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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2년 1월 18일
부제학(副提學) 오정창(吳挺昌)이 상소하여, 신원(新元-설날)에 태묘(太廟)에 배알(拜謁)하고, 봄에 거두는 대동미(大同米)를 특별히 감하기를 청하고, 또 이르기를,
“주(周)나라 이후로 농정(農政)의 중함을 알았는데 천하에 이를 권장한 것은 문제(文帝)ㆍ경제(景帝)보다 성(盛)한 적이 없었습니다. 군신(群臣)을 친히 거느리고 농사를 백성에게 권한 것은 문제(文帝)이고, 몸소 밭을 갈아 천하를 위해 먼저 한 것은 경제(景帝)입니다. 이제 삼대(三代-중국 하, 은, 주나라)의 적전(籍田)의 예(禮)를 행하는데 한제(漢帝)의 덕이 없으면 백성을 실(實)로서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엎드려 듣건대, 남별전(南別殿-서울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있었던 태조ㆍ세조ㆍ원종의 어진을 봉안한 곳. 뒤에 이름을 영희전(永禧殿)으로 고치고 숙종ㆍ영조ㆍ순조의 영정을 더 봉안하여 재를 지냈음.)을 이건(移建)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니, 신은 저으기 놀라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 전(殿)을 여기 세워 진실로 선조(宣祖) 때로부터 지금까지 몇 백 년을 지났고 여러 조정을 거쳤는데, 아직 옮겨서 고치기를 의논한 자가 있지 아니하였으니, 반드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도하(都下) 사람과 사방에서 서울에 와서 보는 이가 반드시 태묘(太廟)를 혁혁(赫赫)한 관첨(觀瞻)이라고 하고 또 반드시 이 전(殿)의 터를 칭찬합니다. 신은 지세(地勢)가 과연 어떠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인심은 같은 바이라, 그 상서로움이 더할 수 없이 큰데 일조에 까닭없이 허물어 없애어 무성한 풀밭을 만들면 아름다운 관망(觀望)이 아니리라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일을 예조(禮曹)에 내렸다. 이때 윤휴(尹鑴)ㆍ허목(許穆)의 무리가 임금을 권하여 친경례(親耕禮)를 행하게 하였다. 친경례를 행하면 중궁(中宮)도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여야 하는데, 친잠할 때는 전례대로 육궁(六宮-후(后)ㆍ비(妃)ㆍ부인(夫人)ㆍ빈(嬪)ㆍ세부(世婦)ㆍ여어(女御)의 임금이 거느리는 여섯 계급의 궁녀)을 데리고 나간다. 오정창(吳挺昌)의 딸이 자색(姿色)이 있어, 이때를 타서 임금의 사랑을 받기를 꾀하였다. 또 예(禮)를 의논하는 일로써 고묘(告廟)를 행하기를 청하였는데, 김만기(金萬基)는 예(禮)를 의논하는 데 같이 참여한 사람이었으므로 또한 장차 죄를 입을 것이고, 중궁은 죄인의 딸이므로 그대로 곤위(坤位)를 맡을 수 없으니, 저절로 폐립(廢立)의 꾀가 이루어질 수 있다. 흉당(凶黨)의 꾀가 이와 같기 때문에 오정창의 상소에서 한(漢)나라 임금의 몸소 밭을 간 일을 끌어서 입을 다해 찬미(贊美)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영조실록 11년 3월 25일
영희전(永禧殿)에 있는 세조(世祖)의 어용(御容)이 세월이 오래되어 종이가 해어지고 그림이 흐려졌는데, 좌의정 서명균(徐命均)과 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화사(畫師)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봉심(奉審)하고서 가을철을 기다렸다가 임금에게 친심(親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정조실록 2년 7월 11일
영종(英宗-영조)의 어진(御眞)을 영희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으로 나아가서 선원전(璿源殿)에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도로 만안문(萬安門) 밖의 소차(小次)에 나아가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준원전의 제2실로 올라 나아가 갑자년의 어진(御眞)인 면복본(冕服本)을 신여(神轝)에 봉안하고,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 어진을 받들어 신탑(神榻) 위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탑전(榻前)에 나아가 손수 받들어 편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도로 소차에 나아가 원유관에 강사포를 고쳐 입고 양지당에 나아가 어진궤(御眞櫃)를 신여(神轝)에 봉안하니, 도감(都監)의 당상과 낭청이 신여를 모시고 만안문으로 나아가 신련(神輦)에 옮겨 봉안하고 인정문(仁政門)을 거쳐 나갔다. 임금이 걸어서 인정전 월대(月臺) 아래에 나아가 여(輿)를 타고, 인정문을 나가서 여에서 내려 연(輦)을 탔다.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영희전에 나아가 홍살문 밖에서 연에서 내려 여를 탔다. 재전(齋殿)에 들어가서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신문(神門) 밖에 나아가 사배례를 행하였다. 전(殿) 안으로 나아가니, 김상철(金尙喆) 등이 어진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작헌례를 행하고 환궁(還宮)하였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으며, 대축(大祝) 윤숙(尹塾)ㆍ이진형(李鎭衡)에게는 가자(加資)하였다. 이조에서 윤숙은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다고 아뢰었으나, 특별히 가자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영희전은 1455년 세조가 왕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이다. 수양대군은 혼례를 치르고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며 그의 야망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1446년에는 어머니 소헌왕후가 이곳에서 병으로 죽었으며, 계유정난이 일어난 날 수양대군은 집에서 말을 타고 돈의문 밖 김종서의 집으로 달려가 김종서를 죽이고 돌아왔다. 수양대군이 등극한 후에는 의숙공주와 부마 정현조가 살았다. 그러나 광해군 때 공빈 김씨의 사당이 되고 또 여러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으로 형태가 변했다. 대군의 제택에서 왕비의 사당으로, 다시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는 곳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여섯 왕의 어진을 모셨을 때 영희전의 규모가 가장 컸을 것이다. 그리고 영희전이 경모궁으로 옮겨진 후 이곳은 황량해졌을 것이며, 문희묘(정조와 의빈 성씨에게서 낳은 장자인 문효세자의 사당)와 의소묘(사도세자와 혜빈 홍씨에서 낳은 장자인 의소세손의 사당-정조의 형)가 들어오면서 다시 제사 공간이 되었지만 예전보다는 축소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표교
왕이 영희전에 거둥할 때에는 수표교를 건너 영희전 문 앞에 다다랐을 것이다. 영희전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 앞에는 하마비(下馬碑,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글을 새긴 비석)가 있었을 것인데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1455년 왕위에 오른 세조는 의숙공주와 정현조(정인지의 아들)에게 자신의 잠저를 하사했다. 이때부터 세조의 잠저는 의숙공주가(家)가 되었으며, 의숙공주가 후사 없이 죽어 비어 있던 이곳에 중종 때 폐비 신씨가 잠시 거처하기도 했다.
이후 광해군 때에 공빈 김씨(광해군의 생모)의 사당이 되었다. 공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으나, 광해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광해군은 왕이 되자 대신들의 반대에도 1610년 어머니를 ‘공성왕후’로 추존했으며, 의숙공주가를 사당으로 고쳐 신주를 모시고 ‘봉자전(奉慈殿)’이라 했다. 1615년에는 왕후가 된 공성왕후의 신주를 종묘로 옮겼다.
그러고 나서 이곳에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모시고 ‘남별전(南別殿)’으로 고쳐 불렀다. 인조는 생부 원종(정원군)의 영정을 남별전에 봉안하고 ‘숭은전(崇恩殿)’이라 했으며, 숙종은 전북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모사하여 이곳에 봉안하고 ‘영희전(永禧殿)’으로 이름을 고쳤다.
태조어진
(서울대병원 내 경모궁 자리로 옮겼을 때의 영희전)
이때부터 세조의 잠저는 영희전으로 불리게 되었고, 음력설 · 한식 · 단오 · 추석 · 동지 · 납일(조정과 민간에서 조상이나 종묘사직에 제사 지내던 날. 동지가 지난 후의 세 번째 미일(未日))에 제사를 지냈다. 영희전에서 지내는 제사를 받들기 위해 왕은 1년에 여러 차례 창덕궁에서 수표교를 지나야 했는데, 이때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중 희빈 장씨를 수표교에서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연잉군 초상)
영조어진
이후 영조 때 숙종 어진, 정조 때 영조 어진, 철종 때 순조 어진을 봉안했다. 1900년에는 영희전에 모신 여섯 왕의 어진을 사도세자의 사당이었던 경모궁으로 옮겼다. 같은 해에 사도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여 신위를 종묘에 모시면서 경모궁은 비어 있었다. 영희전을 옮긴 이유는 한성부 남부 명례방(현재 명동)에서 명동성당 건립이 추진 중이었기 때문이다. 명동성당은 1887년 대지 매입을 완료하였으나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으로 1898년에 가서야 축성식을 가졌다. 나라에서는 영희전의 현무봉(집이나 묘 뒤의 작은 산으로 풍수에서는 이곳에 터의 기운이 뭉쳐 있다고 본다.)인 언덕에 교회를 지으면 영희전의 기운이 파손됨을 우려한 것이다.
1900년 비어 있는 영희전에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에 있던 의소세손의 ‘의소묘(영소묘로 바뀜)’와 문효세자의 ‘문희묘’를 옮겼다. 그러나 8년 후인 1908년 7월에는 제사에 관한 칙령 제50호 ‘향사이정에 관한 안건(享祀釐正件)’에 따라 의소세손과 문효세자의 신위는 땅에 묻고, 영희전은 국가 소유가 되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여 만에 죽고, 12세의 단종이 즉위했다. 문종은 건강이 악화되자 나이 어린 단종이 직접 정치할 수 없음을 염려했다. 왕이 어리면 대비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단종에게는 수렴청정할 어머니나 할머니도 이미 죽고 없었다. 이에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어린 왕을 잘 보필하도록 당부했다.
단종 즉위 후 황보인과 김종서의 세력이 강력해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사사시켰으니, 이른바 계유정난이다. 어린 단종은 숙부의 위협적인 권력 앞에 재위 3년여 만인 1455년 윤 6월 11일 경회루에서 왕권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세조는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근정전 뜰로 나아가 즉위했다.
1457년은 세조에게 많은 일이 일어난 해였다. 상왕이 된 단종과 그 세력이 불안했던 세조는 6월 22일 단종의 장인 송현수 등을 반역죄로 몰았다. 단종도 가담했다 하여 단종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로 귀양 보내고, 26일에는 죽은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를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안산에 있는 소릉(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관을 바닷가에 버렸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덕종)가 병상에 누웠다. 이에 승려 21명이 경회루 아래에서 공작명왕(孔雀明王)에게 재앙을 없애고 병마를 이겨내 오래 살도록 비는 공작재(孔雀齋)를 열었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8월 4일 세조는 의경세자의 거처를 한성부 남부 훈도방에 있던 잠저로 옮겼다.
8월 16일에는 송현수(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를 관노로 삼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그의 처와 자녀들은 관노비로 삼았다. 9월 1일에는 세자의 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환구단과 종묘사직에 제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9월 2일 의경세자가 사망한다. 의경세자가 죽고 난 후인 10월 21일 세조는 송현수와 금성대군을 사사했다. 실록은 이날 노산군이 자결하여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기록한다.
(註)
1. 환구단 : 하늘과 땅에 제사를 드리던 장소를 말한다. 환구제는 중단과 폐지를 거듭하다가 1456년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됐다. 1457년에는 한양의 교외 100리 밖 남쪽과 북쪽에 환구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으나 중단되었고, 고종 때 다시 세워졌다.
2. 종묘사직 : 종묘는 어떤 나라 임금들의 조상 임금들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며, 사직은 사(社)와 직(稷)을 합친 것인데, 사(社)는 이 세상 만물을 생산해 주고 모든 만물을 실어 주는 토지의 신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지내는 단(壇)이고, 직(稷)은 사람을 먹고 살게 해주는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단을 말한다.
세조는 한 해 동안 조카 단종, 동생 금성대군, 옛 친구이자 사돈인 송현수를 죽였으며, 사랑하는 아들 의경세자도 잃었다. 의경세자는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다고 한다. 현덕왕후는 문종이 세자 시절 후궁이었으나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가 쫓겨나고 세자빈이 되었다. 현덕왕후는 경혜공주를 낳았고 단종을 낳고는 사흘 만에 죽었다. 젖먹이 어린 아들을 두고 죽은 현덕왕후가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친정 집안을 풍비박산내고 자신의 묘까지 파헤친 세조에게 맺힌 한이 의경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한편 바닷가에 버려져 떠다니던 현덕왕후의 관이 처음 닿은 곳이 훗날 육지가 되어 우물이 생겼는데, 이를 ‘관우물’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관우물 표지석
이후 소릉의 복원에 관한 문제는 여러 번 거론되었으나 1513년(중종 8년)에 가서야 복위되었다. 이때 현덕왕후의 유골을 찾은 왕실은 문종의 능인 동구릉 현릉 동쪽에 안장했다. 현덕왕후의 한이 서려 있는 이곳 관우물터는 옛날에는 바닷가였으나 현재는 반월공단(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능안로 21 일진전기 내)이 들어서 있다. 죽어서도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없었을 현덕왕후의 영혼이 이제는 편안해졌기를 바랄 뿐이다.
세조, 문수보살을 만나다
의경세자 사후 둘째 아들 해양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1468년 왕위에 오르니 예종이다. 그러나 예종도 오랫동안 발이 썩는 족질에 시달리다가 재위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의 악업과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인지 세조의 두 아들은 모두 20세에 사망했다. 외동딸 의숙공주도 37세에 후사 없이 죽자 세조는 평생 정신적 괴로움을 안고 살았다. 세조는 자신의 죄업을 씻으려는 듯 불교에 귀의하여 사찰 중건에 힘썼다.
세조는 1466년에 40여 일을 금강산 순행길에 올랐고, 돌아오는 길인 윤 3월 17일에는 오대산 상원사를 찾았다. 이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세조가 오대천의 맑은 물에 들어가 혼자 목욕을 하고 있는데 한 동승이 지나가자 등을 밀어달라고 부탁했다. 동승이 등을 밀어주고 나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목욕을 마친 세조가 동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왕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동승은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없고, 몸의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문수보살의 가피(加被,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다)로 피부병을 치료한 세조는 화공에게 그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이에 딸 의숙공주와 사위 정현조 부부가 발원하여 만든 문수동자상이 바로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이다.
상원사 문수동자상
이 이야기는 전설처럼 500여 년을 내려오다가 1984년 문수동자상을 수리할 때 나온 유물 23점 중 세조의 옷으로 보이는 피고름이 묻은 명주적삼이 발견되어 단지 전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피뭍은 세조의 명주적삼
피뭍은 세조의 생명주적삼
또 문수동좌상에서 의숙공주 발원문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발원문에는 “당시 임금인 세조 및 왕실의 수복을 기원하고 그의 득남을 위해서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 십육응진, 천제석왕의 상을 조성하여 오대산 문수사에 봉안했다.”라고 쓰여 있다.
의숙공주와 백련사
홍은동 백련사 대웅전
부마 하성위 정현조는 정인지의 아들로 본가와 처가에서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한양 안에 집이 여러 채 있었다. 의숙공주는 후손이 없어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이 의숙공주의 제사를 모셨다. 그러나 진성대군이 왕위에 올라 중종이 되자 의숙공주의 제사를 모실 사람이 없었다.
의숙공주는 처음에 경기도 양주 서촌 개좌동에서 장사를 지냈고, 정현조는 충주 선영에 묻혔다. 그러나 1542년 중종의 명으로 정현조의 묘를 의숙공주묘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개좌동은 현재의 서대문구 북가좌동, 남가좌동 즉 서대문구 홍은3동 312번지에 자리 잡은 백련사 아래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초평리 구봉산 상당리(현재 경기도 의왕시 초평동)로 함께 이장했다. 이때 다른 석물들은 옮기지 못하고 묘비 2개만을 옮겼으며, 구름무늬가 아름다운 이 묘비는 500년이 넘은 것이다.
의숙공주와 부마 정현조 합장묘
구름문양이 아름다운 묘비
백련사는 747년(신라 경덕왕 6년) 진표율사가 창건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정토도량으로 정토사라고 불렀다. 백련사에서는 “세조의 장녀인 의숙공주가 부마인 하성부원군 정현조의 원찰로 정하면서 사명을 백련사로 개칭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숙종 때 의숙공주와 정현조의 비망기를 고치는데, 세조 때로 써진 의숙공주의 사망 시기를 1477년(성종 8년)으로, 정현조의 사망은 1504년(연산군 10년)으로 바로 잡은 것이다. 따라서 의숙공주는 1477년에 죽어 개좌동에 묻혔고, 정현조는 57년 뒤인 1504년에 죽어 충주 선영에 묻혔다가 1542년 개좌동으로 이장된 것이다. 즉, 정토사는 의숙공주가 부마의 원찰로 정한 것이 아니라 의숙공주의 원찰이 되면서 백련사로 사명이 바뀌었고 정현조가 관리하는 원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의숙공주 사후에는 진성대군이 제사를 모셨으나 진성대군이 왕위(중종)에 오른 뒤에는 이곳 백련사에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사라진 영희전
현재 영희전터에는 중부경찰서와 영락교회가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본정경찰서’가 세워졌고, 8 · 15광복 이후 ‘중부경찰서’가 되었으며, 1945년 한경직 목사가 세운 ‘베다니전도교회’가 ‘영락교회’로 바뀌어 영역을 넓히면서 영희전터는 형태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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