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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문인의 시 낭송으로 꽃피우다
의령종합사회복지관 감성시낭송
2024. 2. ~
강사: 김태근
아버지의 방
이광두
아직 시간들이 느렸던 오래전이었다
아버지는 현관문도 중문도 없는 방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방은 언제나 배가 고팠다
얇은 창호지를 바른 방문이 안팎을 드나드는 일은 자유로웠다
방안 어디서나 새의 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열린 방문은 모든 것이 풍성했다
마당이 방안으로 들어왔고 마당과 함께 암탉들이 들어와 살았다
일찍 서리가 내리면 파란 하늘이 들어와 빠알간 감을 걸어둘 때도 있었다
간혹 걸림돌에 걸려
문틀이 조금씩 기울어졌을 때는 철없는 허공이 기울어진 그 자리를 메꿨다
가난한 아버지의 방에서
방의 안팎이 사라지는 일은 아주 쉬웠다
그렇게 안팎의 경계가 사라지자 어디선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햇살 한 움큼처럼 아버지의 방이 따뜻해졌다
*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빌려서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빌리고 빌려 주기 위해서는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서로가 부족함을 채워주게 되고 삶도 풍요로워 진다.
아버지의 방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가난했던 시절 배고픈 이웃은 물론이고 길손에게도 늘 방문을 열어 맞이했던 아버지의 정을 그리며, 현대인들의 가난한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을 정다운 심성을 끄집어 내어 서로에게 나눠주어 봄햇살처럼 따뜻한 세상이 되었으면 소망해 본다.
국제시장
정영길
어머니와 국제시장을 갔다
어머니 손을 꼭 잡고 국제시장을 돌아 다녔다
골목마다 진열된 오래된 이야기들이 시끄럽다
간이역처럼 지나친 산 몇 번지의 집들을
어머니는 좌판에 내놓으며
거친 숨소리로 호객을 한다
사람은 많으나 사람이 없어
어머니의 좌판엔 나만 있었다
창모자 하나 집어 들고
어머니 머리에 씌운다
이거 쓰고 밭에 가면 되겠다 말하며
정말 예쁘다고도 말했다
가져온 물건을 다 팔았다는 듯
내 손을 꼭 잡고 가는 어머니
어머니의 길
윤재환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다
그래도
낫을 들고 논과 밭에서 일하며
다섯 자녀를 키웠다
허리굽혀 일하던
어머니의 몸은
스스로 기역자가 되었다
아직 몸이 바른 내가
어머니와 마당으로 나서면
ㄱ과 ㅣ가 만나서 "기"자가 된다
그리고
어머니가 살아오신 삶이
꼬불꼬불 ㄹ이 되었고
우리가 살아온 "길"이다
어머니께서 살아오신 그 길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다
*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였고 허리가 길처럼 구부러져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어머니는 먼저 가신 아버지를 만나러 산소로 가는 길이거나 자신이 이승에서 떠나야 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청보리
윤재환
겨우내 서릿발 내린
흙에 묻혀서
근근히 땅을 헤집고 싹을 틔워
낮은 자세로 찬바람 맞다가
봄이되어
푸름으로 일어난다
산수유보다 먼저 봄을 전하는
청보리는
배부른 사람들의 시선 멀리서
고운 햇살안고
굶주리는 사람들의 희망으로
자란다
보리는
한겨울을 보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기에
배고픈 사람만이
수확의 의미를 품는다
☞ 윤재환 제5시집(2001년) <청보리> 중에서
달팽이
윤재환
사람들이 나더러
느리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아니고
토끼가 아니고
참새가 아니다
그들과 다투어서 살아가지 않는다
나는 이 걸음이
가장 빠르고
가장 유연하다
그러면서 누릴 것 다 누리며
생존의 의미를 지켜간다
나는
그들의 방식이 아닌
내 방식대로 산다
나는
달팽이다
☞ 윤재환 제7시집(2015년) <달팽이> 중에서
지게차
김영곤
아버지 종착역에서 작별하고 정거장을 나온 뒤
헐벗은 뒷산에서 여우 울음소리 낭자하던 밤
아버지가 부려 놓은 이삿짐
내 몫의 무게는 험난했고 아버지 등뿔은 무식했다
등에 뿔을 짊어진 아버지를 잊고 과학책을 읽었다
문명의 바퀴 구르는 소리
종착역으로
느린 황소를 따라 KTX가 마을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노쇠한 등뿔 무쇠 뿔로 거듭나고
발목에 바퀴를 단 차가 땅바닥을 누볐다
헤어진 아버지 등을 오르내리는 무쇠 뿔
다시 만날 약속을 하지 못한 나는 여기서
읽던 책을 덮었다
종착역 가까운 마을 호롱불 꺼지고 안개 자욱하다
풀잎에 맺힌 이슬 눈물인지 구슬인지
지게차가 건널목 돌계단 앞에서 제 이름을 묻는다
* 시인의 유년 시절 삶의 무게를 등뿔처럼 매달고 지게를 지고 사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무거운 등짐을 이어받은 시인 아버지가 지고 살던 지게 대신 지게차를 굴리는 편리한 현대문명 속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 문명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 등에 무쇠 뿔을 달고 있는 지게차는 편하고 단단하지만 막상 우리가 건너가야 할 길 앞에 놓인 돌계단에 막히고 무식하리만치 힘들게 지게로 계단을 오르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시인 자신을 되돌아본다
시인은 지게와 아버지 지게차와 현대 문명을 등치시켜 현대 문명이 차용한 지게에 차가 붙은 지게차를 보면서 그가 누구이고 또 현대문명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며 시인 스스로 정체성을 묻고 있는 시다.
정수기
김영곤
나는 생필품처럼 없으면 불편한 사물
목마른 당신 앞에
참으로 우울하고 미세한 존재입니다
오늘도 우체국 앞마당의 우체통처럼
말없는 당신을 우두커니 맞이합니다
눈물 많고 겁 많은 난
누가 건드리면 왈칵 눈물을 쏟는 울보
속내가 바로 드러나지요
그래도 어쩝니까
가릴 건 가릴 줄 아는 물건이 되라던
그들의 체면을 봐서라도 나의 앞가림
맑고 깨끗한 척 찌꺼기는 가라앉히고
걸러진 눈물을 비우고 채운 것입니다
내 눈동자 가만가만 보세요
뜨겁고 찬눈물 동시에 가진 눈입니다
갈증난 당신은 내 한 쪽 눈을 누르고
가린 눈동자의 눈물을 찍어 마십니다
나는 왜
목마른 당신 앞에 울어야만 합니까
* 해설
세상이 생각 없는 사람들의 오염된 말과 행동에 흔들리고 있다
눈물마저 말라가는 세태에 목마른 당신
물을 먹기 전 누군가 걸러낸 눈물을 한 번쯤 상기하자
진실을 외면하면 찬물과 뜨거운 물을 가려낼 눈이 없어진다
당신이 선택한 뜨거운 물은 당신이 가린 내 한 쪽 눈이고
뜨고 있는 다른 쪽 눈이 당신을 보고 있다
그런 당신 앞에 가려진 내 눈은 속절없이 울어야만 하고
돌의 귀가
김영곤
아우라지 강가 혼자 앉아 울면
따라 우는 물새가 있고
파문을 일으키는 바람이 보이고
등 떠미는 물소리 실랑이친다
물속과 물가에 빼곡한 돌들
무늬와 모양은 돌의 언어다
각을 세우다 깨어지고 굴곡진
제 눈물만큼의 아픔과
닳고 단 어깨가 반들거린다
무리 사이 눈에 든 돌 한 개
빙그레 웃는 둥근 달 형상이다
삽을 맨 남자의 가위질 다리
결지은 갈래길
층층이 굽은길
돌의 시간이 열닷새에 멈췄다
끌림에 맺어진 나와의 인연
그래 이젠
그만 부대끼고 나와 손잡고
집으로 가자
물 따라
바람 따라
고달픈 삶은 여기서 끝내자
정선은 아우라지 아득한 객지
* 해설
누군가에게 눈길조차 받지 못한 돌맹이처럼 구르는 범부들의 생애
그럼에도 언젠간 수석이 되고
수석이 되기까지의 아픈 사연은 그동안 쌓인 인간의 말이 된다
돌에 새겨진 무늬와 모양
그것이 우리 인생과 닮았다면 돌도 나와 같이 살았던 세월이고
또 그렇게 살아갈 테니까
늙어가는 일
김양채
모두 처음 겪는 일이다
태어나는 것도 처음이고
학교를 가는 것도
그녀를 만난 것도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모두 처음 겪는 일이다
그런데도 늙어가는 일은
마치 익숙해야 하는 것처럼
누구도 기뻐해 주지 않고
누구에게 물어볼 틈도 없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조차
낯선 얼굴이 되어있다
낯선 길에 들어섰던 일을 기억해보라
두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길이
돌아올 때는 얼마나 금방 돌아왔는지를
하루가 길게 느껴졌지만
어제는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늙어가는 일도 무섭고 불안하다
노인은 모든 것에 익숙할 것 같아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늙어가는 일이란
처음 겪는 일이지만
낯익은 듯 살아가는 일이다
*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첫돌을 맞이하고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입학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일들을 모두 처음 맞는 일이라 병아리, 새내기 등으로 포장하여 축하해 주지만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 퇴직하고 점점 늙어가는 일들은 그냥 익숙한 일로 치부해 버린다. 정작 퇴직을 하는 것도 처음이고 환갑을 지나 노인이 되어가는 일도 처음 맞는 일이지만 새내기들이 축하를 받으며 희망을 안고 첫출근을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취급을 받는다. 나이가 들어 법률에 따라 노인이 되는 것은 차라리 두려움이다. 하지만 노인이 되는 첫경험에 대해서 누구도 기뻐해 주지 않고 다만, 혼자서 고독하게 맞아야 한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티를 낼 수 없다. 무섭고 불안하지만 차라리 낯익은 듯, 다 아는 듯 살아가는 것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그나마 무조건 익숙해야 하는 노인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다.
그리워하는 그대
양창호
말을 잊은 듯이 아무 말도 못하고
때론 앞서가다가 가끔은 뒤따라오더니
앞서기니 뒤서거니 시간을 낚다가
시를 쓰다가 소설을 읽다가
읽지 못한 행간에 들어가는 것을 잊어버렸다
잔주름 품은 바람이 지나가고
태풍을 닮은 눈물 자국은
마냥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같이 있어서 좋은데
헤어질 수 없어 오랜 세월을 같이 한
떨쳐버릴 수 없는 나를 닮은 그대
삶이 고달팠는데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풍족한 삶을 지내지 못했는데도
가끔은 투정을 하면서 나를 따라 다녔다
하이힐 끈이 발목을 단단히 매고 있는 것처럼
가녀린 다리를 떼어낼 수 없는
몸이 하나이었다가 때론 둘이 되기도 하는
신기루 같은 그대는
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뒤척이다가
내 품에 안겨 오늘도 조용히 잠들겠지
언제나처럼
언제나 시인 곁을 지키며 묵묵히 살아온 아내를 생각하며 쓴 시
연필의 태도
주향숙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연필을 깎아요
사각사각 햇살을 깎다보면
마음이 생기고
마음을 깎다보면 빙긋
웃음이 나고
연필 깎는 자세는 꼿꼿하죠
나무밥이 켜켜이 쌓이는 경험이죠
거꾸로 매달리는 철봉처럼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음악이 경계를 넘나들어요, 세상을 향해 조곤조곤
말을 건네는
연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요
너무 뾰족하지는 않게
너무 뭉툭하지는 않게
햇살 좋은 봄날은 온종일 고개 수그리고 글씨만 쓰고 싶죠
필경사의 수염이 되기도 하고
호흡이 가지런한 문장이 되기도 해요
*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연필을 깎으며 생활과 마음을 다잡고 세상을 향해 뾰족하지 않게 뭉툭하지 않게 조곤조곤 말을 건네는 시인의 태도
인생 택시
한삼수
태어나면서 탄 인생 택시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고
부모님이 닦아 놓은 평온한 길 따라가다가
내가 가고 싶은 길 옮겨 가다보면
흙탕길도 만나고 가시밭길도 만난다
어떤 날은 발끝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도 있다
심각한 고장으로 오랫동안 쉬어가기도 한다
가고 싶은 곳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데려다주기도 한다
뒤늦게 잘 못 간 것을 알고 발버둥 치지만 갈아탈 수도 없다
좋은 일 나쁜 일 힘든 일 겪으면서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목적지가 가까워진다
내리막길이다
속도가 붙는다
편하게 달리지만 속도만큼 위험하다
바쁠 것 없다
등수를 따질 필요도 없다
속도를 줄이면 주변 풍경과 달려온 길이 보인다
평생을 타고 온 택시요금은 얼마나 나올지 계산해보자
의식주로 이각을 사용하고
자식들 양육비로 일각이 나가고
남은 일각에서 병원비 경조사비
온갖 잡비로 다 나가고 남은 재산이
내 인생의 택시비겠지
내가 지불할 택시 요금은
나를 위해 운전대 한번 잡지 않은
자식들이 받아 가겠지만 외상 달아놓고 갈 수는 없다
남은 거리 가는 동안
네 바퀴 모두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욕심도 무리도 하지 말자
젊을 때는 빨리 달려야 좋은 줄 알았는데
이순을 살아보니 느리게 사는 것이 정답이더라
규정 속도 아래로 가자
*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정해진 목적지 죽음을 향해 간다.
목적지에 가면서 어떤 과정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지고 지불해야 할 경비도 달라지는데 비용을 택시비에 비유하였다.
태화강 대나무 숲길을 거닐며
곽향련
대나무 숲길을 거니는데 아버지가 대쪽같이 서 있다
곧은 자세로 키 크고 마른 아버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대나무집을 지었다
앉으나 서나 허리 한번 굽히지 않았다
바둑을 즐기셨던 아버지
집 짓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어허 이런! 어허 이런! 손으로 무릎을 탁탁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무릎에는 마디가 한 뼘씩 자랐다
하얗고 까만 바둑알로 들어앉은 나의 작은 눈
왕국 짓는 일을 보느라 눈동자를 부지런히 굴렸다
그런 아버지의 집 짓는 일에도 바람에 대숲 흔들리듯 일렁였다
아직 마디가 다 자라지 않은 오빠들과 나의 종아리에
대나무 자국을 남기고
빨간 종아리들이 잠들었을 무렵
멍 자국을 몰래 쓸어 주셨던 밤
나는 잠든 척 숨소리를 죽였다
아버지는 속을 비워 나갔고 허한 마디를 놓아 버리자
뿌리 뽑힌 대나무처럼 쓰러졌다
대나무 숲에는 깡마른 아버지들이 흔들리고 있다
--
아버지는 가난 속에서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대나무처럼 살다 가셨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기를 바랐을 것이다.
빨래집게
곽향련
입술에 매달린 눈물처럼
젖은 슬픔이 입 속에 닿았다
기다란 막대로 높이 쳐든 빨랫줄에
이를 악물고 매달렸다
아이들이 뛰노는 가난한 마당과 장독대가 빙빙 돌았다
삶이 종종 견디는 일이라기에
무명 헝겊을 입 속에 밀어 넣었다
바람이 마구 휘갈기는 날은
온몸의 무게를 입으로 꽉 깨물고 있었다
옷가지가 다 말라 화르르 펄럭이며
하나둘 떠나 버린 빈집
늙어 간다는 건 공중에서 외줄 타기처럼
눈물을 남모르게 말리는 일
허옇게 색 바래진 몸이 퍼석하다
아흔 해를 아스라이 버텨 온 어머니
틀니를 해드려야겠다
--
빨래집게를 이에 비유해서 어머니의 삶을 연결하였다.
사람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를 앙다물고 견디는 습성이 있다.
유리문
곽향련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가 훤히 보이는데 막막하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휠체어를 탄 엄마는 안, 나는 바깥
아니다, 이미 생이 저쪽 끝으로 밀려난 엄마는
내가 서 있는 바깥을 안쪽이라 할 것이고
당신은 바깥이라 할 것이다
사라지기 위해 멈추고 있는 사람들
유리 안은 선팅을 한 것처럼 그늘지고 어둡다
여러 손자국이 다녀간 유리에 엄마와 나의 손을 대 본다
차갑고 투명한 슬픔이 손바닥에 닿는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입 속에서 우물우물
틀니를 뺀 엄마의 볼은 우물을 파 놓은 듯 깊은 물소리가 났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염되는 눈물은 코로나19보다 전염성이 강해 줄줄 샌다
흰 가운 입은 천사표 저승사자가 면회 시간 끝났음을 알리고
돌아가는 엄마의 뒷모습은 유리 조각처럼 깨져서 간다
--
코로나19 시기에 병문안조차 제한되었다. 근무 중 불현듯, 지금 엄마를 보지 않으면 영원히 못 볼 것 같은 생각에 일을 하다 말고 요양병원으로 달려갔다. 엄마와 내가 서로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엄마는 유리문 안에서 나는 밖에서
일탈
이미순
보이지 않는
두려움으로 엄습해 오는
혼미한 세상에 두려움을 안고
묻혀 져 가는 삶 속에
질주하는 나는 누구인가
바짝 마른 가랑잎처럼
아픔 때문에 말라버린 가슴
스스로 묶어 놓은 끈 풀어 버리고
자유롭게 일탈을 하며
시계바늘조차 관심 없이 하얀 낮달을 보면서
백치같이 웃고 있는 내 얼굴
벗어 던져라
상상의 날개를 펴고
힘껏 날아 보아라
이상의 아방가르드처럼...
* 詩작메모
언제부터 자꾸만 주저앉는 버릇이 생겼다
세월이 강물위에 띄워놓은 종이배처럼 떠나가고
아가는 생은 낙엽의 부스러기처럼 바스락거리는 중년
힘찬 독수리처럼 상상의 날개를 펴고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
새들의 생존법칙
김복근
설계도 허가도 없이 동그란 집을 짓고 산다
작은 부리로 잔가지 지푸라기 물고 와
하늘이 보이는 숲속에서 별들을 노래한다
눈대중 어림잡아 아귀를 맞추면서
휘어져 굽은 둥지 무채색 깃털 깔고
무게를 줄여야 산다 새들의 저 생존법칙
대문도 달지 않고 문패도 없는 집에
잘 익은 달 하나가 슬며시 들어와
남몰래 잉태한 사랑 동그마한 알이 된다
울타리 없는 마을 등기하는 법도 없이
비스듬히 날아보는
나는 자유의 몸
바람이 지나가면서 뼛속마저 비워냈다
새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인간의 삶에 비겨서 쓴 작품이다. 이 시조를 쓸 즈음 나는 자유인自遊人이 되는 기쁨을 누리면서 새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새들은 자신이 살아야 할 집을 어설픈 듯이 지어놓고 살지만, 그들의 삶 속에는 따뜻한 사랑이 내재 되어 속진俗塵이 묻은 우리 인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와 청렴淸廉의 삶을 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세력과 영역 확장을 위해 싸우고 투쟁하는 인간의 삶과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나도 저들처럼 속인의 욕망을 비워내는 성찰의 삶을 살고 싶다. 문학이 생태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방식과 인간의 정신적 사유 체계는 문학의 감화로서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새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화자의 본연지성을 살리고 싶은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출해본 것이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나이 일흔이 되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속세의 삶을 사노라 본연지성을 제어하면서 살아왔다. 「새들의 생존법칙」은 대자연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고 싶어 읊조려 본 나의 자화상과 다름없는 시조이다.
(김복근)
「새들의 생존법칙」이 눈으로만 읽어도 되고 구음口吟되지 않아도 된다면 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들의 생존법칙」은 결코 눈으로만 묵독黙讀되지 않고 절로 입이 열려 귀가 들리게 영영咏聆의 배장단이 장마다 엄연하다. 그렇게 구음하고 이영耳聆해 입귀〔口耳〕가 하나가 되면 아무리 띄어쓰기로 글을 써놓았다 한들 「새들의 생존법칙」은 배장단이 절로 엮여 말의 노래가 되게 술술 호흡 장단이 숨질 따라 생겨나고 만다. 김복근 시조인이 성음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시조의 삼장(평시조)이란 걸림을 벗어나 성음 따라 이리저리 술술 흘러가게 영영咏聆해둔 「새들의 생존법칙」은 하나의 장시조이다. 그러니 이것은 시조의 시가 아니라 그냥 시조의 삼장이란 틀에서 벗어난 장시조일 뿐이다. 말하자면 평시조 넷을 연이어 배장단을 늘려놓은 작품이 「새들의 생존법칙」이란 시조이다.
시조는 영언永言으로 태어나고 시는 언지言志로 태어나 그 태생胎生의 본성이 다름을 잊은 지 근 백년이 넘다보니 시조시時調詩-시조시인時調詩人 등등 술어術語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시조의 본성과 시의 본성을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시조시-시조시인은 시조 본래時調本來와 걸맞을 수 없는 술어術語이다. 본래 우리말에는 글이 없다가 1446년에야 한글이 세상에 등장했지만 20세기까지 <우리말의 歌〔時調〕만 있었지 우리글의 시詩는 없었음>을 문인文人이라면 분명히 알고, 시조를 짓든 시를 짓든 해야 한다. 20세기 들어서야 우리글로 ‘Poetry'를 본떠 시〔新體詩-自由詩-現代詩〕를 짓게 된 것이지 우리말이 우리글을 갖게 되어 자생한 시로서 우리의 현대시가 아님을 시조인과 시인이라면 또한 명심銘心하고 창작의 반명盤銘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어느 말〔語族〕이든 저 나름 노래〔歌〕의 유전자〔遺傳子:DNA〕를 본래부터 가졌지만, 시의 DNA는 글이 생기면서 아주 뒤늦게야 생겨난 것이다. 가歌는 말로부터 생겼고, 시詩는 글로부터 생겼기 때문이다. 선가후시先歌後詩의 도리道理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문장의 자연自然이고 사실事實이다.
만일 조선조에 한시가 없었더라면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한글詩가 만들어졌을는지 모를 일이다. 만해萬海의 「찬송讚頌」, 미당未堂의 「귀촉도歸蜀途」, 목월木月의 「나그네」등도 도저히 눈으로만 묵독黙讀하고 넘어갈 수 없고 절로 입과 귀가 하나 되어 음영咏聆하여 배장단排長短이 숨질을 타고 나와 절로 노래〔歌〕가 되어 살아남을 터이니 먼먼 훗날 시조가 될 터란 내 나름의 오기傲氣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분명 「새들의 생존법칙」은 평조平調〔보통빠른調〕로 음영吟詠되어 이영耳聆되는 장시조長時調로 즐기면 되지 시조니 시니 시비 걸어 따질 것은 없다. 설령 김복근 시조인 자신이 「새들의 생존법칙」은 <시詩의 시조時調>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새들의 생존법칙」이 나로 하여금 한사코 술술 영영咏聆하게 하므로 「새들의 생존법칙」은 <시詩의 시조時調가 아니라 가歌의 시조時調>라고 질러둘 수밖에 없다.
(한양대학교 교수 윤재근)
소금에 관한 명상
김복근
이른 아침 소금으로 머리를 감아 본다
숭숭 열린 머리카락 사이 짠물이 스며들어
바다를 그리는 마음 은빛 길을 만들고 있다
각진 소금이 둥글게 모를 깎을 즈음
내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열리어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구멍은 커져 간다
삼투압을 하는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너저분하고 냄새나는 기억들이 빠져나가며
부황 든 삶의 찌꺼기 방울방울 몰고 간다
소금에 절인 머리 찬물에 헹구면서
지명의 나이에도 오장이 뒤집히는 걸 보면
아직은 썩은 살 도려내는 새순이고 싶은 게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시인은 “소금으로 머리를 감아 본다.” 소금으로 머리를 감다니? 의사들의 조언에 따르면, 소금으로 머리를 감는 경우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소염 및 살균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필경 시인은 이를 의식하고 소금으로 머리를 감아 보고자 했던 것이겠지만, 이 같은 시도는 단순한 머리 감기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소금으로 머리 감기는 비누나 샴푸로 머리 감기와는 달리 ‘자연’과의 만남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자연과의 만남이라니? “숭숭 열린 머리카락 사이 짠물이 스며들어/ 바다를 그리는 마음 은빛 길을 만들고 있다”는 구절이 암시하듯, 소금은 시인에게 “바다를 그리는 마음”을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말하자면, 소금을 매개로 하여 시인은 바다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각진 소금이 둥글게 모를 깎을 즈음”이라는 구절은 파도에 휩쓸려 둥글어지는 바닷가의 돌을 연상케 하기도 하거니와, 이를 통해 시인이 마음으로 만나는 바다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윽고 소금으로 인해 “내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열리어/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구멍은 커져 간다.” 이는 물론 소금으로 머리를 문질렀을 때 생기는 신체적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 또는 ‘정신’에 관한 이야기로 겹쳐 읽히기도 한다. 이 같은 겹쳐 읽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는 구절에 이어지는 “너저분하고 냄새나는 기억들이 빠져나가며/ 부황 든 삶의 찌꺼기 방울방울 몰고 간다”는 구절일 것이다. 이 구절의 “너저분하고 냄새 나는 기억”이나 “부황 든 삶의 찌꺼기”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시인이 시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체적 변화가 아니라 정신적 변화와 각성이다. ‘정신적 변화와 각성’ 이라니?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자기 마음 내부의 너저분함과 냄새와 찌꺼기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찌 보면, 이 시에 나오는 신체적 변화에 관한 이야기는 ‘소금으로 머리를 문지르니 땀방울이 흘러내린다’가 전부일 수 있다.
요컨대, “소금”이 시인의 마음에 “바다”라는 자연을 떠오르게 하고, 그 바다가 다시 닫혀 있고 잠들어 있던 시인의 마음을 열오 놓고 일깨우고 있음을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실제로 탁 트인 바다 앞에 섰을 때 닫혀 있던 우리 마음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열리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게 되듯, 시인은 “소금”과 만나면서 그런 느낌에 젖어들게 된 것이다. 이처럼 마음이 열리고 깨어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신의 내면을 새삼스럽게 의식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자기 되짚어보기’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에서는 자연과 만난 시인이 문명 속의 자기 삶을 되짚어보면서 확인하는 것은 “너저분하고 냄새나는 기억”과 “부황 든 삶의 찌꺼기”다. 이처럼 자기 안의 너저분함과 냄새와 찌꺼기 ― 말하자면, 「는개, 몸속을 지나가다」의 “중금속”과도 같은 것 ― 을 새삼 의식함은 문명에 의한 정신의 오염을 시인이 자각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시인이 몸 안의 땀방울과 함께 “너저분하고 냄새 나는 기억”과 “삶의 찌꺼기”가 ‘빠져나간다’고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땀을 흘리고 났을 때 우리는 아마도 개운해지거나 가뿐해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너저\분하고 냄새 나는 기억”과 “삶의 찌꺼기”가 빠져나갔다면, 그때의 느낌도 개운해짐 또는 가뿐해짐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지명의 나이에도 오장이 뒤집히는 걸 보면/ 아직은 썩은 살 도려내는 새순이고 싶은 게다”라는 구절이 암시하듯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마음의 개운해짐이나 가뿐해짐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워짐이다. 마음이 오히려 무거워지다니? “썩은 살 도려내는 새순이고 싶은” 마음을 새롭게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다면,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개운해지거나 가벼워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빠져나간다’라는 말은 의식의 저장소 ― 말하자면, 잠재의식의 세계 ― 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과 삶의 찌꺼기가 그 의식의 저장소를 빠져나간다는 말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너저분 하고 냄새나는 기억”과 “부황 든 삶의 찌꺼기”가 의식의 저장소를 빠져나간 다음 머물 곳은 어딘가. 그곳은 다름 아닌 의식이다. 마치 우리 몸을 빠져나간 ‘땀’이 어떤 형태로 바뀌든 우리의 물리적 환경에 머물러 있든. 요컨대, 시인은 너저분함과 냄새와 찌꺼기를 여전히 의식에 머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너저분하고 냄새나는 기억”과 “부황 든 삶의 찌꺼기”가 의식의 저장소에서 빠져나와 의식 안에 머물고 있는 한, 그리하여 여전히 시인이 이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시인의 자기 되짚어보기는 여기에서 끝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자기 내부에 남아 있는 너저분함과 냄새와 찌꺼기에 대한 자각만으로 끝나는 자기 되짚어보기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되짚어보기라 할 수 없다. 자기 되짚어보기란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데, ‘자기 자신’이란 어느 한 순간에만 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잠시 동안 도는 얼마 돈안 잊을 수는 있을지언정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되짚어보는 일은 계속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장이 뒤집히는” 것을 시인이 느끼고 있음은 시인의 자기 되짚어보기가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거니와, “지명의 나이” ― 즉, 50의 나이 ― 에 시작된 이번의 자기 되짚어보기를 통해 시인이 마침내 확인하는 것은 “새순이고 싶은” 의지다. 어찌 보면, “새순”이라는 말은 문명의 때가 끼어 있지 않은 순수한 자연적 존재를 암시하는 것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너저분하고 냄새나는 기억”과 “부황 든 삶의 찌꺼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 말 그대로 자연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새순이고 싶은” 의지만으로 우리가 “새순”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새순”이 되기 위해서는 “너저분하고 냄새나는 기억”과 “부황 든 삶의 찌꺼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하나, 누구도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의식에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 때문에 시인을 포함한 누구도 결코 “새순”이 될 수는 없다. 만일 시인이 이를 자각하는 가운데 무언가 택한 차선책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앞서 잠깐 거론한 바 있는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의 양상과 질감”을 ‘보는’ 일과 “그 내면의 이미지를” ‘그리는’ 일이 바로 그 차선책이 아닐까. 이 같은 일은 문명적 삶으로 인해 시인으로부터 멀ㅈ어진 자연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일인 이상, “새순”이 되고자 하나 될 수 없는 시인에게 최선책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은 될 수 있는 것이리라.
(서울대학교 교수 장경렬)
목련차
김복근
고단한 봄날 오후 물오른 정을 담아
감숭하게 여문 꽃봉 볕뉘 담은 그리움은
촉 세운 시인의 손길 붓 한 자루 보냅니다.
찻잔에 어린 무늬
사람 향이 배어나는
메마른 삶의 길에 내 마음이 전이되어
혀끝에 감도는 미감 우리고 또 우립니다.
물관이 섶을 열어 하얀 등을 밝혀놓고
혼자 하는 고해마냥 촉촉하게 젖은 눈매
목필화 선명한 그림 시화 한 폭 새깁니다.
김복근 시인의 「목련차」이다. 목련차는 목련꽃이 피기 전에 꽃봉오리를 따서 우려내는 차다. 화자는 “찻잔에 어린 무늬/ 사람 향이 배어나는// 메마른 삶의 길에 내 마음이 전이 되어/ 혀끝에 감도는 미감 우리고 또 우립니다.”라고 목련차에서 사람의 정이 배어난다고 보고 있다. 어쩌면 목련꽃으로 차를 만들어 준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고 한편 보기만 해도 우아한, 활짝 피기 전의 목련꽃봉오리가 떠 있는 차 자체에 대한 애틋한 정의 표현일 수도 있다. “우리고 또 우린다”고 하니 그 정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셋째 수에 오면 화자는 목련차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얀 목련꽃송이가 떠 있고, 그 향이 배어있는 찻잔을 보며 화자는 “물관이 섶을 열어 하얀 등을 밝혀놓고/ 혼자 하는 고해마냥 촉촉하게 젖은 눈매/ 목필화 선명한 그림 시화 한 폭 새깁니다.”라며 그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표현하고 있다. 한 잔의 목련차를 “고해하는 사람의 촉촉하게 젖은 눈매”라며 뛰어난 메타포와 의인법을 함께 쓰고 있다. 잔잔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문학박사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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