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가, 그 죽일 놈에 시가
암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손톱이 빠지기 시작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누군가 나의 성기를 잘라버렸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목에는 칼이 꽂혀서 안 빠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그 칼이 내장을 드러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 정재학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에서
그 시를 읽다가 내 시를 접었네
아니, 그 시를 읽다가 내 시가 죽었네
내 시의 슬픔이 미천하여
손수건 한 장 적실 힘없고
저 밑바닥까지 떨어질 용기가 없어
차마 내 시가 머리를 처박고 죽었네
너, 나만큼 미쳤니?
너, 나만큼 알몸이니?
홀딱 벗은 삶의 발바닥에 작두를 대고
칼날 같은 시 한 줄과 접신하였니?
그 시의 혓바닥이 내 시를 칭칭 감네
모가지가 감긴 채 켁켁 잠이 드네
*
어제 죽은 시를 버리고 오늘의 시가 밥을 씹네
목구멍에 어제 죽은 시가 또 걸리네
아아, 다시 젯밥 같은 평화에
내 시가 죽네
내 시가 죽네
그 죽일 놈에 시,
그 죽일 놈에 시가 내 시를 죽였네
이선정_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수료. 2016년 『문학광장』 등단. 2020년 강원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23년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계간 『동안』 편집위원. 시집 『치킨의 마지막 설법』, 『고래, 52』
신공 2023 詩작품집
『얼룩을 읽어 주세요』
첫댓글 정재학 선생님의 어머니가 촛불로 지으시는 밥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식구들을 위해 밥을 지으시는 어머니의 무한한 헌신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죽일 놈의 시 그러나 버리면서도 쓰지않을 수 없는 시인의 운명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ㅎ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