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靑潮人』(부산중고등학교 재경 동창회보)
프로 야구와 나
이원우(14회, 전 청조회 부산북구회장 ‧ 북구 명덕초등학교장, 소설가 ‧ 수필가‧ 가수(대한가수협회) ‧ 군 안보강사, 저서 소설집 등 24권,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 본상 ‧ KNN 문화대상 ‧ 부산교육상 ‧ 화쟁포럼문화대상 ‧ 경기PEN대상 ‧ 부산PEN문학대상 ‧ 경기문학인 문학대상‧ 부산수필대상 ‧ 부산북구 문학대상 ‧ 한국수필 ‘청향문학상’ ‧ 황조근정훈장 ‧ 허균문학상 등
서울 근교로 와서 산 지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겼다. 아직도 낯섦을 느끼면서 아슬아슬하게 만 여든 살 생일을 지냈다. ‘아슬아슬하다’는 형용사를 동원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다. 식물 교장(校長)이라는 소릴 들으면서 몇 년 동안 누워 집무(執務)할 정도로 아팠었는데, 용케도 이겨냈다는 뜻으로 갈음하자. 지금은 컨디션이 좋은 편이다.
실은 난 부산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한해 재수한 끝에 부산사범학교에 진학했었다. 덕분에 만 20세 때 진해에 첫 발령을 받아 42간 초등학교에 근무했었다. 북구 명덕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停年退任)했다. 그 뒤로도 병마는 쉬 물러가지 않았다.
나는 거기 굴할 수가 없었다. 초청에 의해 모부대(母部隊)인 26사단의 여단(隸下) 여단과 사령부 직할 중대 등에서 안보 강연에 매진하다 보니 어느덧 건강이 회복되는 게 아닌가? 군가며 진중가요, ‘막춤’ 등으로 장병들과 어울렸다. 애국가를 계명창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3년을 그랬는데, 총 마흔 시간에 지나지 않지만, 교재연구며 옛 추억 되살리기, 현장에서 느끼는 보람 등이 주효해 나를 일으켜 세운 거다.
그 덕분에 20대 초반의 꿈이었던 가수(歌手)가 된다. 21년 동안의 ‘무료 노인학교(매주 토요일 오후, 노래 지도) 운영’도 톡톡히 한몫을 했다. 정통가수협회인 대한가수협회의 정회원으로 데뷔했으니 어디 가든지 큰소리를 칠 수밖에. 도중에 암까지 앓았어도 수술로써 이겨냈다. 18
그럴수록 되레 기고만장해서 나는 마구 일을 벌인다. 40여 년과 25년 전에 수필과 소설로 각각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던 터, 나는 더욱 열심히 글을 쓰고 그걸 책으로 묶어 마침내 스물네 권의 졸저를 낸 작가로 행세하고 있다. 현충원을 무대로 해서 17만 영령들 앞에서 수시로 노래 부르는 가수는 내가 유일하리라. ‘현충원 전속 가수’라는 별칭도 얻었다. 거기서도 내 애국가는 울려 퍼진다. 당연히 난 군복 차림이고. 하사 계급장을 단 채 목소리를 돋운다.
도중에 가수의 자격으로 사직 야구장에서 시구(始球)도 했고, 한해 건너 애국가 선창(先唱)도 했으니 하나의 사건이다. 후자(後者) 즉 마이크 앞에 섰을 때는 해설위원과 캐스터가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게 아닌가? 대중가요 가수는 바이브레이션과 악보 무시 등의 악습 탓에 그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넌지시 암시하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대중가요 가수들 중 상당수는 그들이 콘서트장에서 자기 노래를 독창하듯 애국가를 불러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예사다. 성악을 전공한 사람도 ‘사장조’ 애국가는 그리 녹록지 않다.
프로 야구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내친김에 더 적어보자. 롯데를 우승으로 이끈 강병철 감독! 그는 우리 동창은 아니지만 나는 그를 자주 만났다. 초임 교감으로 발령받은 대처초등학교 총동창회 회장이 그의 선대인(先大人)이었으니까. 연세가 많았다. 학구 내에 그분의 자택이 있어 수시로 방문했다는 뜻이다. 강병철 감독한테서 야구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여기 와선 한국야구위원회의 양해영 사무총장을 사무실에서 환담하는 등 교유(交遊)를 줄곧 계속해 왔다. 심지어는 현충원에서도 만나기도 했다. 방금도 장시간 통화했다.
부산에서의 ‘시구’와 ‘애국가 선창’ 뒤엔 마운드에 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세 대통령에게 탄원까지 해 가면서 제발 애국가 바로 부르기 시범을 보이게 해 달라고 했으나 모두가 무위로 돌아갔다. 셋 중 누구는 어처구니없는 답신을 내놓는 바람에 내 반응도 좋을 리 없을밖에. 피장파장인 셈이다. 물론 한국시리즈를 겨냥했으니, 코로나로 말미암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금년 시즌엔 ‘애국가 선창’으로, 내가 다시 한번 팬 아니 국민 앞에서 ‘애국가’의 진수를 보여 주리라 결심한다. 단 4절이다. ‘사랑 애(愛), 나라 국(國), 노래 가(歌)’라면 1절이 아니라 4절을 택해야 한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서울과 근교의 문학 단체 행사에서 꾸준히 리허설을 하고 있다. 반주가 있든 없든 ‘사장조’의 첫 음을 정확하게 잡고 끝까지 흔들림 없이 16분음표 하나 안 틀리게 정확하게 선창하는 기회를 가끔은 맡는다는 뜻이다. 물론 지휘를 겸한다. 제대 50주년 기념 모부대 장병 초청 콘서트를 자비 5백여 만으로 개최했을 때도 그랬다. 나 자신의 소설집 출판기념회 때도….
그러니 프로 야구 시즌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국가 연습하는 게 버릇이다. 혼자 중얼거리면서. 내 기어이 애국가 역사 한 장을 새로 쓰리라! 누가 부르면 어느 구장에든지 달려갈 거다. 수원이 제일 가까우니, KT 구장이 좋다. 내가 선창을 한 그 게임에서 DOOSAN이 졌으니 빚이 있는 셈, 잠실 구장인들 어떠하랴. 시구하는 날도 KIA의 패배였던 터, 광주로 달려갈 수도 있다. 지역의 연고를 염두에 두지 않고 진정한 나라 사랑 애국가를 부르고 싶은 거다. 앞으로도 그 사연을 소재로 수필과 소설을 창작하고말고. 나아가 책으로 만들 만하다고 자부한다.
도와줄 사람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야구계에 종사하는 우리 청조회 동문의 얼굴들을 떠올린다. 물론 후배들이다. 결례일 테니 이름은 적지 말자. 만약 성사된다면 유니폼 앞이든 뒤에 어떻게든 자랑스러운 청조회 마크를 붙일 걸 결심한다. 난 부르짖노라. 청조회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