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하지 않는 여자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TV를 통해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한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의 얼굴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두렵고 공포스러운 시간을 버텼다고 토로한다. 아름다운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전국에서 대구로 달려간 의료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몸을 사리지 않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주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방호복을 입고 땀에 젖은 모습으로 질병과 싸우는 모습은 이마와 콧잔등에 밴드를 붙인 얼굴과 함께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국민들은 그들을 보며 힘을 냈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들에게는 어떤 화장품으로도 꾸며낼 수 없는 숭고미(崇高美)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의료 수준은 세계 최고다. 친분 있는 의사가 그런 말을 했을 때도 자화자찬이려니 생각했다. 코로나19를 겪고 보니 진짜 그런 것 같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자 각 나라의 의료 수준과 재난대처 능력 등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선진국이라고 으스대던 나라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야말로 의료강국이라는 자부심까지 들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스스로 백초 삼켜 독에 중독된 신농
‘역대군신도상(歷代君臣圖像)’에 들어 있는 ‘신농(神農)’의 얼굴을 보면 쫙 찢어진 눈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튀어나왔다. 머리에는 좌우에 뿔이 있고 정수리도 솟아 삼각산 같다. 두 손에는 풀을 들고 있는데 오른손으로는 그 풀을 입에 가져다 물고 있다. 양어깨 위로는 풀로 된 초의(草衣)를 입었다. 사람인지 괴물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기괴한 용모다. 그림의 주인공은 중국 전설상의 황제 신농이다.
신농의 용모가 기괴하게 그려진 데는 이유가 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인신우수(人身牛首)’로,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복희씨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인물은 얼굴과 몸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특수한 천명을 받은 사람의 외모는 일반인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신농의 얼굴이 특이하게 생긴 것은 그가 천명을 받은 특별한 황제라는 증표다.
‘역대군신도상’의 ‘신농’은 그나마 사람 얼굴을 하고 있다. 고구려 오회분 제4호묘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신농상’은 아예 소의 머리에 사람 몸을 하고 있다. 소머리의 신농은 양손을 벌리고 허리띠가 휘날리도록 달려가고 있는데, 오른손에는 농업의 상징인 벼이삭을 들고 있다. 신농의 머리가 소머리인 것은 그가 농업신이기 때문이다. ‘주역’ 계사전에 의하면, 신농은 인류가 아직 농경을 알지 못하고 수렵생활을 했을 무렵의 제왕이었다. 그는 식량부족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 나무를 깎아 쟁기구를 만들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를 ‘농사의 신’이라는 뜻으로 신농이라 부르게 되었다. 농사의 신이 소의 머리를 한 것은 밭을 경작할 때 소가 이용되기 때문이다. 우경(牛耕)은 중국에서는 춘추시대에 시작해 농경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니까 원래는 소머리에 사람 몸으로 그려지던 신농의 초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 얼굴에 사람 몸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역대군신도상’의 ‘신농’ 그림에서 머리 좌우에 있는 뿔은 ‘우두인신’이었을 때의 소뿔이 퇴화한 흔적이다.
농업의 신인 신농은 의약(醫藥)의 신으로도 숭배받았다. 그가 입에 풀을 물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농업의 신이 의약의 신까지 겸임하게 된 것 역시 농사와 관련이 깊다. 신농은 수렵채집을 하며 사는 백성들이 자주 독에 중독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통치자로서 백성들에게 보다 안전한 식재료를 제공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가 ‘마루타’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는 시험 삼아 백초(百草)를 삼켜 하루에도 70회나 더 많이 독에 중독되었다. 그 고충을 견디면서 끈질기게 약초와 독초를 구분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는 백 가지의 풀을 맛보며 식물의 독성이 없게 약효를 조절한 결과 약으로 복용하는 법을 찾아냈다. 이것이 그가 농업신에서 의약신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다. 중국 의학서의 자랑으로 알려진 ‘본초학(本草學)’의 원조가 신농으로부터 시작된 데는 이런 사연이 담겨 있다. 본초학은 남북조시대의 도홍경(陶弘景)이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주석을 붙여 실용적인 의학으로 발전시켜 현대에 이른다. 음식과 약의 근원이 같다는 ‘식약동원(食藥同源)’의 사상도 ‘본초학’에서 유래하였다.
그림에서 신농이 풀을 물고 있는 것은 백초를 시험하는 자세의 표현이다. 어깨를 덮은 풀로 된 옷 역시 약초의 상징이다. 약초를 캐러 산중을 헤집고 들어가기 위해 새의 깃과 풀로 짠 도롱이를 걸친 것이다. 스기하라 다쿠야(杉原たく哉)의 ‘중화도상유람(中華圖像遊覽)’에 따르면 예전 일본에서는 의사의 진찰실과 약방 앞에 신농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도 신농에 대한 흠모는 대단해서 나라에서는 선농단(先農壇)을 세워 신농에게 제사를 지냈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가면 지금도 선농단이 보존되어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신농씨 한의원’이니 ‘신농백초 한의원’이니 하는 간판을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신농비료’ ‘신농축산’까지 영역이 확장된 것을 보면 신농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층의 충성도가 여전함을 알 수 있다. ‘신농’이 들어 있는 ‘역대군신도상’은 중국의 제왕과 명신, 성현들을 그린 화첩이다. 이런 화첩은 중국, 조선, 일본 세 나라에서 여러 버전으로 그려져 후대 사람들이 감계로 삼았다.
시장을 열어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게 하다
지금까지 신농이 농사의 신이자 의약의 신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명나라의 천연(天然)이 1498년에 편찬한 ‘역대고인상찬(歷代古人像贊)’의 ‘신농상’에는 또 다른 정보가 나온다. ‘신농상’의 제시에 ‘약과 침의 시조, 농업과 상업의 종조(藥石權輿 農商宗祖)’라고 적혀 있다. 의약신과 농업의 시조라는 말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상업의 종조’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19세기에 조선에서 제작된 ‘명현제왕사적도(名賢帝王事蹟圖·명현과 제왕의 사적을 그린 그림)’ 속의 ‘신농이 시장을 열다(神農開市)’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신농과 비슷한 초의를 걸치고 시장에 나와 물건을 교환하고 있다. 그들이 교환하려는 물건은 소, 돼지, 말, 염소 등의 가축이다. 생선과 야채, 과일과 견과류, 꿩과 오리 등도 보인다. 그들 속에 신농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신농과 비슷한 패션을 걸친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 그림이 신농시대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농의 모습보다는 그가 시행한 정책의 탁월함을 보여주려는 데 그림의 목적이 있다.
명나라 때 만들어진 ‘역대군감(歷代君鑑)’에 따르면 신농은 ‘한낮이면 시장을 열어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교환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신농을 ‘상업의 종조’로 부른 이유다. 결론적으로 신농은 농업·의약·상업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오늘에 이른다. ‘역대군감’은 1453년에 조선에 전파되어 세조, 성종, 숙종 때 간행되었다. 조선에서 오자를 교정하거나 내용을 수정해 경연과 서연 등에서 제왕학의 교과서로 활용되었다.
곳곳에서 활약하는 화타와 편작
중국 역사에서는 원조 의사 신농의 뒤를 이어 기라성 같은 명의(名醫)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중 조선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의사는 화타(華佗)와 편작(扁鵲)이었다. 두 사람은 한 단어로 ‘화편(華扁)’이라고도 불렀는데 명의를 넘어 신의(神醫)라고까지 평가받았다. ‘화편’에서 화타는 편작보다 앞서 언급되지만 시대상으로는 편작이 화타보다 앞선다. 편작은 춘추시대의 사람이고, 화타는 동한(東漢) 말기의 사람이다.
편작에 대한 내용은 사마천 ‘사기’의 ‘편작 창공 열전’에 자세하게 나온다. 그중 다음의 일화는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의사였는지를 짐작게 한다. 편작이 제(齊)나라 환후(桓侯)를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왕께서는 피부에 병이 있는데, 치료하지 않으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환후가 말했다. “과인에게는 질병이 없소.” 편작이 물러나자, 환후는 곁에 있던 신하들에게 말했다. “의원이란 자들은 이익을 탐해 병이 없는 사람을 가지고 공을 세우려고 한다.” 5일 뒤에 편작이 환후를 다시 뵙고 말했다. “왕께서는 혈맥에 병이 있습니다.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훨씬 깊어질 것입니다.” 환후가 말했다. “과인에게는 질병이 없소.” 편작은 5일 뒤에 다시 환후를 만나서 말했다. “왕께서는 장과 위 사이에 병이 있는데 치료하지 않으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환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다시 5일 뒤에 편작이 환후를 만났는데 멀리서 쳐다만 보고 그냥 물러 나왔다. 이상하게 여긴 환후가 그 까닭을 묻자 편작이 이렇게 대답했다. “병이 피부에 있을 때는 탕제나 찜질로 고칠 수 있고, 혈맥에 있을 때는 침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장과 위 사이에 있을 때는 약술로 다룹니다. 지금은 질병이 골수에 들었으니 하늘의 신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로부터 5일 뒤에 환후는 몸에 이상을 느끼고 편작을 불렀으나, 그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환후는 결국 죽었다.
편작은 산부인과, 소아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 가는 곳마다 의료과목을 달리하여 사람을 치료했는데 영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런 명의도 자신의 운명은 어쩔 수 없었던 듯하다. 안타깝게도 그의 의술을 시기한 진나라의 태의령 이혜(李醯)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화타는 동한시대의 명의로 방약(方藥)과 침구(鍼灸)에 밝았다. 그는 사람의 배와 등을 갈라서 위장을 씻어 그 안에 있는 질병을 제거했다고 전한다. 외과 수술을 시행했다는 뜻이다. 그는 나이가 100세에도 정정한 모습이어서 사람들이 그를 신선이라고 여겼다. 그는 병을 치료할 때 과잉처방을 하지 않았다. 탕제를 만들어도 최소한의 약재만 썼는데 그가 처방한 약을 마시면 병이 떨어지면서 금방 나았다. 뜸을 놓을 때는 뜸 자리가 1~2곳에 지나지 않았고, 침을 놓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침과 탕제로 치료할 수 없을 때는 마취제를 먹인 후 수술을 했다. 환자는 수술 후 4~5일이 지나면 고통이 없어졌고, 한 달이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전한다.
화타는 삼국지의 주인공 조조(曹操)의 두통을 치료해준 명의로 유명하다. 또한 조조가 눈병이 났을 때 금비(金篦)라는 수술용 칼로 눈의 막을 긁어내어 수술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조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아 결국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편작이나 화타나 마지막은 불행하게 끝났다.
중국에는 편작과 화타 이외에도 수많은 명의가 이름을 떨쳤다. 동진(東晋)의 은중감(殷仲堪)은 약재의 독성 때문에 한쪽 눈을 실명했다. 수당(隋唐)의 허윤종(許胤宗)은 당시 의사들이 서투르게 진맥하는 것에 대해 “사냥에 비유하자면, 토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온 들판에다 널리 그물을 치고서 한 사람이라도 잡기를 바라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송의 승려 지연(智緣)은 “아버지를 진맥하면 그 아들의 길흉을 말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남북조시대의 서추부(徐秋夫)는 의술이 특히 뛰어나서 ‘귀신의 허리에 침을 놓았다’고 할 정도였다. 이밖에도 중국 역사에는 손진인(孫眞人), 기백(歧伯), 갈홍(葛洪), 왕숙화(王叔和), 장중경(張仲景), 순우의(淳于意) 등이 명의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신농이 말하는 명의 되는 법
의약의 신 신농의 후예는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도 수많은 신농이 등장했다. 전쟁 때는 뛰어난 의사의 활약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임진왜란 때는 ‘동의보감’을 쓴 허준(許浚)과 ‘의림촬요’를 쓴 양예수(楊禮壽)가 맹활약을 펼쳤다. 이들은 의약과 침술 등 임상시험에서 얻은 결과를 바탕으로 의약서를 남긴 대표적인 경우다. 같은 시기에 조선 최초의 해부학자 전유형(全有亨)이 등장했고, 노비 출신이면서 침술의 대가가 된 허임(許任)도 한몫했다. 효종 때의 백광현(白光炫)은 침으로 종기를 잘 고쳐 말 고치는 마의(馬醫)에서 궁중 의사인 태의(太醫)가 되었다. 백광현의 이야기는 예전에 ‘마의’라는 드라마로 방송된 적이 있었다. 조광일(趙光一)은 침술의 대가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주로 민간에서 활약하며 어려운 백성들의 의료를 담당했다. 피재길(皮載吉)은 웅담고약으로 정조의 부스럼을 사흘 만에 고쳐 유명해졌다.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李濟馬)와 천연두의 예방법인 종두법을 전파한 지석영(池錫永)은 조선 말기에 활동한 명의였다.
조선시대 때 의사는 중인계급으로 그다지 지위가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로서의 사명감은 대단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자세로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준비했을까. 세종 때 편찬한 ‘의방유취’에는 ‘의인(醫人)이 되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상의(上醫)는 나라를 고치고, 중의(中醫)는 사람을 고치며, 하의(下醫)는 질병을 고쳤다. 또한 상의는 환자의 소리를 듣고, 중의는 혈색을 살피고, 하의는 맥박을 짚는다고 하였다. 상의는 아직 발생하기도 전의 질병을 치료하고, 중의는 막 생기려는 질병을 치료하고, 하의는 이미 걸린 질병을 치료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고 세상의 물정을 깨달으며, 변화의 원리를 깨우쳐야 한다’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몸의 겉면을 살펴서 속면 상태를 알아내고 진단과 처방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과 더불어 ‘환자들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널리 구제하려고 하면서 ‘기준에 맞게 약물을 사용한다면’ 질병은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생각을 품고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면 의인이 되는 길은 ‘지극히 훌륭하고 지극히 아름다울 것’이라는 말로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 상황도 아니다. 그러나 전쟁 상황에 버금갈 만큼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고생하고 있다. 이럴 때 ‘지극히 훌륭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신농의 후예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하고 있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