꾸며 당신의 영과 몸을 선동할 것이다. 원수는 많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극도로 긴장하게 하고 자주 조급하게 많은 일들을 하게 된다. 원수는 그의 영을 외부 흑암의 권세로 이끌어 낸다.
주 예수님은 영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셨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이 매우 안정되어 있어서 어떤 요동도 없으며 아무런 압제와 교만도 없고 아무런 재촉과 지연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어떤 사람의 죽은 딸을 살리러 집에 가실 때에도, 그분은 도중에 멈춰서 하나님 앞에서 필요를 채우기 위한 안정을 취하고 계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영 안에서 완전한 평강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강이 있을 때만이 깨어서 당신의 영을 공격하는 흑암의 권세(때로 이 권세는 당신을 전진하게도 하지만 대개 당신을 하락하게 만든다)를 대항할 수 있다. 우리의 의지와 영의 관계는 마치 실과 연의 관계와 같다. 실은 연의 힘이 되고 연을 안정되게 한다. 실을 놓는 순간 연은 즉시 땅에 떨어진다. 주 예수님은 그분의 영 안에서와 지력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셨고 그것을 행하셨다.
능동적인 의지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 바로 수동적인 것이다. 만일 당신의 의지가 수동적이거나 당신의 실행이 더딘 것을 깨달았다면 당신은 "나에게는 의지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행하여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의지를 가질 때만이 행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주님의 태도나 선택과 같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우리가 우리의 본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가르치시기 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의 뜻 가운데 행하며 그분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게 되기를 바란다(골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